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회> 명상에 빠지다

오영
2024-02-11 05:22
392

                                                                                                                                                                                                                                

덕밍아웃

 

명상에 빠졌다고 공개적으로 고백하게 될 줄은 몰랐다. 무엇이든 이렇게 대놓고 덕심을 드러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혼자 은밀하게 빠졌다가 시들해져서는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슬그머니 발을 빼곤 했다. 무언가를 오래 꾸준히 좋아하기에는 열정이나 에너지가 늘 부족했다. 그런 내가 명상에 대한 덕심을 표출하며 더 많은 친구들을 명상의 세계로 초대하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우연 혹은 필연

 

문탁에서 주로 서양 철학을 공부하는 동안 불교는 관심 밖이었다. 명상도 요가를 마무리하는 한 과정이나 수면에 도움이 된다는 요가 니드라 정도를 해봤을 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 ‘불교와 명상’이 어느 순간 덕질의 대상이 될 줄이야. 그것도 이 둘이 별개가 아닌,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완전체로 말이다.

 

처음 불교 명상을 만난 날의 기억이 2021년 1월 4일자 일기에 남아 있다. 바로 그 전날 문탁네트워크의 마지막 운영회의가 있었다. 그날, 2 년 여에 걸친 분리 논의가 마침내 종결됐다. 몇 달간 그 최종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 난 그 논의 과정에 집중하지 못한 채 이 모든 것으로부터 빨리 벗어 나고만 싶었다. 다들 공동체의 분리를 새로운 10년을 준비하는 전환점이자 출발점으로 삼아 애쓰고 있는데 난 여전히 쿠키무이 사업을 정리한 후 그 감정적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그 모든 것이 끝났을 때는 바라던 후련함보다는 상실감과 허탈감이 더해져서 당혹스러웠다.

 

논의가 이어지는 동안 때때로 템플스테이를 떠올리곤 했다. 고즈넉한 산사에 머무는 동안 저절로 머릿속은 말끔히 비워지고 헛헛한 마음은 채워질 것만 같았다. 그날도 템플스테이를 검색하고 있었는데 문득 ‘초기불교 명상법’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땐 배경 지식이 없어서 ‘초기 불교’와 ‘명상법’, 이 둘의 조합이 무척 낯설고 신기하기만 했다. 초기 불교가 어떤 것인지, 기존 불교와는 어떻게 다른지, 초기 불교의 명상은 선(禪)과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궁금했다. 호기심에 이끌려 둘러보다가 한 법문 영상에 딱 꽂히고 말았다.

 

그 법문에 따르면 아무리 멋진 여행지에, 좋은 경치라도 종일 돌아다니다 보면 지치기 마련이다. 하물며 복잡한 거리를 이리저리 쉬지 않고 돌아다닌다면 당연히 지치고 괴롭지 않겠는가. 근데 왜 그렇게 돌아다니는 걸까? 그건 원하는 것을 잡으려 하거나 혹은 그 반대로 싫은 것을 피해 도망가기 때문이다.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무료한 느낌에서 벗어나 더 강한 느낌을 찾느라 그러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 자신이 그러고 있는 줄도, 그래서 지치고 힘든 줄도 모르기 때문에 멈추고 쉴 줄도 모른다. 그래서 더 괴롭다. 그 순간 양동이 가득 얼음 물이, 머리 위로 쏟아진 것 같았다. 아, 지금 내가 그러고 있구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쿠키무이 사업이 끝난 후 일상은 그 어느 때보다 한가했지만 매일 매일 마라톤을 뛰는 것처럼 지치고 힘들었다. 그건 지금 여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미 지난 일들을 끊임없이 복기하며 시시비비를 따지는 마음 때문이었다. 사업 정리 과정에서 뜻대로 되지 않았던 여러 상황들에 대한 원망과 자책, 그리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뒤엉켜 생겨난 망상들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런 나를 직시하는 순간, 캄캄한 어둠 속에서 EXIT→이라는 선명한 불빛을 발견한 것 같았다. 숨통이 좀 트였다. 그것 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명상이 주는 선물

 

드디어 아무리 애를 써도 찾을 수 없던 출구를 찾았다는 희망, 기쁨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했다. 이제 시작일 뿐 종착지가 아니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명상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15분, 20분 그저 눈을 감고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때 명상은 함께 있으면 안심이 되고 편안한 좋은 친구와도 같았다. 하지만 어렴풋하게 나마 가야 할 방향은 알지만 먼 길을 가는 데 필요한 지도도, 나침반도, 변변한 장비도 갖추지 못한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가이드도, 동료도 없으니 종종 길을 잃곤 했다.

 

 

시간이 흐르고 2023년 불교 학교에서 초기 불교와 명상에 대해 공부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선뜻 용기 내기가 어려웠다. 시간도, 돈도 문제가 되었다. 그러다 딱 일 년만 무진장*의 도움을 받아 공부하기로 했다. 그 다음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공부하게 되어 기쁘고 감사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괜한 욕심에 여러 친구들에게 민폐만 끼치고 있다는 자의식이 일어나곤 했다. 도움은 도움대로 받으면서 이 불편한 마음까지 피하려는 건 지나친 욕심이라고 떨쳐버렸다. 그래도 때때로 일어나는 불편한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그러다 여름 학기부터 세미나 회원들과 명상 수행을 함께 하고 일지를 공유하면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2023년을 보내고 돌아보니, 작년 이맘때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변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중 무진장에 대한 마음의 변화, 태도의 변화는 그 모든 변화들을 함축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민폐라는 말에 얽매이지 않았다. 도움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친구들 덕분에 배우고 경험한 것들에 온전히 감사하고 기뻐하기에도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변화로 가장 행복해진 사람은 바로 나였다.

 

 

이 모두 붓다의 가르침과 명상 덕분이다. 명상을 통해 얼마나 많은 편견과 습관적인 생각, 그리고 망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지를 알아차리는 것은 정말 놀라운 경험이다. 명상이 특별한 신비 체험이라서가 아니다. 일상에서는 수많은 자극들에 가려 알아차리기 힘든 마음의 움직임, 그 변화의 흐름이 명상 중에는 고스란히, 생생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렇게 드러나는 마음을 단지 알아차리고 관찰하기만 할 뿐이지만 일상에도 차츰 스며들어 저절로 마음의 태도가 달라진다. 명상을 통해 달라진 이런 변화들을 일상에서 알아차릴 때마다 그저 놀랍다.

 

많은 경우 내가 경험하는 괴로움의 대부분은 자아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내 것, 내 느낌, 내 생각’에 대한 집착이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고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의지나 노력으로는 그것을 막을 수가 없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나에게는 매우 소중하고 특별한 친구라고 명상을 소개하는 순간, 그 특별함이 오히려 빛을 잃고 초라해질까 두려운 마음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 두려움 역시 소중한 내 것, 나만의 특별한 경험이라는 착각과 집착에서 생겨난 것임을 알아차리고 인정하는 순간 사라진다. 물론 이는 일시적인 변화이므로 언제든 다시 일어날 것을 알지만 그렇다 해도 똑같은 경험이 되풀이되는 일은 없다. 모든 변화는 같은 것의 반복이 아니라 언제나 전혀 새로운 사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매번 명상을 할 때마다 이번엔 또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기대되고 설렌다. 그리고 매일 매일 그런 변화의 순간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쌓이다 보면 언젠가 몸과 마음에 온전히 새겨질 날이 오리라 믿는다. 명상은 늘 내게 그 어떤 조건에서도 마음을 멈추고 고요함과 평온, 그로 인한 기쁨을 경험할 수 있음을 가르쳐준다. 따라서 앞으로도 그 기쁨이 에너지가 되는 한 이 덕심이 사그라지는 일은 없을 것 같다.

 

* 무진장 : 문탁 회원들이 출자해 만든 한 통장의 공동 창고로 상호 부조와 재분배의 원리로 운영된다. 어려움에 처한 회원들을 필요에 따라 긴급한 생활 자금이나 기본 소득의 개념인 마중물로 지원하고 있다.

 

     

 

  오영 

  작년에 불교공부와 명상을 시작하면서 서두르지 않는 삶, 천천히 읽고 쓰며 명상하는 삶을 꿈꾸게 되었다.

  더불어 올 한해 명상동아리 활동으로 조금 더 많은 친구들과 함께 명상하기를 소망한다.

댓글 8
  • 2024-02-12 08:43

    덕심 ㅋ
    난 덕질을 평생 못할줄 알았는데 오영샘 글을 읽으니 이것도 덕질일수 있군요 ㅎ
    명상에 대한 저의 변화도 참 어마어마하네요 지난1년간 ^^
    친구들과 함께 명상하기 올해도 좋은 한해가 될듯요~

  • 2024-02-12 18:37

    오영쌤이 다른 데 안 빠지고 명상에 빠져서 얼마나 다행인지요!ㅎㅎ

    어떤 장비도 없이 언제 어디에서든 숨쉴 줄만 알면 할 수 있는 명상은 참 신기하고 매력이 넘쳐요. ^^
    오영쌤이랑 오래오래 함께 명상하고 싶어요.

    글 잘 읽었습니다~

  • 2024-02-13 09:35

    명상으로 일상을 보살피는 힘을 키울 수 있군요~명상 멋지네요~

  • 2024-02-13 10:21

    오영님의 글 읽으니 좋네요~~

  • 2024-02-13 10:23

    오영샘과 명상이라.
    이건 요요샘과 명상, 도라지와 명상...과는 좀 다른 느낌인 것 같아요.
    요요샘과 도라지는 본투비 명상러일것 같은디, 오영샘은 뭐랄까...결이 좀 다르다랄까...ㅋㅋ
    요요샘이나 도라지과가 아닌 저는, 그래서 오영샘의 명상일기에 더 관심이 갑니다.
    잘 읽었고 앞으로도 잘 읽을게유^^

  • 2024-02-13 10:53

    명상을 덕질하다니요! 신선한 조합입니다.
    저도 올해 같이.. 빠질 수 있기를요!!

  • 2024-02-21 08:07

    덕밍아웃 좋아요~
    근데 덕질이 명상이라뉘 더할나위 없이 좋네요.
    전 무릎이 시원치않아 명상은 패슈...ㅎㅎㅎㅎㅎ

  • 2024-02-27 23:01

    매일 매일 명상하고 일지쓰고, 명상에세이까지 쓰는 오영샘 옆에서 많이 배워야지..
    올해도 함께 공부할 수 있어 기쁩니다^^

일상명상
덕밍 아웃, 그 후   지난 글에서 호기롭게 덕밍 아웃을 했지만 명상에 빠져든 이유를 명확하게 알았던 것은 아니다. 명상에 빠진 것은 결과지 이유는 아니니까. 하여 명상이 처음부터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친구와 같다고 했지만 정작 누군가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면 제대로 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그냥 좋으니까 좋았다는 식의 동어 반복을 되풀이하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언가에 꽂힐 때 그 이유를 다 알아서는 아닌 것 같다. 우연히 어떤 것에 마음이 불꽃처럼 호응할 때 그저 속절없이 빠져드는 게 아닐까. 처음엔 빠져든 이유를 잘 모르는 터라 경우에 따라 ‘입덕 부정기’를 겪기도 하면서 말이다. 대개는 빠져든 다음에야 그 이유를, 스스로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를 발견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이유 덕분에 다시 그 대상을 더 깊이 애정하게 되는, 다이내믹한 순환이야말로 덕질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지.     나도 명상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른바 덕질의 묘미를 맛보고 있다. 명상이 뭔지도 모르고 매달리듯 빠져들었다가 이제야 차츰 명상이 뭔지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명상을 하기 전까지는 그렇게나 많은 쓸데없는 생각들에, 그렇거나 많이 휘둘리고 있는 줄 몰랐다. 그 때문에 명상을 통해 처음 경험했던 침묵과 평온이 그토록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는지도. 만약 명상이 아니었다면 일 년 365일, 꺼지지 않는 텔레비전처럼 소란스런 정신적 수다 때문에 괴롭다는 걸 영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그 순전한 무지에서 벗어난 순간, 마치 세상의 비밀을 다...
덕밍 아웃, 그 후   지난 글에서 호기롭게 덕밍 아웃을 했지만 명상에 빠져든 이유를 명확하게 알았던 것은 아니다. 명상에 빠진 것은 결과지 이유는 아니니까. 하여 명상이 처음부터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친구와 같다고 했지만 정작 누군가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면 제대로 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그냥 좋으니까 좋았다는 식의 동어 반복을 되풀이하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언가에 꽂힐 때 그 이유를 다 알아서는 아닌 것 같다. 우연히 어떤 것에 마음이 불꽃처럼 호응할 때 그저 속절없이 빠져드는 게 아닐까. 처음엔 빠져든 이유를 잘 모르는 터라 경우에 따라 ‘입덕 부정기’를 겪기도 하면서 말이다. 대개는 빠져든 다음에야 그 이유를, 스스로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를 발견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이유 덕분에 다시 그 대상을 더 깊이 애정하게 되는, 다이내믹한 순환이야말로 덕질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지.     나도 명상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른바 덕질의 묘미를 맛보고 있다. 명상이 뭔지도 모르고 매달리듯 빠져들었다가 이제야 차츰 명상이 뭔지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명상을 하기 전까지는 그렇게나 많은 쓸데없는 생각들에, 그렇거나 많이 휘둘리고 있는 줄 몰랐다. 그 때문에 명상을 통해 처음 경험했던 침묵과 평온이 그토록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는지도. 만약 명상이 아니었다면 일 년 365일, 꺼지지 않는 텔레비전처럼 소란스런 정신적 수다 때문에 괴롭다는 걸 영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그 순전한 무지에서 벗어난 순간, 마치 세상의 비밀을 다...
오영
2024.05.09 | 조회 125
일상명상
  매일 아침 명상을 한다. 5년이 좀 넘게 계속해 온 아침 의례다. 어쩌다 며칠 명상을 놓치게 되면 명상시간을 확보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진다. 마음을 집중하여 들숨과 날숨을 온전히 알아차릴 때 누리는 고요와 평화가 그립기 때문이다. 그럴 때 알게 된다. 일상에서 그럭저럭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힘이 아니라 매일의 명상 덕분이었다는 것을. 내게 명상은 마음을 돌보는 시간이면서 마음에 좋은 에너지를 충전하는 귀한 시간이다.   호흡관찰   나는 붓다가 가르친 ‘호흡 수행(아나빠나사띠)’과 ‘사념처 수행(사띠파타나)’에 의지해서 명상을 하고 있다. 경전은 이렇게 명상을 시작하라고 한다.   여기 숲으로 가거나 나무의 뿌리로 가거나 빈집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몸을 똑바로 세우고 면전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마음챙겨 숨을 들이쉬고 마음챙겨 숨을 내쉰다.   명상을 하기 위해서는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가부좌 자세로 앉아 알아차림을 확립하여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쉰다. 조용한 곳으로 가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번다한 자극으로부터 물러나 몸과 마음을 잘 관찰할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조용한 곳에서 명상할 때 우리는 마음이 얼마나 산만하고 시끄러운지 더 잘 알 수 있다. 산만함을 가라앉히는 방법은 산만함과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산만함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번뇌의 대치법도 다르지 않다. 어떤 환경에도 구애받지 않고 마음을 고요히 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 정도 내공을 갖추기 전까지는 조용한 곳에서 명상을 하며 힘을 기르는 수밖에...
  매일 아침 명상을 한다. 5년이 좀 넘게 계속해 온 아침 의례다. 어쩌다 며칠 명상을 놓치게 되면 명상시간을 확보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진다. 마음을 집중하여 들숨과 날숨을 온전히 알아차릴 때 누리는 고요와 평화가 그립기 때문이다. 그럴 때 알게 된다. 일상에서 그럭저럭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힘이 아니라 매일의 명상 덕분이었다는 것을. 내게 명상은 마음을 돌보는 시간이면서 마음에 좋은 에너지를 충전하는 귀한 시간이다.   호흡관찰   나는 붓다가 가르친 ‘호흡 수행(아나빠나사띠)’과 ‘사념처 수행(사띠파타나)’에 의지해서 명상을 하고 있다. 경전은 이렇게 명상을 시작하라고 한다.   여기 숲으로 가거나 나무의 뿌리로 가거나 빈집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몸을 똑바로 세우고 면전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마음챙겨 숨을 들이쉬고 마음챙겨 숨을 내쉰다.   명상을 하기 위해서는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가부좌 자세로 앉아 알아차림을 확립하여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쉰다. 조용한 곳으로 가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번다한 자극으로부터 물러나 몸과 마음을 잘 관찰할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조용한 곳에서 명상할 때 우리는 마음이 얼마나 산만하고 시끄러운지 더 잘 알 수 있다. 산만함을 가라앉히는 방법은 산만함과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산만함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번뇌의 대치법도 다르지 않다. 어떤 환경에도 구애받지 않고 마음을 고요히 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 정도 내공을 갖추기 전까지는 조용한 곳에서 명상을 하며 힘을 기르는 수밖에...
요요
2024.04.14 | 조회 236
일상명상
다시 돌아온 ‘명상의 시간’   국민학교 저학년 때였을 것이다. 대략 1980년대 초반.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위치한 우신국민학교는 당시 한 교실에 60명 이상의 학생들이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나고 있었다. 오전형 콩나물도 있고 오후형 콩나물도 있던 시절. 몇 교시였을까? 수업을 알리는 벨이 울리고 교실에는 "끼이이이이~ 끼~이이이~" 하는 바이올린 선율이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곡명은 '타이슨의 명상곡' 또는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로 기억하고 있는데 아닐 수도 있다. 이어 "명상의 시간~"이라는 우아한 멘트가 전교에 울려 퍼지면 우리는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명상의 시간'을 왜 갖는 건지 어떻게 명상하는 건지 아무도 알려준 적 없었지만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 같다. ‘명상의 시간’은 학교 전체가 잠시 고요해지는 시간이었을 뿐이다.   "끼이이이~이~"하던 그 바이올린 연주곡은 중학교를 지나 고등학교까지 극기훈련, 수학여행, 임원 수련회 등에도 종종 따라다녔다. ‘명상의 시간’은 손 안 대고 아이들을 차분하게 만들기 위한 학교 측의 전략이었을까? 공식적인 침묵의 시간 같았던 ‘명상의 시간’에 이따금 소리 내어 우는 친구들도 있었으니 어쩌면 누군가에겐 반성의 시간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의문 가득했던 '명상 시간' 아니 추억 속의 '명상의 시간'. 오랫동안 잊고 있던 ‘명상의 시간’이 세월을 훌쩍 지나 어느 날 내게 다시 돌아왔다.             십 분을 견디기 힘들었다.   명상 방석 위에 앉아 반가부좌를 한다. 방석이 좋긴 하지만 잠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명상을 하거나 여행지에서 명상을 하는 경우엔 이불을 접어 엉덩이에 받치고...
다시 돌아온 ‘명상의 시간’   국민학교 저학년 때였을 것이다. 대략 1980년대 초반.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위치한 우신국민학교는 당시 한 교실에 60명 이상의 학생들이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나고 있었다. 오전형 콩나물도 있고 오후형 콩나물도 있던 시절. 몇 교시였을까? 수업을 알리는 벨이 울리고 교실에는 "끼이이이이~ 끼~이이이~" 하는 바이올린 선율이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곡명은 '타이슨의 명상곡' 또는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로 기억하고 있는데 아닐 수도 있다. 이어 "명상의 시간~"이라는 우아한 멘트가 전교에 울려 퍼지면 우리는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명상의 시간'을 왜 갖는 건지 어떻게 명상하는 건지 아무도 알려준 적 없었지만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 같다. ‘명상의 시간’은 학교 전체가 잠시 고요해지는 시간이었을 뿐이다.   "끼이이이~이~"하던 그 바이올린 연주곡은 중학교를 지나 고등학교까지 극기훈련, 수학여행, 임원 수련회 등에도 종종 따라다녔다. ‘명상의 시간’은 손 안 대고 아이들을 차분하게 만들기 위한 학교 측의 전략이었을까? 공식적인 침묵의 시간 같았던 ‘명상의 시간’에 이따금 소리 내어 우는 친구들도 있었으니 어쩌면 누군가에겐 반성의 시간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의문 가득했던 '명상 시간' 아니 추억 속의 '명상의 시간'. 오랫동안 잊고 있던 ‘명상의 시간’이 세월을 훌쩍 지나 어느 날 내게 다시 돌아왔다.             십 분을 견디기 힘들었다.   명상 방석 위에 앉아 반가부좌를 한다. 방석이 좋긴 하지만 잠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명상을 하거나 여행지에서 명상을 하는 경우엔 이불을 접어 엉덩이에 받치고...
도라지
2024.03.10 | 조회 331
일상명상
오영
2024.02.11 | 조회 392
일상명상
          요요 문탁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있다.  앞으로 10년은 불교공부를 계속 함께 할 친구들을 찾고 있다.  명상적 삶, 일상의 영성, 공동체와 영성, 나이듦과 영성이  화두다     <일상 명상> 연재를 시작하며   작년 1월에 ‘요요의 월간명상’을 시작했는데, 6개월을 쉬고,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셋이다. 지난해에 불교 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친구들과 번갈아 가며 새로 리뉴얼한 <일상명상>을 쓰기로 했기 때문이다. ‘요요의 월간명상’ 3회차 글에서 나는 문탁에서 함께 명상하는 친구들을 만들고 싶다는 바램을 밝혔다. 그런데 정말로 명상 친구가 만들어졌다.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이 코너는 이제 요요, 오영, 도라지, 세 사람이 한 달에 한 번씩 돌아가며 쓴다. 아마 3인 3색의 명상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이 글은 우리가 어떻게 명상 친구가 되었는지를 돌아보는 이야기이다.     사띠 수행을 공부하다   지난해 가을 불교학교에서 우리가 공부한 것은 사띠(sati) 수행이다. 팔정도 중 여섯 번째가 정념(正念)인데, 정념은 ‘바른 사띠’를 말한다. 그만큼 불교 수행에서 사띠가 중요한 개념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띠에는 ‘기억한다’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을 살핀다’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영어로는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로 옮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순수한 주의집중(bare attention), 알아차림(awareness, noting) 등을 쓰기도 한다.   우리말 번역어도 통일되어 있지 않다. 최초로 니까야를 한글로 완역한 전재성님은 사띠를 ‘새김’이라고 번역했다. 마음에 새긴다고 할 때의 새김이다. 새김은 사띠의 첫 번째 의미인 ‘기억한다’, ‘잊지 않는다’의 뉘앙스가 좀...
          요요 문탁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있다.  앞으로 10년은 불교공부를 계속 함께 할 친구들을 찾고 있다.  명상적 삶, 일상의 영성, 공동체와 영성, 나이듦과 영성이  화두다     <일상 명상> 연재를 시작하며   작년 1월에 ‘요요의 월간명상’을 시작했는데, 6개월을 쉬고,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셋이다. 지난해에 불교 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친구들과 번갈아 가며 새로 리뉴얼한 <일상명상>을 쓰기로 했기 때문이다. ‘요요의 월간명상’ 3회차 글에서 나는 문탁에서 함께 명상하는 친구들을 만들고 싶다는 바램을 밝혔다. 그런데 정말로 명상 친구가 만들어졌다.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이 코너는 이제 요요, 오영, 도라지, 세 사람이 한 달에 한 번씩 돌아가며 쓴다. 아마 3인 3색의 명상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이 글은 우리가 어떻게 명상 친구가 되었는지를 돌아보는 이야기이다.     사띠 수행을 공부하다   지난해 가을 불교학교에서 우리가 공부한 것은 사띠(sati) 수행이다. 팔정도 중 여섯 번째가 정념(正念)인데, 정념은 ‘바른 사띠’를 말한다. 그만큼 불교 수행에서 사띠가 중요한 개념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띠에는 ‘기억한다’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을 살핀다’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영어로는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로 옮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순수한 주의집중(bare attention), 알아차림(awareness, noting) 등을 쓰기도 한다.   우리말 번역어도 통일되어 있지 않다. 최초로 니까야를 한글로 완역한 전재성님은 사띠를 ‘새김’이라고 번역했다. 마음에 새긴다고 할 때의 새김이다. 새김은 사띠의 첫 번째 의미인 ‘기억한다’, ‘잊지 않는다’의 뉘앙스가 좀...
요요
2024.01.10 | 조회 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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