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돌아가신 날

정군
2023-11-02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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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제가 오늘 진짜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침에 나갈 때까지만 하더라도 아버지 성묘 다녀온 이야기를 문스탁그램에 올려야지 하며 나갔다가 싹 까먹고 사진 한장 안 찍고 그냥 들어왔네요... 네, 그런데 뭐 그런 마음을 먹었어도 그건 그저 이론에 불과할 뿐 사진을 실제 찍지는 못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하루 종일 모친과 함께 있었으니까요. 아마 시나리오는 이렇겠지요? 제가 계속 사진을 찍고 있으면, 모친께서 '사진을 왜 그렇게 많이 찍냐?'('왜'냐고 묻는 건 저희 모친의 특징적인 화법입니다. 뭘 할 때마다 '왜'냐고 물으세요. 왜 그러시는 걸까요?)

어디 올릴 때가 있다. 

어디에 올리냐

그게 그러니까....

녜 뭐 그랬을 거에요. 

 

어쨌든 그래서 오늘은 사진을 못 찍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카카오 로드뷰를 잘라봤습니다.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이렇게 썼다죠? ㅋㅋㅋ

가기 싫은 마음을 부여잡고 가까스로 나와 인천 집에 도착합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인천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당구 칠 때 쓰리쿠션에서도 박는다는 룰을 여전히 고수합니다. 

화면에 보이는 집은 제가 11살 때부터 죽 살아온 집으로 대략 30년 쯤 된 집입니다. 저희 모친은 거의 '집'과 한 몸이 되셨죠.

제목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인천에 간 이유는, 오늘이 아버지 기일이기 때문입니다.

양력으로는 2009년 11월6일에 돌아가셨는데, '기일'은 '음력'으로 하는 거라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매년 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셨는지를 까먹습니다. 어쨌든 아버지 돌아가시고 평생 지내지 않던 제사를 지내시던 어머니께서 10년쯤 지난 후부터는 본인도 지내기 부담스러워하기는 것 같았습니다. 본인이 부득부득 우겨서 지내기 시작한 제사였으니, 그만두자고도 말하기 뭐한 상황이었을 것이니... 제가 그냥 이제 그만 지내자고 '우기는' 형식으로 몇년 전부터 제사를 안 지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냐. 기일에 그냥 성묘 한 번 다녀오는 것으로 갈음합니다. 오늘 제가 인천에 갔던 이유죠.

 

전학 한 번 하지 않고 다녔던 초등학교 앞을 지나... 하나도 안 달라졌더라고요. 그나마 달라진게 있다면, 저 다닐 때는 진짜 초등학교 앞 도로에 차들이 얼마나 쌩쌩 달렸던지 잊을만 하면 어린이 교통사고가 나곤 했는데... 지금은 거의 3-4km에 가까운 구간을 30km/h 구간단속으로 설정해 놔서.... 운전자가 된 졸업생은 좀 답답했습니다. 

 

여하튼 그렇게 차를 달려 아버지가 쉬고 계시는 인천가족공원 '금마총' 납골당까지 왔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생전에 쉼없이 뭘 사고, 뜯고, 집에 안 들어오고, 그러다 엄마한테 혼나고 그러시던 분이셨는데... 납골묘 박스 안에 전자제품이라도 넣어드리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저는 납골함 앞에 고인의 생전 사진을 놓는 게 영 어색하거든요... 뭐 어쨌든 그렇게 성묘를 잘 마쳤습니다. 

사실 돌아가시고 10년까지는 갈 때마다 회한이랄지... 후회랄지... 그리움이랄지... 그런 기분이 느껴지곤 했었는데, 3년, 5년, 10년 마디로 점점 그런 감정이 옅어지더니, 이제는 정말 좋은 기억만 나고 그렇습니다. 왜 옛날 사람들이 3년 상을 기본으로 했는지 좀 알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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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제 계획은 여기까지 마치고 후다닥 집(엄마집 말고 우리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로 인천 체류가 길어지고 말았습니다. 

모친께서 지난 달에 봤을 때 보다 눈에 띄게 걷는 게 더 불편해지셨거든요. 작년에 척추압박골절 사고를 당하고, 한 동안 병원치료를 받으신 후로 병원에 가보신지도 오래되었고 하니, 온 김에 병원까지 모시고 가봐야겠다 싶었습니다. (도대체 왜 할머니들은... 병원을 안 가시려고 하는 걸까요? 다녀오면 좋아하면서....)

 

그래서... 이제는 재개발이 완전히 끝나고, 과거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저의 舊출근길을 지나.... 병원으로 갑니다.

어느 정도로 변했냐 하면, 왕복 4차로 도로가 지금은 지하차도까지 합쳐서 왕복 12차로가 되었습니다.(진짜 싫어요)

그래도 모친댁 가까이에 새 병원이 생긴 건 좋더라고요. 건물도 병원도 시설도 장비도 몽땅 새 거였습니다.

진료 결과, 뭐 예상대로 어디가 확 나빠져서 그런 것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다만, 주사, 물리치료 후에도 증상이 호전되지 않으면 상급병원에 가서 mri를 찍어보라는, 마치 오래된 유행가 가사 같은 의사샘의 말을 듣고 왔습니다. 성과가 크게 있는 건 아니었지만, 모친께서 커다란 만족감을 느끼셨으므로 효과는 충분했습니다.

 

그렇게 인천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세미나 두시간 삼십분 전이네요.... '아 째고 싶다...'는 기분을 누르고,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세미나가 끝나고, 와 이제 진짜 끝났다!!! 하는 순간

카톡카톡

'정군샘 오늘 문스탁그램 올리는 날이에요'라는 공부방 총재님의 카톡이...

아... '오늘'은 끝나지 않는 날인가요?

내일은 비밀결사모임 때문에 새벽 네시반에 일어나야 하는데... ‘내일’은 정말 오는 건가요?

댓글 8
  • 2023-11-03 00:31

    비밀결사모임이 뭐지?????!?!?! 너무너무 궁금하당

  • 2023-11-03 06:14

    어머니 모시고 병원 다녀오셨군요. 정말 잘하셨어요.^^.👏

  • 2023-11-03 17:45

    어린 딸과 연날리고 어머님이랑 병원도 가고. 진부하지만 정군샘이 좀 예뻐보임. ㅋ 심했나? 나름 피셜 '정적'인데

  • 2023-11-03 18:45

    정군샘이 째셨으면 좋아쓸꺼쓸ᆢ ㅎㅎ

  • 2023-11-05 17:48

    잘했네요^^
    세미나 있는 날인데 시간을 이렇게 쓰셨구만요 ㅎ

  • 2023-11-06 21:55

    그래서 당구 칠 때 쓰리쿠션에서도 박는다는 룰을 여전히 고수합니다.
    뭔솔?
    '아 째고 싶다...'는 기분을 누르고,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으면 안되는 룰인감?
    어쩐지 무지하게 피곤해 보이더구만........

    나이듦 연구소에서 나의 다음 글이 '제사'에 관한 것이라우......
    (백 광고 아님!)

    • 2023-11-07 10:43

      인천에선 4구칠 때 마지막 쓰리쿠션에 진입한 상태여도 빡나면 쓰리쿠션 상태가 풀립니다.

  • 2023-11-09 19:06

    구글 맵으로 정군샘 일정을 따라다는것도 색다른 재미가 있네요~ㅋㅋ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