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선거 사무원이 되다

김윤경~단순삶
2024-04-20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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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나의 중요한 일정 중 하나는 토요일 양생프로젝트와 죽음 탐구 세미나에서 공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봄에 2주나 결석했다. 2019년 감이당 일성으로 시작해 1년 과정을 6년 동안 공부해오는 동안 결석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매주 꼬박꼬박 공부하러 가는 것이 수행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수업에 출석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2주 연속 빠지게 된 것이다. 그런 결정을 내린 사건은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 선거사무원으로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신앙처럼 지켜온 인문학 수업 출석을 어기게 한 이 사건을 정리하며 나에게 정치적 활동이란 무엇일까 다시 짚어보고 싶다.

 

 

 

 

 

나의 첫정당 활동 연대기

 

 

내가 처음 정당에 가입한 것은 2012년, 녹색당이었다. 그때 나는 하기 싫은 일에 매여 사는 나의 일상이 싫었다. 그 탓을 이명박 정권 때문이라 생각했나 여하튼 정권에 불만이 쌓여 있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사람들을 만나 매일매일 술을 마시며 정권을 욕했다. 그러나 술 먹고 욕하는 걸로는 불만이 해소되지 않았다. 무언가 새로운 탈출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2012년 3월, 직장을 그만두고 다르게 살고자 첫 백수 생활에 도전했다. (나의 백수 도전기와 다르게 사는 도전은 나의 연재 글 <1화 금천에서 다시 시작하기>를 참고하시길^^) 그러다 마을에서 만난 녹색당에 가입했다.

 

 

 

 

녹색당에서 ‘녹색 가치’에 대해 공부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나 핵 발전소와 탈핵 운동에 대해서 그랬다. 밀양 765kV 송전탑 건설과 관련된 투쟁, 우리나라의 핵 발전소 현황 및 에너지 수급 계획 등. 도시에 살며 당연히 누려왔던 것들이 누군가의 희생을 밑에 깔고 있어서 가능했다는 사실에 미안함과 부끄러움, 분노가 일었다. 그래서 밀양 탈핵버스, 밀양 할매들의 북콘서트, 일인 피켓 시위 등 내가 할 수 있는 활동으로 연대했었다. 그런 활동으로 돈으로는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경제나 경제활동, 자본, 시장이 위주인 사회가 아니라 ‘인간활동’의 모든 즐거움과 행동, 문화를 발전시키는 대항발전(『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더글러스 러미스/녹색평론사/101쪽)을 추구하는 사회로 가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런 사회로 가려면 다양한 목소리가 필요하고, 그 바탕은 다양한 정당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즈음 지방선거가 있어 녹색당에서도 구의원 후보를 내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정당이라면 당연히 원내에 진입하여야 하니까. 그래서 선거운동에도 참여했다. 소수의 녹색당 당원들은 다 함께 후보 유세 운동을 다니며 소수 정당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당연히 무보수^^) 동네 곳곳을 돌아다니느라 힘은 들었지만,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재미도 있었다. 또 녹색당 대표로 투표·개표 참관인으로도 참여하며 선거의 과정을 지켜보는 경험도 했다. 녹색당에서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하며 우리의 힘으로 지금의 정치를, 지금의 생활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즐겁게 활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의 차이는 엄청났다. 꿈꾸고 노력만 한다고 해서 현실의 단단한 벽이 부서지는 것은 아니었다. 2014년 제6회 지방선거에서 진보정당은 참패했다. 박근혜 정권은 집요하게 진보정당에 칼날을 겨누었고 마침내 2015년 1월 22일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의 내란선동과 국가보안법 위반이란 혐의로 징역형이 확정되는 대법원판결이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우리나라 최초, 정당이 강제 해산되는 일이 벌어졌다. 대한민국 진보 정치의 꿈은 그렇게 무너져 내리는 듯 보였다. 나는 큰 좌절을 맛보았고, 그리고 녹색당을 탈당했다. 열심히 주장하고, 열심히 활동한다 해도 원내 진입을 못 하는 정당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감과 피로감이 밀려왔다. 그렇게 나의 꿈에 부풀었던 초록초록했던 녹색당, 첫정당 활동도 막을 내렸다.

 

 

 

 

다시 정당에 가입하게 된 이유

 

 

 

다시 정당, 그것도 거대 양당 중 하나인 민주당에 가입해야겠다고 생각한 시기는 20대 대통령 선거 이후였다. 0.73%의 득표율 차이로 생각지도 못한 후보가 우리나라 대통령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불안감과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그즈음 “민주당을 고쳐 쓰자! 민주당을 빨아 쓰자!”란 구호가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 떠돌고 있었기에 민주당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아보고, 당원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민주당 당원으로 가입했다. 대통령 선거 후 다가오는 국회의원 선거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22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주당 권리당원으로 참여하게 됐다.

 

 

 

 

민주당 권리당원으로서 22대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하는 정치 효능감은 무척 좋았다. 2년여 동안 답답한 갈증을 해결할 정도였다. 권리당원으로서 총 세 번의 경선에 참여했다. 우선 내가 사는 지역 내 민주당 후보 경선에 참여했다. (전화 여론조사) 그리고 서울 청년 전략공천 지역에는 전체 권리당원이 경선에 참여할 수 있었다. 또 사고 지역 경선 참여도 전체 권리당원의 몫이었다. (인터넷 투표) 경선에 대비해 권리당원들은 새로운 소식을 발 빠르게 실어 날랐고, 급작스런 상황에도 빠르고 정확한 판단을 하도록 서로 힘을 뭉쳤다. 그래서 더욱 잘 싸울 수 있는 후보들, 권리당원들이 지지하는 후보들이 경선에서 이겼다고 생각한다. 이번 경선 과정에서 내가 뽑은 후보들이 민주당의 후보가 되었고, 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승리했다. 이번에 제대로 일하지 않고, 제대로 싸우지 않는 의원들 전체를 바꾸지는 못했다. 그래도 약 250만 명 권리당원들의 목소리와 행동으로 1/3가량은 바꾸었다고 생각한다. 아마 이번 경선 과정을 거치면서 국회의원과 국회의원이 되려는 후보들은 ‘당원이 정당의 주인’이란 사실을 인식했을 것이라 자평한다.

 

 

 

 

내가 사는 금천구는 서울에서 두 번째로 작은 구라 국회의원이 1명이다. 작년부터 지역위원회 독서 모임에 나가 우리 지역구 국회의원을 만났다. 꼼꼼히 책을 읽어오며 자신의 소신을 신중히 말씀하시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의정활동을 살펴보고 발의 법안도 찾아봤다. 나의 결론은 우리 지역구의원님은 신뢰할 수 있는, 우리 서민을 위해 잘 싸울 수 있는, 싸울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망설임 없이 댄스유세단에 지원했다. 두 주에 걸친 결석을 무릅쓰고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활동으로 당선에 힘을 보태고 싶었기 때문이다.

 

 

 

 

 

 

 

 

공식 선거운동일 13일 동안 아침 출근 유세, 저녁 퇴근 유세, 오후 도보 유세 등 금천 곳곳을 돌아다니며 춤추고, 목소리 높여 우리 지역구 민주당 후보를 알렸다. 우리 댄스 유세팀 팀원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후보도 지지하고, 동네의 좋은 청년들도 알게 되고 또 동네 곳곳에서 주민들의 응원을 받으며 벚꽃이 만발한 좋은 장소도 탐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당도 꽤 되었다.^^ 일석사조! 그래서 이번 선거유세 활동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물론 신체적으론 힘든 유세 활동이었지만 무척 즐겁게, 기세등등하게 13일을 보냈다. 그리고 4월 10일, 드디어 우리가 목표한 금천구 최초의 연속 재선의원을 탄생시켰다.

 

 

 

 

 

 

 

 

 

민주주의=대의제?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이고, 대의제(代議制)를 실시하고 있다. 이러한 명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서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살아왔던 것 같다. 첫 투표권이 생기고 설레는 마음으로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참여한 이후로 더 나은 대리자를 뽑는 데 관심을 두었다. 국회의원과 시의원, 구의원 선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대신해서 나의 목소리를 더 잘 대변해줄 사람을 골라 투표하고 나면 나의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내가 뽑은 후보들은 당선되지 않았다. 대부분 군소정당의 진보 후보에게 투표했기 때문이다. 내가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되지 않았으니 마음껏 비난하고 또 좌절하고 그랬던 것 같다.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 Democratic republic) 시민의 역할은 정말 투표권만 행사하면 끝나는 것일까?

 

 

 

 

대의제에서 살고 있으니 대리자를 잘 고르는 것, 당연히 중요하다. 그러나 잘 고르고 난 후에도 그들이 정말 우리를 잘 대표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 ‘우리’라는 것 안에도 다양한 처지에 놓여 있는 다양한 목소리가 있다. 정말 작은 목소리까지, 아니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생명들(혹은 무생물)까지 대표하고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잘하고 있는 대리자에게는 힘을 실어주고 잘못하고 있는 대리자에게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의사결정 구조에 더 가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민주당에 가입했고, 처음으로 의사결정 구조에 참여할 수 있었다. (물론 아직도 미약하지만) 지금의 거대 양당 체제가 무너져야만 그들만의 리그가 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양한 정당이 주요 세력들을 견제할 수 있도록 원내에 진입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지금의 거대 양당 체제인 의사결정 구조가 변화될 가능성이 더 커질 것이다. 아마 녹색당 활동 끝이 공허했던 것은 우리의 목소리를 대변해줄 대리자 한 명도 없이, 우리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신앙처럼 여기면서 공부했던 수업을 2주나 빠지면서 선택했던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사무원의 경험은 또 다른 배움의 현장이었다. 선거유세 노래 중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로 시작하는 노래가 있다. 그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동안 지나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을 접했다. 엄지척하며 응원하는 사람, 시니컬하게 힐난하듯 쳐다보는 사람, 아예 반대당을 지지한다는 표시를 하며 적개심을 드러내는 사람 등. 그런 모습에 나는 ‘우리의 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왕에게는 아무것도 희망하지 말라. 그에게는 단지 책임만을 물어라. 힘은 바로 당신에게 있다. 왕은 줄 수 없지만 에게 줄 수 있는 힘, 우리가 가진 힘, 데모스(demos)의 힘(『묵묵』/고병권/돌베게/204쪽)말이다. 우리는 서로의 처지를 살피고 우리 곁의 사람들에게 더 귀 기울이고 서로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우리들의 목소리가 더 커질 것이고, 거기에서 민주주의(民主主義, democracy)의 힘, 우리 데모스의 힘이 나올 것이다.

 

 

 

 

이번 선거사무원으로서 활동하며 약자에게 힘이 되고, 내가 사는 지역과 내가 머물고 있는 지구를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으로서 계속 활동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세상이 공화(共和)롭게 살아갈 더 좋은 공동체가 되길 바라고, 또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공화국의 시민으로서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펼쳐질 22대 국회를 기대에 찬 눈으로 예의주시하며 지켜볼 것이다.

 

 

 

 

 

 

김윤경~단순삶

다르게 살아보려고 자발적 백수가 되었고, 이제는 마을활동가로 변신 중.

마을에서  조증적 열광적 사랑을 실천하려고 한다.

 

댓글 8
  • 2024-04-20 19:27

    윤경샘의 정당 활동 이야기는 한국 정당사 같네요. 자신이 믿고 꿈꾸는 것을 바로바로 활동력으로 펼치는 추진력이 대단합니다. 저도 윤경샘의 활동을 기대에 찬 눈으로 '예의' 주시하며 지켜봐도 될까요? 넘 예의 없는 짓일까요? ㅎㅎㅎ

  • 2024-04-21 08:23

    저도 선거운동 한 적 있어요.
    제가 썰 풀면....음.... 한국진보정당운동사...이긴 한데...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쨌든 1992년 총선에서 당시 민중당 중앙당 당직자? 였던 저는
    지역구 지원의 명을 받고 구로로 파견되어
    당시 후보였던 이우재 민중당 대표의 선거운동을 도왔었죠.

    혹시 상상이 되시나요?
    레닌식 비합법조직(인민노력)의 조직원이자 동시에 합법대중정당(민중당)의 당직자이고 (이걸 전문용어로 '프락션'이라고 합니다. ㅋㅋㅋㅋ)
    다시 부르조아 선거판에 또 차출되어 선거운동을 해야 했던 어린? 혁명가?의 난감함이? ㅋㅋ

    각설하고,
    어쨌든 저는 지역구 선거를 하면서 소위 혁명가를 자처했던 우리들의 언어가 얼마나 빈곤한지
    길에서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소통되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저열한지
    뼈가 사무치게 느꼈었죠.

    우리가 말이 있었냐구요?
    글쎄요.
    이후 노회찬이 진보의 이념을 보통 사람들의 말로 이야기하기 전까지
    우리는 말이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래서였을까요?
    300 : 0의 선거가 끝나고 (ㅠ)
    모든 것이 리셋된 것 같은 시대에서
    앞으로는 어떤 정치가 가능한 건지 묻게 되는 선거였습니다.

    윤경샘, 고생하셨고
    이제 공부합시다!

    • 2024-04-21 08:38

      넵 이제 공부로 돌아와야죠.
      이주나 지나가는데 후유증으로 책도 다 못읽고 숙제도 못하고.....얼릉 피로를 떨쳐내고 오늘부터 다시 공부 모드, 활동가 모드로 돌아오겠습니다~^^

  • 2024-04-22 10:40

    음 윤경샘을 세미나가 아닌 국회로 보내야 될듯~~~!! ^^

  • 2024-04-22 17:22

    목소리를 내는 활동가. 멋진것 같아요!!

  • 2024-04-30 16:55

    결석을 이런 식으로 하면 결석도 권할만!
    공부와 활동! 두 가지 다할 수 있다면 백점이지요~

  • 2024-05-02 15:54

    인스타에서 윤경샘 춤추는 모습을 보면서 새삼 놀랐어요!
    재밌다 그리고 멋지다. '조증적 열광'의 아우라를 직접 목격한 기분?
    데모스의 역동적 힘을 계속 글로 나눠주세요^^

  • 2024-05-03 00:08

    개표방송할 때 윤경쌤 지역구 찾아서 결과를 확인했지 말입니다~^^
    윤경쌤 멋지십니다!

남어진의 현장분투기
나와 당신의 책임   10년 전,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쓰인 멋진 슬로건들을 생각하고 있자면, 만든 이를 찾아가 박수를 쳐 주고 싶어지곤 한다.전기를 소비하는 곳에는 책임이 있다. 전기를 생산하고 송전하는 곳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다. 그 책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슬로건이 있었다 .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또,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였던 송전탑 반대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데에 기여했던 슬로건도 있다.   "우리 모두가 밀양이다"   누군가가 당사자이고, 누군가는 당사자가 아니라고 규정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에너지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 냈다.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말이다. 이 슬로건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운이 좋게도 끝없이 확장되는 사회 운동을 경험했다. 설령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밀양이 아니더라도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밀양은 졌다. 높이 100m짜리 송전탑은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다. 밭일을 할 때도, 병원을 가기 위해 마을 길을 걸을 때도, 캄캄한 밤 안방 창문에서도 쇳덩어리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낮 쇳덩어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저 철탑에는 핵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흐른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아도, 마주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송전탑에는 돈으로 갈기갈기 찢긴 마을 공동체의 상처가 묻어 있다. 38만 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사람을 짓밟았던 폭력의 상처, 함께 싸우다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 2014년, 2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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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어진
00:32 | 조회 7
일상명상
덕밍 아웃, 그 후   지난 글에서 호기롭게 덕밍 아웃을 했지만 명상에 빠져든 이유를 명확하게 알았던 것은 아니다. 명상에 빠진 것은 결과지 이유는 아니니까. 하여 명상이 처음부터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친구와 같다고 했지만 정작 누군가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면 제대로 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그냥 좋으니까 좋았다는 식의 동어 반복을 되풀이하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언가에 꽂힐 때 그 이유를 다 알아서는 아닌 것 같다. 우연히 어떤 것에 마음이 불꽃처럼 호응할 때 그저 속절없이 빠져드는 게 아닐까. 처음엔 빠져든 이유를 잘 모르는 터라 경우에 따라 ‘입덕 부정기’를 겪기도 하면서 말이다. 대개는 빠져든 다음에야 그 이유를, 스스로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를 발견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이유 덕분에 다시 그 대상을 더 깊이 애정하게 되는, 다이내믹한 순환이야말로 덕질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지.     나도 명상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른바 덕질의 묘미를 맛보고 있다. 명상이 뭔지도 모르고 매달리듯 빠져들었다가 이제야 차츰 명상이 뭔지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명상을 하기 전까지는 그렇게나 많은 쓸데없는 생각들에, 그렇거나 많이 휘둘리고 있는 줄 몰랐다. 그 때문에 명상을 통해 처음 경험했던 침묵과 평온이 그토록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는지도. 만약 명상이 아니었다면 일 년 365일, 꺼지지 않는 텔레비전처럼 소란스런 정신적 수다 때문에 괴롭다는 걸 영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그 순전한 무지에서 벗어난 순간, 마치 세상의 비밀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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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
2024.05.09 | 조회 6
K장녀_돌봄을 말하다
          언젠가 엄마의 구술 생애사를 써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엄마의 삶을 기록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엄마의 삶을 통해 우리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녀딸이 인터뷰를 시작하긴 했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진행을 못해서 좀 아쉽다. 이렇게 빨리 엄마가 기억을 잃고 이야기를 못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산업화세대 워킹맘   10년 전쯤 아버지가 대장암 재발로 병원에 오래 입원해 계실 때 엄마는 병원간호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혈관이 잘 안 나오는 아버지에게 혈관 주사를 놓으려면 꽤나 힘이 들었는데 엄마가 곧잘 혈관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1935년생인 엄마는 간호사이자 조산사였다. 엄마가 간호사 면허번호를 말하면(0000번 대) 간호사들(면허번호 000000번 대)은 깜짝 놀라며 ‘선배님’이라 불렀다. 엄마는 은근히 그걸 즐기는 듯했다. 대학병원 수술실에서 근무하던 엄마는 결혼하면서 그만두었고, 시골학교 교사인 아빠의 고향에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걸 도왔다고 했다.   엄마는 의대에 가고 싶었다. 중학생 때 친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새엄마가 들어오셨는데 엄마가 의대 가는 걸 반대해서 간호학교에 갔다. 동생인 삼촌 두 분은 의사다. 엄마 세대, 즉 산업화 세대에 많은 딸들은 아들들을 위해서 진학을 포기하고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남동생을 위해 희생한 누나들. 엄마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딸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의대에 갈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엄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 또래는 대부분 형제가 4~5명 정도 된다. 유독 우리집은 형제가 오빠와...
          언젠가 엄마의 구술 생애사를 써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엄마의 삶을 기록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엄마의 삶을 통해 우리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녀딸이 인터뷰를 시작하긴 했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진행을 못해서 좀 아쉽다. 이렇게 빨리 엄마가 기억을 잃고 이야기를 못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산업화세대 워킹맘   10년 전쯤 아버지가 대장암 재발로 병원에 오래 입원해 계실 때 엄마는 병원간호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혈관이 잘 안 나오는 아버지에게 혈관 주사를 놓으려면 꽤나 힘이 들었는데 엄마가 곧잘 혈관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1935년생인 엄마는 간호사이자 조산사였다. 엄마가 간호사 면허번호를 말하면(0000번 대) 간호사들(면허번호 000000번 대)은 깜짝 놀라며 ‘선배님’이라 불렀다. 엄마는 은근히 그걸 즐기는 듯했다. 대학병원 수술실에서 근무하던 엄마는 결혼하면서 그만두었고, 시골학교 교사인 아빠의 고향에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걸 도왔다고 했다.   엄마는 의대에 가고 싶었다. 중학생 때 친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새엄마가 들어오셨는데 엄마가 의대 가는 걸 반대해서 간호학교에 갔다. 동생인 삼촌 두 분은 의사다. 엄마 세대, 즉 산업화 세대에 많은 딸들은 아들들을 위해서 진학을 포기하고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남동생을 위해 희생한 누나들. 엄마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딸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의대에 갈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엄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 또래는 대부분 형제가 4~5명 정도 된다. 유독 우리집은 형제가 오빠와...
인디언
2024.05.07 | 조회 209
기린의 걷다보면
  지난 1월에 마포 난지생명길 1코스를 걸었다.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 공원을 숲으로 만든 이야기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를 읽고 찾아가 본 둘레길이었다. 그 때 노을 공원에 자리한 ‘나무자람터’에서 키운 묘목을 공원의 경사지에 심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숲과 숲을 개미집처럼 이어주는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 활동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서 활동 신청을 했고 905번 개미로 신청되었다는 연락도 받았다. 무리개미, 개별개미, 수시개미 등으로 분류해서 가능한 날짜에 신청하라고 매달 초에 문자로 공지가 왔다. 5월 공지에서 토요일 오후 2시 개별개미 활동 신청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세미나 방학이라 5월 4일 토요일 활동에 참가 신청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 난지공원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헤맬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나섰다. 9호선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네이버 지도의 안내를 믿었다. 당산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반, 근데 버스 정류장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난지 공원 주변으로 상암 올림픽 경기장, 하늘 공원, 노을 공원까지 여러 행사들이 연이어 열리는 모양이었다. 겨우 버스를 탔는데 30분이면 된다던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도록 막혔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 지나있었다.      회사에서 신청해서 왔다는 일가족 세 명, 개별로 신청한 네 명, 교회청년회 봉사활동으로 참가했다는 청년들 다수가 오늘의 참가자였다. 나처럼 개별로 왔다는 분은 노을 공원에 이렇게 아카시아가 많은 줄 몰랐다고 감탄을 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던 나도 그제야...
  지난 1월에 마포 난지생명길 1코스를 걸었다.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 공원을 숲으로 만든 이야기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를 읽고 찾아가 본 둘레길이었다. 그 때 노을 공원에 자리한 ‘나무자람터’에서 키운 묘목을 공원의 경사지에 심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숲과 숲을 개미집처럼 이어주는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 활동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서 활동 신청을 했고 905번 개미로 신청되었다는 연락도 받았다. 무리개미, 개별개미, 수시개미 등으로 분류해서 가능한 날짜에 신청하라고 매달 초에 문자로 공지가 왔다. 5월 공지에서 토요일 오후 2시 개별개미 활동 신청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세미나 방학이라 5월 4일 토요일 활동에 참가 신청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 난지공원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헤맬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나섰다. 9호선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네이버 지도의 안내를 믿었다. 당산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반, 근데 버스 정류장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난지 공원 주변으로 상암 올림픽 경기장, 하늘 공원, 노을 공원까지 여러 행사들이 연이어 열리는 모양이었다. 겨우 버스를 탔는데 30분이면 된다던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도록 막혔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 지나있었다.      회사에서 신청해서 왔다는 일가족 세 명, 개별로 신청한 네 명, 교회청년회 봉사활동으로 참가했다는 청년들 다수가 오늘의 참가자였다. 나처럼 개별로 왔다는 분은 노을 공원에 이렇게 아카시아가 많은 줄 몰랐다고 감탄을 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던 나도 그제야...
기린
2024.05.06 | 조회 142
동물을 만나러 갑니다
  재개발 구역의 고양이들 | 2편           동물의 의례   초코는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고 햇볕을 쬐다 일어나더니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걸었다. 왼쪽 뒷다리는 굽어 있었고 굽은 다리로 바닥을 간신히 딛고 걸었다. 몇 걸음 걷다가는 다친 다리를 허공에 들고 걸었다.   초코는 골절된 다리로도 높은 곳을 오르내리고 다른 고양이들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돌보미들은 초코를 치료하기 위해 포획틀을 설치했지만, 초코 대신 엉뚱한 고양이가 들어왔다. 봉봉오리님은 포획틀에 갖힌 초코의 단짝 고양이 카레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속 터지는 희극'이라고 했다. 『지구에 살 자격』에는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사람들은 재개발구역에서 돌봄하는 것이 무조건 슬플 것이라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마냥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재개발구역이 조금 이상한 곳이라 그럴지도 모르다. 나는 그곳에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는다. 그들이 서로를 돌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내염을 오래 앓아 밥을 먹을 때 힘들어하는 카레의 곁에는 늘 먼저 음식을 양보하는 초코가 있다. 둘은 추운 날 하나의 겨울 집에 들어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몸이 관통 당하는 큰 부상을 입었던 8개월의 오잉이는, 피를 흘리며 몸을 숨겼던 일주일 간의 시간 동안, 혀가 닿지 않는 그의 상처를 핥아준 형제들이 있었다. 『지구에 살 자격』, 145쪽   밥그릇...
  재개발 구역의 고양이들 | 2편           동물의 의례   초코는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고 햇볕을 쬐다 일어나더니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걸었다. 왼쪽 뒷다리는 굽어 있었고 굽은 다리로 바닥을 간신히 딛고 걸었다. 몇 걸음 걷다가는 다친 다리를 허공에 들고 걸었다.   초코는 골절된 다리로도 높은 곳을 오르내리고 다른 고양이들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돌보미들은 초코를 치료하기 위해 포획틀을 설치했지만, 초코 대신 엉뚱한 고양이가 들어왔다. 봉봉오리님은 포획틀에 갖힌 초코의 단짝 고양이 카레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속 터지는 희극'이라고 했다. 『지구에 살 자격』에는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사람들은 재개발구역에서 돌봄하는 것이 무조건 슬플 것이라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마냥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재개발구역이 조금 이상한 곳이라 그럴지도 모르다. 나는 그곳에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는다. 그들이 서로를 돌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내염을 오래 앓아 밥을 먹을 때 힘들어하는 카레의 곁에는 늘 먼저 음식을 양보하는 초코가 있다. 둘은 추운 날 하나의 겨울 집에 들어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몸이 관통 당하는 큰 부상을 입었던 8개월의 오잉이는, 피를 흘리며 몸을 숨겼던 일주일 간의 시간 동안, 혀가 닿지 않는 그의 상처를 핥아준 형제들이 있었다. 『지구에 살 자격』, 145쪽   밥그릇...
경덕
2024.05.01 | 조회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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