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의 윤리 2차 세미나 후기

박정애
2020-07-21 18:13
384

   2부 2장의 발제까지 맡은 터라 나름 열심히 읽고 요약까지 해서 파지사유로 향했습니다. 오신 분들께 발제문을 돌리고 향이 좋은 달밤 더치 한 잔까지 따른 뒤 자리에 앉으니 갑자기 몽롱해집니다. 느티나무님이 준비해오신 2부 1장의 발제문을 읽는데 글이 눈에 들어오지가 않습니다. 제 구역이 아닌지라 잘 해 보려고 발제문 쓰는 데 너무 열을 냈더니 막상 세미나 직전에 긴장이 풀린 모양입니다.

 이를 어쩌나. 문득 리쌍의 노래 가사가 떠오릅니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딱 이 구절만 계속 반복되다가 내가 읽은 게 읽은 게 아니고 내가 듣는 게 듣는 게 아니라는 자각을 하게 됩니다. 느티나무님이 발제문을 읽으신 뒤 나름 정리도 해 주시고 질의응답시간이 이어지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내 자신이 이 세미나의 '서발턴'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제가 발제한 2장의 '이중 구속된 언어'라는 표현이 떠올랐습니다. 듣도 보도 못 한 이국의 낯선 철학자들과 그들의 이론 그리고 잘 해석되지 않는 용어들로 인해 읽기, 듣기의 난감함을 넘어 뭐라 말 해야 할지, 지금까지 내가 구사해 온 명료하고 쉬운 언어들을 사용하면 왠지 급이 떨어져 보일 것만 같아 말을 하기도 쉽지가 않았습니다. 거기에 하나 더. 후기 쓰기도 어렵네요^^

  2부 그림자를 드리운 말의 제1장의 주제는 '전달 (불)가능성입니다. 세미나 당시에는 어쩜 이렇게 주제에 딱 맞게 내용이 이해 불가할까 싶었는데 후기 쓰느라 다시 훑어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데 그 당시 제가 좀 피곤했구나 싶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어렵게 여겼던 이유는 먼저 오카 마리,  프리모 레비 등 생소한 학자들의 이름을 인지하기도 버거운데  재현 불가능성, 전달 불가능성, 문채, 정서적 실재, 모국어의 타자성 등 친절한 설명이 필요한데 그런 과정이 생략된 용어들이 수시로 나오다 보니 모국어로 쓰여 있는데도 외국어를 읽는 느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나마 김고은(?)님이 중간중간 얘기해 주시는 프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의 시체 처리 묘사 부분이 가장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데 그걸 통해 묘사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되었답니다. 그 이외에도 '오딧세우스의 노래'를 통해 알레고리가 오히려 실제 사건과 수용소의 현실을 보다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는 '지시체를 생산하는' 효과를 갖는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대략은 짐작할 수 있었는데 이 역시 저의 오독일까봐 묻기가 좀 뭣했습니다.  

   그나마 내가 발제한 2부의 2장 '다른 목소리 듣기' 부분만 갈수록 쿨해지는 저의 뇌에 족적을 남기긴 했습니다. 물론 '인식소적 폭력'이나 '중층 결정되어 있는 발화 공간' 등의 표현이 여전히 명료하게 해석되지 않지만 희미하게나마 윤곽이 잡히긴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해한 바를 여기에 적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 책에서 강조하는 '충분한 그림자'란 어쩌면 장자의 '혼돈' 편에 나오는 '구멍'과 같은 것이어서 그 구멍을 없애는 순간 혼돈의 존재가 사라져버리듯이 그림자의 의미를 명확히 정의 내리는 순간 그림자의 아우라가 사라지게 될 것 같아서입니다.

  다만 서발턴이 진정 자신의 언어로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자꾸 말하라고 할 것이 아니라 인식소적 폭력에 해당되는 요소들을 없앤다는 전제 조건이 먼저 실현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해 보게 되었습니다. 서발턴 여성은 이중 구속된 언어를 사용하기에 말하기가 더 힘들다는 부분에서는 얼마 전에 발생한 일명 '박원순 사건'과 관련해 피해자가 왜 4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입을 열었을까, 하는 의문이 조금 해소되는 데에 어느 정도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충분히 그림자를 드리운 말하기, 쓰기, 듣기를 잘 하기 위해서는뭐니뭐니 해도 감수성을 기르는 게 가장 중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시를 읽고 쓰는 것의 습관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고 '듣기의 윤리'의 종착역은 어떤 형태이든 '실천'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마음이 무거워진 채 후기 마치려 합니다.

  P.S 어렵지만 재미있습니다. 3-4차시도 즐겁게 임하렵니다^^

 

댓글 4
  • 2020-07-21 18:19

    4년의 시간과 그림자를 연결지어보고...자주 그림자를 보려 해야 할 것 같아요. 선명한 현상에 눈을 주기보다...금욜에 봬요!

  • 2020-07-21 20:19

    정애님이 말한 어렵지만 재미있다, 아마 우리 대부분이 공감하는 느낌일 거라 생각해요.
    단 하루도 말하지 않고 듣지 않는 날이 없는데
    그 매일매일의 말하기와 듣기의 문제를 파고 드는 책을 읽는게 참 만만치가 않네요!

  • 2020-07-21 22:26

    정애님의 후기를 읽으니
    힘겹게 하늘을 향해 날개짓하다
    땅에 안착한 듯한 편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림자를 드리운 말하기, 듣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감수성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공감합니다.
    <듣기의 윤리>를 다 이해하지 못해도
    듣기의 윤리를 실천할 수 있다는
    말씀으로 들어도 될까요?ㅎㅎ

    정애님 덕분에, 3차시 세미나에
    발걸음이 가벼울 것 같습니다.

  • 2020-07-23 09:26

    박정애님의 단단한 목소리가 지난 시간의 세미나를 더 또렷하게 했는데^^ 마음 속으로는 떠셨군요^^
    이제 한 번 남은 세미나에서 듣기에 대한 생각을 더 깊게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후기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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