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 블루스> (2) - 요양사를 며느리로 착각한 여자
문탁
2020-03-21 19:39
825
“그는 검사가 다 끝났다고 여겼는지 모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손을 뻗어 아내의 머리를 잡고서 자기 머리에 쓰려고 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것일까?
그런데도 그의 아내는 늘 있어온 일이라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알마, p31)
1.엄마의 정신은 어디로 외출했을까?
6개월 전, 2차 부상에 대한 병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퇴원시킨 가장 큰 이유는 ‘섬망’ 때문이었다. 오후만 되면 ‘집으로 가자’를 외치는 어머니를 계속 병원에 둘 수는 없었다. 2차 부상이냐? 섬망이냐? 거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수준의 선택 앞에서 난 결국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왔다. 하여, 섬망이 사라졌냐고? 결론을 먼저 말하면 섬망은 사라지지 않았고 2차 부상까지 당하셨다. 특히 2번 요추 압박골절에 이어진 1번 요추 골절은, 어머니도 나도 간병인도 그 누구도 모르는 상태에서 벌어진 것이어서 더 황당했다. 넘어진 적도 부딪힌 적도 없다는 나의 말에 의사는 심상하게 이렇게 말했다. “이런 노인들은 기침하다가도 부러져요. 흔한 일이예요” (그런데 왜 어머니의 6개월 입원기간, 4군데의 병원에서 어떤 의사도 이런 이야기를 미리 해주지 않았지? 쩝!)
어쨌든 척추 뼈가 두 개나 부러지고 그 뼈들이 다시 아무렇게나 붙어서 (혹은 여전히 덜 붙어서) 꼬부랑 할머니처럼 허리가 약간 구부러지게 된 어머니는, 집에 오신 이후에도 수시로 ‘집으로 가자’를 외치셨다. 뿐만 아니라 갑자기 교회 성가대 애들 밥을 먹여야 하니 밥을 넉넉히 하라고도 하시고, 당신이 제일 사랑하는 손주, 이미 군대도, 대학도 마치고 일하러 베트남에 나가 있던 손주가 잠시 귀국한 걸, 군대에서 휴가 나온 것이라고 착각하셨다. “엄마, 00는 군대가 아니라 베트남에 가 있잖아요?”라고 말씀드리면 “참, 그렇지!”라고 대답하셨지만,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손주에게 군대에 언제 복귀하느냐고 물으셨다. TV 리모컨과 전기담요 컨트롤러를 착각하셔서 컨트롤러로 자꾸 TV를 켜시려고 하고, 두 문장 이상의 중문을 한 번에 알아듣지도 못하셨다. 무엇보다 기억력이 엄청 감퇴하셨다. 어제 일은 커녕 1시간 전의 일도 까맣게 잊으셨다.
겁이 덜컥 났다. 혹시 치매 아닐까? 섬망은 뇌의 문제라기보다는 전해질 불균형 같은 내과적 문제, 혹은 외상이나 약물 부작용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일시적인 ‘혼미한 정신상태’이다. 전신마취 수술을 한 노인들이나 장기 입원 중인 환자에게 주로 발생하고 시간이 지나거나 퇴원을 하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니었다. 퇴원 후에도 정신은 수시로 외출을 하거나 가출을 했다. 그렇다면 섬망이 아니라 치매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의심하기 시작했다.
2. 엄마는 혹시 ‘수두증 치매’?
“누구나 치매에 걸릴 수 있다. 그러나 치매는 예방할 수 있다”거나 치매에도 ‘예쁜 치매’와 ‘미운 치매’가 있다는 등의 이야기 등으로 시선을 확 끄는 『뇌미인』 (나덕력, 위즈덤 스타일, 2012)을 다시 꺼내 들었다. 예전엔 휘리릭 읽었지만 이번엔 철학책 읽듯이 차근차근 정독.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치매(癡呆,dementia)는 고혈압이나 당뇨병처럼 하나의 질환이라기보다는 뇌 손상으로 인해 심신이 전반적으로 어눌해져 독립적인 일상생활을 하기 어려운 상태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어이다. 그 원인도 수십 가지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다. 저자는 이런 치매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누는데 하나는 대표적인 퇴행성 치매 알츠하이머, 두 번째는 조기 발견만 되면 치료가 가능한 혈관치매, 세 번째는 이전 상태로 뇌의 인지기능을 회복할 수 있는 고쳐지는 치매.(p67) 쉽게 말하면 치료방법이 없는 알츠하이머, 늦추는 게 가능한 혈관치매, 고칠 수 있는 기타 치매, 이렇게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알츠하이머나 혈관치매는 아닌 것 같았다. 2년 전에 찍은 뇌 MRI에도 1년 전에 찍은 뇌 PET에도 이상소견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짧은 시간에 전두엽에 구조적 손상이 생겼다거나 갑자기 뇌혈관이 막혔다고? 그렇게 보기는 힘들었다.
책을 좀 더 읽어나갔다. 치매의 80~90%를 차지한다는 알츠하이머+혈관치매를 제외한, “고칠 수 있는 치매”의 대표가 바로 수두증(水頭症) 치매란다. 아뿔사, 어머니가 바로 수두증 아니었던가? 이름도 생소한 이 병을 알게 된 것은 5년 전이었다. 어머니와 합친 후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의 온갖 진료과를 전전하다가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었다. 발을 질질 끌면서 기우뚱 불안정하게 걸으시는 것도, 그러다가 자꾸 넘어지시는 것도, 총기(聰氣)가 급속히 감소하는 것도 수두증 때문이라고, 의사는 말했었다.
책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뇌수두증 치매는 뇌실에 물이 고여 뇌실이 커지고 뇌를 압박하면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뇌실의 물을 빼주면 당연히 증세가 사라진다고.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물을 빼주는 시술, 일명 션트 수술(shunt operation)을 어머니 같은 고령자는 선택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5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알츠하이머는 아니더라도 시술을 하기 어려운 조건의 뇌수두증 치매라면, 역시 해결방법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 아닐까? 뭔가 좀 더 정확한 진단이 필요해보였다. 그래서 다시 병원으로 고~고~
신경정신과의 주치의는 이렇게 말했다. “알츠하이머는 백 프로 아닙니다. 평생 알츠하이머는 안 걸리세요”. 오홋, 일단 다행! 그래서 물었다. “그럼 수두증 치매인가요?” 의사가 빙그레 웃으며(전문가들이 아마추어에게 말할 때 흔히 짓는 표정!) “아닙니다. 그냥 많이 누워계셔서 발생하는 일이예요. 어떤 식으로든 일상을 회복하게 하세요”
다음은 정형외과 주치의. 어머니의 증세를 듣고 난 후 “그렇다면 그건 섬망이 아닙니다. 섬망일리 없어요. 치매 가능성이 높아요, 다시 검사해보세요.” 꽤나 단호하다.
마지막으로 통증쎈터의 주치의. “원래 노인들은 그럴 수 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한결 부드럽다. 그러나 하나마나한 소리 아닌가? 나는 더 헷갈렸다. 도대체 누구 말이 맞아?
3.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는 다양하고 감동적인 임상사례들이 나온다. 저자가 환자들을 치료대상이 아닌 “상상을 뛰어넘는 나라를 여행한 사람들”로 여기면서, 이들의 병과 삶의 기록을 위대한 ‘이야기’의 전통 속에서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책 제목이기도 한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P씨의 사례. 뛰어난 성악가였던 그는 지금은 음악교사로 살고 있는데 어느 날부터 시각인식에 문제가 생겼다. 소화전이나 주차요금 자동 징수기를 아이들의 머리라고 생각하고, 발을 신발이라 착각하고, 자기 모자 대신 아내의 머리를 쓰려고 한다. 반면 추상적 형태를 식별하는데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으며 그 도식들의 연관관계를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데에는 컴퓨터에 버금간다. 머리 속으로 체스게임을 하는 것도 식은 죽 먹기이다. 문제는 세상에 대한 구체적이고 생생한 시각적 인식, 그것에 따른 감각적이거나 상상적인 혹은 정서적 현실감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올리버색스가 보기에 이 사람은 시각불능증환자이고 구체성을 잃어버린 차갑고 추상적인 세계에 빠져 있는 사람이다. 숨을 쉬지만 실제로는 AI와 다를 바 없다고 할까?
그런데 이어지는 에피소드. 어느 날 P씨가 그려왔던 그림들을 쭉 살피던 올리버 색스는, 그 그림들이 초기에는 생생하고 세밀하고 구체적이었다가 점차 추상적으로 변한 후 최근에는 “선과 얼룩을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그려 넣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P씨의 부인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 “선생님. 그림 볼 줄 모르시네요! 선생님은 ‘예술적인 발전’을 보지 못하시나요? 처음에는 사실주의였다가 나중에는 거기서 벗어난 추상적 비구상 그림으로 발전했잖아요.”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의 눈으로 보기에 “발전한 것은 화가 자신이 아니라 그의 병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렇게 쓴다.
“그렇지만 부인이 한 말에도 일리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의 병세와 그의 창작력이 투쟁하는 모습도 어느 정도는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그 둘 사이의 융합도 보였다. 아마도 그가 입체파로 기울었던 시기에, 예술적인 발전과 병리학적 발전이 함께 이루어졌을 수도 있고, 그래서 그것들이 독착정인 형태를 만들어낸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구체성을 잃어가면서 추상성을 얻었고 그래서 선, 경계, 윤곽성 등 모든 구조적인 요소들에 대해 전혀 다른 감각을 발전시켰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피카소의 능력에 버금갈 정도로 말이다.”(p43)
올리버 색스는 P씨에게 시각 대신 음악에 파묻혀 살라는 충고를 한다. 그리고 “질병(커다란 종양 즉 뇌에서 시각을 담당하는 부분의 퇴행)의 점진적인 악화에도 불구하고 P선생은 마지막 순간까지 음악을 가르치며 살았다.”
4. 요양사를 며느리로 착각하는 엄마
어머니는 새로운 요양사를 조카며느리라고 착각하신다. 그 착각에 근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외모가 비슷하고 무엇보다 당신의 조카며느리 직업도 간병인이다. 하지만 평소 거의 왕래가 없는 그 조카며느리가 어떻게 갑자기 어머니의 머리 속에 떠올랐는지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그 분은 요양사이지 당신 조카며느리가 아니라고 여러 번 말씀드려도 소용없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그렇게 되자 어머니와 요양사의 관계가 뭐랄까 일방향이 아니라 쌍방향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어머니는 요양사의 보호를 일방적으로 받는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요양사-며느리의 생활을 걱정하고 보살피는 능동적인 주체가 된다. 대화를 잠시 옮겨보자.
“어르신, 동천동에도 코로나 환자가 발생했다네요. 걱정이예요”
“그러게 말이다. 그런데 너네 집 애들은 괜찮니?” (이 때 애들은 조카며느리의 아이들, 즉 어머니의 손주들이다. 물론 오인이다.)
“애들이 학교를 안 가서 밥해주느라 힘들어요”
“그러게 말이다. 그래도 00는 엄마 말 잘 듣지?” (실제로는 손주가 이미 성년인데 당신 대화 속에 언급되는 00는 어린 손주다. 두 번째 오인이다)
“어르신, 저 퇴근해요”
“그래, 빨리 가서 애들 밥해줘라. 그리고 내일부터 오지 마. 너, 힘들어”
어떻게 보면 코미디가 따로 없는 동상이몽의 대화. 그러나 또 어떻게 보면 묘하게 주고 받는 게 어색하지 않는 대화. 하지만 이 오인된 대화를 통해 어머니는 남편과 사별하고 간병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 조카며느리에 대한 연민을 충분히 표현하고 계신다.
그리고 얼마 전 식탁에서 벌어진 일. 텔레비전에서 프로야구 개막이 연기되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고 그걸 빌미로 난 옛날 일을 꺼내서 읊어대기 시작했다. 내가 고등학교 때 얼마나 야구에 미쳤었는지, 매일 종례를 땡땡이 치고 야구장을 가는 바람에 얼마나 선생들 애를 먹였는지, 급기야 어머니가 학교에 불려와서 얼마나 머리를 조아렸는지....
어떻게든 어머니의 뇌를 자극하기 위해 ‘의지를 가지고’ 시작한 이 대화는 예상과 달리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어머니는 어렴풋이 그런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 같았는데 그 다음부터 아주 엉뚱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어머니는 이야기를 꾸며내고 있었다. “니가 야구장을 갔는데 그래서 내가 시장을 가서 (진짜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필동약국 사장님을 만났구 (어릴 때 살았던 필동의 그 약사분은 남성분으로 논리적으로 어머니와 시장에서 마주칠 일은 없다) 단골 생선가게에서 꽃게를 사서 (이건 그 시절 자주 있었던 일이다) 어쩌구 저쩌구.... ” 시공간이 응축되고 사건들이 재조립되면서 이야기는 제법 길게 이어졌다.
그 순간 불현듯 어떤 깨달음이 왔다. 이것은 ‘결여’가 아니라 어쩌면 ‘능력’ 아닐까? 늙고 다친 어머니는 마치 아이들이 그렇게 하듯 생애 최초로 이야기를 짓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 엄마는, 드물게, 환한 얼굴이셨다.
5. 굿모닝 엄마! 굿모닝 딸!!
어머니의 인지는 점점 떨어지고 있다. 현실이다. 하지만 이유는 불분명하다. 노화 과정일까? 아니면 뇌수두증 때문일까? 아니면 또 다른 뇌손상이 있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척추골절로 인해 많은 시간을 누워계시기 때문일까? 아니면 진통제의 장기복용에 따른 부작용일까? 아니면 황반변성으로 한쪽 눈이 안 보이는데다가 청력까지 급속히 떨어져서일까? 혹시 이 모든 게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이유가 불분명하니 진단도 불명료하다. 그래도 진단은 병원의 운명! 지금 내 생각엔, 다음에 병원에선 어머니에게 ‘경도인지장애’ 정도의 판정을 내릴 것 같다. (으악, 동생들의 아우성이 들리는 듯. “언니가 의사야?” ㅋ ) 그렇지만 그 이유나 진단이 지금 어머니의 삶에 대해, 아니 ‘삶 그 자체’에 대해 도대체 무엇을 말해준다는 말인가?
요즘 내가 가장 신기해하는 것은 어머니의 인지가 떨어지면서 평생 어머니를 따라다니던 우울증도 함께 사라지고 있는 듯 보인다는 사실이다. 어머니가 다치기 전 4년간 난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하루 종일 어머니가 내뿜는 부정적인 기운 – 자기연민과 신세한탄에서 시작되어 나에 대한 원망,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미움 등 –에 감염되어 거의 질식사할 것 같았다. 가능한 어머니를 피하게 되고 그럴수록 어머니의 우울증은 깊어지고, 그런 어머니를 상대해야 하는 감정노동에 내 영혼은 너덜너덜해졌다. 그런데 절대 바뀔 것 같지 않던 그런 어머니가 바뀌었다. 한결 수긋해지고 표정도 좋아지셨다. 아이같이 단순해졌다고나 할까.
며칠 전 서울 구로동의 콜쎈터에서 코로나 집단감염이 일어났다는 뉴스를 같이 보았는데 늘 그렇듯이 난 다시 모든 정보를 단문으로 끊어서 다시 어머니에게 전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콜쎈터’가 잘 표상되지 않는 어머니는 그 사건을 이해하는 데 애를 먹는 눈치셨다. 그러다가 구로동의 ‘코리아 빌딩’에서 문제가 해결되었다. 갑자기 어머니는 “아, 거기 우리 집 옆이잖아”라면서 모든게 이해되는 표정을 지으셨다. 아마도 어머니는 당신이 잘 알고 있는 코리아나 빌딩을 떠 올리신 게 아닐까? 어쨌든 그 오인과 착각을 통해 어머니는 나름대로 그 사건과 관계를 맺으셨다.
그런데 인지가 떨어진 어머니뿐만 아니라 니체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누구나 “부단히 세계를 위조하면서 살아간다.”
“삶은 논증이 아니다-우리는 우리가 살 수 있는 세계를 머릿 속에 만들어왔다. 물체, 선, 면, 원인과 결과, 운동과 정지, 형상과 내용 등과 같은 믿음의 조항들이 없다면 이제 아무도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들로 증명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삶은 논증이 아니다. 삶의 조건들 중에는 오류도 있다.” (니체, 『즐거운 학문』, 책세상, p196)
세상에 대한 오인과 착각. 그것은 삶의 오류가 아니라 삶의 조건이다. 니체 말대로 우리가 비슷한 것을 동일하다고 여기는 착각이 없었다면, 엄밀히 보는 눈이 아니라 대충 보는 눈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생각해 보라, 우리가 현미경 같은 눈을 갖고 있었다면 ‘키스’는 커녕 ‘악수’도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생존 가능성이 훨씬 적을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 『즐거운 학문』, p188),
어머니는 어떤 때는 ‘멀쩡'해 보이기도 하고 어느 순간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로 ‘이상'해 보이기도 한다. 어머니와 나는 가끔씩은 ‘이성적'인 대화를 하기도 하고, 가끔씩은 동상이몽의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또 어떤 때는 길게 이어지는 대화를, 또 어떤 때는 토막토막 맥락 없는 대화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와 나는 소통하면서 살고 있다.(고, 나는 느낀다!)
진실을 없고 해석만 있으며 사실은 없고 관점만 있다면(니체) 어머니도 나름대로 세상을 해석하는 자신의 관점을 매번 갱신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엇보다 어머니는 많이 다정해졌다. 아침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인사한다. 굿모닝, 엄마! 굿모닝 딸!!
*즉흥적이고 충동적으로 <간병부르스>를 쓴 게 6개월 전이다.(http://moontaknet.com/?pageid=2&page_id=226&mod=document&uid=28967) 그 때는 "죽지 않으려고" 썼다. 이번엔 <인문약방> 때문에, 무엇보다 코로나강제방학이 지속되는 바람에 쓰게 되었다. 글쓰기와 관련해서는 양치기 소년이라 어떤 다짐도 안한다. 속으로만 저으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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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이 어디로 가게 될지 궁금해요. 우리집에선 내일모레 팔십인 어머니가 수시로 설거지와 청소를 하시겠다고 의욕을 불태우시고 스물다섯된 딸은 시끄럽다고 할머니 일하지 마시라 효심을 불태우느라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어요. 평화유지군이 필요해요....
하하 글쓰기의 또다른 전범을 보는거 같습니다 일상(어머니의 간병)을 해석하기 위해 찾아낸 수많은 자료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또하나의 스토리가 되는^^ ㅋ 저라면 이렇게 못 쓸텐데요~ㅋ 전 후포에 홀로 사시는 어머니가 겨우내 독한 기침감기를 치르는 걸 전화로 그 경과를 들으며 코로나 정국을 보내고 있는데 며칠전에 '방법 '이란 드라마를 봐서 그런가 꿈에서 어머니가 돌이가셨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공포에 빠져있다 깼어요... 아마도 그 경험을 문장으로 떠올린다면... 홍홍 이렇게 못 쓰겠죠^^ ㅋ 남들이 어떻게 쓰나 보라고 했던 북앤톡팀 의 피드백이 떠오르네요^^ 또 다른 간병부르스를 기대하겠습니다 ~~ㅋ
살아가기 위해서는 저마다 세계를 위조하며 사는 거군요. 그래서 같은 자리에서 같이 보고 들은 것이 각자에게 다른 방식으로 접수되는 거고요...저는 두해 전인가 갑자기 오십여년 알고 있던 내 생일을 "얘, 너 노망끼가 들었냐? 니 생일은 그 날이 아니라 00날이잖아" 하시는 친정엄마 땜에 시껍했어요. 순간 생일이 붕 떴습니다....ㅋㅋㅋ 엄마야말로 노망 아니냐고 대들지 않은 것은 고전공부한 덕이었구요...울 엄마도 뭔가 검사를 해봐야 할까요?
엄마한테 잔소리를 많이하는 딸로서 반성하게 되네요....
엄마의 깜박깜박에 속으로 놀랄 때면 겉으로는 엄마가 다 혈당 관리를 안해서 그렇다고 막 뭐라 합니다.
먹는 거에 신경써야 한다고 말이죠.
엄만 평생 먹는 걸 낙으로 사신 분인데....
그래도 현미밥을 받아 들이신 거에 감사하고 과일도 많이 줄이신 거에 감사하고 있어요.
삶은 논증이 아니라는 말에, 오류도 삶의 조건 중 하나라는 말에 왠지 안심이 됩니다.
좋은 글 감사요~
요즘 가장 핫한 곳 대구에 살고 계시는 엄마를 두 달이 다 되도록 뵙지 못하고 있어요.
어제 했던 말을 오늘이면 잊어 버리시더니 이제 아침에 했던 말을 점심 때면 잊어 버리십니다.
그리고 밥을 드셨는지 안 드셨는지도 잊어 버리기 시작하셨습니다.
혹시나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봐 속으로만 생각하고
대신 하루에 한 번 하던 전화를 아침과 저녁 두 번으로 늘였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와 함께 엄마가 달라지셨습니다.
혼자서 밥을 잘 챙겨드십니다. 엄마의 말을 정리해 보면
첫째는 언제 죽어도 좋지만 전염병으로 죽는 것은 너무 추하게 죽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죽어서는 안된다.
둘째는 당신이 아프거나 돌아가시면 대구로 올 자식들이 코로나에 노출되 위험해 질거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통화하는 목소리도 부러 더 씩씩하게 하시지만
종일 TV를 틀어놓고 코로나 감염자의 숫자가 줄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참 벨이 울려도 전화를 받지 않으실 때면 가슴이 쿵 하고 놀래기도 하고
그러다 전화를 받으시면 콧등이 찡하게 매워집니다.
고군분투하며 살고 계시는 어머님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징징대던 마음을 다잡게 됩니다.
엄마들이 다 살아게시니, 전화도 하고 대화도 하고.
가끔. 편하기도 하고 허전하기도 하고.
엄마 없어, 못살 나이는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