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솥의 59년생 서른살
“삼살제왕이 이 땅에 내려 오실 제, ...(중략)..... 계백장군 백살신, 관우장군 백살신.....” 나의 할머니는 우리들 생일이 되면, 하얀 백설기 시루떡 앞에서 아래 아(·)자가 나오는 옛 한글로 쓰여 있는 백살기를 읽으신다. 대략 삼십여 분이 걸린다. 어릴 적에는 그 것이 마냥 싫었다. 어서 저 따뜻한 떡을 먹어야 하는데, 할머니 고사(?) 때문에 군침만 삼키고 있으니...... 그러다가 아마 초등학교 고학년 때쯤이다. 나에게 백설기 떡은 그저 그런 떡이 되었는데, 내 생일날 할머니가 그 백살기를 읽으신다. 연신 손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리며 읽으시는 뒷모습에서 보며, ‘나는 커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였다. 귀신이 있어서 나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할머니의 정성이 나의 마음에 들어 온 것이다. 형제들만의 제사. 우리 집은 이제 방안에서 지내는 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하였다. 제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큰 형님 댁에서 기제사(忌祭祀)로 일 년에 네 번, 조부모와 부모님의 제사를 지내다가, 어느 해인가 두 분이 성당에 나가신 뒤로는 연미사로 대체하겠다고 선언하셨다. 그렇게 하신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무언가 섭섭하기도 또 죄스럽기도 하였다. 특히 성당에 나가지 않는 나로서는 신부님의 말씀에 앉았다가 일어 섰다를 반복하며 정해진 댓구를 따라해야 하는 미사는 매우 껄끄러웠다. 큰 형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무엇보다도 큰 형수님과의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해 제사 날에, 우리는(우리집과 작은 형님네) 큰 형님네 아파트 문 앞에서 저녁이 다 될...
“삼살제왕이 이 땅에 내려 오실 제, ...(중략)..... 계백장군 백살신, 관우장군 백살신.....” 나의 할머니는 우리들 생일이 되면, 하얀 백설기 시루떡 앞에서 아래 아(·)자가 나오는 옛 한글로 쓰여 있는 백살기를 읽으신다. 대략 삼십여 분이 걸린다. 어릴 적에는 그 것이 마냥 싫었다. 어서 저 따뜻한 떡을 먹어야 하는데, 할머니 고사(?) 때문에 군침만 삼키고 있으니...... 그러다가 아마 초등학교 고학년 때쯤이다. 나에게 백설기 떡은 그저 그런 떡이 되었는데, 내 생일날 할머니가 그 백살기를 읽으신다. 연신 손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리며 읽으시는 뒷모습에서 보며, ‘나는 커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였다. 귀신이 있어서 나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할머니의 정성이 나의 마음에 들어 온 것이다. 형제들만의 제사. 우리 집은 이제 방안에서 지내는 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하였다. 제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큰 형님 댁에서 기제사(忌祭祀)로 일 년에 네 번, 조부모와 부모님의 제사를 지내다가, 어느 해인가 두 분이 성당에 나가신 뒤로는 연미사로 대체하겠다고 선언하셨다. 그렇게 하신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무언가 섭섭하기도 또 죄스럽기도 하였다. 특히 성당에 나가지 않는 나로서는 신부님의 말씀에 앉았다가 일어 섰다를 반복하며 정해진 댓구를 따라해야 하는 미사는 매우 껄끄러웠다. 큰 형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무엇보다도 큰 형수님과의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해 제사 날에, 우리는(우리집과 작은 형님네) 큰 형님네 아파트 문 앞에서 저녁이 다 될...
인문약방 에세이
그 어떤 죽음이 안타깝지 않을 수 있으랴. 하지만 죽은 자에게도 산 자에게도 가장 담담할 죽음은 없을까 생각해 본다. 내가 그 순간을 선택할 수 있다면 늘 하던 일을 하다가, 그냥 스르르 가는 것이겠다. 서재에서 책을 보다가, 침대에서 잠을 자다가, 노병이 겹쳤다면 딸, 아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다가 그렇게 가면 좋겠다. 마치 잠을 자듯, 꿈을 꾸듯.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큰 소란 없이 가는 길. 그렇게 갈 수 있으면 좋겠다. 1. 폴: 용기 있는 죽음 『숨결이 바람 될 때』에서 폴 칼라니티는 자신이 암인 걸 알고도 삶의 방향을 급선회하거나 멈추지 않고, 암이 아니었으면 계속했을 그런 삶을 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죽음이 올 때까지 멈추지’(『숨결이 바람 될 때』, 폴 칼라니티, 흐름출판, 145쪽) 않고 신경 외과의로서, 작가로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의 삶을 살아내었다. 폴이 폐암 진단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아내 루시와 함께 울었다. 아내에게 재혼을 권하고, 담보대출을 이자가 적은 곳으로 바꾸라고 하고, 레지던트 근무 복귀 계획을 언급하는 동료의 말을 막았다. 의사로 일하는 동안 그에게 익숙했던 죽음은 막상 자신의 것이 되었을 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누군들 그렇지 않으랴.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은 정해져 있지만 누구도 자신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심지어 주변 사람의 죽음조차 받아들이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린다. 죽음 앞에서는 자신이 가장 비극적인 사람이 된다. 하지만 폴은 남은 시간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살지...
그 어떤 죽음이 안타깝지 않을 수 있으랴. 하지만 죽은 자에게도 산 자에게도 가장 담담할 죽음은 없을까 생각해 본다. 내가 그 순간을 선택할 수 있다면 늘 하던 일을 하다가, 그냥 스르르 가는 것이겠다. 서재에서 책을 보다가, 침대에서 잠을 자다가, 노병이 겹쳤다면 딸, 아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다가 그렇게 가면 좋겠다. 마치 잠을 자듯, 꿈을 꾸듯.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큰 소란 없이 가는 길. 그렇게 갈 수 있으면 좋겠다. 1. 폴: 용기 있는 죽음 『숨결이 바람 될 때』에서 폴 칼라니티는 자신이 암인 걸 알고도 삶의 방향을 급선회하거나 멈추지 않고, 암이 아니었으면 계속했을 그런 삶을 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죽음이 올 때까지 멈추지’(『숨결이 바람 될 때』, 폴 칼라니티, 흐름출판, 145쪽) 않고 신경 외과의로서, 작가로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의 삶을 살아내었다. 폴이 폐암 진단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아내 루시와 함께 울었다. 아내에게 재혼을 권하고, 담보대출을 이자가 적은 곳으로 바꾸라고 하고, 레지던트 근무 복귀 계획을 언급하는 동료의 말을 막았다. 의사로 일하는 동안 그에게 익숙했던 죽음은 막상 자신의 것이 되었을 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누군들 그렇지 않으랴.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은 정해져 있지만 누구도 자신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심지어 주변 사람의 죽음조차 받아들이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린다. 죽음 앞에서는 자신이 가장 비극적인 사람이 된다. 하지만 폴은 남은 시간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살지...
인문약방 에세이
석공1 - 안녕하세요? 앙코르석공님. 석공2 - 네. 안녕하세요, 앙코르석공님. 석공1 - 저는 나이듦연구소의 일일기자 앙코르석공이라고 합니다. 우리 나이듦연구소에서는 나이듦과 자기서사라는 주제로 에세이쓰기 시즌3를 진행하고 있으며, 앙코르석공님의 에세이쓰기를 위해 인터뷰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앙코르석공님과 나이듦에 관한 개인적 경험에 대해 인터뷰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편의를 위해 이제부터는 앙코르석공님을 그냥 석공님이라고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그냥 석공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그리고 석공님, 거짓이나 왜곡만 없다면 과장이나 미화 정도는 인정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석공2 - 아,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이리저리 생각해 보아도 팔이 안으로 굽듯이 아무리 거짓이 없이 말하려고 하여도 본의 아니게 좋게만 말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 걱정이었는데, 이제 조금 편하게 이야기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석공1 - 우선 석공님께서는 언제쯤부터 나이듦을 의식하기 시작하셨나요? 석공2 - 내가 그때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게 좀 우습기는 하지만, 쉰아홉 살 때부터 나이듦을 본격적으로 의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순 살이 되는 게 싫어서, 우스갯소리로 6학년이 되는 게 싫어서 그해 이후로는 나이를 세지도 얘기하지도 않았습니다. 내 나이를 모르던 사람이 조심스럽게 내 나이를 물어보면, 몇 년간 계속 쉰아홉이라고 대답하고 나서 마음속으로 플러스알파라고 덧붙였습니다. 아, 이제는 그것도 낯간지러워서 그렇게 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석공1 - 석공님, 이곳 나이듦연구소에서는 나이듦에 관해 특히 인문학을 중심으로 많이 사유하게 됩니다. 석공님은 석공님의 나이듦에 인문학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석공2 - 저는 살아오는 동안 몇...
석공1 - 안녕하세요? 앙코르석공님. 석공2 - 네. 안녕하세요, 앙코르석공님. 석공1 - 저는 나이듦연구소의 일일기자 앙코르석공이라고 합니다. 우리 나이듦연구소에서는 나이듦과 자기서사라는 주제로 에세이쓰기 시즌3를 진행하고 있으며, 앙코르석공님의 에세이쓰기를 위해 인터뷰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앙코르석공님과 나이듦에 관한 개인적 경험에 대해 인터뷰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편의를 위해 이제부터는 앙코르석공님을 그냥 석공님이라고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그냥 석공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그리고 석공님, 거짓이나 왜곡만 없다면 과장이나 미화 정도는 인정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석공2 - 아,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이리저리 생각해 보아도 팔이 안으로 굽듯이 아무리 거짓이 없이 말하려고 하여도 본의 아니게 좋게만 말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 걱정이었는데, 이제 조금 편하게 이야기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석공1 - 우선 석공님께서는 언제쯤부터 나이듦을 의식하기 시작하셨나요? 석공2 - 내가 그때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게 좀 우습기는 하지만, 쉰아홉 살 때부터 나이듦을 본격적으로 의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순 살이 되는 게 싫어서, 우스갯소리로 6학년이 되는 게 싫어서 그해 이후로는 나이를 세지도 얘기하지도 않았습니다. 내 나이를 모르던 사람이 조심스럽게 내 나이를 물어보면, 몇 년간 계속 쉰아홉이라고 대답하고 나서 마음속으로 플러스알파라고 덧붙였습니다. 아, 이제는 그것도 낯간지러워서 그렇게 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석공1 - 석공님, 이곳 나이듦연구소에서는 나이듦에 관해 특히 인문학을 중심으로 많이 사유하게 됩니다. 석공님은 석공님의 나이듦에 인문학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석공2 - 저는 살아오는 동안 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