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회> 명상에 빠지다

오영
2024-02-11 05:22
382

                                                                                                                                                                                                                                

덕밍아웃

 

명상에 빠졌다고 공개적으로 고백하게 될 줄은 몰랐다. 무엇이든 이렇게 대놓고 덕심을 드러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혼자 은밀하게 빠졌다가 시들해져서는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슬그머니 발을 빼곤 했다. 무언가를 오래 꾸준히 좋아하기에는 열정이나 에너지가 늘 부족했다. 그런 내가 명상에 대한 덕심을 표출하며 더 많은 친구들을 명상의 세계로 초대하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우연 혹은 필연

 

문탁에서 주로 서양 철학을 공부하는 동안 불교는 관심 밖이었다. 명상도 요가를 마무리하는 한 과정이나 수면에 도움이 된다는 요가 니드라 정도를 해봤을 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 ‘불교와 명상’이 어느 순간 덕질의 대상이 될 줄이야. 그것도 이 둘이 별개가 아닌,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완전체로 말이다.

 

처음 불교 명상을 만난 날의 기억이 2021년 1월 4일자 일기에 남아 있다. 바로 그 전날 문탁네트워크의 마지막 운영회의가 있었다. 그날, 2 년 여에 걸친 분리 논의가 마침내 종결됐다. 몇 달간 그 최종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 난 그 논의 과정에 집중하지 못한 채 이 모든 것으로부터 빨리 벗어 나고만 싶었다. 다들 공동체의 분리를 새로운 10년을 준비하는 전환점이자 출발점으로 삼아 애쓰고 있는데 난 여전히 쿠키무이 사업을 정리한 후 그 감정적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그 모든 것이 끝났을 때는 바라던 후련함보다는 상실감과 허탈감이 더해져서 당혹스러웠다.

 

논의가 이어지는 동안 때때로 템플스테이를 떠올리곤 했다. 고즈넉한 산사에 머무는 동안 저절로 머릿속은 말끔히 비워지고 헛헛한 마음은 채워질 것만 같았다. 그날도 템플스테이를 검색하고 있었는데 문득 ‘초기불교 명상법’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땐 배경 지식이 없어서 ‘초기 불교’와 ‘명상법’, 이 둘의 조합이 무척 낯설고 신기하기만 했다. 초기 불교가 어떤 것인지, 기존 불교와는 어떻게 다른지, 초기 불교의 명상은 선(禪)과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궁금했다. 호기심에 이끌려 둘러보다가 한 법문 영상에 딱 꽂히고 말았다.

 

그 법문에 따르면 아무리 멋진 여행지에, 좋은 경치라도 종일 돌아다니다 보면 지치기 마련이다. 하물며 복잡한 거리를 이리저리 쉬지 않고 돌아다닌다면 당연히 지치고 괴롭지 않겠는가. 근데 왜 그렇게 돌아다니는 걸까? 그건 원하는 것을 잡으려 하거나 혹은 그 반대로 싫은 것을 피해 도망가기 때문이다.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무료한 느낌에서 벗어나 더 강한 느낌을 찾느라 그러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 자신이 그러고 있는 줄도, 그래서 지치고 힘든 줄도 모르기 때문에 멈추고 쉴 줄도 모른다. 그래서 더 괴롭다. 그 순간 양동이 가득 얼음 물이, 머리 위로 쏟아진 것 같았다. 아, 지금 내가 그러고 있구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쿠키무이 사업이 끝난 후 일상은 그 어느 때보다 한가했지만 매일 매일 마라톤을 뛰는 것처럼 지치고 힘들었다. 그건 지금 여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미 지난 일들을 끊임없이 복기하며 시시비비를 따지는 마음 때문이었다. 사업 정리 과정에서 뜻대로 되지 않았던 여러 상황들에 대한 원망과 자책, 그리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뒤엉켜 생겨난 망상들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런 나를 직시하는 순간, 캄캄한 어둠 속에서 EXIT→이라는 선명한 불빛을 발견한 것 같았다. 숨통이 좀 트였다. 그것 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명상이 주는 선물

 

드디어 아무리 애를 써도 찾을 수 없던 출구를 찾았다는 희망, 기쁨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했다. 이제 시작일 뿐 종착지가 아니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명상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15분, 20분 그저 눈을 감고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때 명상은 함께 있으면 안심이 되고 편안한 좋은 친구와도 같았다. 하지만 어렴풋하게 나마 가야 할 방향은 알지만 먼 길을 가는 데 필요한 지도도, 나침반도, 변변한 장비도 갖추지 못한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가이드도, 동료도 없으니 종종 길을 잃곤 했다.

 

 

시간이 흐르고 2023년 불교 학교에서 초기 불교와 명상에 대해 공부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선뜻 용기 내기가 어려웠다. 시간도, 돈도 문제가 되었다. 그러다 딱 일 년만 무진장*의 도움을 받아 공부하기로 했다. 그 다음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공부하게 되어 기쁘고 감사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괜한 욕심에 여러 친구들에게 민폐만 끼치고 있다는 자의식이 일어나곤 했다. 도움은 도움대로 받으면서 이 불편한 마음까지 피하려는 건 지나친 욕심이라고 떨쳐버렸다. 그래도 때때로 일어나는 불편한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그러다 여름 학기부터 세미나 회원들과 명상 수행을 함께 하고 일지를 공유하면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2023년을 보내고 돌아보니, 작년 이맘때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변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중 무진장에 대한 마음의 변화, 태도의 변화는 그 모든 변화들을 함축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민폐라는 말에 얽매이지 않았다. 도움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친구들 덕분에 배우고 경험한 것들에 온전히 감사하고 기뻐하기에도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변화로 가장 행복해진 사람은 바로 나였다.

 

 

이 모두 붓다의 가르침과 명상 덕분이다. 명상을 통해 얼마나 많은 편견과 습관적인 생각, 그리고 망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지를 알아차리는 것은 정말 놀라운 경험이다. 명상이 특별한 신비 체험이라서가 아니다. 일상에서는 수많은 자극들에 가려 알아차리기 힘든 마음의 움직임, 그 변화의 흐름이 명상 중에는 고스란히, 생생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렇게 드러나는 마음을 단지 알아차리고 관찰하기만 할 뿐이지만 일상에도 차츰 스며들어 저절로 마음의 태도가 달라진다. 명상을 통해 달라진 이런 변화들을 일상에서 알아차릴 때마다 그저 놀랍다.

 

많은 경우 내가 경험하는 괴로움의 대부분은 자아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내 것, 내 느낌, 내 생각’에 대한 집착이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고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의지나 노력으로는 그것을 막을 수가 없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나에게는 매우 소중하고 특별한 친구라고 명상을 소개하는 순간, 그 특별함이 오히려 빛을 잃고 초라해질까 두려운 마음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 두려움 역시 소중한 내 것, 나만의 특별한 경험이라는 착각과 집착에서 생겨난 것임을 알아차리고 인정하는 순간 사라진다. 물론 이는 일시적인 변화이므로 언제든 다시 일어날 것을 알지만 그렇다 해도 똑같은 경험이 되풀이되는 일은 없다. 모든 변화는 같은 것의 반복이 아니라 언제나 전혀 새로운 사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매번 명상을 할 때마다 이번엔 또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기대되고 설렌다. 그리고 매일 매일 그런 변화의 순간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쌓이다 보면 언젠가 몸과 마음에 온전히 새겨질 날이 오리라 믿는다. 명상은 늘 내게 그 어떤 조건에서도 마음을 멈추고 고요함과 평온, 그로 인한 기쁨을 경험할 수 있음을 가르쳐준다. 따라서 앞으로도 그 기쁨이 에너지가 되는 한 이 덕심이 사그라지는 일은 없을 것 같다.

 

* 무진장 : 문탁 회원들이 출자해 만든 한 통장의 공동 창고로 상호 부조와 재분배의 원리로 운영된다. 어려움에 처한 회원들을 필요에 따라 긴급한 생활 자금이나 기본 소득의 개념인 마중물로 지원하고 있다.

 

     

 

  오영 

  작년에 불교공부와 명상을 시작하면서 서두르지 않는 삶, 천천히 읽고 쓰며 명상하는 삶을 꿈꾸게 되었다.

  더불어 올 한해 명상동아리 활동으로 조금 더 많은 친구들과 함께 명상하기를 소망한다.

댓글 8
  • 2024-02-12 08:43

    덕심 ㅋ
    난 덕질을 평생 못할줄 알았는데 오영샘 글을 읽으니 이것도 덕질일수 있군요 ㅎ
    명상에 대한 저의 변화도 참 어마어마하네요 지난1년간 ^^
    친구들과 함께 명상하기 올해도 좋은 한해가 될듯요~

  • 2024-02-12 18:37

    오영쌤이 다른 데 안 빠지고 명상에 빠져서 얼마나 다행인지요!ㅎㅎ

    어떤 장비도 없이 언제 어디에서든 숨쉴 줄만 알면 할 수 있는 명상은 참 신기하고 매력이 넘쳐요. ^^
    오영쌤이랑 오래오래 함께 명상하고 싶어요.

    글 잘 읽었습니다~

  • 2024-02-13 09:35

    명상으로 일상을 보살피는 힘을 키울 수 있군요~명상 멋지네요~

  • 2024-02-13 10:21

    오영님의 글 읽으니 좋네요~~

  • 2024-02-13 10:23

    오영샘과 명상이라.
    이건 요요샘과 명상, 도라지와 명상...과는 좀 다른 느낌인 것 같아요.
    요요샘과 도라지는 본투비 명상러일것 같은디, 오영샘은 뭐랄까...결이 좀 다르다랄까...ㅋㅋ
    요요샘이나 도라지과가 아닌 저는, 그래서 오영샘의 명상일기에 더 관심이 갑니다.
    잘 읽었고 앞으로도 잘 읽을게유^^

  • 2024-02-13 10:53

    명상을 덕질하다니요! 신선한 조합입니다.
    저도 올해 같이.. 빠질 수 있기를요!!

  • 2024-02-21 08:07

    덕밍아웃 좋아요~
    근데 덕질이 명상이라뉘 더할나위 없이 좋네요.
    전 무릎이 시원치않아 명상은 패슈...ㅎㅎㅎㅎㅎ

  • 2024-02-27 23:01

    매일 매일 명상하고 일지쓰고, 명상에세이까지 쓰는 오영샘 옆에서 많이 배워야지..
    올해도 함께 공부할 수 있어 기쁩니다^^

동물을 만나러 갑니다
  얼마 전에 구청에서 이런 문자를 받았다.             몇 년 전에 본 뉴스가 떠올랐다. 그때도 멧돼지가 출몰했다. 멧돼지는 어느 고깃집에 들이닥쳤고 사람들은 깜짝 놀라 방방 뛰었다. 몇몇은 의자 위로 올라갔고 몇몇은 그릇이 잔뜩 깔린 테이블을 뒤집어엎었다. 몇몇은 칸막이를 들고 돼지를 출구로 몰았다. 멧돼지는 식당을 한바퀴 돌고 잠깐 버티다가 큰 저항 없이 식당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영상에서 ‘좋아요’를 가장 많이 받은 댓글 하나. "웃긴 게 식당 아수라장 된 이유 자세히 보면 멧돼지는 하나도 안 건드렸는데 손님들이 다 때려부셔서 아수라장 됨."   당시에 나는 돼지보다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했고, 돼지의 '출몰'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웃어넘겼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안전안내문자에 등장한 동물이, 행정전산망에 포착된 멧돼지가 먼저 눈에 띄었다. '안전', '출몰', '유의' 등의 말들 하나 하나가 도드라져 보였다. 카페에서 문자를 보고 있는 '나' 또한 낯설었다. 돼지는 어쩌다 '출몰'하는 자리에 있을까. 나는 어떻게 '안전'에 유의하는 자리에 있을까. 돼지의 출몰이 왜 더이상 하나의 해프닝으로 보이지 않을까.         바이러스와 식물     코로나 시국에 세계를 달리 감각하기 시작했다. 코로나 확진자로 자가격리를 하던 나는 이렇게 썼다. "백신을 맞았음에도 통증은 상당했다. 침을 삼킬 때마다 바늘로 찌르듯 목이 아프고 발열 증상은 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그러면서도 통증 뒤에는 순간적인 쾌감이 찾아오기도 했다. (...) 그것은 단순히 내 몸을 수호하는 면역 세포와 내 몸을 침범한 바이러스 간의...
  얼마 전에 구청에서 이런 문자를 받았다.             몇 년 전에 본 뉴스가 떠올랐다. 그때도 멧돼지가 출몰했다. 멧돼지는 어느 고깃집에 들이닥쳤고 사람들은 깜짝 놀라 방방 뛰었다. 몇몇은 의자 위로 올라갔고 몇몇은 그릇이 잔뜩 깔린 테이블을 뒤집어엎었다. 몇몇은 칸막이를 들고 돼지를 출구로 몰았다. 멧돼지는 식당을 한바퀴 돌고 잠깐 버티다가 큰 저항 없이 식당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영상에서 ‘좋아요’를 가장 많이 받은 댓글 하나. "웃긴 게 식당 아수라장 된 이유 자세히 보면 멧돼지는 하나도 안 건드렸는데 손님들이 다 때려부셔서 아수라장 됨."   당시에 나는 돼지보다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했고, 돼지의 '출몰'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웃어넘겼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안전안내문자에 등장한 동물이, 행정전산망에 포착된 멧돼지가 먼저 눈에 띄었다. '안전', '출몰', '유의' 등의 말들 하나 하나가 도드라져 보였다. 카페에서 문자를 보고 있는 '나' 또한 낯설었다. 돼지는 어쩌다 '출몰'하는 자리에 있을까. 나는 어떻게 '안전'에 유의하는 자리에 있을까. 돼지의 출몰이 왜 더이상 하나의 해프닝으로 보이지 않을까.         바이러스와 식물     코로나 시국에 세계를 달리 감각하기 시작했다. 코로나 확진자로 자가격리를 하던 나는 이렇게 썼다. "백신을 맞았음에도 통증은 상당했다. 침을 삼킬 때마다 바늘로 찌르듯 목이 아프고 발열 증상은 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그러면서도 통증 뒤에는 순간적인 쾌감이 찾아오기도 했다. (...) 그것은 단순히 내 몸을 수호하는 면역 세포와 내 몸을 침범한 바이러스 간의...
경덕
2024.03.02 | 조회 358
아스퍼거는 귀여워
  아이는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진통이 시작된 건 토요일. 39주 차인 만삭의 임산부가 절물휴양림으로 산책을 나갈 참이었다. 그 당시 젤 좋아했던 양념 돼지고기를 구워 먹고, 휴양림 주차장에 주차하는 순간 딱 느낌이 왔다. ‘오늘이다! 오늘 나온다!’ 뭔가 세상 처음 느껴보는 진통인데도 오늘인 거 같다는 느낌이 빡 드는 순간이었다. 다니던 산부인과에 전화해 진통 정도를 이야기하자, “그 정도로 아파서는 아이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좀 더 기다려보고 진통이 규칙적으로 오기 시작하면 병원에 들르란다. 나랑 남편은 그 길로 차를 돌려서 집으로 향했다. 어디서 주워들은 것은 있어서 아기를 낳으면 한동안은 차가운 것은 못 먹는다는 말이 생각났다. 평소에는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나는 빠삐코를 사서 입에 물었다. 그리고 세차를 하고 미리 사둔 카 시트를 설치했다. 몇십 번 시뮬레이션을 돌린 탓에 출산하는 날 해야 할 것들이 메뉴얼화 되어있는 느낌이었다. 집에 들어가선 간단하게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통 밑에 있는 거름망까지 탈탈 털어서 음식물 쓰레기를 버렸다. 조리원에 들고 갈 짐을 싸고 있는데 진통이 왔다 갔다 한다. 어느 정도면 병원에 가야 할까. 왠지 병원에 너무 일찍 가면 혼날 것 같았다. 그래도 편한 집이 낫겠지 싶어서 개그콘서트를 보고 있는데, 진통의 간격이 점점 줄어드는 느낌이다. “이제 가자!” 비장한 마음으로 일어나 병원으로 향했다.     사실 처음에는 조산원에서 아이를 낳고 싶었다. 제주도에는 오랫동안 산파일을 하신 조산사가 계셨다. 내 주변의 몇몇 지인이 조산원에서 아이를 낳았고, 무통 주사도, 회음부...
  아이는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진통이 시작된 건 토요일. 39주 차인 만삭의 임산부가 절물휴양림으로 산책을 나갈 참이었다. 그 당시 젤 좋아했던 양념 돼지고기를 구워 먹고, 휴양림 주차장에 주차하는 순간 딱 느낌이 왔다. ‘오늘이다! 오늘 나온다!’ 뭔가 세상 처음 느껴보는 진통인데도 오늘인 거 같다는 느낌이 빡 드는 순간이었다. 다니던 산부인과에 전화해 진통 정도를 이야기하자, “그 정도로 아파서는 아이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좀 더 기다려보고 진통이 규칙적으로 오기 시작하면 병원에 들르란다. 나랑 남편은 그 길로 차를 돌려서 집으로 향했다. 어디서 주워들은 것은 있어서 아기를 낳으면 한동안은 차가운 것은 못 먹는다는 말이 생각났다. 평소에는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나는 빠삐코를 사서 입에 물었다. 그리고 세차를 하고 미리 사둔 카 시트를 설치했다. 몇십 번 시뮬레이션을 돌린 탓에 출산하는 날 해야 할 것들이 메뉴얼화 되어있는 느낌이었다. 집에 들어가선 간단하게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통 밑에 있는 거름망까지 탈탈 털어서 음식물 쓰레기를 버렸다. 조리원에 들고 갈 짐을 싸고 있는데 진통이 왔다 갔다 한다. 어느 정도면 병원에 가야 할까. 왠지 병원에 너무 일찍 가면 혼날 것 같았다. 그래도 편한 집이 낫겠지 싶어서 개그콘서트를 보고 있는데, 진통의 간격이 점점 줄어드는 느낌이다. “이제 가자!” 비장한 마음으로 일어나 병원으로 향했다.     사실 처음에는 조산원에서 아이를 낳고 싶었다. 제주도에는 오랫동안 산파일을 하신 조산사가 계셨다. 내 주변의 몇몇 지인이 조산원에서 아이를 낳았고, 무통 주사도, 회음부...
모로
2024.02.25 | 조회 364
윤경이는 마을활동가
    혼자 말고 함께     내가 사는 금천은 1995년 3월 구로구에서 분구하였다. 서울 면적의 2.1%를 차지하고 중구에 이어 두 번째로 작은 구이다. 그런데도 2022년 서울시 정신건강 지표조사에 따르면 금천구는 우울감 경험률(11.9%)과 자살률(28명/10만 명당)이 서울시 평균(7.3%, 21.4명/10만 명당)보다 높다. 면적은 작지만, 인구는 적지 않고 비교적 사회적 시설과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아서 신체적 건강이나 정신적 건강 수치가 서울시 평균보다 안 좋은 것 같다. 내가 마을 일을 시작하면서 들었던 충격적인 얘기도 우리 구 청년들의 자살률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금천구에서 내가 무소속 마을활동가로서 그들에게 힘을 줄 수 있는 활동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우연한 기회에 제안이 들어온 ‘노랑식탁’사업에 참여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노랑식탁을 기획한 ‘청춘삘딩’은 예전에는 청소년 독서실로 쓰던 공간이었다. 구청에서 그 공간을 없애려고 할 때 지역 주민들의 제안으로 기초지자체 최초의 청년활동공간으로 탈바꿈 한 곳이다. 도시재생과 거버넌스의 좋은 사례가 되는 청년들을 위한 반짝반짝 빛나는 장소다. 그런 곳에서 청년 1인 가구를 위한 밥상을 준비한다니 더욱 기대되었다. 2023년 6월부터 사전 준비모임을 가져 메뉴 선정과 시장 조사를 했다. 7월 한차례 테스트 파일럿 식탁을 준비한 후 8월 첫 주부터 본격적으로 가동했다.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총 16회, 160명 이상(중복 제외 47명)이 참여했고, 93가지의 메뉴를 선보였다.     이름은 노랑식탁이고 형식은 집밥을 차려주는 것이었지만, 실제 그 안은 마음건강을 케어하는 것이 주요한 목표였다. 금천구에 정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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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경~단순삶
2024.02.20 | 조회 436
가마솥의 59년생 서른살
  쌤! 집에 불이 난 것 같아요.        인문약방 사람들과 평창집에 간 문탁쌤의 전화 속 목소리이다. 불이라고요? 침대에서 일어나며 시간을 보니, 밤 11 시 35분이다. 꿈인지 생시인지, 얼떨떨하다. "어디에 불이 났어요?" "지붕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아요". 외부는 붉은 벽돌, 내부는 흙벽돌 그리고 지붕은 기와인데, 어떻게 지붕에서 불이 났다고 하지? 문탁쌤이 잘못 알았거나 꿈일 지도 모른다. 그런데, 핸드폰으로 생중계되는 지붕 안쪽에서 나오는 연기는 그냥 연기가 아니고 불이 난 연기로 보인다. 어? 진짜 불이 났네. 정신이 번쩍 든다. 일단 우리집 소화기 있는 장소를 알려주고, 옆집들을 전화로 깨워서 동네 소화기들을 동원시켰다. 사실, 지붕에서 연기가 난다면 소화기로는 안되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다. 또 없나?  전기!!! 2차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산불 감시원인 옆집 친구에게 전기 차단기부터 내리도록 부탁했다. 지붕의 화재를 잡기 위해서 소방수들은 지붕을 무식하게 걷어 낼텐데..... 온돌방은 포기하고 본채로 번지지 않기만을 기도한다.                       소방차가 7대나 왔다. 산 중턱에 있는 집이라서 불이 산불 등으로 번지는 것을 막으려고 그랬을 것이다. 천만다행인 것은 바람이 불지 않고 있고, 불이 커지기 전에 발견해서 다친 사람이 없다.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다음 날, TV에서 보던 그 모습이 우리 집 온돌방에서 펼쳐진다. 아침 일찍부터 경찰서와...
  쌤! 집에 불이 난 것 같아요.        인문약방 사람들과 평창집에 간 문탁쌤의 전화 속 목소리이다. 불이라고요? 침대에서 일어나며 시간을 보니, 밤 11 시 35분이다. 꿈인지 생시인지, 얼떨떨하다. "어디에 불이 났어요?" "지붕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아요". 외부는 붉은 벽돌, 내부는 흙벽돌 그리고 지붕은 기와인데, 어떻게 지붕에서 불이 났다고 하지? 문탁쌤이 잘못 알았거나 꿈일 지도 모른다. 그런데, 핸드폰으로 생중계되는 지붕 안쪽에서 나오는 연기는 그냥 연기가 아니고 불이 난 연기로 보인다. 어? 진짜 불이 났네. 정신이 번쩍 든다. 일단 우리집 소화기 있는 장소를 알려주고, 옆집들을 전화로 깨워서 동네 소화기들을 동원시켰다. 사실, 지붕에서 연기가 난다면 소화기로는 안되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다. 또 없나?  전기!!! 2차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산불 감시원인 옆집 친구에게 전기 차단기부터 내리도록 부탁했다. 지붕의 화재를 잡기 위해서 소방수들은 지붕을 무식하게 걷어 낼텐데..... 온돌방은 포기하고 본채로 번지지 않기만을 기도한다.                       소방차가 7대나 왔다. 산 중턱에 있는 집이라서 불이 산불 등으로 번지는 것을 막으려고 그랬을 것이다. 천만다행인 것은 바람이 불지 않고 있고, 불이 커지기 전에 발견해서 다친 사람이 없다.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다음 날, TV에서 보던 그 모습이 우리 집 온돌방에서 펼쳐진다. 아침 일찍부터 경찰서와...
가마솥
2024.02.17 | 조회 465
현민의 독국유학기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유학점검기   독일에는 아우스빌둥(Ausbildung)이라는, 직장과 직업학교를 번갈아가며 배우는 제도가 있다. 영어로는 Apprenticeship이고 한국어로는 직업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회사에서 실질적인 교육을 받고 직업학교에서 이론적인 것을 배운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가지 않고 아우스빌둥을 하는 경우도 줄곧 있다. 독일의 오기 전 나의 계획은 일년 간 어학연수를 하고 출판사에서 아우스빌둥을 하는 것이었다. 최근 나는 출판사들에 이력서와 커버레터를 넣고 인터뷰를 다닌다. 자본주의의 빈틈에 껴서 살다가 제발 일 시켜달라고 스스로를 둘도 없는 인재처럼 소개하려니 어색하다. 독일에 와서 변한 것이 많다. 코코넛밀크로 맛있는 커리를 만들 수 있고, 알리오 올리오를 먹고, 핸드크림을 바르고, 외식은 잘 하지 않는다. 전에는 곁에 없으면 안 될 것 같았던 친구들과는 어쩌다 한번 연락한다. 그리고 새로운 친구들과 익숙한 공간들이 생겼다. 한 해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돌아보는 마음으로 유학점검기를 쓴다. 나를 아시는 분들께는 그래서 얘가 지금 독일에서 뭐하며 사는건지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보실 수 있을 것 같다.   독일의 여름을 믿지 마세요   2022년 6월부터 9월 독일 지인 댁에서 아름다운 여름을 보냈다. 그즈음 나는 이러다간 익숙함에 속아 한국을 떠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름이 지난 뒤, 나는 독일에 와서 살아보겠다는 결심을...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유학점검기   독일에는 아우스빌둥(Ausbildung)이라는, 직장과 직업학교를 번갈아가며 배우는 제도가 있다. 영어로는 Apprenticeship이고 한국어로는 직업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회사에서 실질적인 교육을 받고 직업학교에서 이론적인 것을 배운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가지 않고 아우스빌둥을 하는 경우도 줄곧 있다. 독일의 오기 전 나의 계획은 일년 간 어학연수를 하고 출판사에서 아우스빌둥을 하는 것이었다. 최근 나는 출판사들에 이력서와 커버레터를 넣고 인터뷰를 다닌다. 자본주의의 빈틈에 껴서 살다가 제발 일 시켜달라고 스스로를 둘도 없는 인재처럼 소개하려니 어색하다. 독일에 와서 변한 것이 많다. 코코넛밀크로 맛있는 커리를 만들 수 있고, 알리오 올리오를 먹고, 핸드크림을 바르고, 외식은 잘 하지 않는다. 전에는 곁에 없으면 안 될 것 같았던 친구들과는 어쩌다 한번 연락한다. 그리고 새로운 친구들과 익숙한 공간들이 생겼다. 한 해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돌아보는 마음으로 유학점검기를 쓴다. 나를 아시는 분들께는 그래서 얘가 지금 독일에서 뭐하며 사는건지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보실 수 있을 것 같다.   독일의 여름을 믿지 마세요   2022년 6월부터 9월 독일 지인 댁에서 아름다운 여름을 보냈다. 그즈음 나는 이러다간 익숙함에 속아 한국을 떠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름이 지난 뒤, 나는 독일에 와서 살아보겠다는 결심을...
현민
2024.02.16 | 조회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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