[읽고쓰기 1234] 왕보의 『장자를 읽다』를 읽고
봄날
2023-06-07 11:21
199
몸에서 마음으로, 그리고 다시 생명으로
장자에 대해 내가 읽은 것이라곤 『낭송장자』와 왕보의 『장자를 읽다』가 전부이다. 『장자』는 백 명이 읽으면 백 명의 장자가 나온다는 말처럼 그 해석의 폭이 넓고 어려운 텍스트인데다, 나는 그 지난한 원문 공부를 한 적이 없다. 장자를 읽었으되, 장자를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다 5년 만에 『장자를 읽다』를 다시 읽었다. 그동안 주역공부를 그럭저럭 이어왔고, 새로 서양철학 공부를 시작했다. 이같은 공부의 지평에서 다시 장자를 읽으면, 처음 장자를 대했을 때 받았던 감동의 근거를 알 수 있을까. 이 글은 장자 내편을 자신만의 방식대로 해석하는 왕보를 따라 가면서, 그것을 찾아 나서는 여정 정도가 될 것이다. 그렇더라도 장자의 전체 내용을 다루는 건 어림도 없다. 여기서는 인간, 생명의 보존을 다루는 <인간세>와 현실세계를 떠난 마음을 다루는 <소요유>편을 주로 다루면서 왕보가 장자를 해석하면서 발견한 특이점을 찾아내 보려 한다.
몸의 운명은 피할 수 없다
『장자를 읽다』는 내편 7편, 외편 15편, 잡편 11편 등 총 33편으로 되어 있는 전체 내용 중에서 ‘장자 중의 장자’로 인정받는 내편 7편을 다루고 있다. 그 내편 7편도 원래의 순서와는 다르게 재배열되었다. 왕보는 왜 <소요유(逍遙遊)>로부터 시작해 <응제왕(應帝王)>으로 끝나는 원래의 차례를 무시하고, <인간세>로부터 『장자』를 풀어나갔을까? 그는 <인간세>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소요유>에서 시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사실적이고, 실제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장자의 철학을 ‘생명의 철학’이라고 말하면서, ‘인간의 생존’은 인간 세상 속에서만 획득할 수 있다는 관점을 유지했다.
<인간세>에서 장자는 ‘생명’, 즉 구체적인 인간의 몸이 처한 어두운 면을 목도했다. 장자가 살았던 시대의 현실 세계는 군주로부터 도망가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였다. 군주의 폭정으로 인해 세상은 비관적이었다. 수많은 생명이 사라지고, 살아있는 사람도 언제 목숨이 끊어질지 모르는 때였다. 왕보는 이때 장자가 살았던 모습을 ‘육침(陸沈)’으로 표현했다. 이 책에서 내 시선을 처음 머물게 했던 것이 바로 육침이라는 구절이었다. 장자 잡편 칙양(則陽)편에 나오는 이 말은 ‘육지에 침몰한다’는 뜻이다.
“육침은 <인간세>에서 말한 적이 있는 좌치(坐馳)를 생각나게 한다. 두 곳에서 묘사한 것은 마음과 몸이 분리된 상태이다. 좌치는 몸은 앉아 있지만 마음은 달려가는 것이고, 육침은 몸은 육지에 있지만 마음이 침몰하는 것이다.”(51p)
육침은 장자가 세속과 상관없이 살았던 사람이라는 선입견을 단번에 날려준 개념이었다. 현실의 인간세계에 발을 딛고 선 이상, 장자를 비롯한 그 누구도 부모와의 관계, 군주와의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장자는 인간관계는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유가와 마찬가지로 장자도 ‘세계 속의 사람’을 사유했다. 그러나 유가와 장자는 이 세계를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공자, 맹자 같은 유가가 세상을 주유하면서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다면, 장자는 의식적으로 세상의 부름을 거절했다. 그렇다고 세계를 떠나 도피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도피할 수 없는 것이 인간세계였다. 군주를 거부하고 산속으로 들어가면 부모를 거스르는 결과를 낳는다. 또 부모 곁에 있으려 하다 보면 군주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다. 세상에 있으면서 그것과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무도한 세상에서 몸을 지키는 장자의 처세 방법이었다. 하늘이 내려준 운명을 받아들이고 현실 세계에 발붙인 몸의 한계를 긍정하는 그 지점에서 장자는 ‘마음의 자유로움’을 보았다.
마음이 노니는 다른 세계
흔히 장자가 말하는 절대자유를 표현한다는 <소요유>편은 곤(鯤)이라고 하는 거대한 물고기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북쪽 바다에 있는 곤이라는 이름의 물고기는 그 크기가 몇천 리나 되는데, 이것이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붕(鵬)이라는 새로 변한다. 수천 리나 되는 큰 날개를 가진 붕이 힘껏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에 걸린 구름 같다. 몸이 제한하는 현실세계와 달리 마음이 노니는 다른 세계에 등장하는 큰 물고기, 큰 새는 현실을 초월한 상상 속의 큰 것을 가리킨다. ‘크다’는 의미는 곤이나 붕뿐만 아니라 수천 마리의 소를 가릴 수 있는 나무라던가, 무거워서 혼자서는 들 수 없는 조롱박 등으로 등장한다.
처음에 나는 소요유에 나오는 큰 물고기나 큰 새, 큰 나무의 비유에 별로 감흥이 없었다. 비유에 능한 장자의 이색적인 표현법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이번에 새롭게 읽으면서 <소요유>편에 나오는 어마어마하게 큰 존재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름대로 해석해 보았다. 몇천 리나 되는 몸뚱이를 가진 날개라니, 대붕의 날개가 얼마나 크면 하늘의 구름 같다고 했을까. 나는 몸과 마음이 분리되어 현실 세계가 아닌 마음에서 놀 때조차 단 한번도 이런 스케일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 몸으로부터 떨어져 ‘자, 이제 네 마음껏 마음속에서 활개를 쳐봐!’라고 하는 데도 나는 장자처럼 날개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큰 붕새를 마음속에서조차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렇게 큰 존재의 등장은 나같은 보통 사람들이나 우화에 나오는 작은 새의 무지와 한계를 보여준다. 그러니까 <소요유>의 큰 스케일은 우리의 무지를 깨뜨리는 장자의 기획에서 나온 것이다.
“작은 것과 큰 것의 구분에서 강조하는 것은 안목의 높낮이이다. 몇 길과 구만 리는 함께 논할 수 없다. 하나는 낱낱이 눈에 들어와 분명히 볼 수 있는 상태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인 것이다. 다른 하나는 어떤가? 아지랑이나 티끌과 같이 희뿌연 우주의 거대한 변화 속에서 산과 물, 너와 나 등은 모두 사라져 버릴 것이다. 갖가지 모양과 형체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고정된 사물은 없을 것이다.”(316p)
큰 스케일은 ‘변화’의 필요조건이다. 물에 있던 곤은 하늘로 날아오를 때 곤의 모습으로는 도저히 날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은 다른 것으로의 변화가 필요하다. 작은 것으로는 변화할 수 없거나 그 변화가 미미할 것이다. 곤이 변해서 된 대붕이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 만 리 높이 날아 올라가는 것을 본 작은 새들은, 자신들의 세계의 전부인 쑥대밭을 한 바퀴 도는 것과 비교하면서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비웃는다. 곤이 변해서 붕이 되는 그 경지를 작은 새들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늘 파란 하늘을 올려다 보기만 했더 인간의 시점과 같다. 장자는 그것을 까마득히 높은 하늘의 시점으로까지 끌어올려 세상을 조망해보는 게 어떠냐고 우리에게 권한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사물은 구분이 없어진다. 구별이 없어진다는 것은 사물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저것이 될 수 있고, 또 저것도 이것이 될 수 있다. 장자는 이것을 ‘노닌다’ 즉, ‘소요유’라고 이름 붙였다. 이것은 모두 마음이라는 지반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장자는 마음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극한의 자유를 누리라고 말한다.
다시 인간세로, 다시 생명으로
그러나 장자가 누리는 절대자유는 마음에서 끝나지 않는다. 일단 절대자유는 사람이 사람을 보는 시점에서 탈출하여 하늘의 시점에서 사람을 내려다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다. 이러한 탈출은 분명 가볍고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대붕이 높이 날아오를 때는 삼천리에 이르는 물을 내려치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리 높이까지 올라가야”(309p) 한다. 단 한 번이라도 이런 자유를 누려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뭐가 다를까. 절대 자유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이제 현실 세계에서 고통스러워 하는 몸을 구제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출 것이다. 결국 장자가, 몸과 분리된 마음의 바다에서 우리에게 소요하라고 한 것은 ‘생명을 보전하는 역량’을 끌어올리기 위한 것이다. 훨씬 역동적으로 변한 마음의 역량으로 현실의 몸을 이끈다는 생각. 그것은 단순히 이성의 힘으로 몸을 컨트롤한다는 이원론적 접근방식하고는 다른 차원이 아닐까.
나의 몸은 세상에서 물리적 공간을 차지하고 있으며 다른 사물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사람이나 사물과 대치하는 나의 몸은 상대를 뛰어넘을 수 없다. 모든 몸들과 타협해야 하지만, 언제 나에게 위협이 닥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른 지식인들이 정치적인 질서를 확립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장자는 생명의 안정에 중점을 두었다. 그가 질서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생명의 안정을 위해 잠정적인 포기를 취했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이 세상과 적당한 거리를 두어 “자신의 생명을 위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도록 했고, 벗어날 수 없는 군주와 부모에게 져야 할 최소한의 책임만을 보장하도록" 했다.(81p) 생명을 보전하는 역량은 변용능력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자가 생명을 보전하는 방법은 이번에도 역시 마음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그 마음은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가득찬 성심(成心) 혹은 유심(有心)이 아니라 텅 빈 마음, 무심(無心)이다. 장자는 세상을 구하고 목숨을 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선과 악을 변별하려는 마음으로는 자신의 몸 하나 지키지 못한다고 말한다.
심재(心齋), 그리고 쓸모없음의 쓸모있음
몸으로부터 시작해서, 몸을 떠나 마음으로, 그리고 다시 생명과 결합하는 지점 – 물론 이 과정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지거나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 에서 장자는 우리에게 심재(心齋)할 것을 요청한다. 심재는 귀로 듣는 것도 아니고, 마음으로 듣는 것도 아니고 기(氣)로 듣는 것이라고 한다. 텅 빈 채로 사물을 기다리는 심재는 어떤 욕망이나 고집이나 편견이 없는 경지이다. 그래서 따를 수 있고 어떤 것과도 충돌하지 않는다. 마음을 기와 같이 텅 비우면 세상의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변화에 무심하게 맡길 수 있다. 이같은 상태에서는 유가한테는 불가능한 일, 즉 날개 없이 나는 일이 장자에게서는 가능한 일이 된다. 심재는 <제물론>에 등장하는 남곽자기의 ‘식은 재’의 상태, 즉 ‘나는 나 자신을 잃었다’는 오상아(吾喪我)의 마음과도 같고, <대종사>의 ‘좌망(坐忘)’의 상태와도 같다.
목숨을 보전하는 것을 지상목표로 여긴 장자에게 또 하나의 삶의 방식이 있다. 세상을 구하겠다는 생각을 포기하는 것은 그것을 위해 갖추어진 지식과 재능까지도 포기해야 하는 일이다. 장자에게 구세(救世)의 생각은 생명을 괴롭히고 위협하는 일일 뿐이다. 유가는 지식이 없는 사람은 쓸모없는 사람으로 치부한다. 그런데 장자는 생명의 보전을 위해서는 ‘쓸모없는 사람’이 되라고 말한다. 그는 나무의 예를 많이 들어 말한다. 가령 옹이가 많은 나무는 가공해서 쓸 데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목숨을 보전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늘을 내어줄 수 있는 쓸모있음으로 생명을 지킨다.
장자의 철학을 ‘생명의 철학’이라고 했을 때, 그가 말하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모든 사람들은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의 몸은 천차만별로 이미 가지고 태어난다. 반면에 마음은 하나일 수 있으나 기심의 발동으로 몸과 마찬가지로 마음도 한계를 느끼게 된다. <소요유>를 통과한 장자의 마음은 이것과 달라서 천하 따위는 까맣게 잊을 수 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없어진 마음이어야 비로소 몸을 맡길 수 있다. 그런 그에게 세상에서 하등 쓸모없는 구불구불한 나무는 어떤 것도 없는 마을(無何有之鄕)에 심거나 광막한 들판에 심어놓고 아무 것도 안하고 그 근처를 방황하거나 그 아래 서성거리다 잠들 수 있다. 언뜻 보면 허무주의적인 이 생각에 대해 장자는 바로 이 텅빔에서부터 생명이 새롭게 규정된다고 말한다. 텅 빈 것은 어떤 것도 될 수 있고, 그 어떤 것도 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왕보의 해석을 통해 ‘주어진 현실에 맞게 조화롭게 변용하며 생명을 편안하게 하는’ 장자의 ‘고독한 긍정성’에 감정이입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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