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시간 9회차 후기

매실
2021-11-08 11:18
352

 

이번주엔 2편의 2장, '본래적 존재가능의 현존재적인 증명과 결단성' 을 읽었다.  

 

본래성의 가능성을 입증하는 2장에 오며, 본래성이 마치 실체를 상정하는 듯한 (하이데거는 실체를 결코 말하지 않았음에도)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올바른 것, 좋은 것, 규범적인 도덕이라거나 ‘진정한 나 자신’ 같은 것이 아니더라도, 본질에 가까운 무언가 있는데 못 찾고 있으니 그걸 찾아보자고 자꾸만 읽게 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잡담이나 사물에 몰입하는 비본래적 나는 안 좋고, 세계의 무 앞에서의 섬뜩함에 정면으로 마주하여 기획투사하는 건 좋은 것이다, 라며 우열을 하이데거가 달아두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어쩌면 이거야 말로 개념 조차 눈앞의 존재처럼 보고, 그래서 ‘그게 뭔데?’라며 사용 사태를 찾고자하는 접근인데 말이다.  

 

게다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양심’이라는 단어를 써서 본래성을 제시해주는 증언이 양심이라고 해버리니  ‘양심도 없냐’는 말의 양심과 뒤섞여 혼동하기가 딱 쉬웠다. 게다가 좋은 생각의 한 구절에 나올만한 ‘양심의 소리’라니? 하이데거에게 살짝 실망할 뻔 했다. 이제까지 참신한 신조어(?)들로 개념을 만들어서 우리를 쫄리게 했는데 갑자기 너무 만만한 단어를 꺼내오셨다고 해야할까. 

 

아니나 다를까, 하이데거는 우리가 필시 이 양심을 헷갈릴 것을 지극히 심려하셔서 양심은 말의 양태이지만 발성이나 소리도 아니고, 법률이나 심리적인 것도 아니고, 눈앞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 누누히 강조한다. 본래성이 ‘회복되어야할 무엇’이라고 읽혀지는 건 아마도 이 양심이 어떤 바르고 좋고 올바르며 가치있는 무언가를 지향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거다. 딱 하이데거가 예상한 바다. 예전부터 (나는) 이런 식의 기준이 매우 싫다고 말은 자주 해왔지만, 워낙에 비본래적 삶에서 그들-자기로서 잡담 속에 파묻혀 살다보니 정답같이 뚜렷한 내용(일종의 ‘공공성’일듯) 을 나도 모르게 찾고 있었나보다. 무엇인 건 눈앞의 존재가 아니면 이해의 언저리에도 가지 못하는… 인식에서 이토록 벗어나기가 어렵다니...

 

세미나 시간에 양심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라고 말해주셔서 (어떤 공동현존재셨는지…) 다시 감을 잡았다. 즉 양심은 세상 사람들의 공공성에 자신을 상실한 현존재를 불러세우는 부름 그 자체이다. 양심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고, 단지 침묵의 양태로 현존재를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으로 불러 세운다. 

 

이건 초빈샘이 말했듯이 논리로 접근하기보다는 직관적으로 이해하면 퍼뜩 와닿는데, 예를 들어 회사에서 야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어느 날 ‘이건 아닌 거 같아. 나 혹시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라는 섬뜩함이 드는 순간 같은 게 아닐까. 이런 순간은 분명 살면서 종종 찾아온다. 섬뜩함을 흔히 쓰는 표현으로 바꾸자면 (내 식으로) 싸함일텐데, 보통은 이런 싸함이 불안으로 이어지고 나를 세계 앞에 발가벗겨 세우는 듯 하지만, 이런 기분 잡힘은 빨리 떨쳐내야 하는 불쾌감이기에 퇴근 길에 맥주 한 병 사들고 와서 유튜브를 보면서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와의 배려로 도피하게 된다. (도피라는 말은 나올 때마다 뜨끔뜨끔한데,  내가 하는 여러가지 것들이 과연 도피인가라는 양심의 소리가 찾아올 때마다, 그냥 책이나 읽자며 또 도피를 하고 있다. ) 

 

양심의 부름은 현존재가 스스로 존재근거를 떠맡아야 하는 내던져짐에 있음을 열어 밝힌다. ‘이대로 살아도 되는 것인가’라는 섬뜩함에 기분 잡힐 때, ‘어떻게 살아야 한다’라는 답은 그 누구도 주지 않는다. 나는 왜 이러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무어라 답해야할지는, 현존재가 존재가능으로 ‘기획투사’ 하며 그때그때마다의 확실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일상어로 풀이하자면 우린 삶의 무의미 속에 살 수 밖에 없다. 근거도 의미도 주어지지 않은 삶에 내던져 있은 채로, 그 어쩔 수 없음을 내 책임으로 끌어 안으며 살아야 한다. 다시 하이데거의 개념으로 쓰면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근거를 스스로 인수해야만 하는 내던져진 실존이라는 어쩔 수 없음과 무력성에서  ‘탓이 있음’ (책임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현존재의 염려는 이 탓이 있음을 이해함으로서 ‘양심을 가지기를 원함’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퇴근길에 맥주를 사들고 털레털레 집으로 걸어들어오는 현존재는, 섬뜩함에서부터의 염려의 부름에 불러세워진 양심을 가지기를 원함(결단성)에서, 그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으로 기획투사함으로써 과연 자기 자신을 본래성에서 내보일 수 있을까. 

 

 

 

 

+요약하기보다 후기쓰기가 역시 더 어렵다. 한번 소화한 내용으로 쓰고 싶은데, 개념 하나씩 쓸 때마다 영어 글쓰기하듯이 뜻을 떠올리고 단어를 골라야 한다. 예를 들어 ‘드러낸다’ 이런 말도 여기에 맞나, 안 맞나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외국어 공부할 때 자꾸 한국어-외국어를 대입하면 그 언어를 이해할 수 없고, 그 언어 그 자체가 가진 사고방식 속으로 들어가야하는 거 처럼 (외국어 공부를 많이 해보진 않았지만.;;)  하이데거도 그렇게 이해해야 하는 듯 하다. 암튼  맞든 안 맞든 그냥 기획투사할 수 밖에.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으니. 후기 쓰며 오늘치 집중력을 소진해버렸으니, 이런 나를 염려하며 잠시 본업은 미루고 음악 듣기를 하며 도피해야겠다. 그나마 후기를 씀으로 기투할 수 있었던 것은 공동현존재이신 가마솥샘이 양심을 가지기를 원함으로 결단하시어 자꾸 후기쓰기에서 도피하려는 타인의 양심도 밝혀주셨음이니.... 감사드립니다.  

 

 

 

 

댓글 5
  • 2021-11-08 15:47

    ㅎㅎㅎ  맞아요. 후기  쓰기가 더 어려워요. 

    그나 저나 나의 ' 양심 ' 후기에 인디언님의 이야기를 내  비쳐 가지구, 요요님이 예상하신대로 자동차예  관한 결정은 공동현존재의  처분에  맡겨진 채로  나의  지갑을 열어 젖히게 되었습니다.  실존은 어디까지나 '나의' 실존임을 깜박해 가지구......ㅠㅠ 

    • 2021-11-09 02:37

      존경하는 가마솥 샘.. 질문이 있는데 그건 세미나 시간에 드릴게요. 여기다 올리기는 좀 저어되어서 ㅎㅎ

  • 2021-11-08 18:54

    와, 저는 매실샘 후기 좋네요. 이번엔 후기 맛집이네요.ㅎㅎ 

    비본래성은 그저 세인의 삶이니 이런 것, 저런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지 않은데

    본래성이 문제가 되면.. 아직까지는 그저 이것이 아니다, 저것이 아니다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것 같아요.

    본래적 존재가능은 아무래도 본래적으로 실존할 역량을 의미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현존재의 실존에서 그것이 어떻게 구현된다는 것인지 알 수는 없는 가운데

    하이데거는 자신의 방식대로 천천히 한계단 씩 나가고 있네요.

    그러다보니 우리는 본래성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부터 영성이라든가 깨달음이라든가 도(道) 근처를 기웃거리게 되는 것 같아요.

    음.. 과연 하이데거도 '본래성'을 우리처럼 생각했던 것일까, 저는 그걸 아직도 모르겠어요. 

    이 책 끝나기 전에 언젠가 감이 잡히게 되기만 바랄 뿐입니다.ㅋ

     

     

  • 2021-11-08 21:51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퇴근길 맥주-섬뜩함'처럼 저는 '본래성'이라는 게 어떤 '상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그걸 의식하자고 마음 먹으면 알아차릴 수도 있지만, 아니어도 상관없는 것이죠. 중요한 건 '내-삶'의 조성과 구성이 재편되는 일이라는 것일테고요. 그래서 요요샘 말씀처럼 저희가 자꾸 '도', 영성', '깨달음' 같은 걸 떠올리는 것 같습니다. 또 한가지는 후기를 읽다보니 생각난 건데, 현대철학은 이건 인식론, 이건 논리학, 이건 윤리학 이런 식으로 딱히 구분을 하지 않네요. 앎과 함과 삶이 원래 하나였다는 걸 하교수님이 열어밝혔기 때문일까요? ㅎㅎ

  • 2021-11-09 02:36

    본래성 비본래성으로 읽으려들면 나도 모르게 자꾸 좋고 나쁘고를 들이대게 되더라구요. 그러고 나면 책이 시시해지고 평면적으로 읽게 되는거 같아요. 요즘은 열어 밝혀진 채 열어밝히는, 내던져진 채 무언가를 내던지는…수동이 먼저인지 능동이 먼저인지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 수동과 능동이 한데 뭉쳐 있는 그 다이나믹에 점점 더 관심을 두며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넓혀서 선구나 결의를 하이데거처럼 본래성이라는 극한으로 좁혀서 읽지 않고 ‘아니 그건 일상성이나 세인성이잖아’라고 해석될 수 있는 영역까지 넓혀보고 있어요. 어차피 초인되기는 싫고 하이데거의 본래성은 애저녁에 틀려버렸으니까… 아마도 하이데거는 싫어하겠지만 본래성을 찾다가 비본래성으로 고꾸라지더라도…그 다이나믹을 삶에 펼쳐보는 것이 애매하고 평범한 사람으로서 해볼만한 일이 아닌가 싶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비본래적으로 잘 살 것인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우리에게 역량이 있다면 그 정도면 enou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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