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회> 삶은 처분될 수 없다

경덕
2023-11-23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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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2022. 7~).

난잡한 공부가 체질이라 여러 세미나와 워크숍을 유랑한다.

 

 

 

 

삶은 처분될 수 없다
 
 
 
9월 26일 저녁, 활동가 S는 어느 동물권 단톡방에 이런 메세지를 남겼다. 
 
"살처분 관련해서 뭔가를 하고 싶어요."
 
강원 화천군 양돈농장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발생한 다음 날이었다. 그날 언론에는 100건에 가까운 기사가 쏟아졌다.
 
'강원 화천서 야생맷돼지 ASF 발생…농장 주변 차단방역 총력'(데일리안)
'강원 화천 양돈장서 ASF 발생…긴급 살처분 실시'(농민신문)
'강원 화천서 아프리카돼지열병 발생…1500여마리 살처분'(news1).
 
 
언론에서 전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해당 정밀검사에선 하남면 원천리에 소재한 A 발생농장(사육규모 1569마리) 21마리의 검사 시료 중 4마리에서 양성 개체가 발견됐다...(농민신문). 중수본은 “ASF가 확산하지 않도록 관계기관과 지자체는 신속한 살처분, 정밀검사, 집중소독 등 방역 조치에 총력을 기울여달라”며 “양돈농가는 농장 내·외부 소독, 방역복 착용 등 기본적인 방역수칙을 준수해 줄 것”을 당부했다.(데일리안)"
 
방역 당국이 가장 먼저 언급한 지시사항은 '신속한 살처분'이었다.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한 첫 번째 지침이 신속한 '죽임'와 '처분'인 것이다. S는 이어서 말했다.
 
"(살처분 관련) 여러 소식으로 조급한 마음이 드는데 집회든 아웃리치든 뭐가 될진 모르겠지만 같이 계획하고 싶으신 분 있으신가요?"
 
그리고 활동가 H가 응답했다.
 
"저요!! 뭔가 할 수 있으면 참여할 마음 있어요!"
 
 
 
삶은 처분될 수 없다
 
활동가들은 살처분을 공론화하기 위한 모임을 만들었다. 살처분에 대해 공부하고, 그 시스템 자체를 문제시하며 반대 운동을 기획하는 모임이었다. 
 
"9월 26일, 강원도 화천 지역에 발생한 돼지열병으로 1500명의 돼지가 살처분 당해 땅에 묻혔습니다. ‘축산동물’로 분류되는 동물들은 전염병에 걸릴 시, 인간에게 직접적인 전염 가능성이 없더라도 살처분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전염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발생지 근거리에 있으면 예비 숙주로 판단되어 죽임당하는 '예방적 살처분'을 실시합니다. '예방적 살처분'의 거리범위가 축소되면서 살처분되는 동물의 명수는 줄어드는 추세이지만, 이는 여전히 철저한 경제논리에 입각하고 있습니다. 동물권의 시각으로, 살처분이라는 시스템 자체를 문제시하고 공론화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먼저 공부 모임이 시작되었다. 관련 다큐와 논문, 책, 농림축산식품부에서 작성한 <아프리카돼지열병 긴급행동지침[SOP]>, 시행령, 방역노동자 실태조사 등의 자료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임에서 나눈 이야기는 노션에 기록해서 참여하지 못한 사람도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공부가 진행되면서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도 이어졌다. 인간은 병에 걸렸다고 죽이지 않는데, 왜 동물은 죽여야 될까? 왜 어떤 존재는 죽이고 어떤 존재는 죽임을 당할까? 감염 여부로 살처분의 타당성을 결정해도 괜찮을까? 동물에게 백신을 맞혀서 철저하게 관리하면 괜찮을까? 동물보호의 기준이 쾌고감수능력으로 충분할까? 그것과 상관없이 존엄을 이야기할 수 없나? '가축화'자체에 의문을 제기해야 하지 않나? 공급 과잉으로 가축 동물을 죽이는 경우는? 병 걸렸다고 도태시키는 문제는? 농장동물, 실험동물, 반려동물, 야생동물의 안락사 문제는? 이 모든 것이 거대한 동물착취 산업 전반의 문제라면? 살처분을 담당하는 공무원의 고통은 어떻게 다뤄져야 할까? 동물권과 노동자 인권을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우리의 목소리가 잘 전해지려면 어떤 정치가 필요할까? 선거방식을 바꾸야 할까? 단계적 변화를 위해 중간 목표를 정하는 게 좋을까? 중간 목표로 배제되는 동물들은 어떡하나?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려면 어떤 액션이 필요할까? 구호를 외치는 것으로 충분할까? 예술적 퍼포먼스는 어떨까?
 
그리고 10월 20일. 또 다른 전염병과 살처분 소식이 들려왔다. 
 
 
[살처분 반대 모임 인스타그램]
 
 
"최근 아시아 지역에서 급속도로 확산하고 있는 럼피스킨병은 제1종 가축전염병으로 소나 물소 피부에 혹 덩어리가 생기는 악성 피부병이지만 사람에게는 감염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병에 걸린 소는 고열과 눈, 코에서 분비물이 많아지고 피부 등에 많은 작은 혹 덩어리가 생겨 생산성 저하, 유량 감소, 불임, 가죽 손실 등을 유발한다. (...) 주변 방역대(10㎞)에는 180여 농가, 7800여 마리의 소가 사육되고 있어 지역 축산 농가는 비상이 걸린 상태다. 시는 곧바로 해당 농장 출입을 통제하고 해당 농가 전체 소에 대해 살처분 전문 업체를 불러 살처분에 들어갈 예정이다." - '[단독] 국내 최초 럼피스킨병 발생... 축산 농가 비상'(충청투데이)
 
활동가들은 공부모임과 더불어 <살처분 반대 액션 - "삶은 처분될 수 없다"> 퍼포먼스를 기획했다.
 
"현재 소 농가에서는 ‘럼피스킨’이라는 전염병이 돌고 있습니다. 국가는 이번에도 살처분이라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우리는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도태의 대상이 되고 죽음이 묵인되는 구조가 잘못되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소들이 땅에 묻힐 때 ‘한우와 원유 수급 영향’을 염려하는 구조가 폭력적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살처분반대모임에서는 이에 공감하는 사람들과 함께 액션을 계획하였습니다. 11월 11일 토요일 오후 2시, 서울 한복판에서 우리는 살처분되는 모습을 재현하며 살처분이 틀렸음을 알리고자 합니다. 다양한 역할로 참여하실 수 있으니 함께 해요!"
 
액션을 함께할 참여자도 모집했다. 살처분 당하는 동물, 방역복 입은 인간, 기록 활동가, 피켓 드는 사람, 사운드 담당 등의 역할이 필요했다.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되는 중에도 나는 선뜻 참여하지 못 한 채 망설였다. 여러 사안들과 복잡하게 맞물려 있는 살처분 문제가 너무 거대해 보였고, 공부 모임에서 제기된 질문들에 분명하게 답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축산업을 '근절'하는 게 가능할까? '반대'를 외친다고 나아질까? 그러다 스스로에게 이런 의문이 들었다. 확실한 답이 있을 때만 행동할 수 있을까? 완전한 합의가 이루어져야만 함께할 수 있나? 뭐라도 하는 중에 대안이 만들어지는 거 아닐까?
 
그렇게 머뭇거리는데 단톡방에 퍼포머가 부족하다는 메세지가 올라왔다. 그때서야 나는 뭐라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피살처분 역할로 퍼포먼스에 참여했다. 퍼포머로 신청한 사람들은 리허설을 위해 미리 연습실에 모였다. 우리는 퍼포먼스를 기획한 활동가들과 세부적인 연출을 함께 고민하며 리허설까지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2023년 11월 11일. 우리는 서울역 앞에서 다시 모였다.
 
 
[살처분 반대 모임 인스타그램]
 
 
 
살처분 반대 액션
 
2023년 11월 11일. 토요일 오후 2시. 서울역 앞.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전염병 발병으로 인해 반경 500m이내 즉각 살처분, 3km이내 예방적 살처분을 시행합니다. 모두의 안전을 위해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Due to the epidemic, immediate culling is carried out within a 500m. Preventive culling is carried out within a 3km. Please cooperate for everyone's safety."
 
방역복 입은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동물들을 강제로 끌고 온다. 비닐이 덮여진 구덩이에 동물들을 묻는다. 동물들이 쓰러지고 널부러진다. 고통스러운 몸부림, 비명소리가 이어진다. 방역복 입은 사람들이 비닐로 동물들을 덮는다. 그리고 그 위에 흙을 쏟는다.
 
"정부는 현재 전염병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경제적 손실이 없도록 살처분 보상금을 지급하는 등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The government is now effectively controlling the epidemic. We will do our best, such as paying compensation for the culling so that there is no economic loss to our people."
 
 
 
 
사회자 : 9월 20일, 이탈리아 경찰이 생추어리에 침입해, 그 곳의 거주민은 돼지들을 살해했습니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발병하여 ‘살처분’을 시행한 것입니다. 현재 소 농가에서는 ‘럼피스킨병’이라는 전염병이 돌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이번에도 살처분이라는 방법을 택했으며, ‘한우와 원유 수급 영향’을 염려합니다. 몇 일 전, AI, 즉 조류인플루엔자가 발생했고, 국가는 수많은 조류들을 살처분했습니다. 살처분은 육상동물부터 수생동물까지, 축산동물부터 수산동물, 실험동물, 야생동물, 동물원에 감금당한 동물들까지, 모든 비인간동물을 대상으로 시행됩니다. 생매장(매몰), 가스 살해, 독살, 폭행으로 인한 살해, 전기 도살 등, 다양한 방식으로 시행됩니다.
 
 

[다 같이 구호]

 
인간이 아니라서 / 죽였다
약하다고 / 죽였다
아프다고 / 죽였다
병에 걸렸다고 / 죽였다
장애가 있다고 / 죽였다
자본을 아끼려고 / 죽였다
생명을 도구화하는 시스템이 / 죽였다
죽음이 이윤이 되는 구조가 / 죽였다
살해를 외주화하며 / 죽였다
비국민과 용역에게 떠넘기며 / 죽였다
우리가 살아갈 땅도 / 죽였다
 
 
 

 

 

 

[성명서 낭독]

 

국가의 살처분에 대한 살처분 반대 모임의 입장입니다.

 

하나, 우리는 병의 특징, 질병의 인간종에게의 전염 여부, 질병의 치사율, 비인간동물 당사자의 질병 감염 여부와 무관하게, 모든 살처분에 반대합니다. ‘예방적’ 살처분이어서, ‘과도한’ 대처이기에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병에 걸린 존재도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건강하지 않은 존재도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또한, 쾌고감수능력과 무관하게, 비인간동물과 인간동물, 모든 동물에 대한 착취에 반대합니다. 고통을 느끼는 지 여부도 인간중심적인 시각으로 임의적으로 판단한 것이고,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죽이거나 착취해도 되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떠한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부합하는 존재는 ‘보호’하고, 부합하지 않는 존재는 배제하는 권력을 경계합니다. 타자의 고통도 자의적인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기에, 죽는게 낫다고 판단하는 권력을 경계합니다.

 

하나, 살처분이 폐지되기 위해서는 동물산업이 철폐돼야 합니다. 축산업, 어업, 동물실험을 시행하는 산업, 야생동물 납치 살해 및 거래 산업, 비인간동물 전시 및 감금 산업 등을 비롯한 동물산업의 철폐 없는 살처분 폐지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지속 가능한 축산업, 어업, 동물실험, 동물원 등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동물복지 농장, 동물산업의 존속을 위한 백신 등은, 인간의 자본 축적을 위해 마음대로 죽여도 된다는 전제 아래에서의 ‘대안’입니다. 인간이 비인간동물을 착취하는 이상, 동물복지는 없습니다. 살처분의 폐지는, 비인간동물을 착취하는 구조를 유지하는 "동물복지"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살처분을 "동물복지"의 문제로 바라보는 프레임을 전환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 우리는 살처분이 일어나도록 하는 착취적이고 위계적인 구조를 무너뜨리고자 합니다. 살처분을 시행하는 주체는 공무원에서 비국민 노동자와 용역으로 바뀌었습니다. 내몰려있는 비인간동물을 살해하는 것에 반대하듯, 내몰려 있는 이들에게 살해를 외주 주는 구조에 반대합니다. 살처분은, 축산업 등 동물산업의 피해를 줄이려고 개인의 재산을 국가가 처분하는,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인간과 비인간에 대한 구분이, 가축과 가축이 아닌 동물에 대한 구분이 위계를 만듭니다. 현재의 ‘가축’은 인간에 의해 강제로 개변된, 취약하고 장애화된 신체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축'을, 건강하지 못하다는 근거로, 질병에 감염됐다는 이유로 죽입니다. 농장동물의 재생산 능력이나 장애가 있는 동물들이나 생산력이 떨어지는 동물에 대한,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존재에 대한 ‘선제적 도태’도 살처분입니다. 출생부터 질병의 감염, 살처분까지, 모든 과정이 철저하게 자본주의 논리대로 굴러갑니다. 감염된 사체와 폐기물을 값싸게 처리하기 위해, 사료로 만들거나 땅으로, 수로로 버립니다. 그 경로로 또 다른 동물들이 감염되게 되고, 그들은 다시 살처분됩니다.

 

하나, 우리는 누군가의 몸을 소유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구조에 반대합니다. 사유재산의 가치가 떨어지는 걸 막기 위해서 살처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취지 자체가 불평등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국가는 특정 비인간동물을 '가축'으로, '가축'을 '식량'으로, ‘식량’을 사유재산으로 여기며, 공급가격을 조정합니다. 비인간동물, 그리고 식량은 사유재산이어서는 안 됩니다.어떤 존재가 어떤 존재를 죽여도 되는 대상으로 정하는 사회에 저항하고자 합니다. 동물착취가 자본주의내에서 산업으로 번역되는 한 살처분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살처분이 존재하는 이유는, 생명을 도구화하고 피해자의 피해가 가해자에게 이득이 되는 구조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도태의 대상이 되고, 죽음이 묵인되는 구조가 잘못되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불가피하다'는 말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살처분반대모임은 인간을 위해, 경제성을 위해 비인간 동물을 죽여도 된다는, 비인간동물을 '처분'할 자격이 인간동물에게 있다는 전제 자체를 재고하기를 촉구합니다. 감사합니다.

 

2023년 11월 11일
살처분반대모임.

 

 

 
 
그리고 연대발언이 이어졌다. 나도 준비한 발언문을 낭독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살처분 반대 액션에서 살처분 당하는 동물로 참여한 인간 동물입니다. 저는 조금 전에 방역복 입은 인간에게 끌려가서 비닐이 덮여진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제 몸 위로 흙이 마구 쏟아졌고 저는 숨이 막혀 고통 속에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저는 오늘 액션을 통해 땅 속에 묻힌 동물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이 곳은 실제 살처분 현장이 아니라 집회 신고를 마친 서울역 광장이고, 저는 대한민국 사회 안에서 보호 받고 있는 인간 시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치면 치료를 받을 것이고, 죽으면 애도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이런 저는 그들의 죽음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럼피스킨 병으로 이미 살처분되었거나 살처분 예정인 동물이 총 5766명이라고 합니다. 왜 누군가의 죽음은 애도되지 못하고 처분되어야 할까요? 왜 누군가의 죽음은 부고란에 이름이 실리지 못하고 5766이라는 익명의 숫자로 처리되어야 할까요? 왜 누군가의 질병은 끝까지 치료하려 하지 않을까요. 왜 누군가는 '예방적'으로 보호받지 못하고 살해되어야 할까요. 왜 그들의 죽음은 기억되지 않고 땅 속에 파묻힐까요. 
 
저는 그들의 죽음이 나의 생존과 분리될 수 없기에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동물들이 내지르는 비명 소리를 듣습니다. 그들이 끝까지 몸부림치며 저항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 세상에 죽여도 되는 동물은 없기에, 땅 속에 처분된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며, 저는 가축 동물들의 살처분에 반대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의 조건을 함께 만들어가기 위해, 여러분의 관심과 행동을 촉구합니다."
 
 
 
 
뭐가 될진 모르겠지만, 같이
 
<살처분 반대 액션>을 마치고 우리들은 소품으로 활용한 흙을 조금씩 나누어 가져갔다. 누구는 화분에 뭘 심어보겠다고 했고, 누구는 퍼포먼스를 다시 한다면 그때 가져올 거라고 했다. 나도 포대 하나에 흙을 가득 담아 집으로 가져왔다. 누굴 죽이는 흙이 아니라, 살리는 흙으로 다시 쓰고 싶어서. 쓰러진 몸 위로 쏟아진 흙을 기억하며, 지속적인 관심과 행동을 스스로에게 촉구하고 싶어서.
 
'뭐가 될진 모르겠지만, 같이' 무언가를 시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어서. 머뭇거리고, 망설일지라도.
 
 
 
 
 
 
** 퍼포먼스 사진은 살처분 반대 모임 참여자가 함께 기록하였습니다. 
 
 <살처분 반대 액션> 퍼포먼스 영상 
댓글 6
  • 2023-11-23 10:08

    머뭇거리고, 망설일지라도
    경덕님이 걷는 그 길을 응원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 2023-11-23 11:50

    경덕님 몸 위에 쏟아졌던 그 흙이 다른 생명을 살리는 흙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됩니다.

    검은 포클레인이 들이닥치고/ 죽여! 죽여! 할 새도 없이/ 알전구에 똥칠한 벽에 피 튀길 새도 없이/배 속에서 나오자마자 가죽이 벗겨져 알록달록 싸구려 구두가 될 새도 없이/새파란 얼굴에 검은 안경을 쓴 취조관이 불어! 불어! 할 새도 없이/이 고문에 버틸 수 없을 거라는 절박한 공포의 줄넘기를 할 새도 없이/옆방에서 들려오는 친구의 뺨에 내리치는 손바닥을 깨무는 듯/내 입안의 살을 물어뜯을 새도 없이/손발을 묶고 고개를 젖혀 물을 먹일 새도 없이/엄마 용서하세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할 새도 없이/얼굴에 수건을 놓고 주전자 물을 부을 새도 없이/포승줄도 수갑도 없이(김혜순, '피어라 돼지' 일부 인용)

  • 2023-11-23 17:06

    뭘 하기엔 너무 거대하고 복잡해서 엄두가 나지 않는데, 그래도 뭘 하는 사람들이 있네.

  • 2023-11-23 17:29

    쌤이 던진 많은 질문들에 머뭇머뭇 함께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2023-11-23 21:13

    망설이며 머뭇거리면서도 경덕님이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과 같이 걷는 그 길, 저두 응원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 2023-11-24 14:13

    불가피함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라는 점, 모든 발언문들이 언제나 우리의 전제를 재고하고 촉구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이 깊이 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이상 조치나 정답이나 반성이 아니라 머뭇거림과 고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상명상
          요요 문탁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있다.  앞으로 10년은 불교공부를 계속 함께 할 친구들을 찾고 있다.  명상적 삶, 일상의 영성, 공동체와 영성, 나이듦과 영성이  화두다     <일상 명상> 연재를 시작하며   작년 1월에 ‘요요의 월간명상’을 시작했는데, 6개월을 쉬고,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셋이다. 지난해에 불교 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친구들과 번갈아 가며 새로 리뉴얼한 <일상명상>을 쓰기로 했기 때문이다. ‘요요의 월간명상’ 3회차 글에서 나는 문탁에서 함께 명상하는 친구들을 만들고 싶다는 바램을 밝혔다. 그런데 정말로 명상 친구가 만들어졌다.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이 코너는 이제 요요, 오영, 도라지, 세 사람이 한 달에 한 번씩 돌아가며 쓴다. 아마 3인 3색의 명상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이 글은 우리가 어떻게 명상 친구가 되었는지를 돌아보는 이야기이다.     사띠 수행을 공부하다   지난해 가을 불교학교에서 우리가 공부한 것은 사띠(sati) 수행이다. 팔정도 중 여섯 번째가 정념(正念)인데, 정념은 ‘바른 사띠’를 말한다. 그만큼 불교 수행에서 사띠가 중요한 개념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띠에는 ‘기억한다’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을 살핀다’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영어로는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로 옮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순수한 주의집중(bare attention), 알아차림(awareness, noting) 등을 쓰기도 한다.   우리말 번역어도 통일되어 있지 않다. 최초로 니까야를 한글로 완역한 전재성님은 사띠를 ‘새김’이라고 번역했다. 마음에 새긴다고 할 때의 새김이다. 새김은 사띠의 첫 번째 의미인 ‘기억한다’, ‘잊지 않는다’의 뉘앙스가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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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2024.01.10 | 조회 431
로이의 근사한 양생
        건달바와 둥글레를 거쳐 로이로 인문약방에서 공부하고 일하고 있다. 양생은 가장 가까운 일상에서부터 시작된다. 나를 빼놓지 않은 近思하고 近似한 양생 이야기를 하고 싶다.        새해는 매번 다르다   2024 갑진년은 청룡의 해다. 갑(甲)은 목화토금수의 오행 중 목(木, 나무)이고 목의 색은 청색이다. 진(辰)이 십이지지에서 용이니 갑진을 청룡이라고 한다. 보통 여기까지 알아보고 청룡 이상의 의미를 찾지 않는다. 다들 재물복, 건강, 마음의 평화를 빈다거나 운동, 금연, 공부 등 비슷한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육십갑자로 이루어진 동양의 역법은 매해, 매달, 매일, 매시 달라지는 하늘과 땅의 기운을 천간(天干)과 지지(地支)라는 글자로 표현하고 있다. 시간의 단위이지만 시간뿐 아닌 공간을 채우는 전체적 기운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매번 오는 새해는 같은 새해가 아니다. 뻔한 새해 계획에서 벗어나 보자.        이렇게 매년 달라지는 간지(천간과 지지)가 의미하는 기운은 운기학과 명리학에서 중요하게 쓰인다. 운기학에서는 간지의 관계성에서 파생되는 기운이 그해의 기후와 몸에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요즘처럼 이상 기후가 자주 나타나고 안정적인 주거 환경에서는 운기를 안다고 해도 별 소용이 없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약국에 있다 보면 기후와 관련해서 비슷한 증상으로 오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예컨대 갑자기 추워지면 비위가 약한 사람들이 줄줄이 찾아온다. 추위에 대비할 에너지 비축이 평소에 안 되어 있기 때문에 면역력이 떨어져 몸에 이상이 온 다. 그러니 운기를 아주 무시할 수는 없다. <동의보감>을 찾아보니 갑진년 운기는...
        건달바와 둥글레를 거쳐 로이로 인문약방에서 공부하고 일하고 있다. 양생은 가장 가까운 일상에서부터 시작된다. 나를 빼놓지 않은 近思하고 近似한 양생 이야기를 하고 싶다.        새해는 매번 다르다   2024 갑진년은 청룡의 해다. 갑(甲)은 목화토금수의 오행 중 목(木, 나무)이고 목의 색은 청색이다. 진(辰)이 십이지지에서 용이니 갑진을 청룡이라고 한다. 보통 여기까지 알아보고 청룡 이상의 의미를 찾지 않는다. 다들 재물복, 건강, 마음의 평화를 빈다거나 운동, 금연, 공부 등 비슷한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육십갑자로 이루어진 동양의 역법은 매해, 매달, 매일, 매시 달라지는 하늘과 땅의 기운을 천간(天干)과 지지(地支)라는 글자로 표현하고 있다. 시간의 단위이지만 시간뿐 아닌 공간을 채우는 전체적 기운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매번 오는 새해는 같은 새해가 아니다. 뻔한 새해 계획에서 벗어나 보자.        이렇게 매년 달라지는 간지(천간과 지지)가 의미하는 기운은 운기학과 명리학에서 중요하게 쓰인다. 운기학에서는 간지의 관계성에서 파생되는 기운이 그해의 기후와 몸에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요즘처럼 이상 기후가 자주 나타나고 안정적인 주거 환경에서는 운기를 안다고 해도 별 소용이 없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약국에 있다 보면 기후와 관련해서 비슷한 증상으로 오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예컨대 갑자기 추워지면 비위가 약한 사람들이 줄줄이 찾아온다. 추위에 대비할 에너지 비축이 평소에 안 되어 있기 때문에 면역력이 떨어져 몸에 이상이 온 다. 그러니 운기를 아주 무시할 수는 없다. <동의보감>을 찾아보니 갑진년 운기는...
로이
2024.01.08 | 조회 328
기린의 걷다보면
          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생업의 기회를 잡아 3년간 일리치약국 정규직으로 지냈다. 2024년 나이듦연구소로 적을 옮겨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를 꿈꾼다.         12월은 분주한 달이다. 공동체에서 1년간 공부한 내용을 갈무리한 에세이 발표도 가야하고 드문드문 송년회 일정도 있다. 주일에 이런 일정이 잡히면 휴일 걷기는 자연스럽게 미루어졌다. 그 사이 흐린 날까지 겹치며 걷기가 점점 더 귀찮아졌다. 12월 중순을 넘기니 몸놀림이 둔해졌지만 모른 척 하던 어느 날, 공동체와 연결되어 알게 된 지인이 공간을 새로 열었다고 해서 축하방문을 하게 되었다. 미리 와있던 분들과 합석을 하게 되었는데 걷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한 분은 걷기강좌를 연다고 했고, 지인은 23년 한 해 동안 줄기차게 걸어서 남산 주변으로 열 가지가 넘은 자신만의 코스도 있다고 했다. 그 효과를 간증하는데, 다 아는 얘기도 더 실감나게 들렸다. 지인은 최근 새로운 책을 냈는데 그만큼 걸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도 했다. 게을러지던 마음에 조금씩 탱탱한 기운이 서려졌다.    집에 돌아와서 지인이 알려준 유튜브를 검색했다. 걷기혁명이라고 적힌 썸네일을 비롯 기적의 걷기라느니 등등 제목도 현란했다. 그 중에 지인이 알려준 걷기 전문가로 소개된 영상을 찾아서 바르게 걷는 방법을 보았다. 영상에서 알려준 바로는, 발뒤꿈치부터 착지하면서 앞으로 내딛으며 걷는데, 이 때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면서 평소 보폭보다 10센티 정도 더 크게 걷는다는 기분으로 걸으라고 했다....
          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생업의 기회를 잡아 3년간 일리치약국 정규직으로 지냈다. 2024년 나이듦연구소로 적을 옮겨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를 꿈꾼다.         12월은 분주한 달이다. 공동체에서 1년간 공부한 내용을 갈무리한 에세이 발표도 가야하고 드문드문 송년회 일정도 있다. 주일에 이런 일정이 잡히면 휴일 걷기는 자연스럽게 미루어졌다. 그 사이 흐린 날까지 겹치며 걷기가 점점 더 귀찮아졌다. 12월 중순을 넘기니 몸놀림이 둔해졌지만 모른 척 하던 어느 날, 공동체와 연결되어 알게 된 지인이 공간을 새로 열었다고 해서 축하방문을 하게 되었다. 미리 와있던 분들과 합석을 하게 되었는데 걷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한 분은 걷기강좌를 연다고 했고, 지인은 23년 한 해 동안 줄기차게 걸어서 남산 주변으로 열 가지가 넘은 자신만의 코스도 있다고 했다. 그 효과를 간증하는데, 다 아는 얘기도 더 실감나게 들렸다. 지인은 최근 새로운 책을 냈는데 그만큼 걸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도 했다. 게을러지던 마음에 조금씩 탱탱한 기운이 서려졌다.    집에 돌아와서 지인이 알려준 유튜브를 검색했다. 걷기혁명이라고 적힌 썸네일을 비롯 기적의 걷기라느니 등등 제목도 현란했다. 그 중에 지인이 알려준 걷기 전문가로 소개된 영상을 찾아서 바르게 걷는 방법을 보았다. 영상에서 알려준 바로는, 발뒤꿈치부터 착지하면서 앞으로 내딛으며 걷는데, 이 때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면서 평소 보폭보다 10센티 정도 더 크게 걷는다는 기분으로 걸으라고 했다....
기린
2024.01.06 | 조회 301
정화와 임수의 좌충우돌 가족-되기
  세계 끝의 가족 2023.12.31. 정화편 Designed by Cho-hui (앞으로 꽃길만 걷고 싶은) 백수 꿈나무 살림의료사회적협동조합 조합원, 희망법/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한국성폭력상담소 후원회원 문탁에서 함께 공부하던 임수를 꼬드겨 '쫌 다른 가족-되기' 실험 중 소박하게 꾸린 정임합목 양생하우스에서 앎과 삶에 관해 질문하며 살고 있다.     어릴 적 집에 오신 손님들(대부분 친지들)은 내 작은 손에 용돈을 쥐어주시곤 했다. 적게는 만원에서 많게는 3만원. 퍼런 지폐는 어린 내가 봤을 때도 꽤나 듬직해 보였다. 그 용돈은 넉넉치 않은 살림을 사느라 늘 고단해보였던 해피님의 고민거리를 아주 조금이지만 덜어 주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100원, 200원 정도는 남는 이벤트였다. 취학 전 아동 시절이었다. ​ 그 때 배웠다. 어른이 염려하는 마음으로 주시는 용돈은 적당히 공손하게 받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그 용돈은 단지 '용돈'만이 아닐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니 과한 거절은 '선물 경제'에 담긴 다양한 의미를 퇴색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그 시절 나는 나름 증여와 순환의 정신을 잠시 엿본게 아닐까? 체면을 상하지 않게 선물하는 예절, 받는 사람의 태도 등 '돈과 관계의 철학'을 조금 익힌 셈인지도 모르겠다. ​ ​ 고릿적 이야기를 왜 하느냐고? 연재의 발단과도 조금은 연결되기 때문이다.  ​ 작년 가을. 우리는 그동안 각자 모은 돈에 대출금을 좀 보태 집을 사고 이사를 했다. 문탁에서 공부하다 만난 동학 둘이 '쫌 다른' 가족으로 살아보겠다는 포부를 밝힌지 2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응원해주시는 분들을 모셔 조촐하나마 집들이를 계획했었는데,...
  세계 끝의 가족 2023.12.31. 정화편 Designed by Cho-hui (앞으로 꽃길만 걷고 싶은) 백수 꿈나무 살림의료사회적협동조합 조합원, 희망법/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한국성폭력상담소 후원회원 문탁에서 함께 공부하던 임수를 꼬드겨 '쫌 다른 가족-되기' 실험 중 소박하게 꾸린 정임합목 양생하우스에서 앎과 삶에 관해 질문하며 살고 있다.     어릴 적 집에 오신 손님들(대부분 친지들)은 내 작은 손에 용돈을 쥐어주시곤 했다. 적게는 만원에서 많게는 3만원. 퍼런 지폐는 어린 내가 봤을 때도 꽤나 듬직해 보였다. 그 용돈은 넉넉치 않은 살림을 사느라 늘 고단해보였던 해피님의 고민거리를 아주 조금이지만 덜어 주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100원, 200원 정도는 남는 이벤트였다. 취학 전 아동 시절이었다. ​ 그 때 배웠다. 어른이 염려하는 마음으로 주시는 용돈은 적당히 공손하게 받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그 용돈은 단지 '용돈'만이 아닐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니 과한 거절은 '선물 경제'에 담긴 다양한 의미를 퇴색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그 시절 나는 나름 증여와 순환의 정신을 잠시 엿본게 아닐까? 체면을 상하지 않게 선물하는 예절, 받는 사람의 태도 등 '돈과 관계의 철학'을 조금 익힌 셈인지도 모르겠다. ​ ​ 고릿적 이야기를 왜 하느냐고? 연재의 발단과도 조금은 연결되기 때문이다.  ​ 작년 가을. 우리는 그동안 각자 모은 돈에 대출금을 좀 보태 집을 사고 이사를 했다. 문탁에서 공부하다 만난 동학 둘이 '쫌 다른' 가족으로 살아보겠다는 포부를 밝힌지 2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응원해주시는 분들을 모셔 조촐하나마 집들이를 계획했었는데,...
무사
2023.12.31 | 조회 376
인문약방 에세이
      2학기 공부는 유독 일상과 교차되었다. 길을 걷다 장애를 가진 동물과 마주친다든가 갑자기 호떡이 먹고 싶어져 농인인 상인과 소통을 해야하는 일 등으로 말이다. 직업군인으로 근무했던 수십 년 동안 내 주변에 장애인이 ‘없었다’는 것과 장애를 나와 관련된 이슈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장애인 차별이 비장애중심주의ableism와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을 공부하고 나서야 비로소 관련없어 보였던 군대와 장애를 연결시킬 수 있었다.        군에서는 운동신경이 없어서 혹은 경험이 많지 않아 헛발질을 일삼고 잘 하지 못하는 이들의 스포츠 경기를 일컫어 ‘장애인 00’이라고 불렀다. 병영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장병들은 “장애인이냐? 고문관이냐?”는 폭언을 일상적으로 들었다. 군대야말로 인간 사회를 적자생존이라는 진화론적 관점으로 설명하는 ‘사회적 다윈주의와 우생학 정책’의 생생한 현장으로 보였다. 한반도의 분단 상황과 한국의 징병제도는 ‘정상 신체를 가진 대한민국 남성’만을 전쟁에 필요한 자원으로 호명해왔다. 군에서 장애인은 철저하게 비가시화되어 있었지만, 비하할 만한 상황이나 대상이 필요하면 여지없이 소환되었다. ‘군인되기에 적합한 신체'라는 기준에 맞추기 위해 애쓰며 그 누구도 장애인되기를 원하지 않(을 줄 알)았다.     에이블리즘의 원형, 군대    군에는 장애인이 ‘없다’. ‘신체의 정상성’으로 대표되는 조직인 군은 입영단계에서 법령(국방부령 병역판정신체검사등검사규칙)에 근거하여 ‘그냥 인간’을 ‘등급내 인간’과 ‘등급외 인간’으로 분류한다. 이 과정을 통해 장애인의 군내 진입은 ‘원천’ 차단된다. 장애인이 없으니 장애인 편의시설도 필요없다. 장애인 화장실은 고사하고 휠체어 픽토그램조차 보지 못했다. 군 복무 중 장애가 생기는 경우는 어떨까? 장애의 원인이...
      2학기 공부는 유독 일상과 교차되었다. 길을 걷다 장애를 가진 동물과 마주친다든가 갑자기 호떡이 먹고 싶어져 농인인 상인과 소통을 해야하는 일 등으로 말이다. 직업군인으로 근무했던 수십 년 동안 내 주변에 장애인이 ‘없었다’는 것과 장애를 나와 관련된 이슈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장애인 차별이 비장애중심주의ableism와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을 공부하고 나서야 비로소 관련없어 보였던 군대와 장애를 연결시킬 수 있었다.        군에서는 운동신경이 없어서 혹은 경험이 많지 않아 헛발질을 일삼고 잘 하지 못하는 이들의 스포츠 경기를 일컫어 ‘장애인 00’이라고 불렀다. 병영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장병들은 “장애인이냐? 고문관이냐?”는 폭언을 일상적으로 들었다. 군대야말로 인간 사회를 적자생존이라는 진화론적 관점으로 설명하는 ‘사회적 다윈주의와 우생학 정책’의 생생한 현장으로 보였다. 한반도의 분단 상황과 한국의 징병제도는 ‘정상 신체를 가진 대한민국 남성’만을 전쟁에 필요한 자원으로 호명해왔다. 군에서 장애인은 철저하게 비가시화되어 있었지만, 비하할 만한 상황이나 대상이 필요하면 여지없이 소환되었다. ‘군인되기에 적합한 신체'라는 기준에 맞추기 위해 애쓰며 그 누구도 장애인되기를 원하지 않(을 줄 알)았다.     에이블리즘의 원형, 군대    군에는 장애인이 ‘없다’. ‘신체의 정상성’으로 대표되는 조직인 군은 입영단계에서 법령(국방부령 병역판정신체검사등검사규칙)에 근거하여 ‘그냥 인간’을 ‘등급내 인간’과 ‘등급외 인간’으로 분류한다. 이 과정을 통해 장애인의 군내 진입은 ‘원천’ 차단된다. 장애인이 없으니 장애인 편의시설도 필요없다. 장애인 화장실은 고사하고 휠체어 픽토그램조차 보지 못했다. 군 복무 중 장애가 생기는 경우는 어떨까? 장애의 원인이...
문탁
2023.12.31 | 조회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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