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탈핵 18주-세 가지 이야기

스마일리
2016-12-11 21:58
4386

지지난주 11월 말에서 12월 초까지 오키나와에 다녀왔습니다. ... 원전 사고 이후 일본 여행이라... 놀라운 수족관이 있고, 그야말로 아름다운 바다로 둘러싸인 곳이라 이미 나이도 50을 바라보고 있고, 거기나 여기나 오염은 매 한 한가지 일 것이라고 혼자 핑계를 대면서, 1년 가까이 같이 집에 있으니 이제 뒷통수도 보기 싫은 남편이지만 그래도 결혼 20주년을 막 넘어가려는 시기라 그것도 핑계에 덧대면서 저렴하게 다녀왔지요.

 

사실, 오키나와 두 번째인데요, 첫 번 갔을 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특별한 곳을 이번에 들렀습니다. 사키마 미술관.


사키마1.jpg


공항이 있는 나하는 오키나와 남쪽인데 오키나와에서 가장 유명한 츄라우미 수족관에 가기 위해 관광객들은 거의 북쪽으로 이동합니다. 고속도로를 타고 가면 보이지 않지만 국도를 타고 올라가다보면 어마어마한 부지를 차지하고 있는 미군부대를, 아니 미군부대의 철조망을 보게 되는데 사키마 미술관이 있는 기노완시 역시 1/4 정도의 땅이 미군부지랍니다. 대대로 기노완시에 살던 사키마 집안은 넓은 땅을 미군부대로 빼앗기고 오랜 환수 투쟁의 성과로 돌려받은 땅에-빙 둘러 미군부대가 그대로 있는- 작은 미술관을 짓고 땅을 빌려준 댓가로 받은 돈으로 케테 콜비츠를 비롯한 작가들의 콜렉션을 모읍니다. 아니, 순서가 작품을 먼저 하나둘씩 모으고 미술관을 지어 전시... 그러니까 사키마 미술관은 개인미술관이지만 사실, 우리나라 평화박물관의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합니다. 저희가 갔던 날도 고등학교 한 반 정도의 학생들이 와서 설명을 듣고 질문을 하는 등 한 30분 이상을 머물다 가더군요.


콜비츠-피에타.jpg


2~3년 전 서울에서 케테 콜비츠 전시회를 한 것도 사키마 미술관의 작품을 빌려온 것이었습니다. 콜비츠의 작품이 널리 사랑받기를 원하는 미술관 측이 여전히 콜비츠의 작품을 여기저기로 여행보내는 모양입니다. <전쟁과 인간>이라는 주제의 특별전이 진행되는 중이었고, 콜비츠의 작품은 생각만큼 많지 않더라구요. 지난 번 서울 전시회에서는 못 본 것 같은 피에타를 오래 보았습니다. 화려한 디테일이 있는 게 아니고 아주 단순한 선 몇 개만 보이는 것 같은데도 미간의 주름과 입으로 가져간, 주먹 쥔 손만으로도 자식잃은 어미의 슬픔이 절절했습니다. 넘치는 슬픔을 퍼 올려서 전쟁에 반대하고, 핵발전에 반대하고, 모든 폭력에 반대하는 힘으로 만듭니다.

 

부랴부랴 당번을 확인하고 128일 파지사유로 향합니다. 몸이 찌뿌둥하여 아침 먹은 설거지 후에 깜빡 졸다가 시간을 놓칠 뻔했다는...

김장하는 날이었군요. 요란하게 김장하느라고 바지에 고춧가루를 잔뜩 묻힌 히말라야의 인도로 문탁 창고에서 들고 나갈 피켓, 장갑, 플랫카드 등을 고릅니다. 시국에 맞춰 대통령 이름이 들어있는 것과 계절에 맞춰 따뜻함이 번지는 풀랫카드를 가방에 쑤셔넣고 출발.

지난 주에 한 바탕 잔치같은 탈핵행동이 벌어졌으니 이번 주는 소박한 일인시위가 되어도 좋겠다 하고 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제가 남편 핸폰을 빌려서 집에 잘 놓고 나온 것이었습니다.

... 곤란하군... 요요 샘이 사진있는 후기를 부탁했는데...

과일 아저씨에게 사진도 부탁하고 메일로 전송까지 부탁한다면...

지나가는 아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으니...


1208-2.JPG


일인시위에 몰입되어갈 즈음 여여 님이 나타나신 것이었습니다. 하아... 목요일이 월든 당번이어서 나오지 못해 마음이 그랬는데 마침 월든에서 세미나하는 루쉰팀의 노라가 월든을 지켜줄테니 나가보시라고 강권했다는... 그래서 사진도 찍고 전송도 받고, 다 되었답니다. 여여 님과 저는 뚝 떨어져서 고요히 한 시간을 서 있었고 문탁으로 걸어오는 동안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습니다.

거리에 서있다보면 무반응이 가장 두려운 법인데 이날은 다양한 반응이 있어서 즐겁기까지 했습니다. 반응을 모아보면


 1208-1.JPG

 

해결이 되기는 되야할텐데 이러고 있으려면 힘들겠다- 70대 후반의 할머니, 대통령탄핵시위와 햇갈리시는 듯

여기서 이러는 거 보기 좋지 않다, 하지 말라-70대 할아버지, 지나가면서 속삭이듯 조용하게 저한테만 들리게 던지시는 걸로 봐서 요즘 촛불집회 덕에 기가 좀 죽으신 듯

우리나라에 핵발전소 있어요?(손으로는 쑤웅 미사일 쏘는 시늉)

그건 핵미사일, 핵폭탄이고 전기 만드는 핵발전소 있어요.(제 대답)

아하... 수고하세요. -우르르 몰려온 남고등학생 중 한 명

맞아요, 맞아요- 지나가면서 손뼉 쳐주신 40대 여성

핵발전소 안하면 전기는 안 쓸껀가?(아주 고전적인 질문이지요^^)

오래된 것부터 하나하나 폐기하면 우리가 쓸 전기 부족하지 않습니다.(제 대답)

우리가 중동으로 원전 수출하는 나란데...

유럽이나 서구 선진국들은 점점 탈핵을 하는 나라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대안에너지 개발도 댜앙하구요.

우리나라는 아직 멀었어, 아직 멀었어.-70대 초반 할아버지

 

여여 님이 받은 반응

이거 얼마 받고 하는 거예요?(비아냥이 아닌 진지한 질문이었다는...)

핵발전소가 뭡니까? 원자력발전소라고 해야 사람들이 알기 쉽지 않나요?(역시 호의적인 질문)

이거 언제까지 해요? (3시까지요, 라고 대답할 뻔했지만)

대통령이 내려올 때 가지 해요?(이 분 역시 탄핵시위와 헷갈리신 듯)

 

길거리에 서면 누구든 느끼는 것이지만 나이든 남자의 단단한 표정과 자기 고집이 얼마나 불편한지... 그 사람은 그 세계를 죽을 때까지 안고 갈 수 밖에 없겠다 끄덕거리게 되면서 한편으로는 우르르 몰려다니는 아이들의 가벼운 관심, 기꺼운 응원에 그래, 너희들을 위해 여기 서있는 것이지, 나는 못봐도, 미래를 살게 될 너희들을 위해서... 더 크게 끄덕거리면서 허리를 펴게 된다는.

 

판도라2.jpg


광화문에 다녀온 다음 날, 일요일 조조로 영화를 보러 나섭니다. <판도라>

포스터만 봐도 내용의 90% 이상은 알 수 있는 뻔한 영화. 이미 체르노빌, 후쿠시마에서 있었을 수많은 사연을 단순화하여 한 가족의 이야기로, 한 도시의 이야기로 만든.

다 아는 뻔한 내용인데도 왜 보는 내내 줄줄 눈물이 흐를까요? 이 땅에서 핵발전소 사고가 나면 다 죽게 될텐데 그래도 끝까지, 더 멀리 도망가겠다고 달리는 사람들, 절대로 저절로 꺼지지 않는, 영원히 타오를 불을 꺼보겠다고 소방차에 연결된 후스로 물을 뿜고, 헬기로 바닷물을 길어 붓는 사람들, 원자력발전이 얼마나 싸고 깨끗하고 안전한 에너지인가 홍보하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눈으로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는 사람들...

 

아침 시간에도 좌석이 사람들로 꽉 찼던데... 얼마 안 있으면 우리의 탈핵행동도 박수갈채를 받는 날이 오는거 아닌지... 성급한 기대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분위기가 바뀌기는 바뀌겠지요.

오랫만에 별별 이야기 다 썼습니다. 이상. 

 

 

댓글 7
  • 2016-12-11 23:26

    우아~ 이렇게 재미난 후기... 처음봐요! ^^

    ..그렇죠...아이들...때문에 우리가 서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우리자신 때문이기도 하고요~ 

    고생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2016-12-13 12:51

    벌써 판도라 영화를 봤단 말이네요!

    흠.. 의리상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스마일리 영화후기를 보니 살짝 망설여지네요. ㅋㅋ

    그건 그렇고 이 기회에 판도라 포스터를 패러디해서 탈핵릴레이에 쓸 유인물 만들어봅시다!!

    예술가와 기능인들의 도움이 필요한데.. 도와줄거죠? 다들 콜??

  • 2016-12-13 17:41

    스마일리샘이랑 뚝 떨어져서 판넬만 들고 있었는데 마음이 차분해 지더라구요.

    말없이 서 있으니 오히려 지나가는 사람들이 눈길을 더 많이 주는것 같았어요

  • 2016-12-14 02:10

    오랜만에 스마일리 쌤을 여기서 만나는군요~~ 반가워요 쌤!!!

    케테콜비츠도 보러  가시고 집회도 다녀오시고 판도라도 보고오셨군요.

    다음 녹색다방 모임에 쌤의근황을 듣고 싶어요~~ 쌤의 웃는 모습도 보고싶고요~

    추운데 고생하셨습니다. 여여쌤도요~~~

  • 2016-12-14 21:09

    하나의 이야기 추가

    지난주 동네 탈핵에 싸가지고 갔던 한땀한땀 수많은 장인의 솜씨가 서려있는 그 작품,

    오늘 녹색당에 전달했습니다.

    내일 광화문 탈핵집회 현장으로 가지고 갔다면 더더 극적이었을테지만,

    내일은 제가 약속이 있어서...

    녹색당사에서 일하던 모든 일꾼들이 감탄사와 감사의 말들을 쏟아냈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박은 글자의 단단한 메세지에,

    테를 두른 뜨게질 조각보의 따뜻한 디테일에 ...

    덕분에 저는 맛있는 유자차 대접받고, 녹색당 내년 수첩까지 선물받아 룰루랄라 돌아왔습니다.

    작품을 만든 수많은 손길들, 그 작품 곁을 스쳐간 수많은 발길들...

    고맙습니다.

    KakaoTalk_20161214.jpg

  • 2016-12-16 23:44

    조근조근 스마일리 목소리가 들리는 거 같은 후기, 반갑네요

    오키나와에도 수지로얄앞에도 녹색당에도 함께 다녀온거 같아요!

  • 2016-12-17 10:57

    저도 잘 읽었습니다 

    스마일리님~ 목소리도 듣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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