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철학학교시즌3] 스피노자 읽기 3주차 질문들

정군
2023-08-09 19:56
394

댓글 본문으로 정오까지 올려주세요!

댓글 13
  • 2023-08-09 20:15

    1. 정리 59(188p) "우리가 수동적인 정서에 의해 수행하도록 규정되는 모든 행위를 우리는 수동적 정서없이 이성에 의해 수행되도록 규정될 수 있다."
    정리 59 주석(189p) "수동적인 정서에서 생겨나는 모든 욕망은 인간들이 이성에 의해 인도될 수 있다면 아무런 쓸모도 없을 것이다."

    질문 1) 이성으로 수동적 정서를 통제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이 주장이 불쑥 튀어나온 느낌입니다. 그리고 이성에 의해 인도될 수 있다면 수동적 정서에서 생겨나는 욕망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말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2. 정리 66 주석(193p) "우리는 오직 정서 또는 의견에 의해 인도되는 사람과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중략)...나는 전자를 노예라고, 후자는 자유인(Homo liber)이라고 부른다."

    질문 2) 4부 정리 66주석에 처음 등장하는 '자유인'은 초반에 언급된 '인간 본성의 모형'과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나요? 자유인도 정념을 겪는 것으로 보이지만 보통 사람이 현실적으로는 도달 불가능한 존재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3. 정리 67(194p) "자유인은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에 대한 명상이 아니라 삶에 대한 고찰이다."

    질문 3) 같은 정리 증명에서 "이성의 명령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인도되지 않으며"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스피노자가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것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지 의견을 나눠봤으면 합니다.

  • 2023-08-09 21:51

    1. 지난 시간에 이어 불경의 구절들을 마주하는 듯, 공맹의 사상과 마주하는 듯하는 텍스트들이 있어 놀람의 정서를 겪기도 했습니다. 특히 4부 정리 62는 불경의 어는 구절이 생각나며 넘사벽처럼 느껴졌습니다. (삼시세불이 평등하다..)  인간의 수준으로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차원.. 깨달음의 영역으로 넘어간듯한 느낌적 느낌. 그만큼 쉽지 않고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말입니다. 선생님들은 정리 62의 내용이 어떠하셨는지 궁금합니다.  

    (_4부 정리 62_정신이 이성의 명령에 따라 실재들을 인식하는 한에서 정신은 미래 실재의 관념이든, 과거 실재의 관념이든 또는 현재 실재의 관념이든 관계없이 동등하게 변용된다.)

    2. 스피노자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단계적인 차원으로, 즉 "수동정서로서의 기쁨을 통해 공통통념들을 형성하여 능동적으로 기쁨을 산출하는 차원으로의 과정을 긍정하면서도",, 유난히도 [연민]의 정서, [두려움]의 정서 [부끄러움]의 정서에 대하여 거듭하여 (4부 정리 58의 주석, 4부 부록 16항) '덕이 아니다', '이성의 사용에 속하지 않는다'라고 지적하는 것은 왜 일까요? 

    (그 자체가 일종의 '슬픔'이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그 자체가 일종의 슬픔일 다양한 정서들 중에서 유독 자주 소환되는 것이 저 [연민]과 [부그럼움]의 정서이니 말입니다.__맹자의 사단 중 [측은지심]과 [수오지심]이 정의를 위한 씨앗과 같이 귀한 마음으로 대접받는 것과 관련하여,,)

    3. 스피노자에게 종교란 무엇일까요? '신즉자연'과 관련하여,,

    (_4부 부록 15항 _(...)하지만 사랑을 이룩하기 위해 각별히 필요한 것은 종교 및 도덕과 관련된 것이다.) 

    ====추가질문 ^^
    4. 4부 정리68의 주석_에서 '인간의 유용성'이란 어떤 것인가요?

    (_4부 정리68의 주석_(...)곧 신이 오직 인간의 유용성만을 고려했던 역량 이외의 다른 역량은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 )

  • 2023-08-09 22:26

    정리 64. 나쁨(악)에 대한 인식은 부적합하다.
    따름정리. 만약 인간정신이 적합한 관념들만 갖고 있다면, 인간 정신은 악에 대한 어떠한 통념도 형성하지 못한다.

    (질문) 슬픔, 나쁨, 악에 대한 인식은 외부원인에 의해서 인간 본성이 제한되는 상태이므로 부적합한 인식이다. 또한 적합한 인식은 악에 대한 어떠한 통념도 만들어내지 못한다고 한다. 즉, 슬픔, 나쁨, 악 등의 정서를 벋어나려면 그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해야 하는 것으로 읽힌다. 한편, 적합한 인식은 그 정서의 원인을 찾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는데, 원인을 찾았다고 해서 그 정서들이 (줄어 들 수는 있을지 몰라도) 없어질 수는 없을 것 같은데......어찌 생각하나요?

    정리 68. 만약 사람들이 자유롭게 태어난다면, 사람들은 그들이 자유로운 한에서는 좋음과 나쁨에 대한 어떠한 개념도 형성하지 않을 것이다.

    (질문) 자유인은 적합한 관념만 가지고 있으니 나쁨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정리 64의 따름정리). 그런데 자유인은 이성의 명령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고, (정리 63 따름정리, 정리 67 증명) 우리는 이성에서 생겨나는 욕망에 의해 직접적으로는 좋은 것을 따르고 간접적으로는 나쁜 것을 피한다고 하였다. 즉, 좋음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질문) 정리 68 주석에서, ‘우리가 (중략) 단지 인간이 실존하는 것에 대한 원인인 한에서의 신에 대해서만 주의를 기울이는 한에서는 이 정리(정리 68)의 가설은 거짓이다’(정리 4)라고 한다. 사람들은 자유롭게 태어나지 못한다는 것인가? 정리 4에 의하면 인간은 신 또는 자연의 일부이고 무한하지 않으며, 적합한 원인이 되는 그러한 변화들만 겪을 수 없다고 한다. 한마디로 인간은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 정리 68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 2023-08-10 02:29

    1. 일단, 스피노자는 명백하게, '이성의 인도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을 '선-좋은 것-능동-자유'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기쁨'의 정서는 그것이 '이성과 합치하는 한'에서만 '좋은 것'(정리59의 증명)이 될 수 있고요. 여기서 누구라도 궁금해할 법한 질문이 떠오릅니다. 1) 이성의 인도 하에 행동하는 것은 어떤 행동일까요? 2) 이성과 합치하지 않는 기쁨도 어쨌든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변용'일텐데, 이러한 수동적 변용으로서의 '기쁨'과 이성과 합치하는 '능동적 변용'으로서의 '기쁨'은 서로 무슨 관계일까요?

    2. 수동적인 것은 '외부원인'에 의한 것으로, 능동적인 것은 '내부(자기)원인'에 의한 것이라고 할 때, 이 경우 '외부'와 '내부'는 사실은 같은 것으로서 '자연-신-실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단적으로 원인-결과 연쇄를 잘 몰라서 닥쳐온 일을 '겪'습니다. 만약 그것을 안다면, 요컨대 이성의 인도에 따라 인식한다면, '외부원인'은 더 이상 '외부'의 원인이 아니게 될 겁니다. 그것은 '내부원인'이 되겠죠. 그렇게, 우리를 변용시키는 '원인'들을 더 많이 인식할수록 우리는 '능동적'이 됩니다. 이 일이 실제로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요? 더 많이 인식할수록 우리는 덜 '겪게' 되므로, 하고자 하는 것과 해야할 것 사이의 간격이 줄어들 겁니다. 다시 말해 '의지'를 발휘해야할 상황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죠. 자유롭게 하는 것이 곧 이치에 맞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4장 마지막 정리들에서 이야기되는 '자유인'의 의미일 겁니다. 제 의문은 조금 엉뚱하게도 어느 정도까지 '이성의 인도'를 따를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자유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현재 인류의 과학기술은 자연의 인과사슬을 17세기에 비해 훨씬 더 많이, 세심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분자생물학이나 양자역학 같은 걸 보면 기가 막힐 지경이고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를 또는 과학자들을 '자유인'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뇌과학의 예를 들면 어떨까요? 뇌과학자들은 어떤 신경전달물질이 얼만큼 분비될 때 어떤 기분을 느끼고, 그것이 사람에 따라, 수용체가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어떤 강도로 느끼는지도 측정합니다. 말하자면 정념적 변용도 아직은 불완전하지만 과학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가능한 듯 보입니다. 그런데 이 역시 마찬가지로 그걸 안다고 해서 신경생리학자들을 '자유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듯 보입니다. 그렇다면 스피노자가 말하는 그러한 '인과연쇄'와 그것에 대한 '인식'은 도대체 어떤 '연쇄'와 '인식'인 것일까요?

    3. 스피노자의 논의 구도에 따르자면 '반성적 주체'는 하나의 허구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상상적 인식'의 산물이죠. 다시 말해 '자기'는 원래 '실체'가 아닌데 그것이라고 상상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의지'를 발휘해서 이렇게 저렇게 정념을 통제할 수 있다고, '자기'라는 국가의 통치자는 자신이라고 상상하는 것이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인식이 커질수록, 더 많은 공통감각을 획득할수록 우리는 '자기'라는 상상에서 빠져나오게 됩니다. 요컨대 '연결'되는 게 많아질수록 '자신'이 어떤 것과 연결된 것이 아니고 자신이 이미 '연결' 자체임을 깨닫는 것이죠. 그렇게 '국가'는 해체됩니다. 그런데 일단 해체가 되려면, 의지를 발휘하는 주체로서 '자기'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말하자면 특정한 행동, 상상 등을 경험적 결과 및 학습에 따라 수정하고 갱신하는 자기를 평가는 '자기' 없이 '인성의 인도'에 따르고, '본성에 합치'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나요?

  • 2023-08-10 09:30

    질문1
    정리 60의 증명에서 스피노자는 “신체의 A라는 부분과 이 부분의 정서와 욕망은 전체를 고려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증명을 통해 스피노자가 말하는 정신, 정서, 욕망이 흔히 우리가 상정하는 어떤 통일된 주체나 자아의 정신, 정서, 욕망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피노자가 말하는 이성의 인도란 어떠한 것일까요? 욕망이나 정서와 마찬가지로 이성을 발휘하는 어떤 주체(사람)이 전제되고 있다기 보다는 신체의 부분들 사이에서 혹은 신체의 부분과 외부실재의 사이에서 공통관념이 형성되거나 합성된 개체로서의 신체 전체가 외부실재와 공통관념을 형성할 때 그것을 2종인식, 즉 이성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이성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은 정서와 대립되는 역능을 가진 정신의 부분으로서의 이성이 아니라 오로지 정신에서의 공통관념의 형성여부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스피노자의 이성은 정신의 고유한 활동능력이라기보다는 신체의 합치의 다른 표현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독특한 실재들의 합치에 대한 적합한 관념인 이성은 정서나 욕망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욕망과 정서와 함께 하지 않는 이성의 인도를 생각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질문2
    정리62 증명/ “정신이 이성의 인도 아래 인식하는 모든 것을 정신은 동일한 ‘영원성의 관점’에 따라 또는 필연성의 관점에 따라 인식하며 동일한 확실성에 의해 변용된다.”(feat 2부 정리 44 따름정리2)

    2부 정리 44의 따름정리2에서는 “이성의 토대는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을 설명하며 어떠한 독특한 실재의 본질도 설명하지 않는 통념들이다. 이 때문에 이 통념들은 시간과 아무런 관계 없이, 어떤 영원의 관점에서 인식되어야 한다”고 보충하고 있군요.

    정리62의 증명을 2부 정리 44 따름정리 2와 관련해서 생각해볼 때 이성은 어떠한 실재의 본질도 설명하지 않는, 오직 공통적인 것을 설명하는 보편통념입니다. 그렇다면 이성의 인도를 받을 때 우리는 실재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고 공통적인 것을 인식한다고 이해해도 좋을까요? 실재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과, 공통적인 것을 설명한다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이것으로 인해 3종인식과 2종인식이 구분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성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의 의미를 좀 더 명료하게 하기 위해 질문합니다.

    질문3
    부적합한 인식을 하고 정서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는 어떻게 이성의 인도를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일까요? 지금까지 읽은 것으로 보아 “인간이 그 자신 및 그의 행위를 적합하게 인식할 수 있게 할 만큼 인간의 행위역량을 증대하게 하는(정리 59 증명)” 기쁨이 바로 이성의 인도로 우리를 이끄는 견인차가 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 우리가 양태라는 존재론적 현실 자체가 양태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적인 것을 인식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것은 아닐까요?
    2부 정리 38은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 그리고 부분과 전체에 균등하게 존재하는 것들은 적합하게 인식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설령 우리가 수동적 정념에 강하게 예속되어 있다 하더라도 우리 정신의 어떤 부분은 이 공통적인 것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이성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두 개의 길이 있는 것 아닐까요? 하나는 기쁨을 통해 적합한 인식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변용이 일어나는 것(이것이 정서를 좋은 정서와 나쁜 정서로 나누는 이유겠지요). 또 하나는 외부물체들과의 관계에서 정서를 겪는 양태로서의 현실 자체. 이것을 선험적인 것은 아니고 잠재적인 것이라고 이해해도 될까요? 그점에서 이성의 인도를 받는 것은 가능성의 모색일까요? 아니면 잠재성의 발현일까요? 문득 앞서 우연성과 가능성의 정의와 관련해서 이 문제를 생각해보고 싶어지는데.. 어떤가요?

  • 2023-08-10 10:43

    정리73.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복종하는 고립 상태보다는 공동의 법령(decreto)에 따라 살아가는 국가 안에서 더 자유롭다.
    스피노자가 공동체라는 좀더 포괄적인 표현대신 국가라는 표현을 쓴 이유가 궁금합니다. 스피노자 역시 종교, 국가들의 예속을 피해서 이사를 다녔는데요.
    이성에 따라 인도되는 사람들로만 구성된 이상적인 공동체가 아닌 이상, 예속은 피할 길이 없는데 그렇다면 스피노자에게 국가는 필요악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철학의 역사에서 소크라테스가 법에 따라 사형을 선고 받았는데, 철학자인 스피노자가 공동의 법령(decreto)을 중시하는 게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 2023-08-10 10:58

    정리 67에서 73까지 이어지는 자유인의 삶에 대한 스피노자의 설명을 보면, 자유인은 이성에 의해 인도되고, 적합한 관념만을 가지며, 지헤롭고, 신의있고, 굳건하고, 죽음보다 삶에 집중하는... 거의 해탈한 부처님을 연상시킵니다. 정리 73에 가면 공동의 법령에 따라 살아가는 국가 안에서 자유인은 더 자유롭다고 말합니다. 지난 시간(사회의 형성이 자연상태와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상태에 기초하여 이루어진다는) 정리 37의 주석에서부터 또 이번 시간 정리 73의 내용을 이어서 생각해보면 무엇보다 건전한 이성에 근거한 법률을 둔 국가(정치적 해법)가 아니라면 시민은 자유인은커녕 노예로 전락할 가능성이 더 높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4부를 쓰면서) 정치론을 써야겠다고 맘 먹은걸까요? 여기까지 읽다보니 윤리학보다 정치론이 더 중요할 것 같은...

  • 2023-08-10 11:12

    4부 정리 68의 주석에서 스피노자는 ’우리가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만 또는 오히려 무한한 한에서가 아니라 단지 인간이 실존하는 것에 대한 원인인 한에서의 신에 대해서만 주의를 기울이는 한‘ 이 정리의 가설 즉 ’인간이 자유롭게 태어난다‘는 (4부 정리 4에 따라) 거짓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다시 풀면 ’우리가 무한한 한에서의 신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한‘ 우리는 자유롭다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경지일까요? 필시 4부 부록 4항에서 말하는 ’지성 또는 이성의 완전화‘이며 이는 곧 ‘신에 대한 직관적 인식’이 그 답일 것입니다. 이것은 지복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4부 부록의 마지막 항인 32항에서 언뜻 또 다른 대안을 제시하는 듯합니다. ‘우리가 할 일을 다 했으며, 우리가 가진 역량은 우리가 이 일을 피할 수 있게 하는 데까지 미치지 못했다는 것’과 ’우리가 그 질서를 따르는 자연 전체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우리가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적 능력에 의해 정의’되는 ‘우리의 더 나은 부분’은 ‘자족감’ 속에서 존속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러한 상태는 ‘무한한 한에서의 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기=완전해진 지성 또는 이성=지복의 상태’라는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 ‘자족감’이라는 능동 정서를 매개로 삼거나 혹은 경유하는 것일까요? 하지만 이 32항과 4부 정리 4를 비롯해 스피노자가 재차 강조하듯 인간이 자연의 일부가 아니게 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고 인간의 역량은 극히 제한적입니다. 이 점에 주목한다면 혹시 이 자족감의 상태가 곧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상태 즉 지복, 이미 이성이 완전화된 상태, 이미 덕을 누리는 상태일까요?

  • 2023-08-10 11:27

    질문 재사용합니다.

    1부 정의7과 4부정리 66 주석에서 질문합니다. - 자유와 필연성

    1부 정의7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실존하고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행위하도록 규정되는 실재는 자유롭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실재에 의해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되는 실재는 필연적이라고 또는 오히려 제약되어 있다고 한다.' 1부 정의 7을 길게 풀어 쓴 것이 에티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4부에 이르러 '본성=역량=덕=이성의 인도=인식'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스피노자는 이를 인간의 처지에서 다시 요약합니다. 4부 정리 66주석(P193) '우리는 오직 정서 또는 의견에 의해 인도되는 사람과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전자의 사람은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은 간에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행위를 수행하는데 반해, 후자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의 욕망에만 따르며, 그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알고 있는, 그리고 이 때문에 그가 가장 욕망하게 되는 행위만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나는 전자를 노예라고, 후자는 자유인이라고 부른다. ' --> 스피노자에게는 필연성과 자유가 명백하게 양립가능합니다. 다만 필연성을 잘 해석하는 것이 자유를 잘 해석하는 것이 됩니다. 저는 답답하기는 해도 필연성과 자유가 같이 서 있는 스피노자의 이 해석이 엉뚱하다고 여기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 어떠신지요?

  • 2023-08-10 11:43

    정리67. 자유인은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에 대한 명상이 아니라 삶에 대한 명상이다.

    증명에서 스피노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인도되지 않고 직접적으로 좋음을 욕망하기 때문에 죽음이 아니라 삶을 명상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과연 자기 주변과 도처에 발생하는 죽음을 어찌 생각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그 다음 68정리에서 자유인은 좋음과 나쁨에 대한 어떠한 개념도 형성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그가 죽음을 사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나쁨도 좋음도 아니라는 것을 통찰하는 가운데 죽음에 대한 적합한 관념을 형성한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 같다. 다만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죽음 그 자체를 명상하는 것은 결코 기쁨을 생성할 수 없기에 삶을 명상하라고 말하는 것 같다. 서양에서 신과 죽음에 대한 공포는 고대부터 현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고통의 근원으로 여겨지는데, 스피노자가 신에 대한 공포에는 <에티카>에서 세세하게 분석하고 증명하면서 정면으로 맞서는데 비해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음"이라는 전략을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렇다면, 신과 죽음이 둘다 사람들에게 공포를 유발하는 공통점이 있는데 왜 스피노자는 이 둘에 대한 전략을 달리 했을까? 이렇게 전략이 다른데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 죽은 후 천당에 가기 위해 신을 믿는다면 결코 신과 죽음은 다른 키워드가 아닐텐데... 이런 점이 스피노자가 신을 믿지만 기존의 종교와 달랐던 점과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 2023-08-10 12:07

    질문1) 정리65의 "이성의 인도 아래 우리는 두 개의 좋음 중에서 더 좋은 것을, 그리고 두 개의 나쁨 중에서는 덜 나쁜 것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라는 구절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증명에서" 우리가 더 좋은 것을 향유하는 것을 방해하는 어떤 좋은 것은 사실은 나쁜 것이다...더 작은 나쁨은 사실은 좋은 것이다..."라는 부분은 잘 모르겠네요. 그 근거가 4부 서문에서 좋음과 나쁨은 우리가 그것을 비교하는 한에서 말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 말은 차선이나 차악은 사실은 없다는 뜻일까요?

    질문2) 부록 14항. 따라서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욕심에 따라 모든 일을 처리하지만, 그들의 공동사회로부터는 손해보다는 더 많은 이익이 따라 나오게 된다.
    "공동사회로부터 손해보다는 더 많은 이익이 따라 나오게 된다"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요?

  • 2023-08-10 13:29

    정리68의 자유롭게 태어난다면 자유로운 한에서 좋음과 나쁨에 대한 어떠한 개념도 형성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했는데 적합한 인식과 좋음 혹은 기쁨은 어떤 관계일까요

  • 2023-08-10 16:26

    질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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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철학학교 시즌3] 스피노자 정치론 1,2장 후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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