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회> 명상의 신비

요요
2024-04-14 09:04
237

 

매일 아침 명상을 한다. 5년이 좀 넘게 계속해 온 아침 의례다. 어쩌다 며칠 명상을 놓치게 되면 명상시간을 확보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진다. 마음을 집중하여 들숨과 날숨을 온전히 알아차릴 때 누리는 고요와 평화가 그립기 때문이다. 그럴 때 알게 된다. 일상에서 그럭저럭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힘이 아니라 매일의 명상 덕분이었다는 것을. 내게 명상은 마음을 돌보는 시간이면서 마음에 좋은 에너지를 충전하는 귀한 시간이다.

 

호흡관찰

 

나는 붓다가 가르친 ‘호흡 수행(아나빠나사띠)’과 ‘사념처 수행(사띠파타나)’에 의지해서 명상을 하고 있다. 경전은 이렇게 명상을 시작하라고 한다.

 

여기 숲으로 가거나 나무의 뿌리로 가거나 빈집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몸을 똑바로 세우고 면전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마음챙겨 숨을 들이쉬고 마음챙겨 숨을 내쉰다.

 

명상을 하기 위해서는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가부좌 자세로 앉아 알아차림을 확립하여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쉰다. 조용한 곳으로 가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번다한 자극으로부터 물러나 몸과 마음을 잘 관찰할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조용한 곳에서 명상할 때 우리는 마음이 얼마나 산만하고 시끄러운지 더 잘 알 수 있다. 산만함을 가라앉히는 방법은 산만함과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산만함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번뇌의 대치법도 다르지 않다. 어떤 환경에도 구애받지 않고 마음을 고요히 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 정도 내공을 갖추기 전까지는 조용한 곳에서 명상을 하며 힘을 기르는 수밖에 없다. 기본자세는 가부좌이지만 몸을 안정시킬 수 있는 자세면 된다.

 

길게 숨을 들이쉴 때는 길게 숨을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길게 숨을 내쉴 때는 길게 숨을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짧게 숨을 들이쉴 때는 짧게 숨을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짧게 숨을 내쉴 때는 짧게 숨을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호흡에 대한 관찰과 몸에 대한 관찰의 도입부다. 호흡 관찰은 명상수행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호흡은 생명을 마치는 순간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는 벗이다. 호흡은 언제 어디서나 관찰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또 대개의 경우 호흡은 우리가 욕망을 일으키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집착 없이 관찰의 대상으로 삼기에 좋다. 호흡은 몸과 마음의 상태를 알 수 있는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몸과 마음이 흥분되면 호흡도 거칠어지고, 몸과 마음이 안정되면 호흡도 고요해진다. 호흡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거친 호흡이 가라앉고 점점 미세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호흡은 매번 다르다. 단 한 번도 같은 호흡은 없다. 그것을 직접 알고 보면 기쁨이 일어난다.

 

 

 

몸에 대한 관찰

 

온몸을 체험하면서 숨을 들이쉬겠다고 훈련하고, 온몸을 체험하면서 숨을 내쉬겠다고 훈련한다. 몸의 작용을 고요하게 하면서 숨을 내쉬겠다고 훈련하고, 몸의 작용을 고요하게 하면서 숨을 내쉬겠다고 훈련한다.

 

명상스승들에 따라 몸을 관찰하는 구체적인 지도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호흡을 분명히 관찰할 수 있는 곳, 코끝이나 가슴, 배 등에 주의를 보낸다. 그렇게 들숨 날숨을 지켜보는 것을 전경으로 삼으면서 몸에서 어떤 감각이 일어날 때 몸을 관찰하라고 가르치는 스승이 있다. 몸에서 통증이나 가려움, 열감이나 떨림 등이 일어나거나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에 주의를 보내고, 분명히 알아차린 뒤에는 몸은 배경으로 두고 다시 들숨 날숨의 관찰로 돌아가는 방법이다. 이와 좀 다르게 호흡을 배경으로 하고 몸을 관찰하는 것을 전경에 두라고 가르치는 스승도 있다. 머리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스캔하면서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에 주의를 기울이는 방법이다. 의식을 몸의 각 부분으로 보내면서 감각을 알아차리는 것이 처음에는 쉽지 않다. 좀 힘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계속 주의를 기울이면 알아차림의 힘이 커지면서 평소 알지 못했던 신체를 경험하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감각을 또렷이 느낄 수 있다. 어떤 방법으로 관찰하든 몸에 대한 알아차림이 끊어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하나의 대상에만 마음을 고정시키지 않고,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명상을 위빠사나라고 한다. 위빠사나 명상은 관찰하는 힘, 통찰력을 기르는 수행이다.

 

관찰을 방해하는 요소 중 그 첫 번째가 잡음처럼 일어나는 생각들이다. 명상할 때 일어나는 생각은 우리가 의식을 집중해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어떤 주제에 마음을 기울일 때의 생각과는 다르다. 생각하려 하지 않는데 생각이 끝없이 떠오른다. 그래서 망상은 노이즈다. 망상은 대부분 생각의 찌꺼기, 감정의 찌꺼기로 구성된다. 마치 원숭이가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쉼 없이 옮겨다니는 것처럼 맥락 없이 이어진다. 이런 생각들은 억지로 멈추려 한다고 멈추어지지 않는다. 방법은 하나다. 그것이 일어났음을 분명히 알고 보면 사라진다. 명상할 때의 관건은 몸과 마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이다.

 

                                  

맛지마니까야 안에는 호흡수행, 사념처수행, 몸에 대한 마음챙김 등 수행에 대한 경전이 들어 있다.

 

 

희열과 행복

 

희열을 경험하면서 숨을 들이쉬겠다고 훈련하고, 희열을 경험하면서 숨을 내쉬겠다고 훈련한다. 행복을 경험하면서 숨을 들이쉬겠다고 훈련하고, 행복을 경험하면서 숨을 내쉬겠다고 훈련한다.

 

망상이 사라지고 고요해져서 집중과 알아차림이 강해지면 희열과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 집중과 알아차림이 곧 희열과 행복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희열과 행복을 경험할 때도 호흡을 관찰할 때처럼 일어난 현상 그대로 분명히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희열은 ‘좋다, 싫다’ 혹은 ‘기쁨, 슬픔’처럼 대립항을 갖는 감정이나 대상을 갖는 느낌이 아니다. 집중과 알아차림이 고양되면서 저절로 생겨나는 청정한 즐거움이고, 지금 여기에서 누리는 대상 없는 기쁨이다.

 

앉아서 호흡을 관찰하는 것만으로 아직 초보 수행자에 불과한 나에게 이런 경험이 가능하다는 것이 참 신비롭다. 알아차림을 통해 집중이 생기고 마음이 고요해진다. 또 알아차림을 통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꿰뚫어 아는 통찰의 힘이 생겨난다. 명상이란 집중을 통해서 고요함을, 관찰을 통해서 통찰과 지혜를 얻는 수행이다. 집중과 통찰은 명상을 이끌고 가는 두 날개이면서, 또 우리를 고요와 평화로 안내하는 명상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런데 명상을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 명상의 맛이다. 직접 경험하는 것 말고는 명상하는 기쁨을 알려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 역시 명상의 또 다른 신비다.

 

 

 

 

 

 

 

 

요요

문탁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있다. 

앞으로 10년은 불교공부를 계속 함께 할 친구들을 찾고 있다. 

명상적 삶, 일상의 영성, 공동체와 영성, 나이듦과 영성이  화두다

댓글 8
  • 2024-04-14 09:20

    <바가와드기타 강의> 읽을 때 '희열' 이란 단어가 잘 이해가 안 되었는데, 샘의 명상 글에서 힌트를 얻었네요~ 잘 읽었습니다 ~

  • 2024-04-15 08:16

    명상의 맛을 느껴보고 싶어지네요오 ~

  • 2024-04-15 08:46

    음... 저도....점점.....가부좌 명상을 해볼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명상동아리라도 들어가볼까, 싶은 마음도.
    아, 큰일났네...ㅋㅋㅋㅋ

  • 2024-04-15 11:55

    명상이 아니어도 좋은 수행법은 많을 것 같아요. 수행은 삶의 방향성을 잃지 않고 꾸준히 그 길을 가기 위한 것이니 무엇이라도 수행 삼아 '한다' 가 그 핵심이겠지요.
    명상의 맛은 오래 묵은 장맛과 같다고 하면 다들 웃겠지요?

  • 2024-04-15 12:30

    집중에서 오는 고요함이 참 좋다는걸 알게해주신 요요샘 감사합니다~~^^

  • 2024-04-15 13:18

    명상 방석에 앉는게 왜 이렇게 힘들까요? 앉는 생각만 하면 몸이 근질근질해져요.. 뭔가 요즘 저의 마음의 상태가 안정되지 않은 걸까요? 언젠가 저도 선생님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날이 오길요!

  • 2024-04-17 09:17

    생각과 감정의 찌꺼기에 허덕이고있어서 ㅜㅜㅜ
    저도 명상해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 2024-05-02 16:09

    호흡이 매번 다르다는 말 다시금 새깁니다. 들숨과 날숨, 호흡의 출렁임을 알아차리기!
    (요즘은 마감이 잦아서 종종 호흡이 가쁘지만... 가쁘면 가쁘구나 알아차리기...)

일상명상
덕밍 아웃, 그 후   지난 글에서 호기롭게 덕밍 아웃을 했지만 명상에 빠져든 이유를 명확하게 알았던 것은 아니다. 명상에 빠진 것은 결과지 이유는 아니니까. 하여 명상이 처음부터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친구와 같다고 했지만 정작 누군가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면 제대로 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그냥 좋으니까 좋았다는 식의 동어 반복을 되풀이하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언가에 꽂힐 때 그 이유를 다 알아서는 아닌 것 같다. 우연히 어떤 것에 마음이 불꽃처럼 호응할 때 그저 속절없이 빠져드는 게 아닐까. 처음엔 빠져든 이유를 잘 모르는 터라 경우에 따라 ‘입덕 부정기’를 겪기도 하면서 말이다. 대개는 빠져든 다음에야 그 이유를, 스스로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를 발견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이유 덕분에 다시 그 대상을 더 깊이 애정하게 되는, 다이내믹한 순환이야말로 덕질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지.     나도 명상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른바 덕질의 묘미를 맛보고 있다. 명상이 뭔지도 모르고 매달리듯 빠져들었다가 이제야 차츰 명상이 뭔지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명상을 하기 전까지는 그렇게나 많은 쓸데없는 생각들에, 그렇거나 많이 휘둘리고 있는 줄 몰랐다. 그 때문에 명상을 통해 처음 경험했던 침묵과 평온이 그토록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는지도. 만약 명상이 아니었다면 일 년 365일, 꺼지지 않는 텔레비전처럼 소란스런 정신적 수다 때문에 괴롭다는 걸 영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그 순전한 무지에서 벗어난 순간, 마치 세상의 비밀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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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
2024.05.09 | 조회 134
일상명상
  매일 아침 명상을 한다. 5년이 좀 넘게 계속해 온 아침 의례다. 어쩌다 며칠 명상을 놓치게 되면 명상시간을 확보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진다. 마음을 집중하여 들숨과 날숨을 온전히 알아차릴 때 누리는 고요와 평화가 그립기 때문이다. 그럴 때 알게 된다. 일상에서 그럭저럭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힘이 아니라 매일의 명상 덕분이었다는 것을. 내게 명상은 마음을 돌보는 시간이면서 마음에 좋은 에너지를 충전하는 귀한 시간이다.   호흡관찰   나는 붓다가 가르친 ‘호흡 수행(아나빠나사띠)’과 ‘사념처 수행(사띠파타나)’에 의지해서 명상을 하고 있다. 경전은 이렇게 명상을 시작하라고 한다.   여기 숲으로 가거나 나무의 뿌리로 가거나 빈집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몸을 똑바로 세우고 면전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마음챙겨 숨을 들이쉬고 마음챙겨 숨을 내쉰다.   명상을 하기 위해서는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가부좌 자세로 앉아 알아차림을 확립하여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쉰다. 조용한 곳으로 가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번다한 자극으로부터 물러나 몸과 마음을 잘 관찰할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조용한 곳에서 명상할 때 우리는 마음이 얼마나 산만하고 시끄러운지 더 잘 알 수 있다. 산만함을 가라앉히는 방법은 산만함과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산만함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번뇌의 대치법도 다르지 않다. 어떤 환경에도 구애받지 않고 마음을 고요히 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 정도 내공을 갖추기 전까지는 조용한 곳에서 명상을 하며 힘을 기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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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2024.04.14 | 조회 237
일상명상
다시 돌아온 ‘명상의 시간’   국민학교 저학년 때였을 것이다. 대략 1980년대 초반.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위치한 우신국민학교는 당시 한 교실에 60명 이상의 학생들이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나고 있었다. 오전형 콩나물도 있고 오후형 콩나물도 있던 시절. 몇 교시였을까? 수업을 알리는 벨이 울리고 교실에는 "끼이이이이~ 끼~이이이~" 하는 바이올린 선율이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곡명은 '타이슨의 명상곡' 또는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로 기억하고 있는데 아닐 수도 있다. 이어 "명상의 시간~"이라는 우아한 멘트가 전교에 울려 퍼지면 우리는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명상의 시간'을 왜 갖는 건지 어떻게 명상하는 건지 아무도 알려준 적 없었지만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 같다. ‘명상의 시간’은 학교 전체가 잠시 고요해지는 시간이었을 뿐이다.   "끼이이이~이~"하던 그 바이올린 연주곡은 중학교를 지나 고등학교까지 극기훈련, 수학여행, 임원 수련회 등에도 종종 따라다녔다. ‘명상의 시간’은 손 안 대고 아이들을 차분하게 만들기 위한 학교 측의 전략이었을까? 공식적인 침묵의 시간 같았던 ‘명상의 시간’에 이따금 소리 내어 우는 친구들도 있었으니 어쩌면 누군가에겐 반성의 시간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의문 가득했던 '명상 시간' 아니 추억 속의 '명상의 시간'. 오랫동안 잊고 있던 ‘명상의 시간’이 세월을 훌쩍 지나 어느 날 내게 다시 돌아왔다.             십 분을 견디기 힘들었다.   명상 방석 위에 앉아 반가부좌를 한다. 방석이 좋긴 하지만 잠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명상을 하거나 여행지에서 명상을 하는 경우엔 이불을 접어 엉덩이에 받치고...
다시 돌아온 ‘명상의 시간’   국민학교 저학년 때였을 것이다. 대략 1980년대 초반.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위치한 우신국민학교는 당시 한 교실에 60명 이상의 학생들이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나고 있었다. 오전형 콩나물도 있고 오후형 콩나물도 있던 시절. 몇 교시였을까? 수업을 알리는 벨이 울리고 교실에는 "끼이이이이~ 끼~이이이~" 하는 바이올린 선율이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곡명은 '타이슨의 명상곡' 또는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로 기억하고 있는데 아닐 수도 있다. 이어 "명상의 시간~"이라는 우아한 멘트가 전교에 울려 퍼지면 우리는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명상의 시간'을 왜 갖는 건지 어떻게 명상하는 건지 아무도 알려준 적 없었지만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 같다. ‘명상의 시간’은 학교 전체가 잠시 고요해지는 시간이었을 뿐이다.   "끼이이이~이~"하던 그 바이올린 연주곡은 중학교를 지나 고등학교까지 극기훈련, 수학여행, 임원 수련회 등에도 종종 따라다녔다. ‘명상의 시간’은 손 안 대고 아이들을 차분하게 만들기 위한 학교 측의 전략이었을까? 공식적인 침묵의 시간 같았던 ‘명상의 시간’에 이따금 소리 내어 우는 친구들도 있었으니 어쩌면 누군가에겐 반성의 시간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의문 가득했던 '명상 시간' 아니 추억 속의 '명상의 시간'. 오랫동안 잊고 있던 ‘명상의 시간’이 세월을 훌쩍 지나 어느 날 내게 다시 돌아왔다.             십 분을 견디기 힘들었다.   명상 방석 위에 앉아 반가부좌를 한다. 방석이 좋긴 하지만 잠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명상을 하거나 여행지에서 명상을 하는 경우엔 이불을 접어 엉덩이에 받치고...
도라지
2024.03.10 | 조회 331
일상명상
오영
2024.02.11 | 조회 392
일상명상
          요요 문탁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있다.  앞으로 10년은 불교공부를 계속 함께 할 친구들을 찾고 있다.  명상적 삶, 일상의 영성, 공동체와 영성, 나이듦과 영성이  화두다     <일상 명상> 연재를 시작하며   작년 1월에 ‘요요의 월간명상’을 시작했는데, 6개월을 쉬고,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셋이다. 지난해에 불교 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친구들과 번갈아 가며 새로 리뉴얼한 <일상명상>을 쓰기로 했기 때문이다. ‘요요의 월간명상’ 3회차 글에서 나는 문탁에서 함께 명상하는 친구들을 만들고 싶다는 바램을 밝혔다. 그런데 정말로 명상 친구가 만들어졌다.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이 코너는 이제 요요, 오영, 도라지, 세 사람이 한 달에 한 번씩 돌아가며 쓴다. 아마 3인 3색의 명상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이 글은 우리가 어떻게 명상 친구가 되었는지를 돌아보는 이야기이다.     사띠 수행을 공부하다   지난해 가을 불교학교에서 우리가 공부한 것은 사띠(sati) 수행이다. 팔정도 중 여섯 번째가 정념(正念)인데, 정념은 ‘바른 사띠’를 말한다. 그만큼 불교 수행에서 사띠가 중요한 개념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띠에는 ‘기억한다’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을 살핀다’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영어로는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로 옮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순수한 주의집중(bare attention), 알아차림(awareness, noting) 등을 쓰기도 한다.   우리말 번역어도 통일되어 있지 않다. 최초로 니까야를 한글로 완역한 전재성님은 사띠를 ‘새김’이라고 번역했다. 마음에 새긴다고 할 때의 새김이다. 새김은 사띠의 첫 번째 의미인 ‘기억한다’, ‘잊지 않는다’의 뉘앙스가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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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2024.01.10 | 조회 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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