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카메오 열전 2회] 관중, 능력주의 시대에 필요한 것

진달래
2021-09-22 22:42
366

관중은 인한 사람입니까

 

자로가 말했다. “환공이 공자 규를 죽이자 소홀은 죽었고 관중은 죽지 않았으니, 인하지 못한 것이지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환공이 제후를 규합하면서도 군사력으로 하지 않은 것은 관중의 힘이었다. 누가 그의 인만하겠는가! 누가 그의 인만하겠는가!” (子路曰 桓公殺公子糾 召忽死之 管仲不死 曰未仁乎 子曰 桓公九合諸侯 不以兵車 管仲之力也 如其仁 如其仁)『논어』「헌문」17

 

관중(管仲)은 제(齊)나라의 정치가로 이름은 이오(夷吾)이고 중(仲)은 자이다. 우리에게는 ‘관포지교(管鮑之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어려운 시절, 친구인 포숙아의 도움을 여러 번 받았던 관중은 후에 “나를 낳아 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주는 것은 포숙아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라는 말로 그와의 두터운 우정을 보여주었다. 포숙아는 제나라의 공자 규와 소백이 군주의 자리를 놓고 다툴 때 규를 지지하던 관중과 달리 소백을 모시고 있었다. 후에 소백이 제 환공의 자리에 오르자 포숙아는 관중을 추천하여 그를 재상의 자리에 오르게 했다. 이에 관중은 제 환공을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로 만들고, 제나라를 제후국 중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게 하였다. 제 환공은 관중을 높여 중부(仲父)라 불렀다고 한다.

 

 

공자는 칭찬에 인색하다. 『논어』에 누가 인(仁)하냐고 물으면 대체로 “인한지 모르겠다.(不知其仁也)”로 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자로가 관중은 인하지 못한 사람이지 않느냐고 물을 때 공자가 “누가 그의 인만하겠는가(如其仁)”라고 대답한 것은 대단한 칭찬으로 볼 수 있다. 공자는 관중과 제 환공이 쇠약해진 주(周)나라를 대신해, 제후들을 규합하여 주 왕실을 받들게 하고, 북쪽의 융족이 침략했을 때 그를 막아냄으로써 중원의 문화를 지킨 것을 높게 평가했다.

춘추전국시대를 통틀어 관중은 가장 훌륭한 재상으로 꼽힌다. 그런데 자로의 질문을 보면 이 당시 관중에 대한 다른 평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관중이 공자 규를 모시고 있었으면서 규가 죽었을 때 함께 죽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관례대로라면 규가 죽었을 때 관중이 함께 죽는 것이 신하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관중은 규를 제후의 자리에 올리기 위해서 제나라로 들어가는 소백을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그런데 죽지 않았을 뿐 아니라, 소백의 신하가 되었으니 공자의 제자들이 보기에 관중은 도리를 다하지 못한 인물로 비춰진 것이다.

 

자공이 말했다. “관중은 인한 사람이 아니지요? 환공이 공자 규를 죽였는데 따라 죽지 않았고 또 환공을 도왔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관중은 환공을 도와 제후들의 패자가 되게 했고, 천하를 한번 바로잡아 백성이 지금까지 그 혜택을 받고 있다. 관중이 없었다면 우리는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 어찌 보통사람처럼 사소한 신의를 지킨다고 스스로 도랑에서 목을 매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경우와 같겠는가.”(子貢曰 管仲非仁者與 桓公殺公子糾 不能死 又相之 子曰 管仲相桓公 霸諸侯 一匡天下 民到于今受其賜 微管仲 吾其被髮左衽矣 豈若匹夫匹婦之爲諒也 自經於溝瀆而莫之知也)「헌문」18

 

그러나 공자의 대답은 제자들의 생각과 달랐다. 공자는 관중의 공적을 높이며 많은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한 관중을 인하다고 하지 않으면 누구를 인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고 답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구현하고자 했던 공자의 입장에선 관중이 규를 따라 죽지 않고, 제 환공의 신하가 되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관중이 썼다고 알려진 『관자(管子)』를 보면 백성을 풍족하게 해 주는 것이 다스리는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그 뿐 아니라 관중은 제 환공에게 명분 없는 싸움을 하지 못하게 했다. 사람들을 배부르고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 공자 역시 제 환공과 같은 제후를 만난다면 자기도 하고 싶은 일로 여겼다.

 

관중은 그릇이 작다

 

관중은 『논어』에 네 번 등장한다. 이렇듯 모두 칭찬의 말인 듯싶으나 한편, 공자는 관중을 ‘그릇이 작은 사람’이라 평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관중의 그릇이 작구나.”

어떤 이가 말했다. “관중은 검소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관중은 집이 세 채나 있었고, 가신에게 일을 겸직시키지 않았으니, 어찌 검소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관중은 예를 알았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임금만이 병풍으로 문을 가릴 수 있는데 관중도 병풍으로 문을 가렸다. 임금만이 두 나라의 임금이 회합할 때 반점(사이에 두는 탁자)을 두는데 관중도 반점을 두었다. 관중이 예를 안다고 한다면 누구인들 예를 알지 못하겠는가?” (子曰 管仲之器小哉 或曰 管仲儉乎 曰 管氏有三歸 官事不攝 焉得儉 然則管仲知禮乎 曰 邦君樹塞門 管氏亦樹塞門 邦君爲兩君之好 有反坫 管氏亦有反坫 管氏而知禮 孰不知禮)「팔일」22

 

공자가 관중의 업적을 높이며 칭찬했으면서 이렇게 그의 그릇이 작다고 한 것은 사실 어떤 면을 보고 한 말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공자의 말을 듣고 잘 이해하지 못한 혹자의 질문을 통해 공자가 관중의 어떤 면을 지적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후에 사마천은 『사기』 「관안열전(菅晏列傳)」에 “관중은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현신이었으나 공자는 그를 소인이라고 하였다.(管仲世所謂賢臣,然孔子小之)”고 적었다. 아마도 사마천이 이렇게 말한 것은 공자가 관중의 그릇이 작다고 평한 이 문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관중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공자는 관중이 제 환공을 패자로 만든 것을 문제 삼지 않았으나 후대에 맹자는 관중이 왕도(王道)를 행하려 하지 않고, 단지 제 환공을 패자(覇者)의 자리에 머물게 한 것을 비난했다. 북송의 소순(蘇洵)은 「관중론」에서 관중이 자신이 죽고 난 뒤의 혼란을 예견했을 터인데도 그것을 막지 못함을 한탄했다. 제 환공은 재위기간 내내 관중에 의지하여 정치를 했기 때문에 관중이 죽을 때 그를 대신 해 누가 정치를 맡는 것이 좋을지를 물었다. 이 때 관중은 절대 등용해서는 안 되는 세 사람(역아, 개방, 수조)을 언급하는데 제 환공은 처음에는 관중의 말을 들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둠으로써 말년에 나라를 혼란하게 만들었다. 거기다 제 환공이 제대로 후사를 정하지 못하고 죽자, 그의 아들들이 제후의 자리를 두고 싸우느라 환공의 장례를 제 때에 치르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고, 제나라는 이 시기에 국력이 많이 쇠해졌다.

그런데 공자가 혹자와 나눈 대화를 보면 이전 관중의 평가들과 달리, 공적이 아닌 평소 행실에 대해 문제 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공자는 관중이 집을 세 채나 가지고 있고, 집안에서 일하는 사람을 너무 많이 둔 것을 보고 사치스럽다고 했다. 제후처럼 집을 만들고 제후나 쓸 수 있는 물건을 자기 집에 가져다 놓는 것은 예를 모르는 행동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논어』에 제 환공이 백씨라는 사람의 땅을 빼앗아 관중에게 주었음에도 백씨가 죽을 때까지 원망하지 않았다고 했고, 『사기』에도 관중이 사치스러웠음에도 그를 비난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했다. 공자가 예를 모른다고 했지만 관중이 주나라를 침략한 융적을 물리치고 주 양왕에게 갔을 때 양왕이 그를 상경(上卿)으로 대우하려고 하자 자기는 제후국의 하경이므로 그런 대접을 받을 수 없다고 하며 정중히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니까 관중의 흠이라면 좀 과하게 사치스러운 정도, 그것도 다른 사람들이 관중의 능력이라면 이 정도쯤이야 하고 눈감아 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공자는 왜 굳이 이를 문제 삼았으며, 사마천은 관중을 소인(小人)이라고까지 칭했을까?

 

능력주의의 함정

 

어쩌면 공자가 관중에 대해 ‘그릇이 작다’고 한 것은 그저 관중이 그의 업적에 어울리는 좀 더 훌륭한 사람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내비친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말이 『논어』의 여러 편 중에 「팔일(八佾)」편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면이 있다. 「팔일」편은 대체로 당시 대부들이 제후와 맞먹는 부를 누리고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비난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관중의 사치스러움이 단지 검소하지 않은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가 예를 모른다고 한 것 또한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공자가 생각하기에 그 당시 사회 혼란은 이렇게 예를 지키지 않는 것, 그러니까 각자 자기 분수를 지키지 않는데서 온다고 보았다. 거기에 덧붙여 공자가 살았던 시기가 춘추시대 말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공자가 관중의 사치스러움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 것은 이것이 가지고 올 파장을 미리 예견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관중은 공자보다 약 100년 앞서 살았던 인물이다. 그가 이렇게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최고의 재상 자리에 오른 것은 그의 탁월한 실무 능력 때문이었다. 포숙아는 관중을 제 환공에게 추천하면서 제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에 만족한다면 관중을 죽여도 좋으나 패자가 되고 싶다면 관중을 등용해야 한다고 했다. 이후 관중에 대한 평가는 당대보다 공자가 그의 업적을 칭하고 난 뒤, 오히려 공자 사후 전국시대에 이르러 높아졌다. 일례로 『한비자』를 보면 “지금 나라 안의 백성이 모두 정치를 논하며 상앙이나 관중의 책을 소장한 사람이 집집마다 있다(今境內之民皆言治 藏商管之法者家有之)”고 하였다. 아마도 관중의 탁월한 능력과 그에 의해 누리게 된 부(富)와 권력이 전국시대 지식인들이 바라는 바였기 때문일 것이다.

전국시대는 어떠한 배경 없이도 오로지 능력으로 출세할 수 있는 길이 많았던 시대였다. 제후국들은 7개로 통합되었고, 각 나라들은 누구보다 부강해지기 위해서 각지의 능력 있는 인물들을 끌어 모으기 바빴기 때문이다. 이 당시 소진이나 장의와 같은 이들은 평민출신으로 관중에 버금가는 부귀와 명성을 얻었다. 이렇듯 능력이 있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의 가장 큰 매력은 출신이나 사회적 배경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으로 부와 권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능력주의는 이렇게 누리게 된 부와 권력을 당연하게 여기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 공자가 주목한 것을 보면 능력으로 출세한 것 자체라기보다 능력이 있으면 자기가 누릴 수 있는 부보다 더 한 것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또 사람들이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인정하는 태도이다.

 

 

능력과 공정

 

얼마 전부터 우리 사회에 ‘공정(公正)’이 화두가 되었다. 특히 젊은 층에서 공정함은 무척 예민한 일이 되었다. 치열한 입시경쟁을 통과한 이들은 노력으로 얻은 보상은 당연한 것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같은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해 불공정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노력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혜택’으로 흔히 말하는 ‘부모 찬스’와 같은 것에 민감하다. 자기 노력으로 얻은 자격, 즉 능력으로 얻은 것이 아닌 것에 대해 부당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경쟁을 통해 능력을 인정받는 것을 공정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주의가 과연 공정한가를 생각해보자. 마이클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능력주의의 문제를 다룬다.

 

“능력주의 윤리의 핵심은 ‘통제 불가능한 요인에 근거한 보상이나 박탈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정한 재능의 소유(또는 결여)를 순전히 각자의 몫으로 봐도 될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재능 덕분에 상류층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그와 똑같이 노력했지만 시장이 반기는 재능은 없는 탓에 뒤떨어져 버린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공정하다는 착각』 52p

 

능력주의는 자기 능력으로 성공했다고 스스로 많은 재화를 취득하는 것을 당당하게 여기게 만들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우월감을 갖게 만든다. 그래서 과도하게 사치스러운 것에 당당하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샌델은 이러한 성공이 과연 능력만으로 혹은 노력만으로 가능한가를 묻는다. 성공은 노력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운이 좋아서 되는 경우도 있고, 그만큼 주변에 도와주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가능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관안열전」에 100여 년의 시간 차이가 나는 관중과 안영(안자)을 함께 배치했다. 그리고 그들의 공적이 아닌 그들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일들을 기록했다. 특히 관중에 대해 사마천은 그의 친구인 포숙아의 행동과 비교하여 당시에도 관중의 능력보다 관중의 사람됨을 알아본 포숙아를 칭찬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했다. 관중의 능력이 탁월한 것은 맞지만 포숙아가 없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관중은 없었을 것이다. 공자 규를 함께 모시던 소흘은 관중에게 자신은 죽어서 신하의 예를 다할 테니 살아서 신하의 예를 다하라고했다. 제 환공이 그의 능력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면……. 이렇듯 관중의 성공은 관중 혼자서 이루어 낸 것이 아니다.

공자는 관중의 능력에 대해서 문제 삼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마천은 관중을 ‘소인’이라고 칭하면서 그를 알아본 포숙아를 칭찬하고, 평생 가난하게 살았던 안영의 삶을 본받고 싶다고 했다. 능력만큼 대가를 받는 것은 공정한 것일까? 관중의 능력은 인정했지만 그 능력으로 누린 사치스러움에 대해 지적한 공자의 이 한 문장이 우리 시대 능력주의의 공정함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우리가 지향하는 공정함은 과연 올바른 것인가?

 

 

댓글 5
  • 2021-09-23 18:32

    몇년전 중국에 갔을 때 도심 중앙 벽마다 논어의 핵심 키워드들이 프린트돼 있어 놀랐다. 논어의 말들이 아직 유효한가? 그런데, 논어에 나올 법하지 않은 단어가 하나 유독 눈이 갔다. 공정...  당시는 공정을 내건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라 공정이 세계 유행인가 싶었다. 진달래샘 글을 읽으니, 공정이란 말은  사회주의건 자본주의건 능력주의의 횡포를 포장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 2021-09-24 20:08

      그러니까요.... 그러고 보니,  도대체 원래 처음부터 그런게 있기나 한 거였어 ?  라는 허무주의 (?) 에 빠질 수도 있을 거 같으네요...흠...

  • 2021-09-23 19:08

    관중은 오랑캐로부터 중국의 예를 지켜냈지만 스스로는 분수에 맞지않는 사치로 예를 벗어났다는 공자님의 평가는 다시 생각해볼만 한것 같습니다

    공적은 공적 잘못은 잘못

    우리가 잘 구별하지 못하고 하나로 다른 하나를 덮어버리는 잘못을 하는 일이 적지 않잖아요

    관중의 이야기를 능력주의 공정과 연결란 진달래샘의 글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명절연휴에 글 낳느라 애많이 쓰셨습니다 짝짝짝!!!

  • 2021-09-23 23:33

    관중에  관한  평가를 능력이라는 키워드로  해석한 이 글을 읽자니, 포숙이 알아본 것도 관중의 인간됨이 아니라  '능력'이 아니었을 까... 싶은 생각도 드네요.  

  • 2021-09-24 21:36

    능력과 공정, 한번 생각해볼 문제인것 같아요.

    그런데 관중의 사치함에 공정의 잣대를 들이댈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관중의 능력으로 중원을 안정시켜 공공의 이익에 기여한 바를 따지면 공정하지 못하다고 할수도 없을것 같네요. 도덕성의 문제라면 모를까. 

    갑자기 헷갈리네요. ㅋㅋ

    질문을 만드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논어 카메오 열전
애공(노나라 임금)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백성이 복종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합니다. 부정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정직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습니다.” (哀公問曰 何爲則民服 孔子對曰 擧直錯諸枉 則民服 擧枉錯諸直 則民不服)「위정,19」   공자 말년의 군주   공자가 14년의 주유를 끝내고 노(魯)나라에 돌아왔다. 이제 막 약관의 나이를 지나고 있던 애공(哀公)은 68세의 공자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의 옷차림은 유자(儒者)들의 복장인가요?” 공자가 대답했다. “제가 어려서 노나라에 있어서 소매통이 넓은 노나라의 옷을 입었습니다. 커서는 송나라에 있어서 송나라의 장보관을 썼습니다. 제가 듣기에 군자는 널리 여러 곳을 다니며 배우지만 고향의 옷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유자들이 복장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魯哀公問於孔子曰 夫子之服 其儒服與 」孔子對曰 丘少居魯 衣逢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 丘聞之也 君子之學也博 其服也鄉 丘不知儒服)   이는 『예기(禮記)』 「유행(儒行)」의 첫 장면으로 이후, 애공이 유자들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묻고 공자가 이에 답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애공과 공자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이런 글의 형식은 일종의 글쓰기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애공과 공자가 만나 실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주를 단 정현(鄭玄,127년~200년)은 이때를 공자가 주유를 막 끝내고 노나라에 귀국한 직후라고 보았다. 당시 공자는 성공한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명망 있는 인사였다. 그런데 공자를 만나자마자 애공이 처음 물은 것이 그의 옷차림이라니. 이를 통해 애공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나름 상상해 볼 여지가 있는 듯하다. 애공(哀公)의 이름은 장(將)이다. 혹 장(蔣)이라고도 한다. 정공(定公)의...
애공(노나라 임금)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백성이 복종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합니다. 부정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정직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습니다.” (哀公問曰 何爲則民服 孔子對曰 擧直錯諸枉 則民服 擧枉錯諸直 則民不服)「위정,19」   공자 말년의 군주   공자가 14년의 주유를 끝내고 노(魯)나라에 돌아왔다. 이제 막 약관의 나이를 지나고 있던 애공(哀公)은 68세의 공자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의 옷차림은 유자(儒者)들의 복장인가요?” 공자가 대답했다. “제가 어려서 노나라에 있어서 소매통이 넓은 노나라의 옷을 입었습니다. 커서는 송나라에 있어서 송나라의 장보관을 썼습니다. 제가 듣기에 군자는 널리 여러 곳을 다니며 배우지만 고향의 옷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유자들이 복장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魯哀公問於孔子曰 夫子之服 其儒服與 」孔子對曰 丘少居魯 衣逢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 丘聞之也 君子之學也博 其服也鄉 丘不知儒服)   이는 『예기(禮記)』 「유행(儒行)」의 첫 장면으로 이후, 애공이 유자들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묻고 공자가 이에 답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애공과 공자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이런 글의 형식은 일종의 글쓰기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애공과 공자가 만나 실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주를 단 정현(鄭玄,127년~200년)은 이때를 공자가 주유를 막 끝내고 노나라에 귀국한 직후라고 보았다. 당시 공자는 성공한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명망 있는 인사였다. 그런데 공자를 만나자마자 애공이 처음 물은 것이 그의 옷차림이라니. 이를 통해 애공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나름 상상해 볼 여지가 있는 듯하다. 애공(哀公)의 이름은 장(將)이다. 혹 장(蔣)이라고도 한다. 정공(定公)의...
진달래
2024.02.08 | 조회 280
논어 카메오 열전
제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 제경공이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진실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아들이 아들답지 못하다면, 비록 곡식이 있더라도 제가 그것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齊景公問政於孔子 孔子對曰 君君 臣臣 父父 子子 公曰 善哉 信如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雖有粟 吾得而食諸) 「안연,11」   공자가 만난 제 경공   제나라 26대 군주인 경공(景公/재위 기원전 548~기원전490)은 대부인 최저에게 시해된 장공(莊公)의 이복동생으로 장공이 시해된 후 최저에 의해 옹립되었다. 최저의 권력은 끝이 없을 것 같았지만 얼마 뒤 그는 그의 측근인 경봉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경봉 역시 얼마 못가 그의 수하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 뒤에 제나라의 권력은 네 집안, 국(國)씨, 고(高)씨, 포(鮑)씨, 전(田)씨가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안정되게 되었다. 공자와 같은 시기를 살았던 제 경공은 공자와 세 번 정도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공자가 30대 초반일 때 노나라에 온 제 경공과 안자를 만났다고 한다. 다음에는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로 가 경공을 만났다. 마지막으로 50대에 이르러 대사구의 직책을 맡게 된 공자가 제 경공과 노 정공의 회담을 주관하면서 만나게 되었다. 『논어』에도 제 경공에 대한 기록이 세 차례 보인다. 그 중 두 개가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에 갔을 때, 경공을 만나는 장면이다. 공자를 만난 제 경공은 그에게 ‘정치’에 대해 물어본다. 이 때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제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 제경공이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진실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아들이 아들답지 못하다면, 비록 곡식이 있더라도 제가 그것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齊景公問政於孔子 孔子對曰 君君 臣臣 父父 子子 公曰 善哉 信如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雖有粟 吾得而食諸) 「안연,11」   공자가 만난 제 경공   제나라 26대 군주인 경공(景公/재위 기원전 548~기원전490)은 대부인 최저에게 시해된 장공(莊公)의 이복동생으로 장공이 시해된 후 최저에 의해 옹립되었다. 최저의 권력은 끝이 없을 것 같았지만 얼마 뒤 그는 그의 측근인 경봉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경봉 역시 얼마 못가 그의 수하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 뒤에 제나라의 권력은 네 집안, 국(國)씨, 고(高)씨, 포(鮑)씨, 전(田)씨가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안정되게 되었다. 공자와 같은 시기를 살았던 제 경공은 공자와 세 번 정도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공자가 30대 초반일 때 노나라에 온 제 경공과 안자를 만났다고 한다. 다음에는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로 가 경공을 만났다. 마지막으로 50대에 이르러 대사구의 직책을 맡게 된 공자가 제 경공과 노 정공의 회담을 주관하면서 만나게 되었다. 『논어』에도 제 경공에 대한 기록이 세 차례 보인다. 그 중 두 개가 30대 중반의 공자가 제나라에 갔을 때, 경공을 만나는 장면이다. 공자를 만난 제 경공은 그에게 ‘정치’에 대해 물어본다. 이 때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진달래
2023.12.05 | 조회 284
논어 카메오 열전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장문중(노나라 대부)이 큰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기둥머리에는 산을 조각하고 동자기둥에는 마름풀을 그렸으니,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子曰  臧文仲居蔡  山節藻梲  何如其知也) 『논어』「공야장,17」     『논어(論語)』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들은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다. 더불어 당대 혹은 선대의 유명한 사람들도 많이 언급 되는데 생각보다 노(魯)나라 사람들이 잘 나오지 않는다. 공자 당대에 권력자였던 삼환(三桓)을 제외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노나라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논어』에 두 번 언급되는 장문중은 노나라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사람인 듯하다. 하지만 『춘추좌전(春秋左傳)』을 읽기 전까지 장문중이 노나라의 대부였다는 것 이외에 거의 아는 것도 없었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관심도 없었다. 게다가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장식을 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썩지 않는 세 가지, 삼불후(三不朽)   <불후의 명곡>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여러 가수들이 다양한 장르의 명곡을 재해석하여 부르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서 불후(不朽)는 ‘썩지 않는’이라는 뜻으로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불후라는 말은 『춘추좌전』에서 유래했는데 노나라 양공(襄公) 24년, 숙손표가 진(晉)나라의 범선자와 나눈 대화에 등장한다. 범선자가 사람이 죽어도 썩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숙손표가 덕을 세우는 것(立德)과 공을 세우는 것(立功), 말을 세우는 것(立言) 세 가지가 오래 되어도 폐해지지 않으니 불후라고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후대에는 이 세 가지를 ‘삼불후(三不朽)’라고 칭하였다. 이 때 숙손표는 불후의 예로 장문중을 들었다.   “우리 노나라 선대부 중에 장문중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가 남긴...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장문중(노나라 대부)이 큰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기둥머리에는 산을 조각하고 동자기둥에는 마름풀을 그렸으니,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子曰  臧文仲居蔡  山節藻梲  何如其知也) 『논어』「공야장,17」     『논어(論語)』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들은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다. 더불어 당대 혹은 선대의 유명한 사람들도 많이 언급 되는데 생각보다 노(魯)나라 사람들이 잘 나오지 않는다. 공자 당대에 권력자였던 삼환(三桓)을 제외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노나라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논어』에 두 번 언급되는 장문중은 노나라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사람인 듯하다. 하지만 『춘추좌전(春秋左傳)』을 읽기 전까지 장문중이 노나라의 대부였다는 것 이외에 거의 아는 것도 없었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관심도 없었다. 게다가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장식을 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썩지 않는 세 가지, 삼불후(三不朽)   <불후의 명곡>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여러 가수들이 다양한 장르의 명곡을 재해석하여 부르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서 불후(不朽)는 ‘썩지 않는’이라는 뜻으로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불후라는 말은 『춘추좌전』에서 유래했는데 노나라 양공(襄公) 24년, 숙손표가 진(晉)나라의 범선자와 나눈 대화에 등장한다. 범선자가 사람이 죽어도 썩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숙손표가 덕을 세우는 것(立德)과 공을 세우는 것(立功), 말을 세우는 것(立言) 세 가지가 오래 되어도 폐해지지 않으니 불후라고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후대에는 이 세 가지를 ‘삼불후(三不朽)’라고 칭하였다. 이 때 숙손표는 불후의 예로 장문중을 들었다.   “우리 노나라 선대부 중에 장문중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가 남긴...
진달래
2023.10.01 | 조회 408
논어 카메오 열전
진성자(제나라 대부 진항)가 간공을 시해했다. 공자께서 목욕재계하고 조정에 나가 애공에게 알렸다. “진항이 그의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그를 토벌하십시오.” 애공이 말했다. “세 대부들에게 말하시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임금께서는 세 대부들에게 말하라 하시는구나.” 공자께서 세 대부들에게 가서 말했으나 모두 안 된다고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陳成子弑簡公 孔子沐浴而朝 告於哀公曰 陳恆弑其君 請討之 公曰 告夫三子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君曰 告夫三子者 之三子告 不可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논어> 헌문-22   내가 동양 고전을 처음 읽었을 때 겪은 어려움 중 하나는 한 사람이 여러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진성자(陳成子)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는데, 여기는 진성자라고 되어 있지만 대체로 전성자(田成子)라고 하고, 진항(陳恒), 전항(田恒), 혹 전상(田常)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성자(成子)는 그의 시호이며, 이름이 항(恒)인데 『사기』에는 상(常)으로도 되어 있다. 진성자 혹은 전성자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이들이 진(陳)나라에서 살다가 제(齊)나라로 이주하여 성을 전(田)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강(姜)씨의 제나라에서 전(田)씨의 제나라로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 「세가(世家)」는 춘추전국시대 제후국들의 역사를 쓰고 있다. 그러니까 노나라의 역사는 「노세가」에 진나라는 「진세가」를 살펴보면 된다. 그런데 제나라의 경우 「제세가」로 되어 있지 않고 「제태공세가」와 「전경중완세가」로 나누어져 있다. 제나라 군주의 자리가 강태공의 강씨에서 바로 진성자, 아니 전성자의 전씨로 바뀌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陳)나라에서 처음 제나라로 이주한 이는 진완(陳完)이다. 완은 원래 진나라의 공족(公族)이었다. 진나라는 순임금의 후예들에게 봉해...
진성자(제나라 대부 진항)가 간공을 시해했다. 공자께서 목욕재계하고 조정에 나가 애공에게 알렸다. “진항이 그의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그를 토벌하십시오.” 애공이 말했다. “세 대부들에게 말하시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임금께서는 세 대부들에게 말하라 하시는구나.” 공자께서 세 대부들에게 가서 말했으나 모두 안 된다고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陳成子弑簡公 孔子沐浴而朝 告於哀公曰 陳恆弑其君 請討之 公曰 告夫三子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君曰 告夫三子者 之三子告 不可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논어> 헌문-22   내가 동양 고전을 처음 읽었을 때 겪은 어려움 중 하나는 한 사람이 여러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진성자(陳成子)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는데, 여기는 진성자라고 되어 있지만 대체로 전성자(田成子)라고 하고, 진항(陳恒), 전항(田恒), 혹 전상(田常)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성자(成子)는 그의 시호이며, 이름이 항(恒)인데 『사기』에는 상(常)으로도 되어 있다. 진성자 혹은 전성자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이들이 진(陳)나라에서 살다가 제(齊)나라로 이주하여 성을 전(田)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강(姜)씨의 제나라에서 전(田)씨의 제나라로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 「세가(世家)」는 춘추전국시대 제후국들의 역사를 쓰고 있다. 그러니까 노나라의 역사는 「노세가」에 진나라는 「진세가」를 살펴보면 된다. 그런데 제나라의 경우 「제세가」로 되어 있지 않고 「제태공세가」와 「전경중완세가」로 나누어져 있다. 제나라 군주의 자리가 강태공의 강씨에서 바로 진성자, 아니 전성자의 전씨로 바뀌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陳)나라에서 처음 제나라로 이주한 이는 진완(陳完)이다. 완은 원래 진나라의 공족(公族)이었다. 진나라는 순임금의 후예들에게 봉해...
진달래
2023.07.11 | 조회 294
논어 카메오 열전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심하도다, 나의 쇠함이여! 오래되었구나, 내 다시 꿈속에서 주공을 뵙지 못한 것이.”(子曰 甚矣吾衰也 久矣吾不復夢見周公) 『논어』「술이,5」   동양의 문화주의는 흔히 공자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공자는 이 문화를 주공(周公)으로부터 이었다고 했다. 공자는 늘 주공을 흠모했다고 전해지는 데, 이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논어(論語)』에 나오는 이 문장이 아닌가 싶다. 공자는 젊었을 때부터 주공의 도(道)를 따르고 배우려고 힘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공자는 꿈에서 주공을 뵐 수 있었나 보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자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꾸는 횟수가 점점 줄었다. 위 문장은 공자가 이 때의 심정을 토로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논어집주』의 주(注)에는 주자와 이천의 주가 함께 있는데, 두 글이 비슷한데 다른 것이 흥미롭다. 주자는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꿀 수 없게 된 것이 늙어서 주공의 도를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에 반해 이천은 마음은 늙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나 도를 행하는 것은 몸이기 때문에 공자가 늙어서 도를 행하는 것도 힘들고 주공에 대한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꿈에서까지 주공을 생각한 공자의 이러한 모습은 후대에 『여씨춘추』와 같은 책에 이르면 공자가 꿈에서 주공을 직접 만나 도를 배웠다는 이야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주공은 어떤 사람일까   주공의 이름은 단(旦)이다.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의 동생이다. 무왕이 은(殷)나라를 정벌할 때의 공신(功臣)이다. 『사기』 「주본기」에 의하면 무왕이 즉위한 후 태공망(강태공)을 사(師)로 삼고 주공을 보(輔)로 삼았다고 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심하도다, 나의 쇠함이여! 오래되었구나, 내 다시 꿈속에서 주공을 뵙지 못한 것이.”(子曰 甚矣吾衰也 久矣吾不復夢見周公) 『논어』「술이,5」   동양의 문화주의는 흔히 공자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공자는 이 문화를 주공(周公)으로부터 이었다고 했다. 공자는 늘 주공을 흠모했다고 전해지는 데, 이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논어(論語)』에 나오는 이 문장이 아닌가 싶다. 공자는 젊었을 때부터 주공의 도(道)를 따르고 배우려고 힘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공자는 꿈에서 주공을 뵐 수 있었나 보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자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꾸는 횟수가 점점 줄었다. 위 문장은 공자가 이 때의 심정을 토로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논어집주』의 주(注)에는 주자와 이천의 주가 함께 있는데, 두 글이 비슷한데 다른 것이 흥미롭다. 주자는 공자가 주공에 대한 꿈을 꿀 수 없게 된 것이 늙어서 주공의 도를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에 반해 이천은 마음은 늙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나 도를 행하는 것은 몸이기 때문에 공자가 늙어서 도를 행하는 것도 힘들고 주공에 대한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꿈에서까지 주공을 생각한 공자의 이러한 모습은 후대에 『여씨춘추』와 같은 책에 이르면 공자가 꿈에서 주공을 직접 만나 도를 배웠다는 이야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주공은 어떤 사람일까   주공의 이름은 단(旦)이다.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의 동생이다. 무왕이 은(殷)나라를 정벌할 때의 공신(功臣)이다. 『사기』 「주본기」에 의하면 무왕이 즉위한 후 태공망(강태공)을 사(師)로 삼고 주공을 보(輔)로 삼았다고 한다....
진달래
2023.04.26 | 조회 359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