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양생에세이 ②]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타자를 마주할 수 있을까- 조은

인문약방
2022-01-02 20:30
260

인간(Man, 人間)을 넘어선다는 것

 

나는 인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들보다 인간이 아닌 것, 예를 들어 비인간 동물이나 자연이 더 잘 이해된다. 나에게 ‘인간’이라는 단어는 이해되지 않는 범죄들을 저지르고, 동물들은 소유물 혹은 고깃덩어리로 대하며, 여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남자’들을 생각나게 한다. 그렇다고 내 주변에 이런 사람이 가득한 건 아니다. 다만 매일 올라오는 각종 폭력 범죄들, 도로에서 마주치는 동물의 사체들, 이해되지 않는 행동과 말을 하는 사람들, 이들을 마주칠 때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뚝뚝 떨어진다. 페미니즘, 환경, 동물권을 알게 되면서 더 자주 인간들이 싫어졌다. 처음 공부를 할 때는 ‘인간’을 넘어설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혔다. 나에게 인간은 곧 남자가 되어버렸고, 나는 남자에게 마음을 열어주기가 쉽지 않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그들과 나 둘 중에 하나만 살아갈 방법은 없다는 것도 안다. 그렇다면 내가 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내가 그들을, 그들이 나를 해석할 수 있을까. 나의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넘어설 수 있을까?

 

 

 

 

 

처음에 양생 세미나를 신청할 때는 몸과 마음이 연결되는 것이 궁금했다. 하지만 <숲은 생각한다>를 읽으며 어느새 인류학까지 왔다. ‘나’에서 숲으로 확장된 셈이다. <숲은 생각한다>는 “인간적”인 것에 의문을 던진다.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인류학을 아마존 숲속에 있는 루나족의 생활을 통하여 이야기한다. 그들이 어떻게 문명과 야생 사이에서 소통을 하고 있는지 담겨있다. 인간은 그동안 사유할 수 있는 동물로서 고유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숲은 생각한다>의 저자 에두아르도 콘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상징적’인 것이며, ‘상징적’인 것만이 기호는 아니라고 말한다. 기호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기호를 사용한다. 콘은 퍼스의 기호학을 참조하여 기호에 관해 설명한다. 기호에는 ‘상징적(symblic)’인 것뿐만 아니라 ‘아이콘적(iconic)’, ‘인덱스적(indexical)’ 기호가 있다고 말한다. 이 기호들을 만들어내고 해석하는 것을 기호작용이라고 하며, 기호작용을 통해 우리는 우리로서 존재할 수 있다.

 

기호작용은 살아있는 세계에 널리 퍼져 있으며 살아있는 세계를 구성한다. 다수 종들 간의 관계가 가능하고 또한 그러한 관계를 분석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기호적 성향을 부분적으로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호작용에 대한 이러한 이해 방식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표상하는 세계들로부터 인간을 분리해서 묘사하는 이원론적인 인류학적 접근법을 넘어 일원론적인 접근법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나는 ‘인간’을 넘어서 생각한다는 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알고 싶었다. 그래야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도 날을 세우고 살지만은 않을 것 같다. 페미니즘, 환경, 동물권을 공부하면서도 인간을 넘어선다는 것에 대한 의문이 가득했는데, <숲은 생각한다>를 읽으면서 인간을 넘어설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았다.

 

 

봉덕이는 생각한다

 

많은 종과의 기호작용을 통해 우리는 우리로 존재하고, ‘자기’로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숲에 사는 루나족과 다르게 도시에 사는 인간들이 다른 존재와의 기호작용을 인식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도 고기동에 사는 나는 아파트에 사는 것보다는 비인간 존재들과 아주 조금 더 가까운 편이다. 새들이 밭에 있는 먹이를 먹으러 오거나, 버스정류장에 가는 길에 마주치는 개와 고양이, 가끔 운전하다가 만나는 고라니와 다람쥐.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버스정류장에 가는 길에 마주쳤던 개였다. 고기동에 이사를 온 지 8년이 다 되어가는데 지금까지도 동네를 돌아다니는 큰 개들이 무서워서 밤에 혼자 걷는 것은 피한다. 큰 개를 무서워했던 내가 대략 3년째 20킬로가 넘어가는 개, 봉덕이와 함께 살고 있다. 가장 가까운 비인간 동물인 봉덕이가 <숲은 생각한다>를 읽는 중간중간 생각났다.

 

 

 

 

봉덕이는 처음에는 밖에서 지내다가 현재는 집 안과 밖을 넘나들며 살고 있다. 밖에서 지낼 때는 지금보다 좀 더 야생적이었다. 날아다니는 새를 잡은 적도 있고, 쥐도 여러 마리 잡았다. 그때는 솔직히 봉덕이를 잘 알지 못했다. 아니, 봉덕이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거의 없었다. 봉덕이랑 마주치는 게 집을 나갈 때랑 들어올 때 마당에서 잠시 보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두 발로 내 다리를 잡는 봉덕이를 떼고, 집으로 들어오기에 바빴다. 더 놀다 가라는 봉덕이의 행동을 어떤 의미(기호)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반갑고, 더 있고 싶어서 그런 걸 가족들은 자꾸 훈련으로 가르쳐야 할 문제행동이라고 봤다. 그래서 여러 훈련을 시도했었다. 현관문에서 대문을 가는 길에 ‘앉아’를 시켜가며 간식을 주기도 했었고, 한동안은 무시해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안으로 들어와서 긴 시간을 함께하니 자연스럽게 그 행동은 없어졌다. 긴 시간을 같이 생활하면서 나도 봉덕이도 서로의 기호를 전보다 더 잘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봉덕이가 나가고 싶을 때, 배가 고플 때, 놀고 싶을 때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고, 봉덕이는 우리가 언제 자려고 하는지, 나가려고 하는지, 산책하러 가는지를 구분한다.

 

나는 솔직히 ‘인간적’인 걸 넘어서 생각하는 걸 너무 원했지만, 한편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지금 봉덕이랑 내가 기호작용을 통해서 각자 새로운 자기로 또 우리로 창발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지구를 넘어서

 

<숲은 생각한다> 마지막 세미나 시간에 나왔던 이야기가 있다. ‘기호’로 받아들이는 것. 그 말을 들었을 때 생각났던 책이 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라는 김초엽 작가의 sf 소설이다. 단편집으로 구성되어있는 이 책에서 ‘스펙트럼’이라는 단편이 생각났다. 외계 생명체를 탐사하는 연구원이었던 희진이 탐사 도중 조난을 당하며 낯선 행성에서 외계생명체 루이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이다. 루이는 하루의 거의 모든 시간을 행성에 있는 도구들로 그림을 그리는 데에 보낸다. 희진은 자신을 돌봐주는 루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외계 생명체들과 간단한 비언어적 의사소통도 가능해졌다. 희진은 연구원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 행성을 분석하고 지구에 알리려고 했지만, 점차 지구의 도구들 없이, 행성 자체를 감각으로만 받아들이는 일에 익숙해졌다. 희진은 루이의 그림들이 예술과 감정을 표현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의미를 기록해오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언어인 그림을 해석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끝내 포기했다. 희진은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은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 루이, 네게는.”

희진은 루이의 눈에 비친 노을의 붉은 빛을 보았다.

저 풍경이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보이겠네.”

희진은 결코 루이가 보는 방식으로 그 풍경을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희진은 루이가 보는 세계를 약간이나마 상상할 수 있었고, 기쁨을 느꼈다.

 

나는 숲을 넘어서, 지구를 넘어서, 다른 존재를 저렇게 마주할 수 있을까. 아니 지구 안에서라도, 숲에서라도,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라도 타자를 마주할 수 있을까. <숲은 생각한다>에서 시작해서 우주로까지 가보았다. 나는 이 두 책이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이 책들을 통해서 어렴풋이 느껴진다. 타자를 마주하는 일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

 

처음의 질문은 ‘어떻게 그 남자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였다. 이해하고 싶었고,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은 마음의 방향이 조금 달라졌다. ‘남자’들에 방점을 찍은 저 질문 자체가 맞지 않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남자의 범위를 벗어나 보는 것? 모든 남자가 ‘범죄자’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 범위를 벗어나서 그저 하나의 주체로서 관계를 맺는 것. 그 정도가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난 그냥 어떤 타자와 마주하게 될 때 내 세상 안에서만 타자를 해석하기 싫다. 좀 더 넓은 타자를 마주하고 싶다. 나는 그런 노력을 기꺼이 하는 사람이다.

댓글 1
  • 2022-01-03 13:52

    좀 더 넓은 타자를 마주하는 노력을 기꺼이 하는 분이라면 이미 게임 오버~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베르나르 스티글레르 —『자동화 사회I』, 『고용은 끝났다, 일이여 오라!』 - 정군 독이면서 약이고, 약이면서 독인 것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참된 수사의 기술’에 관해 논한다. 더위를 피해 일리소스라는 강변에 이른 소크라테스에게 파이드로스는 그곳이 아테네의 오레이튀이아가 보레아스에게 납치된 곳이 아닌지 묻는다1).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뜬금없이 오레이튀이아가 납치될 때, ‘파르마케이아’라는 친구와 함께 있었다고 답한다. ‘파르마케이아’는 누구일까? 전설에 따르면 그것은 ‘여자 마법사’를 일컫는 그리스어 일반명사다. 이 외에 ‘제약술’이라는 뜻도 함께 전해진다. 그리스어에는 비슷한 의미를 가진, ‘파르마-’ 어미를 가진 몇몇 어휘들이 전해지는데, 가령 ‘주술사’를 뜻하는 ‘파르마키우스’, 희생제물을 뜻하는 ‘파르마코스’와 같은 말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를 죽게 만든 것, 그리고 동시에 소크라테스를 불멸로 만든 것, 바로 약藥이면서 독毒인 것, ‘파르마콘’도 그렇다.     데리다의 제자로, 스승과 함께 쓴 『에코그라피』(1996, 한국어판2006)로도 잘 알려진 베르나르 스티글레르는 ‘디지털 기술’을 현대에 등장한 ‘파르마콘’으로 사유한다.   “쓰여진 기록은 이미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지식의 모든 외부화에 내포된 프롤레타리아화의 위험을 간파할 수 있도록 해준 바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디지털, 아날로그 그리고 기계에 의한 기록은 제3차 파지이다. 여기서 지식은 오직 외부화를 통해서만 구성될 수 있다는 명백한 역설이 나타난다."2)   소크라테스, 후설, 데리다로 이어지는 말/글에 관한 복잡한 사유의 층위들이 한꺼번에 녹아있는 구절이기는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내용 자체는 간단하다. ‘디지털화’는 의식 내부에서 일어나는 감각적 포착으로서 ‘1차 파지’와 반성적 포착으로서 ‘2차 파지’ 너머의, 의식 외부에서 일어나는 ‘3차 파지’의 궁극적 형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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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군
2023.11.26 | 조회 340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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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르륵
2023.11.21 | 조회 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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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0 | 조회 217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운전을 하고 가다가 라디오 광고를 듣고 웃음이 났다. 광고의 주인공은 ‘현해환경’이라는 기업이었다. 대개 ‘00환경’은 고물상의 고급진 표현인 경우가 많다. 현해환경은 고물상은 아니지만 배관청소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였다. 그 업체가 장자에 나오는 현해(懸解)라는 한자를 쓰는지 안쓰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내가 웃었던 이유는 그 광고를 듣고 과연 ‘현해’라는 뜻과 기업의 일이 절묘하게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꽉 막힌 배관을 뚫어 물길을 해방시키듯, 장자의 현해(懸解)는 스스로의 마음을 옭아맸던 상황에서 풀려나는 ‘자기해방’의 경지이다. 세 번째 ‘읽고쓰기1234’의 마지막에서 나는 물화를, 자기동일성의 해방이며 현해(懸解)로 가는 지름길을 연 것이라고 썼다. 올해의 마지막 읽고쓰기1234에서 나는 현해를 비롯한 장자의 개념을 꼼꼼하게 읽고, 나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관찰해보려 한다.   식은 재 같은 마음과 마른 나무 같은 몸 유소감은 장자철학의 주요 내용이 안명론(安命論)과 소요론(逍遙論)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각각 운명론과 자유론이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운명론에서 출발해서 자유론으로 결론지어지는 구조로 장자철학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장자의 철학체계도 여러 사상적 측면이 내부에서 대립하고 또 융합하면서 유기적으로 하나의 사상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인정한다. 특히 장자는 현실에 대한 깊은 관찰과 비판, 그 현실의 초탈과 이상적 세계가 극단적으로 대립되어 있다. 그러므로 장자철학 안에는 현실세계와 이상적 세계로서의 정신세계가 늘 대립하고 있다. 장자철학 안에서 끝없이 모순적 국면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대립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 대립과 모순은 장자가 살았던 당대의 사회적 맥락과 떼어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가 살았던 전국시대 중기는...
운전을 하고 가다가 라디오 광고를 듣고 웃음이 났다. 광고의 주인공은 ‘현해환경’이라는 기업이었다. 대개 ‘00환경’은 고물상의 고급진 표현인 경우가 많다. 현해환경은 고물상은 아니지만 배관청소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였다. 그 업체가 장자에 나오는 현해(懸解)라는 한자를 쓰는지 안쓰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내가 웃었던 이유는 그 광고를 듣고 과연 ‘현해’라는 뜻과 기업의 일이 절묘하게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꽉 막힌 배관을 뚫어 물길을 해방시키듯, 장자의 현해(懸解)는 스스로의 마음을 옭아맸던 상황에서 풀려나는 ‘자기해방’의 경지이다. 세 번째 ‘읽고쓰기1234’의 마지막에서 나는 물화를, 자기동일성의 해방이며 현해(懸解)로 가는 지름길을 연 것이라고 썼다. 올해의 마지막 읽고쓰기1234에서 나는 현해를 비롯한 장자의 개념을 꼼꼼하게 읽고, 나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관찰해보려 한다.   식은 재 같은 마음과 마른 나무 같은 몸 유소감은 장자철학의 주요 내용이 안명론(安命論)과 소요론(逍遙論)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각각 운명론과 자유론이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운명론에서 출발해서 자유론으로 결론지어지는 구조로 장자철학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장자의 철학체계도 여러 사상적 측면이 내부에서 대립하고 또 융합하면서 유기적으로 하나의 사상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인정한다. 특히 장자는 현실에 대한 깊은 관찰과 비판, 그 현실의 초탈과 이상적 세계가 극단적으로 대립되어 있다. 그러므로 장자철학 안에는 현실세계와 이상적 세계로서의 정신세계가 늘 대립하고 있다. 장자철학 안에서 끝없이 모순적 국면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대립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 대립과 모순은 장자가 살았던 당대의 사회적 맥락과 떼어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가 살았던 전국시대 중기는...
봄날
2023.11.20 | 조회 215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진한 시기 중앙집권과 지방분권 사이에서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 읽기     들어가기 : 처음에는 한나라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 요즘 중국 한나라와 관련 있는 책을 보고 있다. 한나라에 관한 모든 것을 알자는 모토였지만, 세미나에서 읽은 책은 두세 권 남짓이다. <춘추>를 해석해낸 동중서의 <춘추번로>, 한 무제의 평전과 <염철론> 및 <사기>. 처음 김영민의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의 관심은 전적으로 한나라에 있었다. 세미나에서 강의안을 쓰자고 결의한 이상, 관련 이차자료를 봐야 하는 이상, <읽고쓰기 1234>도 하고 겸사겸사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나라에 대한 나의 관심은 지금 우리가 ‘중국’이라고 할 때 상상되는 모든 것들(‘漢’)의 원형이 이때 만들어졌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즉 흉노와의 전쟁을 통해 획득한 영토는 이후 중국인의 관념적 국토 영역의 한 원형이 구축되었으며, 독존유술獨尊儒術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중국 통치의 시스템이 마련되었으며, 경학/역사/문학 등 중국 정신 문화 영역에서의 모델이 구축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적으로 당시의 지도만 보더라도 우리가 상상하는 중국 영토와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나라 시대에 단지 그 ‘원형’이 세워졌다는 의미이지, 완벽히 확립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로부터도 우리는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역사적으로 다르게 상상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는 중국을 하나의 단일한 단위로 생각하는 본질주의적 접근에 대한 비판으로 채워져 있다. ‘중국’이 역사적으로 고찰되어 온 과정을 밝히는 작업인 셈이다. 그는 서론에서 기존 정치사상사 전개에 딴지를 건다. 어떻게? 바로 그들이 밟고 서 있는 ‘기본...
  진한 시기 중앙집권과 지방분권 사이에서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 읽기     들어가기 : 처음에는 한나라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 요즘 중국 한나라와 관련 있는 책을 보고 있다. 한나라에 관한 모든 것을 알자는 모토였지만, 세미나에서 읽은 책은 두세 권 남짓이다. <춘추>를 해석해낸 동중서의 <춘추번로>, 한 무제의 평전과 <염철론> 및 <사기>. 처음 김영민의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의 관심은 전적으로 한나라에 있었다. 세미나에서 강의안을 쓰자고 결의한 이상, 관련 이차자료를 봐야 하는 이상, <읽고쓰기 1234>도 하고 겸사겸사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나라에 대한 나의 관심은 지금 우리가 ‘중국’이라고 할 때 상상되는 모든 것들(‘漢’)의 원형이 이때 만들어졌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즉 흉노와의 전쟁을 통해 획득한 영토는 이후 중국인의 관념적 국토 영역의 한 원형이 구축되었으며, 독존유술獨尊儒術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중국 통치의 시스템이 마련되었으며, 경학/역사/문학 등 중국 정신 문화 영역에서의 모델이 구축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적으로 당시의 지도만 보더라도 우리가 상상하는 중국 영토와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나라 시대에 단지 그 ‘원형’이 세워졌다는 의미이지, 완벽히 확립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로부터도 우리는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역사적으로 다르게 상상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영민의 <중국정치사상사>는 중국을 하나의 단일한 단위로 생각하는 본질주의적 접근에 대한 비판으로 채워져 있다. ‘중국’이 역사적으로 고찰되어 온 과정을 밝히는 작업인 셈이다. 그는 서론에서 기존 정치사상사 전개에 딴지를 건다. 어떻게? 바로 그들이 밟고 서 있는 ‘기본...
자작나무
2023.11.13 | 조회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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