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대로42길] 36회 나무를 닮은 사람/<아들(2002)>

띠우
2024-04-28 23:34
147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관객은 주어진 것을 따라가기 급급해 올리비에의 뒷모습마저 뭔가 알려주지 않을까 주목하게 된다.

 

“올리비에의 가장 특별한 점은 그가 전혀 특별하지 않다는 점이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외모고, 어떤 인물이라도 될 수 있다. 중립적인 느낌이랄까. 올리비에의 눈초리, 시선 역시 매우 독특해서 <아들>에서는 그의 눈을 가지고 시도한 것도 좀 있다. 옆쪽이거나 정면이거나 일정한 포지션에서 보면 눈을 없앨 수가 있다.”      - 다르덴 형제 인터뷰 중에서

 

주인공의 중립적인 느낌이라니, 다르덴 형제는 어떤 영화를 찍고 싶었던 것일까. 분명 영화는 갈등 상황을 주고 관객에게 윤리적 질문을 한다. 11살에 도둑질을 하다 우발적 살인을 저지른 프란시스가 5년 복역을 마치고 목공을 배우러 재활센터에 왔다. 그런데 프란시스를 가르쳐야 하는 사람은 살해당한 아이의 아버지다. 올리비에가 어느 순간에는 복수하려나 싶다가도, 어느 장면에서는 용서할 것도 같다. 복수냐 용서냐, 이는 많은 영화들이 시도했던 질문인데 다르덴 형제가 이 상황을 보여주는 방식은 특별하다. 전혀 특별하지 않은 방식으로 특별하게, 올리비에의 눈을 가리고 영화를 찍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런, 지나쳤군

 

올리비에의 마음은 도통 알 수가 없다. 카메라가 비추는 올리비에를 통해 그 판단이 계속해서 유보되기 때문이다. 옆이나 뒷모습, 눈빛을 감추어버리면서 그의 감정 대신 화면을 채우는 것은 일하는 몸이다. 영화 초반 재활센터 학생인 필리포에게 나무 이음새를 가르치는 장면이 있다. 쇠망치가 아닌 나무 망치를 쓰고 나무와 나무를 연결해 틀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프란시스의 등장에 정신을 빼앗겼음에도 잘린 나무 각도와 연결할 틈의 간격을 놓치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목공을 가르치는 올리비에의 태도에서 우리는 그가 일을 대하는 자세를 알게 된다. 작업 도구들을 꼼꼼하게 관리하고, 아픈 허리운동을 꾸준히 하고. 엄격하지만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영화에서 올리비에나 프란시스의 일상은 단순하고 반복적이다. 사는 아파트의 모습도 유사하다. 나무를 가운데 두고 선 둘의 모습은 차츰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를 벗어난다. 그 사이로 용서와 복수를 떠난 이야기가 끼어든다. 프란시스는 성실하게 일을 배운다. 올리비에가 하는 일에 감탄하며 존경심도 보인다. 나무 이름을 묻고 필기하고 그 재질의 특성을 외운다. 이와 동시에 올리비에의 시선은 여전히 불안정하고 두 사람의 관계도 위태롭다. 한 사람은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고, 한 사람은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교육 과정의 일부로 목재소를 함께 가게 된 두 사람, 옆에서 프란시스가 졸자 올리비에는 토끼 핑계를 대며 급정거를 한다. 지난밤에 잠이 오지 않아 수면제를 먹었던 프란시스에게 이제서야 졸음이 몰려온다. 이들을 근접촬영하는 카메라, 프란시스에게 올리비아는 그날의 진실을 묻는다. 5년 동안 궁금했던 일을 묻는데 프란시스는 졸려서 정신이 없다. 프란시스가 뒷좌석에 누워 자도 되냐고 묻자, 올리비에의 눈빛에 분노가 엿보인다. 휴게소에서 음식값을 내주지 않는 올리비에의 소심한 복수가 이어진다. 이 여정에서 올리비에는 마침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다. 이는 둘의 관계가 달라져가기에 불가피해 보인다.

 

 

   

프란시스가 올리비에에게 후견인이 되어달라고 부탁한다. 왜냐고 묻자 선생님이니까요, 라는 답이 돌아오고 둘은 그곳에서 잠시 축구게임을 한다. 차에 타자 프란시스에게 또 질문하는 올리비에, 그날의 진실을 알고 싶다. “왜 사람을 죽였지?” 후견인이 되려면 프란시스의 상황을 알 필요가 있다는 말로 5년 전 사건을 화제로 삼는다. 그날의 진실은 이러하다. 카스테레오를 훔치던 프란시스는 뒷좌석에 있던 올리비에의 아들을 발견한다. 아이는 프란시스를 막아섰고, 프란시스는 아이의 목을 졸랐다. 이미 5년의 복역을 마친 프란시스는 그 일을 잊고 싶은 듯하다. 흥분해 목재소 가는 길을 지나쳐 버린 올리비에가 중얼거린다. “이런, 지나쳤군.”

 

너도밤나무 그리고 나도밤나무

 

목재소에 도착해 나무를 고르는 도중에 올리비에는 프란시스에게 말한다. “내가 그 살해된 아이의 아버지”라고. 해를 가할 생각은 없다고 외치지만 놀란 프란시스는 도망친다. 각기 다른 이유로 추격전이 벌어진다. 프란시스를 붙잡은 올리비에가 흥분해서 목에 잠시 손을 대지만 곧 손을 뗀다. 가쁜 숨을 고르던 올리비에는 다시 일하러 돌아간다. 이제 카메라는 그를 근접촬영하지 않는다. 잠시 뒤에 그대로 도망친 줄 알았던 프란시스가 뒤따라와 있다. 둘은 나무를 들고 잠시 대치한다. 이것을 불안하게 볼지 다른 가능성의 순간으로 볼지는 보는 사람의 몫이다. 쭈뼛쭈뼛 다시 트럭에 나무를 싣는 두 사람을 보여주면서 돌연 영화는 끝나버린다.

 

 

목재소에 쌓여있는 나무들 사이에 간격을 두어 틈을 만들어둔 것을 본 프란시스가 그 이유를 묻는 장면이 있었다. 잘 건조되지 않은 나무로 문 같은 것을 만들면, 나중에 수축되고 뒤틀림이 생겨난다. 목재로 잘 말리기 위해서는 나무들 사이를 오갈 공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무 사이에 공간을 두고 말리는 것이다. 이때 나눈 이들의 대화는 영화 전체를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에서 서로 나무를 들고 서 있는 두 사람, 이들에게도 공기가 필요하다. 이들의 상태는 아직까지 마르지 않은 나무와 같다.

 

불행한 사건을 만날 때, 우리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하게 된다. 가해자는 용서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불행과 어려운 상황을 호소하거나, 법적 책임을 지는 것을 통해 그 죄에서 벗어나려 한다. 피해자는 자신의 상처를 채 살피기도 전에 용서를 요구하는 세상의 시선과 마주할 때도 많다. 다르덴 형제는 이 영화에서 일의 상황에 대해 빠른 판단을 요구하지 않고 선택을 유예하는 시간을 제시한다. 일상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한 공간에 들여놓고 말이다. 이때 판단을 가리는 카메라의 근접촬영은 우리를 그 시간에 올라타게 만든다.

 

복수나 용서가 한순간에 끝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영화는 완전한 복수나 용서를 보여주지 않았다. 사실 이렇게 극적인 상황이 아니어도 우리의 일상에는 크고 작은 복수와 용서가 언제나 섞여 들어온다. 간단해 보여도 그 해결이 쉽지 않을 때도 많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은 그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많을 것이다. 너도밤나무와 나도밤나무가 둘 다 나무지만 사는 조건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다만 좋은 목재가 되기 위해 잘 마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 것처럼, 사람 사이의 소통에도 잘 마르고 단단해질 환경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둘을 함께 보여주며 꺼진 카메라의 시선을 품으며 조심스레 올리비에와 프란시스의 남은 삶을 응원하고 싶어진다.

 

댓글 4
  • 2024-04-29 09:24

    띠우님의 글을 읽은 다음에 청량리님의 지난 번 글을 다시 읽게 되는군요.^^

  • 2024-04-29 09:45

    다르덴의 카메라의 눈.
    매번 흔들리는 찰나의 순간들.
    그 속에서만 드러나는 삶의 진면목들.
    그래서 우리는 다르덴 영화를 좋아하는 듯^^

    잘 읽었습니다

  • 2024-04-30 09:27

    저는 띠우의 글을 읽고나니 영화가 다시 보고싶어 집니다.
    '틈'
    '나'와 '너' 사이의 틈
    '나'와 '나' 사이의 틈

  • 2024-04-30 21:20

    복수나 용서가 한순간에 끝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그렇네요. 진짜 그런건데...왜 자꾸 한방에 끝내야 속이 시원한지....

    다르덴형제 영화는 늘 답답하지만, 착각하게 만드는 환타지가 없어서 좋네요.
    잘 읽었습니다.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작년에 『장자』의 내편 중 「양생주」편을 읽으면서 다섯 편의 글을 썼다. 양생에 대한 장자의 문장을 조목조목 읽어보며 양생의 지혜를 찾아보았다. 어느 하나 수월하지 않았지만, 번다해진 일상을 정돈하고 싶을 때 그 지혜들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는 남은 편들까지 양생의 지혜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장자』는 내편⸱외편⸱잡편의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편은 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은 여섯 편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양생의 면면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번에는 「대종사」편을 읽어보기로 했다.     사서(四書)에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군자를 가리키는 문장들이 나온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사소한 리에 전전긍긍하는 내가 소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군자의 풍모를 본받고 싶어지기도 한다. 『장자』에는 그보다 급이 더 높은 진인(眞人)에 대한 내용들이 나온다. 「대종사」편에는 특히 많다. “깊은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으며, 활활 타는 불속에서도 뜨거워지지 않는” 급이기 때문에, 땅에 발을 딛고 다니는 범인으로서는 근접이 불가능한 경지이다. 그래서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는 일상과 괴리되어 터무니없게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일상에서 볼 수 없다는 핑계로 그 이야기 너머가 가리키는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1. 고요히 무심하게 일상을 사는 진인   옛날의 진인은, 그 모습이 우뚝 솟았으나 무너지는 일이 없었고, 뭔가 부족하지만 받는 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지만 완고하지 않았고, 크고 넓었으나 겉치레가 없었습니다. 밝고 당당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한 듯도 했습니다. 환하게 기쁨을 드러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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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4.05.10 | 조회 98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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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147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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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148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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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4.04.22 | 조회 165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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