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회> 마라 맛 말고 심심한 맛, 명상

오영
2024-05-09 23:20
189

덕밍 아웃, 그 후

 

지난 글에서 호기롭게 덕밍 아웃을 했지만 명상에 빠져든 이유를 명확하게 알았던 것은 아니다. 명상에 빠진 것은 결과지 이유는 아니니까. 하여 명상이 처음부터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친구와 같다고 했지만 정작 누군가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면 제대로 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그냥 좋으니까 좋았다는 식의 동어 반복을 되풀이하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언가에 꽂힐 때 그 이유를 다 알아서는 아닌 것 같다. 우연히 어떤 것에 마음이 불꽃처럼 호응할 때 그저 속절없이 빠져드는 게 아닐까. 처음엔 빠져든 이유를 잘 모르는 터라 경우에 따라 ‘입덕 부정기’를 겪기도 하면서 말이다. 대개는 빠져든 다음에야 그 이유를, 스스로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를 발견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이유 덕분에 다시 그 대상을 더 깊이 애정하게 되는, 다이내믹한 순환이야말로 덕질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지.

 

 

나도 명상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른바 덕질의 묘미를 맛보고 있다. 명상이 뭔지도 모르고 매달리듯 빠져들었다가 이제야 차츰 명상이 뭔지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명상을 하기 전까지는 그렇게나 많은 쓸데없는 생각들에, 그렇거나 많이 휘둘리고 있는 줄 몰랐다. 그 때문에 명상을 통해 처음 경험했던 침묵과 평온이 그토록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는지도. 만약 명상이 아니었다면 일 년 365일, 꺼지지 않는 텔레비전처럼 소란스런 정신적 수다 때문에 괴롭다는 걸 영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그 순전한 무지에서 벗어난 순간, 마치 세상의 비밀을 다 얻은 양 기뻤던 모양이다.

게다가 당시에는 모든 괴로움이 전부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바깥 조건에서 비롯된다고 믿고 있었다. 하여 잠시라도 숨 쉴 공간이, 피난처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때 명상은 내게 말 그대로 숨 쉴 공간이 되어주었다. 한 호흡이라도 알아차리려고 마음을 모으는 동안 만큼은 그 어떤 것도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있는 그대로 온전히 쉴 수 있었다.

 

그런데 올해 들어 뭔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하필 명상에 대한 덕심을 드러낸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처음엔 무엇이, 어떻게 변했는지 도통 감을 잡지 못했다. 작년에 비해 조금 나아진 경제 사정 때문에 몸도, 마음도 느슨해졌나 싶기도 했지만 사실 긴가민가했다. 다만 작년 말까지 여러 상황들이 체감 상 ‘강!강!강!’의 연속이었으므로 일시적인 외부 조건의 변화로 인한 과도기인가 보다 생각하기도 했다. 공부와 명상 덕분에 훨씬 차분하고 담담해진 일상에 만족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언제 상황이 바뀔지 모르니 쉽게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확실성의 유혹에 빠지다

 

 그런 변화가 느껴진 시점을 되짚어 보니, 공교롭게도 작년 말, 체력적으로 부담이 되던 일을 그만 둔 즈음이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보니 한결 살만했다. 몸도 마음도 가볍고 행복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잘만 돌아가던 비행기 엔진 중 하나가 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전에는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공부든, 명상이든, 일상에서든 그만한 집중력이 발휘되었고 필요한 만큼의 에너지가 곧 채워지는 듯 했다. 힘든 시기였지만 그래서 생긴 슬픔 만큼이나 그에 버금가는 기쁨도, 성취감도 생생하고 즉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게 만들던 대상이 사라지자 그처럼 순환하던 에너지의 역동성도, 그 총량도 줄어든 것 같았다. 그제야 비로소 고통에도 중독이 된다는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외부의 위협이 사라지니 점차 동굴 속으로 도피할 이유도, 필요도 없어졌다. 모든 것이 가파른 골짜기 끝에 이르러 점차 완만해진 물길처럼 잔잔해졌다. 잘못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돌이켜보니 일상의 변화에 따라 명상도 그렇게 달라지고 있었다. 신혼의 격정적인 밀월기간이 자연스럽게 평범한 일상으로 이어지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잃어버리거나 놓친 것 같은 찜찜함이 내내 달라붙었던 것은 왜일까?

 

 

 올해 불교학교에서 읽은 마뚜라나의 <앎의 나무>에 따르면, 습관처럼 다시 ‘확실성의 유혹’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어느새 모 아니면 도, 그 양 극단 중 한 곳에 확실성의 닻을 내리고 안주하고 싶은 욕심이 생겨났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일이 그런 욕심대로 돌아갈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 그 어느 쪽에도 만족을 얻지 못하고 끊임없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우왕좌왕 할 수밖에. 부처님도 양 극단에 치우치지 말고 ‘중도’를 걸으라고 하셨는데 나는 꾸준히 그 길을 걷는 대신 ‘중도’라는 푯말을 어딘가에 단단히 꽂고 그 땅을 파려는 형국이었다.

 

 

 마뚜라나는 이 같은 혼란에서 벗어나려면 확실성을 찾아 양극단을 오가는 대신 그 얽힘에 주목하라고 조언했다. 즉 자신의 구조적 역동성과 환경이 맺는 상호 관계를 잘 보라고. 에셔의 그림, ‘그리는 손’에서 서로를 그리고 있는 두 손의 관계처럼 끊임없이 얽히며 변화하는 과정이야말로 진정한 앎이라고 말이다. 부처님 역시 무상한 변화의 흐름과 그 연기적 조건을 알아차리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이젠 마라맛 말고 심심한 맛

 

 그 어디에도 정답이 없고 안전하게 매달려 의지할 것이 없다는 것을 자주 잊곤 한다. 그래서 때로 헷갈린다. 명상 경험 역시 모든 무상한 것들처럼 그렇게 흘러간다는 것을 놓치고 있었다.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때론 거칠고 빠르게, 때로는 매우 고요히 흘러간다는 것을. 변하는 것을 부여잡고 지키려는 마음이 곧 자만이다. 자만은 자꾸 돌아보고 의심하고 채우고 쌓아두려고 한다. 무상한 흐름과는 정반대로 작동한다. 앞서 달라진 상황에서 생겨난 느낌을 붙잡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면 곧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나고 내 것이다’라고 붙드는 순간, 동시에 그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시야를 좁게 만들어 버렸고 그렇게 길을 잃고 말았다.

 

그럴 때마다 다만 할 수 있는 것은 명상자리로 돌아가는 것 뿐.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알게 되었다, 명상을 이제 더는 안전한 도피처로 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명상 경험이 일상과 무관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같은 것은 아니다. 에셔의 그림 속 두 손처럼 일상과 명상 역시 서로 다르지만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어느 손이, 어느 손을 그리고 있는 지 구분할 수 없는 것처럼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중도는 그 어디에도 멈추지 않고 걷고 있는 그 길 위에서 길을 찾는 것이 아닐까. 떠나온 그 자리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 이미 길의 풍경이 달라졌고 함께 걷는 이들도, 나도, 세상도 변했기 때문이다. 명상에 대한 덕심이 사라지는 일은 없겠지만 흐르는 물과 같아서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그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한 걸음, 한 걸음 계속 꾸준히 나아가는 수밖에! 때로는 흔들리고 헷갈리고 그래서 실망하고 슬퍼하기도 하겠지만 일어난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지기 마련이라는 가르침을 깨어 알아차리는 한, 길은 이어질 것이다.

 

과거에는 마라 맛 같이 자극적인 맛도 제법 즐기곤 했다. 하지만 맵부심을 부리던 시절은 지나갔고 그에 대한 추억도 부질없다. 명상도 그런 것 같다. 평양 냉면 같이 심심한 맛의 깊이를 천천히 음미하며 즐길 때가 되었다.

 

 

 

 

  오영

 

작년에 불교공부와 명상을 시작한 덕분에 서두르지 않는 삶, 천천히 읽고 쓰며 명상하는 삶을 꿈꾸게 되었다.

더불어 올 한해 명상동아리 활동으로 조금 더 많은 친구들과 함께 명상하기를 소망한다.

댓글 6
  • 2024-05-10 08:52

    '붙잡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면 곧 사라졌을 것', '중도는 그 어디에도 멈추지 않고 걷고 있는 그 길 위에서 길을 찾는 것'
    이 문구들이 마음에 들어오네요.
    그렇다면 마라맛도 사라지게 내버려두면서 잠시 두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ㅎㅎ 마라탕을 좋아하는 일인으로서...

  • 2024-05-12 17:54

    오늘은 명상이 어떻게 경험될까? 하는 기대는 늘 있어요. 전에는 기대에 못미치면 속상해하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은 그냥 그날의 명상 자체를 기대하게 된 것 같네요.

    허나. 가끔은 마라도 좋지요~ㅎ^^

  • 2024-05-12 21:33

    저는 올해 활동가 친구들이 데리고 간 비건 식당에서 마라탕을 처음 먹어봤는데
    채수로 끓였는데도 엄청 자극적이고,,, 근데 맛나더라고요ㅎㅎ
    스트레스 받으면 자극적인 맛을 찾을 때가 있어요. 저도 심심한 맛의 깊이를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오영샘의 명상 덕질기 3탄도 기대하겠습니다^^

  • 2024-05-13 11:30

    " 떠나온 그 자리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 이미 길의 풍경이 달라졌고 함께 걷는 이들도, 나도, 세상도 변했기 때문이다."
    이 문장의 라임이 오늘 아침 제 마음으로 여여히 흘러들어오네요~~ 걸을 때 마다 달라지는 세계... 명상이 주는 깨달음이군요^^

  • 2024-05-15 20:33

    쌤 명상 글을 읽는데 전부 마라탕 이야기.. 인데 저도 ㅋㅋㅋ 마라탕 먹고 싶... ㅎㅎㅎㅎㅎㅎ
    그리고 눈에 띄는 마뚜라나 사랑! ㅎㅎ
    일상의 잔잔함을 즐겨야 한다면서도 요새 지겨워서 온몸이 뒤틀리는데 어째요. 명상에 빨리 입문해야 할텐데요.. 흑 ㅜ

  • 2024-05-20 08:20

    착각이 성장을 가져온다..... 최근 읽은 책에서 밑줄 그은 부분이에요. 알지 못하고 사랑하게 되고, 그래서 알게 되는 것이 있다는 부분이었는데, 오영님의 덕질도 순항중이시네요!!

윤경이는 마을활동가
      지난 4월 13일과 14일 낮 최고 기온이 27.3℃와 29.4℃였다. 아직은 이른 봄인데, 기온은 한여름이다. 작년보다도 더 빠르게 더워지는 것 같고, 무엇보다 햇빛의 강도가 작년과 또 다르게 더 강렬했다. (올해는 새로운 패턴이 생긴 것도 같다. 너무 일찍 더워졌다가 또 급하게 온도가 내려가 평년보다 더 쌀쌀해진 느낌이다) 그런 햇빛을 받으며 걷고 있는 나는 겁이 났다. 정말 지구가 불타오르는 것 아닐까 해서다.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아이들이 엄청 더워서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인다. 괜스레 미안해지고 안쓰러웠다. 기후변화가 시작된 것은 이미 오래전이고, 이제 기후위기라고 한다. 이런 지구를 물려주는 어른으로서 나는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번 어린이날 행사에 참여하며 느낀 점을 정리하며 또다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본다.         친구야 노~올자     2024년 5월 5일 제102회 어린이날, 우리 동네에서는 제17회 금천어린이큰잔치 ‘친구야 노~올자’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는 2007년부터 시작된 마을 행사이다. 우리구는 1995년 구로구에서 분구된 후 ‘금천구’라는 정체성을 찾는데 시간이 좀 걸린 것 같다. 그래서 어린이날 행사도 한동안 없었다. 우리 동네 어린이들은 신도림 가로공원에서 열리는 어린이날 행사까지 다녀와야 했단다. 그런 상황을 보고 ‘나서는 어른들’이 있었다. 우리 동네 어린이들도 우리 동네에서 놀게 하자고. 그런 어른들의 제안으로 2007년 처음 금천구에도 어린이날 행사가 생긴 것이다. 전교조, 노동조합, 청년회, 진보정당 등 지역의 여러 단체가 첫 행사를 준비했다. 처음 열린 행사에서는 이주노동자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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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경~단순삶
2024.05.20 | 조회 130
남어진의 현장분투기
나와 당신의 책임   10년 전,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쓰인 멋진 슬로건들을 생각하고 있자면, 만든 이를 찾아가 박수를 쳐 주고 싶어지곤 한다.전기를 소비하는 곳에는 책임이 있다. 전기를 생산하고 송전하는 곳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다. 그 책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슬로건이 있었다 .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또,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였던 송전탑 반대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데에 기여했던 슬로건도 있다.   "우리 모두가 밀양이다"   누군가가 당사자이고, 누군가는 당사자가 아니라고 규정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에너지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 냈다.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말이다. 이 슬로건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운이 좋게도 끝없이 확장되는 사회 운동을 경험했다. 설령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밀양이 아니더라도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밀양은 졌다. 높이 100m짜리 송전탑은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다. 밭일을 할 때도, 병원을 가기 위해 마을 길을 걸을 때도, 캄캄한 밤 안방 창문에서도 쇳덩어리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낮 쇳덩어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저 철탑에는 핵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흐른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아도, 마주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송전탑에는 돈으로 갈기갈기 찢긴 마을 공동체의 상처가 묻어 있다. 38만 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사람을 짓밟았던 폭력의 상처, 함께 싸우다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 2014년, 2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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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어진
2024.05.10 | 조회 200
일상명상
덕밍 아웃, 그 후   지난 글에서 호기롭게 덕밍 아웃을 했지만 명상에 빠져든 이유를 명확하게 알았던 것은 아니다. 명상에 빠진 것은 결과지 이유는 아니니까. 하여 명상이 처음부터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친구와 같다고 했지만 정작 누군가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면 제대로 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그냥 좋으니까 좋았다는 식의 동어 반복을 되풀이하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언가에 꽂힐 때 그 이유를 다 알아서는 아닌 것 같다. 우연히 어떤 것에 마음이 불꽃처럼 호응할 때 그저 속절없이 빠져드는 게 아닐까. 처음엔 빠져든 이유를 잘 모르는 터라 경우에 따라 ‘입덕 부정기’를 겪기도 하면서 말이다. 대개는 빠져든 다음에야 그 이유를, 스스로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를 발견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이유 덕분에 다시 그 대상을 더 깊이 애정하게 되는, 다이내믹한 순환이야말로 덕질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지.     나도 명상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른바 덕질의 묘미를 맛보고 있다. 명상이 뭔지도 모르고 매달리듯 빠져들었다가 이제야 차츰 명상이 뭔지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명상을 하기 전까지는 그렇게나 많은 쓸데없는 생각들에, 그렇거나 많이 휘둘리고 있는 줄 몰랐다. 그 때문에 명상을 통해 처음 경험했던 침묵과 평온이 그토록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는지도. 만약 명상이 아니었다면 일 년 365일, 꺼지지 않는 텔레비전처럼 소란스런 정신적 수다 때문에 괴롭다는 걸 영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그 순전한 무지에서 벗어난 순간, 마치 세상의 비밀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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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
2024.05.09 | 조회 189
K장녀_돌봄을 말하다
          언젠가 엄마의 구술 생애사를 써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엄마의 삶을 기록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엄마의 삶을 통해 우리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녀딸이 인터뷰를 시작하긴 했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진행을 못해서 좀 아쉽다. 이렇게 빨리 엄마가 기억을 잃고 이야기를 못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산업화세대 워킹맘   10년 전쯤 아버지가 대장암 재발로 병원에 오래 입원해 계실 때 엄마는 병원간호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혈관이 잘 안 나오는 아버지에게 혈관 주사를 놓으려면 꽤나 힘이 들었는데 엄마가 곧잘 혈관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1935년생인 엄마는 간호사이자 조산사였다. 엄마가 간호사 면허번호를 말하면(0000번 대) 간호사들(면허번호 000000번 대)은 깜짝 놀라며 ‘선배님’이라 불렀다. 엄마는 은근히 그걸 즐기는 듯했다. 대학병원 수술실에서 근무하던 엄마는 결혼하면서 그만두었고, 시골학교 교사인 아빠의 고향에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걸 도왔다고 했다.   엄마는 의대에 가고 싶었다. 중학생 때 친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새엄마가 들어오셨는데 엄마가 의대 가는 걸 반대해서 간호학교에 갔다. 동생인 삼촌 두 분은 의사다. 엄마 세대, 즉 산업화 세대에 많은 딸들은 아들들을 위해서 진학을 포기하고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남동생을 위해 희생한 누나들. 엄마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딸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의대에 갈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엄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 또래는 대부분 형제가 4~5명 정도 된다. 유독 우리집은 형제가 오빠와...
          언젠가 엄마의 구술 생애사를 써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엄마의 삶을 기록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엄마의 삶을 통해 우리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녀딸이 인터뷰를 시작하긴 했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진행을 못해서 좀 아쉽다. 이렇게 빨리 엄마가 기억을 잃고 이야기를 못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산업화세대 워킹맘   10년 전쯤 아버지가 대장암 재발로 병원에 오래 입원해 계실 때 엄마는 병원간호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혈관이 잘 안 나오는 아버지에게 혈관 주사를 놓으려면 꽤나 힘이 들었는데 엄마가 곧잘 혈관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1935년생인 엄마는 간호사이자 조산사였다. 엄마가 간호사 면허번호를 말하면(0000번 대) 간호사들(면허번호 000000번 대)은 깜짝 놀라며 ‘선배님’이라 불렀다. 엄마는 은근히 그걸 즐기는 듯했다. 대학병원 수술실에서 근무하던 엄마는 결혼하면서 그만두었고, 시골학교 교사인 아빠의 고향에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걸 도왔다고 했다.   엄마는 의대에 가고 싶었다. 중학생 때 친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새엄마가 들어오셨는데 엄마가 의대 가는 걸 반대해서 간호학교에 갔다. 동생인 삼촌 두 분은 의사다. 엄마 세대, 즉 산업화 세대에 많은 딸들은 아들들을 위해서 진학을 포기하고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남동생을 위해 희생한 누나들. 엄마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딸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의대에 갈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엄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 또래는 대부분 형제가 4~5명 정도 된다. 유독 우리집은 형제가 오빠와...
인디언
2024.05.07 | 조회 350
기린의 걷다보면
  지난 1월에 마포 난지생명길 1코스를 걸었다.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 공원을 숲으로 만든 이야기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를 읽고 찾아가 본 둘레길이었다. 그 때 노을 공원에 자리한 ‘나무자람터’에서 키운 묘목을 공원의 경사지에 심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숲과 숲을 개미집처럼 이어주는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 활동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서 활동 신청을 했고 905번 개미로 신청되었다는 연락도 받았다. 무리개미, 개별개미, 수시개미 등으로 분류해서 가능한 날짜에 신청하라고 매달 초에 문자로 공지가 왔다. 5월 공지에서 토요일 오후 2시 개별개미 활동 신청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세미나 방학이라 5월 4일 토요일 활동에 참가 신청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 난지공원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헤맬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나섰다. 9호선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네이버 지도의 안내를 믿었다. 당산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반, 근데 버스 정류장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난지 공원 주변으로 상암 올림픽 경기장, 하늘 공원, 노을 공원까지 여러 행사들이 연이어 열리는 모양이었다. 겨우 버스를 탔는데 30분이면 된다던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도록 막혔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 지나있었다.      회사에서 신청해서 왔다는 일가족 세 명, 개별로 신청한 네 명, 교회청년회 봉사활동으로 참가했다는 청년들 다수가 오늘의 참가자였다. 나처럼 개별로 왔다는 분은 노을 공원에 이렇게 아카시아가 많은 줄 몰랐다고 감탄을 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던 나도 그제야...
  지난 1월에 마포 난지생명길 1코스를 걸었다.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 공원을 숲으로 만든 이야기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를 읽고 찾아가 본 둘레길이었다. 그 때 노을 공원에 자리한 ‘나무자람터’에서 키운 묘목을 공원의 경사지에 심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숲과 숲을 개미집처럼 이어주는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 활동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서 활동 신청을 했고 905번 개미로 신청되었다는 연락도 받았다. 무리개미, 개별개미, 수시개미 등으로 분류해서 가능한 날짜에 신청하라고 매달 초에 문자로 공지가 왔다. 5월 공지에서 토요일 오후 2시 개별개미 활동 신청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세미나 방학이라 5월 4일 토요일 활동에 참가 신청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 난지공원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헤맬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나섰다. 9호선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네이버 지도의 안내를 믿었다. 당산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반, 근데 버스 정류장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난지 공원 주변으로 상암 올림픽 경기장, 하늘 공원, 노을 공원까지 여러 행사들이 연이어 열리는 모양이었다. 겨우 버스를 탔는데 30분이면 된다던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도록 막혔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 지나있었다.      회사에서 신청해서 왔다는 일가족 세 명, 개별로 신청한 네 명, 교회청년회 봉사활동으로 참가했다는 청년들 다수가 오늘의 참가자였다. 나처럼 개별로 왔다는 분은 노을 공원에 이렇게 아카시아가 많은 줄 몰랐다고 감탄을 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던 나도 그제야...
기린
2024.05.06 | 조회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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