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시간> 5주차 후기 - 공간성과 공동 현존재

매실
2021-10-02 22:10
248

 

 

서문 읽을 때만 해도 이 책을 과연 끝낼 수 있을까 막막하기만 하던 <존재와 시간> 을 벌써 1/3이나 읽었다. 철학 책을 거의 10여 년 만에 읽고 있는데 그동안 얼마나 책을 듬성듬성 읽었는지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다. (나는 전체 흐름 파악에서 요점 파악으로 가고 디테일을 무시하는 책 읽기를 해왔다.) 주어, 술어, 조사에 부사까지 꼼꼼히 읽지 않으면 독해가 전혀 되지 않는 <존재와 시간>을 읽으며 책 읽는 법을 새롭게 익히고 있다. ( 또 반면 요즘 다른 책을 읽으면 상대적으로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서 자꾸 다른 책 읽기로 도피한다.) 

 

이번에 발제 쓰면서 소광희 번역, 이기상 번역, 그리고 소광희 강독판까지 읽었는데도 개념이 명료하게 정리가 되지 않았다. 하이데거의 개념을 하이데거의 개념으로 풀어가는데 익숙하지 않고, 자꾸 이미 아는 용어로  쉽게 이해하려 해서 방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어두운 동굴 속처럼 잡힐 듯 말 듯 한 개념을 더듬거리다 보면 머리털이 자꾸 뽑혀나가는 거 같고 한 문장 한 문장 읽을 때마다 한숨이 푹푹 나오지만,  <존재와 시간>은 존재의 자명성을 의심하고, 끝까지 존재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해주지 않으며, 그 모호함만이 ‘자명하다’는 정군샘의 말에 체증이 ‘우선’ 조금 내려갔다. 

 

 

*

이번 주 읽은 내용에서는 하이데거가 데카르트를 대차게 비판했다. 

 

책의 구조를 다시 보면,  2장에서 현존재의 존재 구성들로서 “세계”, “안에 있음” “(현)존재”를 제시하며 윤곽을 그리고, 3장에서 세계를 분석하고, 4장에서 현존재, 5장에서 안에 있음을 말한다.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존재하는 ‘세계’를 말하기 위해, 또 현존재와 관련된 세계의 한 측면으로서 “공간”을 말하기 위해, 존재와 세계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해 기존의 데카르트 세계관을 비판할 필요가 있었다.

 

데카르트에게 주체와 세계는 구분되어 있다. 세계는 주체와 분리된 대상이다. 그 대상의 실체성은 속성에 의해 인식될 수 있는데, 물질에서 형태나 운동의 변화 속에서도 자신을 유지하는 것이 “연장”이라고 한다. (실체의 속성엔 연장과 사유가 있다고 했다.) 데카르트는 이 연장 실체로부터 세계를 연역한다. 주체는 이 세계를 “인식”함으로서 파악한다. 세계에 ‘속한’ 사물들 역시 마찬가지다. 사물이 주체에게 유용하다는 '가치'가 있을 때 그 사물의 속성은 파악된다. 

 

하이데거는 이런 데카르트의 사고방식을 비판한다. 그러기 위해서 존재와 분리된 세계와 사물이 속한 공간들이라는 개념부터 완전히 바꾼다. 

 

하이데거에게 공간이란 현존재와 사물을 “배려”할 때, 다시 말해 목적이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그때 그때의  “사용 사태”(내가 망치를 손에 들고 못을 박는 그때)에 의해,  발견되고 ‘펼쳐지는 것’이다. 주체 따로, 사물 따로, 공간 따로가 아니다. 물질적, 수치적 공간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간과 공간은 ‘겹쳐지지도 않는다.’ 두 사람이 같은 식탁에 앉아 있다 하더라도 한 명은 식탁에서 커피를 두고 마시고, 한 명은 노트북으로 글을 쓰고 있다면 각자의 ‘공간성’은 다를 수 있다. 사물 역시 이미 선행하는 목적과 가치가 있지 않다. 하이데거에게 있어 물건은 '쓸모'를 다 했다고 버리면 그만인 것이 아니다.  좀 뜬금없을 수 있지만 여기에서 우리 아이가 애지중지 하는 곰인형이 생각나는데 나는 더럽고 냄새나니까 세탁하자고 하면 아이는 질색을 하고 인형을 끌어안으며 숨긴다. 기능과 가치 측면에서 접근하는 나와 달리 아이는 인형을 "배려" 하는 것 같다. 개념은 개념으로 이해해야 하는 거 같은데, 그게 안 되어서 자꾸 예를 들게 된다.  

 

4장 요약까지 쓰면 무사샘이 쓸 얘기가 없으실까봐 양보하고, 3장까지만 ‘내용 정리’ 후기를 썼다.  

 

 

*

4장에서 "공동존재"에서 "세인"까지 나아가는 전개에 깊은 감동을 받았던 것만 감상적으로 언급하자면, 

하이데거가 말하고 싶은 바가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나서 인 거 같기도 하고 다른 장에 비해 이해가 잘 되어서인 것 같기도 한데, 무엇보다도 예전에 (듬성듬성) 접한 책들의 사상의 원료를 찾은 반가움 때문이었다.

 

특히 여기서 주디스 버틀러가 떠올랐다. 사실 버틀러 책을 본격적으로 읽어 보지 않고 해설서와 강의로만 접한 걸로 끼워 맞추긴 좀 무리가 있지만…  ‘순수한 나는 없고 ‘타자성으로 뭉쳐진 나’만 있으며,  우린 자신에 대해 충분히 투명하게 말할 수 없고,  너도 나만큼 타자성에 의해 불투명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우린 연대할 수 있다’는 내용의 강좌에 큰 감명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것도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26절을 읽으며 이것이 생각났다.

 

한편 27절에서 공동존재인 현존재는 타자에 의해 예속된다는 말은 공동존재를  ‘우린 모두 함께 있다’는 식으로 나이브하게 해석할 수 있는 위험성을 지적해 줘서, 그동안 타자(성)에 대한 나의 석연치 않음이 약간 해소되기도 했다. 그리고 앞으로 하이데거가 무슨 말을 할지 조금 기대되기 시작했다. 

 

하이데거는 나치 전적도 있고 아렌트와 결별한 이후에도 아렌트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참 정이 안 가지만, <존재와 시간>을 썼던 30대의 하이데거를 떠올리며(20대의 하이데거도 떠올리며) 이 책을 읽어가보기로 했다.

 

참, 하이데거가 20세기 철학에 ‘절대적(?)’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데, 해러웨이나 버틀러의 문장을 다시 접하니 <존재와 시간>의 주석처럼 읽히는 놀라운 일이 생겼다.  하이데거를 읽고 나면 이 책들도 본격적으로 읽을 강단이 생길 거라고 기대해본다.

 

 

“주체가 된다는 것은 자율성을 확보하고 막강해지며 신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주체됨은 환상이며 그 때문에 타자와 함께 종말의 변증법에 들어가게 된다. 반면 타자됨은 다양해지는 것, 분명한 경계가 없는 것, 너덜너덜해지는 것, 실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하나는 너무 적지만 둘은 너무 많다" (사이보그 선언, 도나 해러웨이)

 

"나 자신에 대한 나의 설명은 부분적이고, 거기에는 내가 어떤 명확한 이야기도 지어낼 수 없는 것이 따라다닌다. 나는 내가 왜 이런 식으로 출현했는가를 정확히 설명할 수 없고, 서사적인 재구성을 향한 나의 노력은 항상 수정 중에 있다. 내가 어떤 설명도 할 수 없는 것이 내 안에 그리고 나와 연관해서 존재한다." (윤리적 폭력 비판, 주디스 버틀러)

 

 

 

끝. 

 

 

 

댓글 4
  • 2021-10-02 23:18

    하이데거는 진짜 그 인간 됨됨이를 떠나서, 여기저기 (하이데거에게) 한 발씩 걸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꼭 한번 통과해 봐야하는 철학자입니다. 여러 번 말씀드리지만, 그런 철학자들이 철학사에는 주기적으로 등장하고요. 하이데거를 읽으면서 가장 최신의 철학들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여전히 하이데거의 시대 안에 있는건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ㅎㅎ 그도 그럴 것이 아직 100년이 채 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보자면 하이데거가 그렇게나 비판한 데카르트의 시대도 여전히 진행 중이기는 합니다. 아마 사유의 물적 토대(참 고풍스러운 어휘로군요 ㅋㅋ)가 여전하기 때문일 겁니다. '개인-주체'과 그것을 기반으로한 모종의 공동체가 여전히 남아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주체성'이라는 테마는 현실의 '주체'가 어떻게 되어야만, 어떻게 될 겁니다. ㅎㅎㅎ 

     

    벌써 3/1이로군요. 여전히 어렵게 어렵게 나가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처음보다 많이 익숙해졌습니다.(아마 다음에 또 읽어도 똑같을 겁니다 ㅎㅎㅎ(실험적 증거가 여기 있어요!)) 남은 3/2도 '어떻게 어떻게' 읽어가 보아욧!

    • 2021-10-07 22:21

      '하이데거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그리 낯설지는 않고 오히려 자연스럽기도 하면서도 (들으면 끄덕끄덕이고요), 무언가를 각 잡고 접근할 땐 데카르트적으로 사고하게 되더라고요. <존재와 시간>이 읽기는 어렵지만 풀이가 되면 알아는 들을 수는 있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책을 보면 다 헝클어지다는게 문제에요. ㅎㅎㅎ  

       

       

  • 2021-10-03 10:46

    음.. 서론을 읽어서 좋은 점도 있고 안좋은 점도 있는 것 같아요.

    서론에서 뭔가 큰 그림을 아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좋았는데 본문을 읽으니 아는 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되는 당혹감?ㅋ

    저는 공간성을 읽으며 데카르트와 칸트, 그리고 하이데거가 과학과 맺는 관계가 더 잘 구분되기 시작하는 것 같아요.

    데카르트가 수학적 인식을 철학적/과학적 인식의 확고부동한 토대로 놓았다면

    칸트는 과학이 가능한 토대로 인간의 선험적 인식(직관형식으로서의 시공간)을 내놓았고,

    하이데거에 이르러서는 현존재(세계-내-존재)의 공간성이라는 토대가 있었기 때문에 과학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군요.

    이 세사람의 관계는 서로를 끌어당기기도 하고, 서로를 밀쳐내기도 한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물론 그 사이에 스피노자나 훗설 같은 기라성 같은 인물들도 있지만요..

    물론 이미 사라진 앞사람은 모르는 뒷사람들 만의 사랑과 전쟁임에 분명합니다만..ㅎㅎ

    우리 속에는 이들의 관점이 뒤섞여 있거나 필요할 때마다 다른 걸 꺼내쓰기도 하는 것 같구요.^^

    • 2021-10-07 22:22

      저는 칸트는 그냥 절로 스캔하고 넘어가버렸는데 세 사람이 과학과 맺는 관계가 그렇게 다를 수 있군요!!  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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