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철학학교시즌2] 스피노자 읽기 7주차 후기

진달래
2023-06-27 04:37
379

생각해보니까 처음 문탁에 왔을 때 <에티카>를 읽고 있었다. 그 때는 뭔지도 몰랐고 그냥 그런 공부를 하나보다 했다. 2018년 스피노자 세미나가 열렸다. 동양고전 공부로만도 숨이 차서 함께 공부하자는 제안을 거절했다. 스피노자 세미나는 그 다음 해에도 진행되었다. 문탁에는 스피노자 이야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좀 후회했다. ‘공부를 같이 하자고 할 때 그냥 할 걸’

지금 내가 느끼기에 스피노자는 예전에 마뚜라나의 <앎의 나무>를 읽을 때랑 비슷하다. 음~ <장자> 읽을 때와도 비슷하다. 책을 읽으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책의 내용을 간신히 따라 가는가 싶다가도 생각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빙빙 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잘 설명을 못하겠다 - ‘내’가 있어서 ‘대상’을 능동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 이걸 잘 따라가다가 늘 생각하던 대로 돌아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윤리학> 읽기는 이런 상태에서 이것저것 주워들은 걸 생각하면서 읽고는 있지만 문장의 내용을 파악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니 세미나 시간에 오고가는 이야기들은 내게는 사실 많~이 어렵다. 그래서 이번 후기에는 이해되는(?) 것만 정리 해보기로.

 

드디어 ‘3부 정서의 기원과 본성에 대하여’ 에 들어가니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던 ‘코나투스(conatus)’를 만났다. 하지만 일단 지난 세미나에서 먼저 문제가 된 것은 능동, 수동이다.

 

정의2

우리가 그것의 적합한 원인이 어떤 것이 우리 안에서나 우리 밖에서 생겨날 때 곧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우리 안에서나 우리 밖에서 우리의 본성만으로 명석 판명하게 인식될 수 있는 어떤 것이 따라 나올 때 나는 우리가 능동적이다(활동한다, nos agere)고 말한다. 그리고 반대로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이 생겨날 때, 또는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우리가 그것의 부분적인 원인에 불과한 어떤 것이 따라 나올 때, 나는 우리가 수동적이다(활동을 겪는다, nos pati)라고 말한다.

 

능동과 수동에 문제에 있어서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시켜서 하는 것이냐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냐를 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에 관해 진태원샘의 <스피노자 윤리학 수업> 9강에서 정리하신 부분이 도움이 된다. - 세미나 시간에 요요샘의 설명과 같다.

 

“능동과 수동에 대한 스피노자의 정의는 능동과 수동에 대한 다른 철학자들의 정의와 구별되는 상당히 새로운 정의입니다. 핵심적인 것은 스피노자가 수동을 원인 개념으로 정의한다는 점입니다. 보통의 경우 수동은 외부 원인에 의해 작용을 당하는 것으로 정의되고 능동은 외부 대상에 대하여 행위자가 작용을 가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능동만이 원인으로 이해되며 수동은 보통 결과 개념으로 이해됩니다. 반면 스피노자는 능동을 적합한 원인으로 정의하고 수동을 부적합한 원인으로 정의하기 때문에 능동과 수동의 차이는 원인이냐 결과냐, 작용을 가하냐 작용을 겪느냐의 차이가 아니라 어떤 원인이냐의 차이로 규정됩니다.”p263

 

그러므로 능동과 수동에 대한 문제에서는 인간이 능동적일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원인에 대한 인식이 적합한가에 따라서 능동인가 수동인가를 따져야 한다. 원인은 항상 결과를 따라 나오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겪는 감정은 대부분 부적합한 원인, 즉 부분적 원인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수동이라고 하는데 세미나에서 주로 논의 되었던 것은 그렇다면 능동적인 것도 있냐는 것이었다. 적합한 원인의 결과라면 능동적인 것도 있을 수 있는데 이건 아마도 다음 시간에 더 많이 이야기 되지 않을까 싶다.

 

다음으로 이야기 된 것은 코나투스다.

 

정리 7

각각의 실재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추구하는 노력(conatus)은 실재의 현행적 본질 자체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문탁에서 한참 스피노자 공부에 열을 올리던 때 무슨 말만 하면 ‘그게 코나투스다.’ 혹은 ‘코나투스네’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무슨 말인지 몰라 매번 물어봤던 기억이 난다. - 그렇게 매번 물었는데도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여기서 첫 번째 질문은 ‘노력’이라는 번역에 문제였다. 코나투스를 노력이라고 하면 ‘돌이 자기 존재를 존속하려고 노력하느냐’와 같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노력’은 의식적이거나 지향적인 활동이 아니라 ‘본성 자체에서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활동’으로 보아야 한다. 돌이 깨지지 않고 자기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코나투스의 활동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코나투스가 실재의 본질이라면 자살이나 암 세포 같은 것들은 어떻게 이해할까가 다음 질문이었다. ‘존재를 보존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때 물리적인 죽음만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자살이 ‘존재를 보존하려는 노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관해서는 세네카나 들뢰즈의 예가 나왔다. 우리는 복합체로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기는 하다.

 

코나투스가 정신에게만 관련될 때는 의지라고 불리고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련될 때는 욕구라고 한다. 욕망과 욕구도 구분하여 사용하는데 욕망은 욕구에 대한 의식과 결합된 욕구라고 한다. 음~ 헷갈린다.

 

스피노자는 정서를 ‘신체의 변용’이면서 ‘이러한 변용에 대한 관념’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욕망, 기쁨, 슬픔의 세 정서를 일차 정서라고 하고 다른 모든 정서들은 여기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보았다.

질문은 기쁨과 슬픔을 왜 완전성의 크기를 가지고 말하는가에 대한 것이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교급이라는 것이 포인트라고 한다. 무엇보다 더 큰, 혹은 더 작은 정서는 무엇인가와 비교해서 크고 작다. 완전성은 실재성이기 때문에 크고 작음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 역량의 변화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능력을 감소시키지도 증대시키지도 않는 정서가 있을까? 그런 정서가 있는데 예를 들면 지금의 정서와 딱 동조가 되는 외부 원인이 있다면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앞에서 능동과 수동의 문제가 아직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정서’도 쉽게 와 닿지 않는다. 앞으로 좀 더 생각을 많이 해 봐야 할 것 같은... 그래도 이번 시간에는 들어본 말들이 있어서 좀 편했던 것 같기도 하고. 

댓글 8
  • 2023-06-27 10:14

    진달래샘이 후기에서 언급한 '자살'에 관한 이야기를 보태고자 합니다.
    제 질문은 자살이 '외부 원인에 의하지 않고는 어떤 실재도 파괴될 수 없다'는 코나투스의 본질에 대한 반론의 증거가 될 수 있느냐였습니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도 많이 인용되는 구절인 4부 정리 67(194p)에서 "자유인은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에 대한 명상이 아니라 삶에 대한 명상"이라는 말로 이성적 판단에 의한 자살에 대해선 부정적인 입장을 보입니다.
    그렇다고 '이성적 자살'이 전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4부 정리20 주석(161p)에선 자살이 '능동적 선택'보다는 '외부 원인'에 의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누구도 그가 그의 본성에 반하는 외부 원인들에 의해 제압되지 않는 한에서,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추구하는 것 또는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누구도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스스로 곡기를 끊는다거나 자살을 하게 되지 않으며..."
    그러나 세네카의 죽음에 대해선 다소 이중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세네카처럼 폭군의 명령으로 자신의 혈관을 드러내도록 강제되기도 한다"며 타의에 의한 자살임을 설명하면서도 "더 큰 악을 피하기 위해 더 작은 악을 욕망하는 것"이라며 세네카의 자살이 사실상 '더 큰 악'을 피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암시합니다.
    세네카와 들뢰즈같은 철학자들의 자살도 외부 원인에 의한 선택과는 다른 차원의 자살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 2023-06-27 11:45

      추가로 지난 시간에 언급됐던 내용 중에 '정신의 코나투스'가 나와 덧붙입니다. 정리28의 증명(107p) "정신의 코나투스 또는 사유 역량은 신체의 코나투스 또는 행위 역량과 동등하며 본성상 그것과 함께 하는 것이다. " 결국 '정신의 코나투스=사유 역량, 신체의 코나투스=행위 역량'이고,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동등하다고 볼 수 있겠네요.

  • 2023-06-27 11:22

    알찬 후기 감사해요. 진달래샘 말씀대로 세미나에서 주로 능동과 수동, 의지에 관해 가장 많이 얘기 나누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초반에 요요샘이 질문하신 자연의 행위역량에 관해 세미나가 끝나고 더 생각해봤어요. 특히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이라는 말에 관해서요. 다시 보니 이 두 개념은 넓게는 자기 원인으로서의 실체라는 말까지 설명하는 듯합니다.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은 알다시피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중에서 능산적 자연은 자연을 행위 역량의 측면에서 바라본 것이고 3부 서문에서는 자연을 능산적 자연 측면에서 설명한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능산적 자연이 행위 역량적 측면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소산적 자연이란 어떤 것을 가리킬까 생각해보니, 소산적 자연은 말하자면 자연의 어느 한 정지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모든 것을 생산된 것이자 결과로서 바라본 말이 될 수 있을 듯해요. 스피노자는 자연에 이렇게 두 이름을 붙여주지만, 이전에 흔히 그랬듯 자연을 소산적 자연으로서만 바라본다면 자연을 만든 창조주에 대한 질문, 그 기원에 대한 질문이 나오게 됩니다. 여기에 스피노자는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의 존재로서의 신 또는 실체, 스스로 원인이자 결과인 자기 원인으로서의 실체, 능산적 자연이자 소산적 자연을 말함으로써 그 질문에 답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이 실체의 본성을 표현하는 존재인 어떤 특수한 실재들로서 인간을 설명하고 있고요. 그러면.... 정지된 상태, 어느 추상적인 조건에서 우리는 소산적 자연의 일부이지만 동시에 움직이는 우리로서 능산적 자연의 일부이니 아무튼 역량을 발휘하고 있겠지요? 오늘도 열심히 욕망해보겠습니다. ㅎㅎ

  • 2023-06-28 01:40

    사랑과 미움에 대해 특이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 아렘입니다. 제 질문은 별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쁨과 슬픔에 대해서는 정의를 내리는 스피노자가 사랑과 미움에 대해서는 정의를 내리고 있지 않다는게 제 질문의 요지였습니다. 이 말 또한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논리학을 적용한 시비였습니다.

    기쁨: 정신이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게 되는 수동 —> 수동은 부적합한 것이고, 부분적인 것입니다. 부분적이란 말은 우리가 적합한 원인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아니면 외부겠지요.
    사랑: 외부 원인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 —> 기쁨이라고 했으니, 외부 원인에 대한 관념이란 말만이 사랑과 기쁨을 구분해주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기쁨에서 저 수동이란 말이 이미 외부 원인에 대한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 시비는 스피노자가 사랑을 정의하고 있느냐란 말이었습니다. 사랑과 기쁨이 동어반복으로 들려서 한 질문이었습니다. 스피노자가 자기 입으로 기초정서를 욕망/기쁨/슬픔 세 가지 밖에 없다고 했으니 사랑은 기쁨과 뭐가 달라도 달라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의 정의로 쓰인 말에서는 기쁨과의 차이를 발견할 수 없어 보입니다. 사랑=기쁨이란 말과 사랑은 기쁨의 일종이다라는 말은 다른 말이고 분명히 사랑은 기쁨에 더해 무언가 의미적인 제한이 가해져야 할 것 같은데… 외부 원인에 대한 관념이란 말은 수동이란 말때문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동어반복이 어떻게 정의가 될 수 있느냐 이 말이었습니다.

    부족한 제게 가르침을 주시길…

    • 2023-06-28 08:04

      제가 생각하기에 기쁨은 사랑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보입니다.
      기쁨에는 사랑처럼 '외부 원인'을 수반하는 기쁨이 있는 반면 자부심이나 자족감처럼
      '내부 원인'을 수반하는 기쁨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정리31의 주석에도 "사랑과 미움이 외부 대상들과 관련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정서들을 다른
      이름으로 지칭할 것이다. 곧 내부 원인의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을 나는 자부심(뿌듯함)이라 부를 것이며....
      이것들은 자신이 칭찬받거나 비난받는다고 믿을 때 생겨나는 기쁨과 슬픔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강신주의 <감정수업>에서는 "기쁨이라는 감정과 사랑이라는 감정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는,
      사랑에는 외부 원인(대상)이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고 사랑편(79p)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 ^

      • 2023-06-28 09:10

        음.. 저는 스피노자가 기쁨과 슬픔이 수동이면서도 다른 한편 '이행'이라고 정의한 것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기쁨은 더 큰 완전성으로의 이행하게 되는 수동이고 슬픔은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게 되는 수동이라고 정의하니까요. 그런데 기쁨과 슬픔의 정의에서는 외부원인이 어떤 종류인지가 구별되지 않고 모든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 스피노자의 정서를 기쁨 계열과 슬픔 계열로 나눌 수 있게 되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기쁨 안에 사랑이 들어가고 슬픔 안에 미움이 들어가는 것이라고...
        사랑과 미움의 정의가 외부원인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과 슬픔인데요. 외부원인에 대한 관념이란, 어떤 실재의 이미지에 대한 관념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사랑과 미움은 내 신체의 변용=이미지를 만든 대상에 대한 관념을 갖습니다. 그런데 기쁨 계열에서 가령 희망이나 안도감은 이미지 중에서도 대상+시간의 관념이 개입되는 기쁨이고, 만족은 이미지 중에서도 대상+비교가 관련된 기쁨이고 등등 이런 차이들이 덧붙여지거나 혹은 기쁨, 슬픔이 더 다채롭게 분화되어 가는 것 아닌가 싶어요.
        써놓고 나서 세븐샘 댓글을 읽어보니 제가 세븐샘을 똑같이 반복했네요.ㅎㅎ 지울까 하다가.. 그냥 두는 걸로.^^ 댓글을 쓰다 문득 아렘샘의 문제제기가 데카르트의 기본정념인 사랑과 미움과 스피노자의 기쁨과 슬픔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라는 질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혹시 그런가요? 궁금합니다.^^(그런데 데카르트가 정서를 정의할 때는 '이행'이라는 생각이 없다는 게 가장 큰 차이인 것 같기는 하군요.)

        • 2023-06-28 10:17

          두 분 말씀이 맞습니다. 스피노자가 의도한 바는 그런것으로 보입니다. 내부 외부를 구분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 내부를 지시하려는 그 순간 그 역시 정념(수동)이 되어버리고 이는 이미 외부를 함축할 수 밖에 없는 사태와 만나게 될텐데... 뭐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더 나가 보자면....정군샘이 싫어라 하실텐데.... 행위주체/인간주체가 우리라는 말로 둔갑한채 '나(주체)'가 명시적으로 드러나고 있지 않나 뭐 그런 생각도 듭니다. 내/외부가 나뉘고, 능/수동이 나뉘는 국면에서 주체가 없다 이런 말을 하기는 어설퍼지는 국면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 2023-06-28 14:40

            일단 저는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주체'의 의미를 생각해 봐야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주체'는 데카르트의 '주체'처럼 의지의 1차적 원인으로 이야기되는 주체는 아닐 겁니다. 그것은 커다란 네트워크 안에 결절점처럼 존재하는 일종의 노드 같은 것이라고 봐야하겠죠. 스피노자의 주체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 주체의 성격은 '정념적 주체(수동적 주체)'가 기본값일 겁니다. '주체'가 없다기 보다는 '주체적 주체는 없다'가 맞다고 봅니다.
            다음, 기쁨은 '큰 완전성으로 이행해 가는 정념 = 기쁨'과 '외부 원인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은 앞서 두 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포함관계를 갖는다고 봐야할 겁니다. 조금 더 생각해 보면 '기쁨 계열'의 정념들은 '기쁨'의 변용들로, '슬픔 계열'의 정념들은 '슬픔의 변용들'로 생각해 볼 수 있을겁니다. 그것들이 변용들이라는 점에서 그것들은 같은 것이지만 사실은 다른 것들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러면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닌가 싶지만... ㅎㅎㅎ 어떨지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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