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회>남산을 걷다

기린
2023-11-06 23:49
393

 

 

 

 

 

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양생을 위한 담론을 생산하고 생업도 마련하는 기회를 잡아

소속을 인문약방 팀으로 옮겨 일리치 약국 정규직이 되었다.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에 도전중이다.

 

 

나는 남산 밑에 자리했던(지금은 안산으로 옮긴)예술대학을 다녔다. 지하철 4호선 명동역에서 퍼시픽호텔이 있는 방향으로 나와서 경사진 골목을 올라가면 강의를 듣던 건물이 있었다. 그 골목을 끝까지 올라가면 남산자락으로 통했다. 하지만 나는 학교를 다닐 때 한 번도 골목 끝까지 올라 남산까지 가본 적이 없었다. 학교에서 집까지 거리가 멀기도 했고, 주말에는 2년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학교 집만 오가며 보냈던 것 같다. 10월에 날씨 좋을 때 남산 둘레길을 걷자고 친구들과 약속을 잡았다. 학교를 졸업한지 25년이 흘러갔는데 그 골목은 그대로일지 궁금했다. 10월 15일 일요일, 서울 시청까지 가는 광역버스를 타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뭔지 모르게 설레었다.

 

약속장소인 덕수궁 앞에서 먼저 와있던 두 친구를 만났다. 공동체에서 만나 함께 공부하고 밥 먹고 활동하다 보니 따로  보면 각각 다르지만, 뭉쳐 있으면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닮아 보이는 사이가 된 친구들이다. 안으로 들어가 국립현대 미술관 덕수궁에서 <가장 진지한 고백: 장욱진 회고전>을 관람했다. 이름은 처음 듣는 화가였는데, 그림은 달력에서 본 기억이 나는 그림도 있었다. 한 친구는 그림 한 점 한 점을 대하는 폼이 참으로 진지해서 전시회의 제목에 걸맞은 관람객이었다. 반면, 다른 친구와 나는 설렁설렁 돌아보고 나와서 휴게실 의자에서 노닥거렸다. 단순하게 그려진 화풍이 따라 그려볼만 하다던가, 노년기 작품에서 보이는 밝은 색조가 인상적이라는 둥. 그림 자체에서 달관한 기풍이 느껴져서 60여년 그림을 그리며 산 화가의 내공이 느껴지는 전시회였다.

 

 

덕수궁을 나서서 도심가 인도를 따라 건널목을 몇 번이나 건너 명동 한복판을 통과해서 명동역 지하도를 건넜더니 예전에 학교로 통했던 골목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나보다 2년 앞서 역시 이 골목길을 오르내리며 학교를 다닌 친구는 골목에 즐비했던 가게들의 이름을 줄줄이 읊었다. 어떤 이름은 기억이 났고 또 어떤 이름은 생경했다. 그 중에서 나란히 붙어있던 두 서점의 상호를 듣자, 빽빽이 책이 꽂혀있던 좁은 서가가 떠올랐다. 전공서적이 주로 꽂혀 있던 그 서가 한 쪽에 꽂힌 시집을 사곤 했다. 기형도의 <잎 속의 검은 잎> 같은 시집 말이다. 알 수 없는 내용들을 꾸역꾸역 읽으며 다 글 쓰는데 피가 되고 살이 되리라 믿었다. 그렇게 사 모은 시집이 책꽂이 한 칸을 꽉 채웠다. 그러는 동안 글은 한 줄도 안 늘었지만, 예술 대학 다닌다며 부린 유일한 사치였던 것 같다. 지금은 학교도 이전했고 내가 자주 갔던 가게들은 다 사라지고 없었다. 강의동 건물 맞은편에 있던 편의점 정도만 남아있었다.

 

 경사진 골목을 끝까지 올라가서 점심을 먹고 남산 둘레길로 접어들어 본격적으로 걸었다. 나보다 먼저 학교를 다녔던 친구는 둘레길을 들어서면서 여기저기 그 시절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학교 강의동 위로는 올라가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 추억담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때 올라 다녔던 남산과는 너무나 달라졌다고도 했다. 같이 걸은 다른 친구는 한남동에서 남산으로 오르는 길을 훤하게 꿰뚫고 있어서 걷기 좋은 코스로 안내해 주었다. 사계절의 운치를 만끽할 수 있어서 굳이 다른 데 갈 필요가 없다는 그 길에는 가을 단풍이 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한 쪽으로 인공으로 조성된 실개천이라지만 울창한 나무숲과도 잘 어울렸다. 도심 한가운데 이렇게 호젓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점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남산 둘레길은 총 7.3키로로 두 시간 삼십분 정도 걸리는 길로 완만하게 조성되어 있어서 누구나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는 길이었다.

 

 

 두 친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 혼자 앞서나갔던 모양이다. 나를 불러 세운 친구들은 얘기 좀 하면서 걸으란다. 워낙 혼자 싸돌아 다니다보니 이정표만 좇아서 하염없이 걷는 습관이 같이 걷는데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속도를 늦추고 어제 본 드라마 얘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사설이 길고 본론으로 들어가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나의 스타일을 아는 친구들은 어디서 치고 들어올지 가늠하는 게 느껴진다. 나는 말하는 속도를 높여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공동체에서 꽤 오랜 시간을 같이 보냈던 친구들이라 작정하고 수다 떠는 나를 받아주는데 능숙하다. 그런 분위기가 주는 편안함이 좋았다. 혼자서 걷는 고요함과는 다른 떠들썩하게 걷는 재미도 좋았다.

 

 

 오랜 만에 친구들과 함께 걸은 길이었다. 다 잊고 있었던 20대 후반의 나를 만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 서점은 사라졌지만, 그 때 산 시집들은 내 책꽂이에 여전히 꽂혀있다. 그 시절에 이루고 싶었던 꿈에서는 한참 멀어졌지만, 또 다른 꿈을 찾으며 나는 여전하게 지낸다. 이 시절에 만난 친구들의 이야기로 한 칸 한 칸 채워가면서.

댓글 5
  • 2023-11-08 20:04

    저는 가을에 충무로역에서 올라가서 필동으로 내려오는 코스 갔었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샘 책꽂이에 꽂혀 있는 시집이랑 꿈 이야기 궁금해요ㅎㅎ

  • 2023-11-08 22:32

    나는 쌤이랑 걷자 걷자 하면서 왜 못 걷는지...
    언젠가 같이 해파랑길을 걷고 있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긴 하여요~~~ ^^

  • 2023-11-09 17:44

    봄에 벚꽃 필 때 남산 둘레길 같이 걷고 싶네요.^^

  • 2023-11-09 18:39

    그 시절 기린샘이 궁금하네요~~ㅎㅎ

  • 2023-11-11 09:37

    숭의서점과 문학당 사이~
    그 길에 각자의 어떤 기억들이 스며있겠죠!
    여전히 책장에 꽂혀있는 시의 흔적처럼..
    남산이 참 좋아요ㅎㅎ

일상명상
          요요 문탁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있다.  앞으로 10년은 불교공부를 계속 함께 할 친구들을 찾고 있다.  명상적 삶, 일상의 영성, 공동체와 영성, 나이듦과 영성이  화두다     <일상 명상> 연재를 시작하며   작년 1월에 ‘요요의 월간명상’을 시작했는데, 6개월을 쉬고,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셋이다. 지난해에 불교 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친구들과 번갈아 가며 새로 리뉴얼한 <일상명상>을 쓰기로 했기 때문이다. ‘요요의 월간명상’ 3회차 글에서 나는 문탁에서 함께 명상하는 친구들을 만들고 싶다는 바램을 밝혔다. 그런데 정말로 명상 친구가 만들어졌다.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이 코너는 이제 요요, 오영, 도라지, 세 사람이 한 달에 한 번씩 돌아가며 쓴다. 아마 3인 3색의 명상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이 글은 우리가 어떻게 명상 친구가 되었는지를 돌아보는 이야기이다.     사띠 수행을 공부하다   지난해 가을 불교학교에서 우리가 공부한 것은 사띠(sati) 수행이다. 팔정도 중 여섯 번째가 정념(正念)인데, 정념은 ‘바른 사띠’를 말한다. 그만큼 불교 수행에서 사띠가 중요한 개념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띠에는 ‘기억한다’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을 살핀다’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영어로는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로 옮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순수한 주의집중(bare attention), 알아차림(awareness, noting) 등을 쓰기도 한다.   우리말 번역어도 통일되어 있지 않다. 최초로 니까야를 한글로 완역한 전재성님은 사띠를 ‘새김’이라고 번역했다. 마음에 새긴다고 할 때의 새김이다. 새김은 사띠의 첫 번째 의미인 ‘기억한다’, ‘잊지 않는다’의 뉘앙스가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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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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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의 근사한 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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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
2024.01.08 | 조회 328
기린의 걷다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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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6 | 조회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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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약방 에세이
      2학기 공부는 유독 일상과 교차되었다. 길을 걷다 장애를 가진 동물과 마주친다든가 갑자기 호떡이 먹고 싶어져 농인인 상인과 소통을 해야하는 일 등으로 말이다. 직업군인으로 근무했던 수십 년 동안 내 주변에 장애인이 ‘없었다’는 것과 장애를 나와 관련된 이슈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장애인 차별이 비장애중심주의ableism와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을 공부하고 나서야 비로소 관련없어 보였던 군대와 장애를 연결시킬 수 있었다.        군에서는 운동신경이 없어서 혹은 경험이 많지 않아 헛발질을 일삼고 잘 하지 못하는 이들의 스포츠 경기를 일컫어 ‘장애인 00’이라고 불렀다. 병영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장병들은 “장애인이냐? 고문관이냐?”는 폭언을 일상적으로 들었다. 군대야말로 인간 사회를 적자생존이라는 진화론적 관점으로 설명하는 ‘사회적 다윈주의와 우생학 정책’의 생생한 현장으로 보였다. 한반도의 분단 상황과 한국의 징병제도는 ‘정상 신체를 가진 대한민국 남성’만을 전쟁에 필요한 자원으로 호명해왔다. 군에서 장애인은 철저하게 비가시화되어 있었지만, 비하할 만한 상황이나 대상이 필요하면 여지없이 소환되었다. ‘군인되기에 적합한 신체'라는 기준에 맞추기 위해 애쓰며 그 누구도 장애인되기를 원하지 않(을 줄 알)았다.     에이블리즘의 원형, 군대    군에는 장애인이 ‘없다’. ‘신체의 정상성’으로 대표되는 조직인 군은 입영단계에서 법령(국방부령 병역판정신체검사등검사규칙)에 근거하여 ‘그냥 인간’을 ‘등급내 인간’과 ‘등급외 인간’으로 분류한다. 이 과정을 통해 장애인의 군내 진입은 ‘원천’ 차단된다. 장애인이 없으니 장애인 편의시설도 필요없다. 장애인 화장실은 고사하고 휠체어 픽토그램조차 보지 못했다. 군 복무 중 장애가 생기는 경우는 어떨까? 장애의 원인이...
      2학기 공부는 유독 일상과 교차되었다. 길을 걷다 장애를 가진 동물과 마주친다든가 갑자기 호떡이 먹고 싶어져 농인인 상인과 소통을 해야하는 일 등으로 말이다. 직업군인으로 근무했던 수십 년 동안 내 주변에 장애인이 ‘없었다’는 것과 장애를 나와 관련된 이슈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장애인 차별이 비장애중심주의ableism와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을 공부하고 나서야 비로소 관련없어 보였던 군대와 장애를 연결시킬 수 있었다.        군에서는 운동신경이 없어서 혹은 경험이 많지 않아 헛발질을 일삼고 잘 하지 못하는 이들의 스포츠 경기를 일컫어 ‘장애인 00’이라고 불렀다. 병영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장병들은 “장애인이냐? 고문관이냐?”는 폭언을 일상적으로 들었다. 군대야말로 인간 사회를 적자생존이라는 진화론적 관점으로 설명하는 ‘사회적 다윈주의와 우생학 정책’의 생생한 현장으로 보였다. 한반도의 분단 상황과 한국의 징병제도는 ‘정상 신체를 가진 대한민국 남성’만을 전쟁에 필요한 자원으로 호명해왔다. 군에서 장애인은 철저하게 비가시화되어 있었지만, 비하할 만한 상황이나 대상이 필요하면 여지없이 소환되었다. ‘군인되기에 적합한 신체'라는 기준에 맞추기 위해 애쓰며 그 누구도 장애인되기를 원하지 않(을 줄 알)았다.     에이블리즘의 원형, 군대    군에는 장애인이 ‘없다’. ‘신체의 정상성’으로 대표되는 조직인 군은 입영단계에서 법령(국방부령 병역판정신체검사등검사규칙)에 근거하여 ‘그냥 인간’을 ‘등급내 인간’과 ‘등급외 인간’으로 분류한다. 이 과정을 통해 장애인의 군내 진입은 ‘원천’ 차단된다. 장애인이 없으니 장애인 편의시설도 필요없다. 장애인 화장실은 고사하고 휠체어 픽토그램조차 보지 못했다. 군 복무 중 장애가 생기는 경우는 어떨까? 장애의 원인이...
문탁
2023.12.31 | 조회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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