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오늘도 잘 살았습니다.

도라지
2023-06-22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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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중환자실에 계시고부터 자주 슬프고, 문득 멍하다. 그렇다고 재미있고 즐거운 순간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오늘은 아빠 면회를 다녀오며 공차에 들러 밀크티를 마셨다.

매장에서 아이유의 노래가 나오는가 싶더니.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의 노래가 나오지 뭔가! 것도 거의 숨듣명에 가까운 곡이...

알바님 얼굴을 함 보고 싶었는데. 참았다. 혼자 웃었다.

아빠가 의식도 없이 죽음과 사투를 하는 중에도 그의 딸은 아이돌에 설레고 밀크티는 맛있구나. 잠시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번 문스탁에는 양양 소식을 전할까 한다.

 

지난 1234를 계획대로 양양에서 했더라면 공부방 친구들에게 꽤나 멋진 작약을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친구들에게 덜 미안한 것은 그 멋진 작약을 나도 못 봤기 때문이다. ㅎㅎㅎ

 

그렇게 한동안 사람 냄새 나지 않던 산속 집에 고라니들만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먹으려고 심어논 상추 모종을 먼저 와서 맛나게 먹고 간 것 까지는 괜찮았는데 녀석들이 도라지 밭도 망쳐놨다.

고라니 성가셔 콩도 안 심는 텃밭에 일용한 양식인  푸성귀마저 내어줄 수 없다 싶었는지 남편은 밭에 망을 둘러쳤다.

망 안에 들어가 풀 뽑으려니 괜히 나만 폼이 더 안 난다.

 

 

 

 

(저렇게 온 몸을 다 가리고 작업을 했어도. 눈꺼풀과 입술은 당했다. 항상 벌레들이 나보다 훨씬 똑똑하다. )

 

풀을 뽑다 보면 잠시 여여한 순간을 체험한다.

풀 뽑는 순간만 남고 어떤 이미지도 생각도 만들어 내지 않는 순간. 언제 이런 순간을 친구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친구들은 소중한 일 삼매를 체험하고. 덕분에 나는 밭에 풀을 쉬이 잡고. 거 참 좋은 아이디어 아닌가! ㅎㅎㅎ

 

 

 

 

 

 

텃밭 일을 할 때 호미, 작업방석, 목장갑, 자누리 벌레 기피제는 필수. 

 

 

작업 방석은 '엉덩이 의자' 라고도 하는데 기계화율이 낮은 밭일에 이 의자는 최고의 발명품이지 싶다. 

요즘은 바퀴달린 파라솔도 있다고 하던데. 아마 땡볕에 그늘을 만들어 밭일하는 사람들을 착취하려는 도구가 아닐까 의심스럽다. 

뜨거울 때는 쉬어야 한다. 그늘에서 수박도 먹고. 

 

 

 

 

 

그리고 작업을 끝낸 밭의 모습은 아래와 같습니다~~ 짜잔~

 

 

 

(비포-->애프터. 정리한 밭에 드문 드문 도라지가 보입니다.)

 

 

내 부모의 보호자가 되어 지내는 요즘. 나는 내 감정을 다루는 방법을 제법 잘 알아 가고 있는 것 같다. 

나의 감정의 조각들이 나를 집어삼키지 않도록.  속수무책 당하지 않도록. 

쇠약한 엄마와 소멸중인 아빠를 성실히 돌보며.  때론 풀을 뽑고, 때론 차를 마신다.

여전히 술도 마시고.  마시면서 니까야도 읽는다. ^^;;

 

 

 

 

 

 

 

 

 

댓글 14
  • 2023-06-23 08:41

    최고네...

  • 2023-06-23 10:19

    이 도라지가 저 도라지인가, 그 도라지가 이 도라지인가?
    힘든 시간 잘 견디면 그게 또 힘이 되더라고요..

  • 2023-06-23 13:20

    도라지를 따라 울다가 웃다가 합니다.
    마침내 술도 마시고 책도 읽는다고 했는데, 도라지가 영 슬픈 마음인 듯 합니다.
    밭 가운데에 몸빼 입고 있는데도 스타일리쉬하게 보이는 건 내 눈에만 그런 건 아닌듯...ㅎㅎ
    기운냅시다~

  • 2023-06-24 07:34

    그나저나 애프터 밭이 참 끝내주네요!!

  • 2023-06-24 13:00

    하루하루 잘 살아주시니 옆에서 보기 안심되네요~

  • 2023-06-24 18:45

    그 숨듣명 뭐예요? 나도 함 들어봅시다.
    초성으로만 써줘도 알아낼 수 있음!

    • 2023-06-24 22:20

      그거슨…아미는 절대 알 수 없는… 에리들만 아는…ㅋ
      (부끄럽군요~ㅎ🤭)

  • 2023-06-25 08:45

    그 어떤 순간에도 맛을 아는 그대, 멋집니다^^

  • 2023-06-25 11:33

    숨듣명=숨 참고 듣는 명곡 ?

    뭐든 숨구멍이 있어야 살죠. 도라지샘은 많네요. 아이돌도 있고, 술도 있고, 니까야도 있고.
    제 친구는 병원에서 며칠 어머니 병수발 들때 중국드라마 없었으면 큰 일날뻔 했다고 ㅋㅋㅋ

    • 2023-06-25 21:49

      ‘숨어서 듣는 명곡’이란 뜻입니다~^^
      대놓고 듣긴 좀 부끄러운…뭐 그런 노래?!ㅎㅎ

      전 최근 (잠 안오는 밤엔) ‘미스터 션샤인 ’ 정주행을 했고. 롯데 야구도 한동안 숨구멍이었는데. 이제 야구는 속터져서 안봅니다. ㅋㅋㅋ 오늘 마침 LG랑 했군요. 이런 젠장…ㅠㅠ

  • 2023-06-25 21:28

    니까야 읽는 시간이 맥주 한 캔 마시는 시간과 같으려나요~??

    • 2023-06-25 21:50

      같기도 하고 안같기도 합니다~ㅋ🙏

  • 2023-06-25 22:27

    와... 제 쫄쫄이와는 다른 의미로 굉장한 복장이군요. 저도 금요일엔 고글 안으로 벌이 들어와서 식겁했는데... 그것 때문일리 없겠지만 지금은 다래끼가 나서 고생 중입니다. 저희가 얼른 만나서 플랫폼 노동과 자동화 사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텐데요 ㅠㅠ 뵙고 싶읍니다 흑

  • 2023-06-26 10:49

    나는 한시간쯤 풀뽑고 이틀째 어기적 거리며 걷고 있는데 ㅎㅎ
    도라지 잘 지내고 있다니 좋네요
    도라지 곁에 도라지만 있는게 아니고 여러가지가 많구만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