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철학학교시즌2] 스피노자 읽기 9주차 질문들

정군
2023-07-05 22:22
422

여기에 댓글로, 정오까지 올려주세요.

시즌 마지막 시간이니 만큼, 이번주 읽은 부분에서 딱히 어려울 것도 없는 만큼

지금까지 읽은 스피노자 철학 전반에 관한 질문도 좋고, 앞부분에 관한 질문도 좋습니다!

댓글 12
  • 2023-07-05 22:32

    1. 3부 정리57주석(130p): "이로부터 이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하는(왜냐하면 이제 우리가 정신의 기원에 대해 알게 된 만큼 짐승들(bruta)이 감각을 느낀다는 점에 대해 결코 의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물들의 정서는 인간들의 정서와 어긋나는데, 이는 동물의 본성이 인간과 다른 한에서 그렇다."

    질문1) 2부 정리13주석(50p)에서 "다른 개체들-이것들도 상이한 정도이긴 하지만 모두 정신화(animata) 되어 있다-보다 인간에게 더 많이 속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에서 동물은 물론 돌에도 일정 정도의 정신이 있다고 이야기했던 것 같습니다.
    정신에서와 마찬가지로 '동물에게 정서가 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정서와는 다른 어떤 정서를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할까요?

    2. 3부 정리59 주석(131)에선 "(지성에 의해) 이해하는 한에서의 정신과 관련을 맺고 있는 정서에서 따라 나오는 모든 능동(능동적인) 작용을 나는 강인함과 관련시키며, 강인함(Fortitudo)은 굳건함(一以貫之.Animosits)과 관대함(Generositas)으로 나누겠다. 왜냐하면 나는 굳건함을 각자가 오직 '이성의 인도에 따라'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욕망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대함은 각자가 오직 '이성의 인도'에 따라 다른 사람들을 돕고 그들과 우정으로 연결하려고 노력하는 욕망으로 이해한다."

    질문2) 굳건함이든 관대함이든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느냐, 다른 사람들을 돕고 그들과 우정으로 연결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둘다 '이성의 인도'에 따르는 게 능동 작용의 전제 조건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이성의 인도에 따른다'는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질문3) 같은 3부정리59주석(131p)에서 '행위하는 이'의 유용함(utile)을 목표로 하는 능동적 작용을 굳건함, '다른 이'의 유용함도 목표로 하는 능동적 작용을 관대함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뒤에선 생략한 다른 정서들이 '유용'하기보다는 호기심을 끄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언급한 '유용함'은 쓸모를 말하는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유용함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 2023-07-05 22:57

    정리56의 주석(129쪽)에서 스피노자는 재미있는 말을 합니다.
    스피노자는 "정서들의 제어 및 억제에서 정신의 역량은 어떤 성질(qualis)을 지니고 있고, 어느 정도의 힘(quanta)을 지니고 있는지 규정하기 위해서는 정서들 및 정신의 공통적인 특성을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따라서 사랑, 미움, 욕망의 이런저런 정서들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고 해도, 우리가 이 차이들을 인식할 필요는 없으며, 정서들의 본성과 기원에 관해 더 많은 탐구를 수행할 필요도 없다"고 말합니다. 제가 흥미를 느낀 것은 스피노자가 정서를 제어하고 억제하는 정신의 역량을 '힘'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스피노자가 3부에 들어서면서부터 비판하는 '자유의지'를 다시 떠올려보면 이때의 이 '힘'을 '의지'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겁니다. 그런데, 흔히 우리는 '의지'를 '마음의 힘' 같은 의미로 표상하곤 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렇다면 이 '힘'은 '의지'와 어떻게 구별되는 것일까요?

    3부 말미의 '정서들에 대한 정의'는 <정념론>의 2-3부 '정서들에 대해'라는 제목으로 데카르트가 수행한 작업(정서들의 정의, 분석)을 연상시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다른 점이 있다고 저는 느껴지는데요. 이를테면 데카르트가 개별 정서들의 '분류'에 집중하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비해 스피노자는 정서들의 연관을 염두에두고 마치, 마음의 네트워크를 그리 듯 써가고 있는 듯 보입니다. 이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의견들 들어보고 싶습니다.

  • 2023-07-05 23:05

    정리 56~59에서 질문합니다.

    능동/수동의 관점에서 스피노자는 특이할까요, 모호할까요, 아니면 멍청할까요? 특이하게 여기려면 따라나오는 모호함과 멍청함을 어떻게 떨쳐내야 할까요?

    수동은 겪는것입니다. —> 헷갈리지 않습니다.
    수동은 겪는것이고 그래서 정념/수동입니다. —> 역시 헷갈리지 않습니다.
    수동은 겪는것이고, 그래서 정념/수동이고 부적합/부분적입니다. —> 역시 헷갈리지 않습니다.

    능동은 행하는 것입니다. —> 헷갈리지 않습니다.
    능동은 행하는 것이고 작용(역량)이고 그래서 정념/정서가 아니고 능동입니다. —> 안헷갈립니다.
    능동은 행하는 것이고 작용(역량이고 그래서 정념/정서가 아니고 능동이고 그리고 적합합니다.
    그러니까 능동은 인식이고 이해입니다. —> 안헷갈립니다.

    이렇게 칼 같이 구분을 하면 이해하기 편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스피노자가 정리59 주석에서 ‘이해하는 한에서의 정신과 관련을 맺고 있는 정서들에서 따라 나오는 모든 능동(능동작용)을 나는 강인함과 관련시킨다’ 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이해하는 한에서 정신과 관련을 맺고 있으면 이성일텐데 이것이 정서들이라고 하면서 이해하는데 스텝이 꼬입니다.

    스피노자는 감정(정념/정서)과 이성을 전통적인 의미에서 구분하고 있을까요? 그러기에는 모호한 측면이 있습니다.
    아니면 감정(정념/정서)과 이성이 들러붙어 있는 어떤 경지가 있을까요? 이러면 특이해집니다.
    마지막으로 스피노자는 감정과 이성조차 구분하고 있지 못할까요? 쓰다보니 스텝이 꼬이고 있나요? 이러면 멍청해집니다.

    특이하게 해석하고 싶어도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 2023-07-05 23:47

    [정서에 대한 일반적 정의]의 해명
    (p.145) "하지만 내가  실존의 힘이 이전보다 더 크거나 작다고 말할 때, 내가 말하려는 것은 정신이 신체의 현재 상태를 그 과거의 상태와 비교한다는 점이 아니라 정서의 형태를 구성하는 관념이 신체에 대하여, 이전보다 실제로 [더 크거나 더 작은 실재성을 함축하는 어떤 것을 긍정]한다는 점이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
    =>이 부분에서 스텝이 꼬입니다. ('해명' 전의 정의만 볼때는 나름 명확하게 이해된 것 같았는데, 이럼으로써 적합하게 이해한게 아닌게 되는거겠지요;;) 
    [더 크거나 더 작은 실재성을 함축하는 어떤 것을 긍정한다]는 것을  어떻게 풀면 좋을까요?   기쁨과 슬픔의 본성을 표현하기 위한 정의의 이 첫 번째 부분에서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이것이다'라며 스피노자가 피하려고한 해석과 의도하는 바는 정확히 무엇일까요?

  • 2023-07-06 00:10

    정서들에 대한 정의, (P.133) 2/3에서 기쁨이(슬픔이) 더 큰(더 작은) 완전성으로의 인간의 이행이다 라고 말한다. 기쁨이 그 자체로 완전성이 아니며, (더 큰 완전성으로)이행을 하여야 기쁨이다 라고 해명한다. 이해할 수 있다. 동일하게, 슬픔에 대한 해명으로써 “우리는 또한 슬픔은 더 커다란 완전성의 결핍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데, 왜냐하면 결핍은 아무것도 아닌 반면, 슬픔의 정서는 작용(actus)이기 때문이다.” 라고 한다. “우리는 또한 슬픔은 더 커다란 완전성의 결핍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데, 슬픔의 정서는 작용(actus)이기 때문이다.” 라고 했으면, ‘이행’에 중점을 두어 ‘기쁨’처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간 문장, “왜냐하면 결핍은 아무것도 아닌 반면,” 이것은 무슨 뜻인가요? 결핍 그 자체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뜻인가요? 예를 들면, 내가 신체적 장애를 가졌다는 결핍자체는 아무것도 아닌데, 그로 인하여 그 사람이 완전성의 축소 방향으로 이행한다면 슬픔이다 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스피노자는 정리58에서 능동적인 한에서 (수동적인 정서인 기쁨, 슬픔, 욕망에서) 슬픔을 빼고 우리와 관련된 기쁨과 욕망의 정서만을 남겼습니다. 위의 문장과 연결시키면, 결핍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적합한 관념이 있어야(능동적이어야), 결핍으로 인한 더 작은 완전성으로 나아가지 않도록(슬프지 않고 기쁨으로 가는) 이행할 수 있는 것이어서, 능동적 정서에서 ‘슬픔’을 뺐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능동적인 정서에서의 기쁨과 욕망은 적합한 관념(이성?)으로 수동적 정서의 기쁨, 슬픔, 욕망을 극복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읽어야 하는데.....'자유의지'없는 정신(이성)승리법처럼 말입니다. 맞나요?

  • 2023-07-06 07:44

    정리 58 증명에서 마지막 부분에
    "정신은 명석 판명한 관념들을 갖고 있는 한에서나 혼동된 관념들을 갖고 있는 한에서나 자신의 존재 속에서 존속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우리는 노력[코나투스]을 욕망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욕망은 또한 우리가 이해하는 한에서 또는 우리가 능동적인 한에서 우리와 관련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능동적인 한에서 우리와 관련된다"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 2023-07-06 09:03

    정리59 증명에서 능동적인 정신과 관련되는 슬픔의 정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와 달리 기쁨과 욕망은 정리 58과 59에 따라 수동과 능동을 넘나드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3부 정의 1, 2에 의해 수동과 능동의 기준은 적합한 원인과 부적합한(부분적인) 원인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피노자는 적합한 원인을 인식할 수 있는 명석판명한 관념에서는 슬픔이 생길 수 없다고 생각했던 걸까요? 그렇다면 부적합한 인식에서 적합한 인식으로의 이행하면 더이상 슬픔을 겪지 않을까요? 이런 인식의 변화는 사고 역량을 키우고 더불어 신체 역량도 증가할 것이구요. 스피노자식 슬픔 탈출법에 대해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 2023-07-06 09:49

    1. 정리 56의 주석과 정리 57의 주석에 등장하는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정리56의 주석에서 마음의 역량은 정신의 역량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때 마음의 역량은 정서를 제어하는 힘인데, 그 힘은 식탐, 음주욕, 성욕, 탐욕, 암비치오 등과 대립되는 정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정서들은 힘을 갖고 있는데, 이 힘은 더 큰 힘으로 제어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게 반대되는 정서가 아니라 정신의 역량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정리 57의 주석에서는 술취한 사람의 만족과 철학자의 만족의 차이를 언급하면서 각자의 본성과 만족은 동일한 개체의 관념 또는 마음(anima)과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에티카>에서 처음 등장하는 마음, 이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라틴어 anima의 사전적 정의는 1. soul, spirit, life 2. air, breeze 3. breath군요.)
    이와 관련하여 부록 마지막의 정서에 대한 일반적 정의에 나오는 마음의 정념(animi pathema, passionem animi)의 마음은 어떤 용법인지요?

    2. 3부 부록 정서에 대한 일반적 정의
    “마음의 정념이라고 불리는 정서는 1) 혼동된 관념으로, 2) 정신은 이것을 통해 자신의 신체나 그 신체의 부분들 중 하나의 실존의 힘이 이전보다 더 크거나 작다고 긍정하며, 3) 이것의 현존은 정신이 저것보다는 이것을 사고하도록 규정한다.”

    해명에서 스피노자는 1), 2), 3) 셋을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중에서 두 번째 부분과 관련해서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스피노자는 실존의 힘이 이전보다 더 크거나 작다고 말할 때 자신이 말하려는 것은, 1) 정신이 신체의 현재 상태를 과거의 상태와 비교한다는 것이 아니라, 2) 정서의 형태를 구성하는 관념이 신체에 대하여, 이전보다 실제로 더 크거나 더 작은 실재성을 함축하는 어떤 것을 긍정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1)과 2)는 어떤 차이를 갖는 것일까요? 생각건대 1)의 경우는 정신을 신체에 대해 비교하고 판단하는 독립된 어떤 것으로 보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기쁨, 슬픔, 욕망은 그런 정신(주체)의 활동이 아니라는 말이겠지요? 그렇다면 2)는 정서=관념이라는 것을 좀 더 확실히 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앞선 정서에 대한 정의에 따라 이 관념은 부적합한 관념이겠지만요.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것을 보면 ‘정신이 신체에 대해 이전보다 더 크거나 작은 실재성을 함축하는 어떤 것을 긍정하게 될 때, 정신은 더 커다란 완전성이나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게 된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고 합니다. 부적합한 관념=정서임에도 불구하고 기쁨을 느낄 때 우리의 정신의 사유역량 역시 커지고 슬픔을 느낄 때 우리 정신의 사유역량 역시 작아진다는 이야기라고 봐야 하겠지요? 여기서 말하는 사유의 현행적 역량과 앞서 정리 56의 주석에서 말한 마음의 역량(적합한 관념의 역량?)은 어떤 관계에 있는지 궁금합니다.

  • 2023-07-06 10:18

    1. 정리59 주석
    "나는 떨림, 창백함, 흐느낌, 웃음 등과 같이 정서들 안에서 관찰되는 신체의 외적 변용들에 대해서는 무시했는데, 왜냐하면 이것들은 오직 신체하고만 관련될 뿐, 정신하고는 아무 관계도 맺지 않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떨림, 창백함, 흐느낌, 웃음은 정서가 아니라 정서를 통해 발현되는 신체의 변용이라고 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게 오직 신체하고만 관련될 뿐 정신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하는 건 조금 어색합니다. 떨림과 창백함에서 공포를, 흐느낌에서 슬픔을, 웃음에서 기쁨을 연상하는 건 자연스럽지 않나요? 게다가 웃으면 기뻐지기도 하고, 흐느끼면 슬퍼지기도 하니까요.
    2. 스피노자는 관념론자로 분류할 수 있나요? 만물은 실체(신)의 속성의 양태/표현이니까요.
    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은 관념론과 유물론을 따져보며 새로운 형이상학을 제시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러한 베르그손의 철학 역시 스피노자의 영향을 크게 받았겠죠?

  • 2023-07-06 10:27

    .(P137) 정서들에 대한 정의 18번. 연민에 대한 해명에서 '연민은 독특한 정서에 관계되며"라고 말합니다. 왜 독특한 정서라고 말하고 있는 걸까요? 관련해서, 연민의 일반적 성향이 동정심인데, 이 동정심은 타인의 행복에 즐거워하고 타인의 불행에 슬퍼하는 (정서모방의) 한에서의 '사랑'의 일종이고, 연민은 타인의 해악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의 일종이라고 말하고 있네요.

  • 2023-07-06 11:30

    정리 56의 주석에서 스피노자는 절제, 절도, 정결을 말하면서 이것은 정서나 정념이 아니라 식탐, 음주욕, 성욕을 제어하는 '마음의 역량'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일단 정신(mens)의 역량이 아니라 마음(animus)의 역량이라고 표현할 것이 눈에 띄지만 정서와 관련해 자주 쓰이는 단어를 여기서 같이 사용해준 것이 아닐까라고 가볍게 추측해봅니다. 그다음에 저는 스피노자가 정서를 제어하는 것이 '마음의 역량'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의문이 생겼는데요, 이 '마음의 역량'이란 무엇일까요? 스피노자는 욕망 자체를 정신의 행위 역량이라고 말해왔으니 식탐, 음주욕, 성욕 역시 정신의 역량에 속할 것입니다. 그런데 식탐, 음주욕, 성욕을 제어해야 할 까닭이 있다면 그 또한 다른 정서에서 나와야 하겠지요? 그것은 능동적인 정서일수도 있고 수동적인 정서일수도 있을 테고요. 스피노자가 욕망이나 코나투스를 곧 행위 역량이라고 말할 때 저는 가령 음주욕이라는 정서와 그것을 제어하려고 하는 (지난번에 부린 주사를 부끄러워 하는....) 수치심의 역학 관계를 통해 행위가 결정되는 것으로 이해했거든요. 가령 단순하게 말해서 음주욕이 100인데 수치심이 0이면 엄청나게 마신다, 로요. 정서 또는 욕망들의 역학 관계에서 어떤 제어의 역량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스피노자가 말하는 '마음의 역량'으로서 '절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결국 "정서들 및 정신의 공통적인 특성을 이해하는 것", 즉 인식일까요?

  • 2023-07-06 11:59

    질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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