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회) 우리 집은 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

가마솥
2023-12-15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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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살제왕이 이 땅에 내려 오실 제, ...(중략)..... 계백장군 백살신, 관우장군 백살신.....”

나의 할머니는 우리들 생일이 되면, 하얀 백설기 시루떡 앞에서 아래 아(·)자가 나오는 옛 한글로 쓰여 있는 백살기를 읽으신다. 대략 삼십여 분이 걸린다. 어릴 적에는 그 것이 마냥 싫었다. 어서 저 따뜻한 떡을 먹어야 하는데, 할머니 고사(?) 때문에 군침만 삼키고 있으니......

그러다가 아마 초등학교 고학년 때쯤이다. 나에게 백설기 떡은 그저 그런 떡이 되었는데, 내 생일날 할머니가 그 백살기를 읽으신다. 연신 손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리며 읽으시는 뒷모습에서 보며, ‘나는 커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였다. 귀신이 있어서 나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할머니의 정성이 나의 마음에 들어 온 것이다.

 

 형제들만의 제사.

 

    우리 집은 이제 방안에서 지내는 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하였다. 제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큰 형님 댁에서 기제사(忌祭祀)로 일 년에 네 번, 조부모와 부모님의 제사를 지내다가, 어느 해인가 두 분이 성당에 나가신 뒤로는 연미사로 대체하겠다고 선언하셨다. 그렇게 하신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무언가 섭섭하기도 또 죄스럽기도 하였다. 특히 성당에 나가지 않는 나로서는 신부님의 말씀에 앉았다가 일어 섰다를 반복하며 정해진 댓구를 따라해야 하는 미사는 매우 껄끄러웠다.

큰 형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무엇보다도 큰 형수님과의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해 제사 날에, 우리는(우리집과 작은 형님네) 큰 형님네 아파트 문 앞에서 저녁이 다 될 때까지 기다린 적도 있었다. 큰 형님네는 그 날이 제사 날인 것을 까먹은 것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지내는 제사이니, 항상 공기가 무겁고 답답한 날이었다. 그 날은 아이들도 숨죽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한두 해, 연미사를 나가지 않았다. 당신도 동생들을 부르지 않으니 제사 날에 연미사라도 지내는 것인지 지내지 않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기일(忌日)이 되면 항상 우울하였다. 어느 해인가 마눌님이 “섭섭하면 우리가 지내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한다. ‘그래, 삼형제 중에 누구라도 지내면 되지, 꼭 큰 형님이 지내야 할 이유는 없잖아?’ 큰 형님 댁은 딸만 둘을 두었고, 나는 아들이 있으니 길게 보면 우리 집이 나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막내인 내가 제사를 지내겠다고 두 형님께 말씀드렸다. 내가 처갓집에서 배운 전통방식으로 격식을 차려서, 그렇게 몇 해 동안 우리 집에서 제사를 지냈다. 어느 해부터 작은 형님이 나섰다. 제사를 지내러 동생 집에 오시는 것이 부담이 되셨나 보다. 당신은 아들만 둘이 있으므로 제사가 끊길 염려가 적다는 이유를 들어 당신 집으로 제사를 옮겼다. 진즉에 그럴 일이지. 아들이 이제야 생겼나? 다만, 할머니와 할아버지 제사를 할머니 기일로 합제(合際)하였다. 할아버지는 뵌 적도 없지만 할머니는 내가 고1 때까지 함께 사셨으니 형제들끼리 회상할 정서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해를 지냈다.

 

     그런데, 기일이 되면 큰 형님, 작은형님 내외 그리고 우리 집 내외만 참석하는 일이 잦아 졌다. 우리 집 아이들도 평일에 시간을 내어서 작은 형님 댁, 세종까지 가기 힘든 일이었고, 작은 집 조카들도 독립하여 서울과 헬싱키에 살고 있으니 제사에 못 오는 것이었다. 그것참! 제사에 모여 부모가 알고 있는 조상님들의 이야기를 전해야 하는데, 아이들이 없으니 ‘의식’만 남은 제사가 되었다. 작은 형님이 동탄으로 이사를 왔지만, 우리 형제들만 참석하기는 매 마찬가지였다.

 

      작은 형님이 은퇴하여 형수님과 함께 성당에 나가시는데, 늦게나마 성당에 나가시는 게 아주 ‘좋다’며 나에게도 권한다. 불길한(?) 예상은 항상 적중한다. 작년에, 어머니 기일 때가 되자 형님이 내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낸다. 우리 형제만 모이는 제사는 의미가 없으니, 기제사를 없애고 모두 연미사로 돌리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다. 짐작하였기에 놀랍지는 않았지만, 내가 아직 무언가 정리되지 않는 상태였다. 먼저 느낌적으로 어머니 아버지께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제사보다도 어려운 것은 산소이다. 어머니는 안성 공원묘원에 계셔서 연간 관리비만 끊기지 않으면 되지만, 고향 땅,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산소를 관리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몇 해라도 가보았지만 형님네들은 전혀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지 않으니, 우리 대(代)에서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윤달이 길게 들어 있던 그 해에, 모두 파묘(破墓)하여 화장한 후, 어머니 묘소 옆에 가족묘원을 만들어 안치하였다. 형님들과, 제사를 없애고 연미사를 하는 대신에 어머니 기일이 든 주말에 그 가족묘원에 가서 시제(時祭)처럼 합제를 지내는 것으로 의견을 맞췄다. 다른 집들은 어떻게 하나?

 

 

     친구들 얘기를 들어 보았다. 장남이 아닌 친구들은 큰 집에 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장남인 친구들은 다양한 방식을 지내고 있었다. 전통 방식 그대로 제사를 지내는 사람도 있고, 형제들이 모여서 1박 2일로 고향 주변을 여행하며 산소에 가기도 하고, 어떤 집은 콘도에 모여서 손주들이 돌아 가며 할아버지 할머니를 기억하는 이야기 방식으로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또 어떤 집은 참석하는 사람 수대로 새뱃돈처럼 용돈을 주는 집도 있다. 어떤 형식으로든 추모하고 있지만, 모두들 부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가정에서 지내는 제사는 언제부터 생겼을까?

 

 

   우리나라는 고려 말부터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고, 조선시대에 들어 와서 민간에 널리 장려되었다. 초기의 제사는 신분에 따라 차등을 두어 벼슬이 높을수록 더 윗대 조상까지 제사를 지냈다. 조선 초기에는 1품 이상은 3대 증조(曾祖)까지, 7품 이상은 2대 조부(祖父), 일반 서민은 부모 제사만 지냈다.

 

조선 중기인 17세기 전반까지는, 돌아가신 어버이나 조상의 제사는 아들뿐만 아니라 딸도 지낼 수 있었으며, 사위가 지낼 수도 있었다. 또한 외손자도 지낼 수도 있었다. 예컨대 율곡 이이(李珥)의 외가는 3대째 아들이 없어서 그 외손들이 외조부모의 제사를 맡기도 하였다. 제사를 전담하는 사람은 상속에서 우선권이 주어졌다. 이는 의무를 이행하는 사람에게 권리·권한을 준다는 뜻이었다. 제사와 상속권에는 아들과 딸(또는 사위)의 구별이나 차별이 없었고, 친손과 외손의 구별하지도 않았다.

 

17세기 후반부터 제사에서 남녀의 차별이 생겨났다. 남자 집안 중심의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에 따라 제사에서 소외된 사위나 외손은 차츰 제사에 빠지는 일이 잦아지며, 제사는 남자, 그것도 장남을 중심으로 재편된다. 장남이 제사를 독점하는 것은 상속에서 상속 지분을 독점하게 된다는 뜻과 같다. 또한 이것은 제사의 모든 준비는 며느리 몫으로 남게 됨을 말하는 것이며, 여자들 입장에서는 남의 집 제사 준비를 하게 되는 폐단이 시작되었음을 말한다.

 

조선 말기에 오면 제사는 완전히 대중화되고, 그 절차가 복잡해진다. 이는 대부분의 백성이 양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 인구의 1%에 지나지 않던 양반이 철종 때 이르러서는 전 국민의 70%가 양반이 되었고, 특히 갑오개혁 이후 신분제가 철폐되면서 모두가 성씨(姓氏)를 가지게 되면서, 그 동안 양반의 문화를 부러워하던 일반 백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제사를 지내게 된다. 그 것도 4대인 고조(高祖)까지 지냈으며, 송나라의 학자, 주희의 『가례』를 1759년에 8권 3책으로 묶어 간행한 예서인 『家禮』에 집착하면서 절차는 까다로워지고 제상의 음식은 복잡하게 되었다.

 

1969년 정부가 「가정의례준칙」을 제정해 제사는 2대조까지로 하고, 성묘는 제수를 마련하지 않거나 간소하게 한다고 공표했으나, 지금까지도 고조부까지 4대봉사(四代奉祀)를 하는 집안이 더러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들에게 제사는 예전만큼의 흐름이 유지되고 있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요즘 제사는......

 

     최근 성균관의례정립위원회가 지난 10월 30일 발표한 '제례 문화 관련 국민인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앞으로 제사를 지낼 계획이 없다'는 응답률이 55.9%로 집계됐다. 반면 '계획이 있다'는 답변은 44.1%였다. '현재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응답률은 62.2%으로 나왔다.

      제사를 지내는 가장 큰 이유로 배운 것처럼 '조상을 기리기 위해서'라고 답한 비율은 39.6%로 가장 높게 나왔고, '부모님이 지내고 있어서'는 27.2%로 2위, '가족과 교류를 위해서'는 16.6%로 3위였다.

      반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 가장 큰 이유로는 '종교적 이유나 신념 때문'이란 응답이 34.6%로 가장 높았다. '가족들이 모이는데 제약이 있어서'라는 이유와 '제사 과정에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 요소가 있다고 느껴서'는 각각 13.7%와 12.5%로 2,3위를 차지했다.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는 응답자 중, 제사를 '간소화거나 가족 모임 같은 형태로 대체하겠다'는 응답이 41%로 가장 많았다. '시대 변화로 더는 제사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응답자와 '종교적 이유나 신념 때문'이란 응답자가 각각 27.8%와 13.7%로 그 뒤를 이었다.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엄마 아빠 결혼 기념일이어서 케잌을 사가지고 집에 온 줄 알았더니, 그냥 녀석의 조카 하빈이가 보고 싶어서 왔다며 딸네 부부가 집에 왔다. 오랜만에 식구들이 다 모여서 ‘엄마표’ 맛난 점심을 먹고 케잌을 잘랐다. 딸, 아들, 사위에게 “너희들은 엄마/아빠 제사를 어떻게 지낼래?”하고 질문을 던졌다. ‘(아빠가 왜 또) 뜬금포?’하는 표정들이다. 먼저 은퇴 후 글쓰기를 소개하였다. 이어서 조상의 넋을 기리고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후손들이 마음을 다해 예를 올리는 전통문화라는 교과서 같은 제사의 의미를 상기시키고, 제사의 유래와 녀석들이 잘 알고 있는 우리 집 제사 이력을 발제형식으로 발표하고 토론을 제안하였다.

 

    아들은 제사를 지내겠다고 한다. 그 동안 제사에서 느낀 감정은 나쁜 것이 아니었고, 제사는 우리 전통문화중 하나인데, 자기 아들/하빈이에게 그 뜻을 전한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녀석은 아마도 외할아버지나 내가 정성으로 제사를 지내는 모습에서, 나의 할머니의 백살기 속에서 내가 느낀 그 무언가를 보았을 지도 모른다. 감성적인 아들놈의 의견에 따르면 나는 죽어서 다행히(!) 젯밥을 얻어 먹을 수 있을 듯하다. 문제는 매사 깐깐한(?) 딸내미인데, 녀석은 문화인류학 전공자답게 의식과 의례의 중간쯤 되는 ‘리추얼(Ritual)’인 우리네 가정제사는 재고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면서 토론을 달군다.

 

     나는 제사의 의미는 씨족사회에서 공동체 결속의 의미가 있었다고 이야기를 꺼낸다. 예를 들면 조부모 제사를 지낸다고 하면, 아버지 항렬과 사촌들까지 모두 모여서 지내니, 그 기회에 서로 가족의 정서를 나누는 자리로써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과거의 조상과 현재의 친척들을 아우르는 공동체 속에서 나의 존재를 자리매김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물론 요즘처럼 그 것을 제사에서(특히 기제사에서) 유지하기가 힘들기는 하지만, 힘들다고 없애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일상적인 삶 속에서 돌아가신 분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자칫 잊히기 쉬운 나의 시원(始原)을 반복적으로 되돌아보고, 내가 나아갈 곳을 바라다보는 것도 의미있지 않을까?

 

     아이들은 가족의 공동체성을 기르는 방식으로는 함께 놀러 가도 되는 등 많은 재미있는 방법이 있다. 평소에 서로 교류하고 있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제사라는 어려운 제도를 ‘가족 공동체성’을 위하여 유지하는 것보다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살아 생전에 뵙지도 않아서 아무런 정서도 없는 분들의 제사를 지내는 것은 별다른 공감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힘든 것은 현실적인 문제이고. 하기야 많아 보아야 두 명인 자식들이 조상들의 제사를 일일이 챙기기도 쉽지 않고, 무엇보다도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는 가정이 줄어들고 있으니 제사 준비는 앞으로 쉽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도 나름대로 제사의 의미에 대해서 공감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무작정 없애고 싶지는 않은 듯하다. 다만, 정해진 기일(忌日), 갖춰야 하는 음식, 절차 등 그 형식에 있어서는 개선이 필요하다는 곳까지 결론에 다다랐다. 조상을 기리는 것은 기일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문득 문득 어떤 계기에서 생각 날 때 기릴 수 있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후손들에게 조상의 내력을 말해 주는 것도 꼭 기일에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양한 방법이 인정되어야 할 듯하다. 그렇게 진행되려면 당사자인 내가 먼저 제안할 필요가 있다.

      나는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해서 한 줌 재로써 가족묘원에 묻고, 기일에는 형편이 되는대로 하는데, 당일 아침 식사 자리에서 꽃 한 송이 올려놓아 그 날을 기억해 주어도 감사한다고 정리했다. “당신, 많이 변했네요!” 마눌님이 칭찬인지 힐난인지 모를 멘트를 날린다. 속으로 응답한다. ‘문탁 글쓰기 덕분이죠. 네네.’

 

 

     나의 처가는 금성 나씨 계은공파 종손(宗孫)집이어서 현조(玄祖)까지 5대봉사(五代奉祀)를 한다. 결혼 후 처갓집 제사에 참여하기 시작한 첫 해에는 거의 격 달로 기제사가 있었던 듯하였다. 그 전에는 매달 있었다고 했다. 매번 제사 때마다 종부(宗婦)이신 장모님의 강력한 주장으로 그 횟수가 점점 줄었는데, 마지막에는 일 년에 방안에서 지내는 제사는 두 번, 산소에 가는 시제는 한 번으로 제사를 줄였다. 방안에서 지내는 제사는 장인의 부모님 합제와 조부에서 현조까지의 합제 두 번이다. 장인은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돌아가신 장인의 일기에서 당신의 고뇌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가슴 찌릿한 한 문장을 남겼다.

 

     “조상들에게는 법도가 아닌 줄 알지만, 살아 있는 집사람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다.”

 

     종손(宗孫)의 자격을 물려받은 유일한 아들, 처조카 녀석은 제사에 대해서 별 다른 생각이 없는 듯하다. 아직 장가들지 않아서, 아니면 모든 제사 준비를 엄마와 고모가 다 해주어서 그럴 지도 모른다. 그도 언젠가 결정해야 할 날이 오겠지.

 

그의 몫으로 남긴다.

댓글 4
  • 2023-12-19 14:16

    기제사는 저희집도 비슷하게 서사가 흘러가네요. 시제는 저희는 봄에 동구능부터 합니다 돈은 문체부에서 지원받아서 ㅎㅎㅎ 저는 제사문화와 세시풍속을 즐기는 편이라서 힘들지만 심리적 부담없이 하는데(집에서 손하나 까딱안하는 남편도 부담감 없이 즐김ㅋㅋㅋ) 명절 차례는 어떻게 하시나요? 아 그러고보니 남편은 밤치고 지방쓰고 병풍치는 일은 하네요^^

    • 2023-12-21 17:22

      저는 처가에 식구가 없어서 처가에 갑니다. 장모님을 모신 이후로는 우리 집에서 명절을 지내고요.

  • 2023-12-19 20:24

    시댁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 제사를 합쳐서 1년에 한 번 제사를 지냅니다. 제사 날짜도 형제들 모이기 쉬운 8월 둘째주 토요일, 이렇게 정합니다.
    친정집에서도 오랫동안 따로 지내던 할머니 제사와 할아버지 제사를 어머니 돌아가신 뒤에 합쳐서 한번 지내자고 했습니다.
    저희 형제는 어릴 적 할머니 할아버지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던 터라 아직은 제사를 올립니다.
    올해 어머니 돌아가시고 첫 기제사를 지냈는데, 역시 모두가 모이기 쉬운 일요일을 잡아 제사를 지냈습니다.
    날짜도 양력으로 했고요. 제가 적극적으로 그렇게 하자고 했어요.
    옛 법도대로 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을 함께 나누며 어머니를 애도하고, 아직도 남은 상실감을 보듬는 소중한 시간이었어요.

    • 2023-12-21 17:26

      맞아요. 정서를 함께한 조상님들의 제사를 지내는 집이 꽤 있더군요.
      다만, 기제사 날짜를 지키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워요. 성균관에서도 기제사가 아니면 안된다는 입장에서 후퇴하는 듯합니다.

가마솥의 59년생 서른살
  쌤! 집에 불이 난 것 같아요.        인문약방 사람들과 평창집에 간 문탁쌤의 전화 속 목소리이다. 불이라고요? 침대에서 일어나며 시간을 보니, 밤 11 시 35분이다. 꿈인지 생시인지, 얼떨떨하다. "어디에 불이 났어요?" "지붕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아요". 외부는 붉은 벽돌, 내부는 흙벽돌 그리고 지붕은 기와인데, 어떻게 지붕에서 불이 났다고 하지? 문탁쌤이 잘못 알았거나 꿈일 지도 모른다. 그런데, 핸드폰으로 생중계되는 지붕 안쪽에서 나오는 연기는 그냥 연기가 아니고 불이 난 연기로 보인다. 어? 진짜 불이 났네. 정신이 번쩍 든다. 일단 우리집 소화기 있는 장소를 알려주고, 옆집들을 전화로 깨워서 동네 소화기들을 동원시켰다. 사실, 지붕에서 연기가 난다면 소화기로는 안되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다. 또 없나?  전기!!! 2차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산불 감시원인 옆집 친구에게 전기 차단기부터 내리도록 부탁했다. 지붕의 화재를 잡기 위해서 소방수들은 지붕을 무식하게 걷어 낼텐데..... 온돌방은 포기하고 본채로 번지지 않기만을 기도한다.                       소방차가 7대나 왔다. 산 중턱에 있는 집이라서 불이 산불 등으로 번지는 것을 막으려고 그랬을 것이다. 천만다행인 것은 바람이 불지 않고 있고, 불이 커지기 전에 발견해서 다친 사람이 없다.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다음 날, TV에서 보던 그 모습이 우리 집 온돌방에서 펼쳐진다. 아침 일찍부터 경찰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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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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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유학점검기   독일에는 아우스빌둥(Ausbildung)이라는, 직장과 직업학교를 번갈아가며 배우는 제도가 있다. 영어로는 Apprenticeship이고 한국어로는 직업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회사에서 실질적인 교육을 받고 직업학교에서 이론적인 것을 배운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가지 않고 아우스빌둥을 하는 경우도 줄곧 있다. 독일의 오기 전 나의 계획은 일년 간 어학연수를 하고 출판사에서 아우스빌둥을 하는 것이었다. 최근 나는 출판사들에 이력서와 커버레터를 넣고 인터뷰를 다닌다. 자본주의의 빈틈에 껴서 살다가 제발 일 시켜달라고 스스로를 둘도 없는 인재처럼 소개하려니 어색하다. 독일에 와서 변한 것이 많다. 코코넛밀크로 맛있는 커리를 만들 수 있고, 알리오 올리오를 먹고, 핸드크림을 바르고, 외식은 잘 하지 않는다. 전에는 곁에 없으면 안 될 것 같았던 친구들과는 어쩌다 한번 연락한다. 그리고 새로운 친구들과 익숙한 공간들이 생겼다. 한 해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돌아보는 마음으로 유학점검기를 쓴다. 나를 아시는 분들께는 그래서 얘가 지금 독일에서 뭐하며 사는건지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보실 수 있을 것 같다.   독일의 여름을 믿지 마세요   2022년 6월부터 9월 독일 지인 댁에서 아름다운 여름을 보냈다. 그즈음 나는 이러다간 익숙함에 속아 한국을 떠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름이 지난 뒤, 나는 독일에 와서 살아보겠다는 결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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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1 | 조회 364
기린의 걷다보면
          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생업의 기회를 잡아 3년간 일리치약국 정규직으로 지냈다. 2024년 나이듦연구소로 적을 옮겨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를 꿈꾼다.   1.  쓰레기산이 숲으로?   나의 검색 알고리즘에 매번 뜨는 소식은 걷기에 관련한 정보다. 둘레길 걷기를 하면서 걷기 좋은 길을 자주 검색했기 때문이다. 작년 가을쯤 서울에서 걷기 좋은 길로 ‘마포난지생명길 1코스’를 추천하는 기사가 떴다. 6호선 월드컵경기장역에서 시작하는 길로, 예전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을 공원으로 바뀐 후 그 공원들을 둘러보는 코스였다. 더 추워지기 전에 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이후 차일피일 미루며 언젠가는 걸어야지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녹색평론 2023년 겨울호에서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 라는 책의 서평에서 ‘노을공원시민모임’이라는 시민단체를 알게 되었다.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을 다섯 곳의 공원으로 만들었는데, 그 중에 노을공원에서 나무를 씨앗부터 길러 옮겨 심는 활동을 한다고 했다. 걷기 좋은 길이라고 했는데, 쓰레기더미 위에 숲을 만들었다고? 호기심이 급상승했다.     1월 셋째 주 일요일 하늘은 흐렸고 비 예보도 잡혀 있었다. 마음먹은 참에 더 이상 미루지 말자고 집을 나섰다. 지하철을 타고 월드컵경기장역에 내리니 가늘게 보슬비가 흩날렸다. 한겨울이라 그런지 한산했다. 역 옆으로 걸어가다 안내하는 표지판을 만났다. 난(蘭)초와 지(芝)초가 무성하게 자라서 난지도였던 한강 둔치의 섬이 15년 동안 쓰레기 매립장이 되었다가, 1996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지금의 공원으로 바뀌었다는 설명이었다. 월드컵을 열었던 경기장에 옆으로...
          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생업의 기회를 잡아 3년간 일리치약국 정규직으로 지냈다. 2024년 나이듦연구소로 적을 옮겨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를 꿈꾼다.   1.  쓰레기산이 숲으로?   나의 검색 알고리즘에 매번 뜨는 소식은 걷기에 관련한 정보다. 둘레길 걷기를 하면서 걷기 좋은 길을 자주 검색했기 때문이다. 작년 가을쯤 서울에서 걷기 좋은 길로 ‘마포난지생명길 1코스’를 추천하는 기사가 떴다. 6호선 월드컵경기장역에서 시작하는 길로, 예전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을 공원으로 바뀐 후 그 공원들을 둘러보는 코스였다. 더 추워지기 전에 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이후 차일피일 미루며 언젠가는 걸어야지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녹색평론 2023년 겨울호에서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 라는 책의 서평에서 ‘노을공원시민모임’이라는 시민단체를 알게 되었다.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을 다섯 곳의 공원으로 만들었는데, 그 중에 노을공원에서 나무를 씨앗부터 길러 옮겨 심는 활동을 한다고 했다. 걷기 좋은 길이라고 했는데, 쓰레기더미 위에 숲을 만들었다고? 호기심이 급상승했다.     1월 셋째 주 일요일 하늘은 흐렸고 비 예보도 잡혀 있었다. 마음먹은 참에 더 이상 미루지 말자고 집을 나섰다. 지하철을 타고 월드컵경기장역에 내리니 가늘게 보슬비가 흩날렸다. 한겨울이라 그런지 한산했다. 역 옆으로 걸어가다 안내하는 표지판을 만났다. 난(蘭)초와 지(芝)초가 무성하게 자라서 난지도였던 한강 둔치의 섬이 15년 동안 쓰레기 매립장이 되었다가, 1996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지금의 공원으로 바뀌었다는 설명이었다. 월드컵을 열었던 경기장에 옆으로...
기린
2024.02.05 | 조회 290
동물을 만나러 갑니다
          경덕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2022~2023). 문탁네트워크 공부방 회원, 인문약방 킨사이다 멤버. 오래 머무르고 많이 이동하는 일상을 실험합니다.             안녕, 돼지들       비 오는 날, 새벽이생추어리 마지막 돌봄을 다녀왔다. 나는 그날 돌봄이 마지막인 줄도 모르고 새벽이와 잔디를 만나러 갔다. 돌봄을 마치고 나서는 그 다음주에 다시 볼 것처럼 인사를 했다. 이후에 사정이 생겨 돌봄을 몇 주 쉬게 되었는데, 그 사이에 새벽이생추어리 이사 날짜가 정해졌다. 이사를 가는 날에도 배웅하지 못했다. 결국 나는 얼굴도 못 보고 새벽이와 잔디를 보내야 했다.   1년 넘게 매주 돼지를 만나다가,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 돌봄을 가기 위해 깜깜한 새벽부터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 옆구리를 쓰다듬어서 잔디가 짜증 낼 때 섭섭해하지 않아도 된다. 새벽이와 술래잡기를 하며 진땀을 흘리지 않아도 된다. 돼지의 응가 냄새를 맡지 않아도 된다. 덩굴잎을 채집하다가 가시에 긁히지 않아도 된다. 새벽이와 잔디의 사진을 수십 장씩 찍지 않아도 된다. 돌아오는 길에 일지를 쓰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다른 보듬이들의 일지를 읽고, 웃고 (울지) 않아도 된다. (흑흑)     술래잡기 중     다시, 떠나야 하는 삶들   새벽이생추어리는 재작년부터 이사를 준비했다. 땅 주인의 사정으로 원래의 장소에서 계속 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새벽이가 공장식 축산 농장에서 구조되어 2020년 새벽이생추어리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을 <돼지를 만나러 갑니다> 1회에 적었다.   "새로 살 집을...
          경덕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2022~2023). 문탁네트워크 공부방 회원, 인문약방 킨사이다 멤버. 오래 머무르고 많이 이동하는 일상을 실험합니다.             안녕, 돼지들       비 오는 날, 새벽이생추어리 마지막 돌봄을 다녀왔다. 나는 그날 돌봄이 마지막인 줄도 모르고 새벽이와 잔디를 만나러 갔다. 돌봄을 마치고 나서는 그 다음주에 다시 볼 것처럼 인사를 했다. 이후에 사정이 생겨 돌봄을 몇 주 쉬게 되었는데, 그 사이에 새벽이생추어리 이사 날짜가 정해졌다. 이사를 가는 날에도 배웅하지 못했다. 결국 나는 얼굴도 못 보고 새벽이와 잔디를 보내야 했다.   1년 넘게 매주 돼지를 만나다가,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 돌봄을 가기 위해 깜깜한 새벽부터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 옆구리를 쓰다듬어서 잔디가 짜증 낼 때 섭섭해하지 않아도 된다. 새벽이와 술래잡기를 하며 진땀을 흘리지 않아도 된다. 돼지의 응가 냄새를 맡지 않아도 된다. 덩굴잎을 채집하다가 가시에 긁히지 않아도 된다. 새벽이와 잔디의 사진을 수십 장씩 찍지 않아도 된다. 돌아오는 길에 일지를 쓰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다른 보듬이들의 일지를 읽고, 웃고 (울지) 않아도 된다. (흑흑)     술래잡기 중     다시, 떠나야 하는 삶들   새벽이생추어리는 재작년부터 이사를 준비했다. 땅 주인의 사정으로 원래의 장소에서 계속 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새벽이가 공장식 축산 농장에서 구조되어 2020년 새벽이생추어리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을 <돼지를 만나러 갑니다> 1회에 적었다.   "새로 살 집을...
경덕
2024.01.30 | 조회 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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