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 지현
문탁
2023-12-11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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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물들이 고통 앞에서 취한 태도
테드 창의 소설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실린 단편소설 <지옥은 신의 부재>는 주인공 닐의 생애를 보여준다. 닐은 다리에 선천적인 기형을 갖고 태어났다. 그는 평생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게 됐지만 좌절하거나 비관하지 않고 장애 때문에 생기는 갈등 상황에도 꽤 잘 대응하며 살아내는 인물이다. 자신의 장애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아내를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던 그는 천사의 강림이라는 사건으로 아내(사라)를 잃는다. 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강림’은 마치 자연재해와 비슷하다. 불시에 일어나고 끝나면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는다. 차이점이라면 기적도 있다는 것이다. ‘강림’으로 불치병이 치유되거나 장애가 사라지거나 하는 일도 일어난다. 이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사라의 영혼은 천국으로 갔다. 닐은 아내가 없는 삶을 견딜 수 없었고 그녀와의 재회를 위해 천국으로 가기 위한 방법을 찾아 헤맨다.
아내를 잃고 좌절한 닐에게 도움을 주려고 애썼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강림’으로 고통받은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공감과 위로로 아픔을 극복하고자 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연대의 방법을 통해 신에 대한 사랑을 성취하면 천국으로 가서 아내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닐을 설득했지만, 닐은 그 방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남은 삶을 그 가능성 하나에 걸어야 하는데다가 도대체가 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성공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지만 확실한 방법을 선택한다. ‘강림’ 때 새어 나오는 천상의 빛을 보고 천국에 간 범죄자의 사례를 알게 되고 자신도 같은 방법으로 천국에 가기 위해 ‘강림’을 쫓아다닌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선택의 결과는 천상의 빛을 보고 신을 사랑하게 되었지만 천국에 가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진 것이다. 그는 지옥에서도 신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못하고 신과의 단절감만을 느끼며 고통스러워 한다.
2. 닐과 연대자들의 차이점
연대자들의 모습은 따뜻하지만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다. 나는 연대자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의 일상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위로와 공감에서 내가 느꼈던 이질감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타인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수없이 왜곡되는 누군가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은 가능한 일인지, 오히려 그렇게 경험을 나누는 행위는 현실과의 타협으로 이어지고 현실에 안주해 버리게 하는 것은 아닌지가 나의 고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력하게 만드는 ‘강림’ 앞에서,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 앞에서 순응했다. 하지만 그들의 순응은 극복을 가장한 포기였다. 그들은 그저 신의 구원만을 바라며 서로의 고통을 되새김질하는 것으로 삶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적극적인 수용’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고통의 경험은 답을 찾기를 포기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적극적인 수용’은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다시 닐의 경우로 돌아가 보자.
장애도 어쩌지 못한 그의 삶을 붕괴시킨 것은 아내의 죽음이었다. 사랑하는 아내와의 재회를 위해서라면 닐은 못할 것이 없었다.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의 삶은 빈 껍데기였을 뿐이라는 듯 그것에 아무런 미련도 갖지 않았다. 심지어 천국에서 아내와 재회해도 그 재회가 인간계에서의 삶이 연장되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닐의 맹목적 사랑은 그런 결과도 개의치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잘 살아왔다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사랑하지 않는 힘으로, 어쩌면 신을 사랑하지 않는 힘으로 버텨온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닐은 자신 앞에 놓인 고통 혹은 질문 앞에서 불평하며 화풀이 대상을 찾거나 도피하거나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의 고통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 바꿀 수 있는 것이 없었으므로 그는 그저 그 질문을 계속 읽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포기라기보다는 ‘적극적이지 않은 수용’이라고 보았다. 일종의 보류랄까. 그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을 일단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답을 찾았다고 생각하지 않은 채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아내의 죽음이라는 사건 앞에서 그는 비로소 ‘적극적인 수용’의 단계로 나아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온 생을 던져 답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기존의 한계를 뛰어넘는 데 성공했다.
3. 닐의 비탄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
이 소설에 나오는 천국은 모든 것에 대한 동등한 사랑을 공유하는 구원받은 영혼들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그곳에서는 모든 인간적인 것들이 무화될 것이다. 닐의 아내는 상실의 아픔이 없으므로 닐을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다. 닐을 사랑하지만 닐을 그리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재회는 부재의 고통을 전제로 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들은 다른 모든 것을 사랑하듯 서로를 사랑하겠지만 그것 때문에 특별히 더 기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지옥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지옥과 다르다. 어찌 보면 인간계의 연속이다.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은 현실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단지 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회오를 품고 일상을 무한 반복해야 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견디며 살아간다. 마치 윤회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중생들처럼 말이다. 그곳에서 인간계와의 연속성을 누리지 못하는 유일한 존재가 닐이다. 그는 멀쩡한 다리를 얻었으나 자각하지 못한다. 현실에서 천상의 빛 때문에 눈을 잃었지만 지옥에 떨어지고 다시 눈이 생겼다. 하지만 그것도 그에게는 의미가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신이 부재한다는 것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닐이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은 비탄으로 이어진다.’
나는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감정이 비탄이라고 생각했다. 주인공 닐이 원하는 아내와의 재회는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고 지옥에서 매일 비탄에 빠진 일상을 반복하지만 그는 신을 사랑한다. 닐은 이제 더 이상 아내만을 생각하며 비탄에 빠지지 않는다. 그는 신이 부재하는 모든 것을 느끼며 비탄에 빠진다. 그런 닐의 모습은 벌을 받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도덕법칙에 따라 걸으며 한발 한발 고통스럽지만 그만큼 자유로워지는 칸트의 주체가 떠올랐다. 나는 이 부분이 닐과 연대자들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자신의 소명을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더 이상 질문하지 않거나, 비탄에 빠지기보다는 비탄에 빠지지 않도록 애쓰며 살았기 때문이다.
4. 우리가 다시 비탄에 빠져야 하는 이유
“하지만 호머는 진실로 어느 한쪽을 편들지 않기 때문에 이야기가 비극이 되도록 허용한다. 비극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과 영혼은 비탄에 젖고, 경계가 확장되며 고양된다.”
-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어슐러 K. 르귄/ 황금가지(p87)
이 소설에서 인간계보다 지옥이 더 우리의 현실을 닮았다. 매스컴과 디지털 매체는 지구 구석구석에서 발생하는 고통을 실시간으로 보여주지만 우리는 그런 뉴스를 끊임없이 생산하고 소비한다. 전쟁은 더 최신 전쟁으로 잊히고 곳곳에서 발생하는 폭력과 파괴는 클릭 수에 유리한 순서로 선별된다. SNS에서는 개인들의 소소한 고통들이 전시되고 공유되며 ‘좋아요’로 위로 받는다. 혹은 누군가의 고통을 관람하고 그보다 상대적으로 나은 나의 고통을 위로 받는다. 우리는 이미 우리 사회의 ‘신의 부재’를 자각하지 못한 지 오래다.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나의 비탄은 늘 나의 고통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내가 그것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났는지를 생각해보니, 책임 전가였다. 잘못은 나에게 고통을 준 타인과 세상에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나는 비탄에 빠지지 않는 것이 내가 고통을 극복한 증거라고 믿어버렸다. 고통 앞에서 너무 빨리 답을 찾아버린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스스로 지옥문을 열고 들어가 신과의 단절을 선택한 것이다. 르귄에 따르면 그것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것이고, 테드창은 그것이 신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비탄이다.
이제 내가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고통만 있고 비탄이 없는 이 세계에서 극복이 답이 아니라면 우리가 해야할 것은 판단 중지가 아닐까? 극복은 그 이전과 이후의 위계를 설정한다. 극복 이후의 자신을 더욱 긍정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러한 긍정은 우리를 현실에 안주하게 하고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다. 칸트는 인간이 자연법칙에 종속된 현상계에 한 발을 걸치고 초월적 세계(예지계)를 욕망하며 그 경계에 균열을 낼 때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현상계와 예지계 사이를 끊임없이 부유하며 그 경계에 균열을 내라고 요구받는 칸트의 주체처럼 우리는 성급한, 본질적으로 성급할 수밖에 없는 판단을 멈춰야 한다. 닐의 삶이 보여주듯이 우리에게 생기는 모든 일은 우리가 한 행위의 결과가 아니다. 우리의 행위는 그저 행위로만 존재할 뿐 어떤 결과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 모든 결과는 신의 몫이므로 인간은 그저 행위로 누군가를, 또한 자신을 섣불리 규정하지 않으면서 신의 부재를 자각할 때마다 비탄에 빠져야 한다. 우리는 그 슬픔을 감수해야 한다. 기꺼이. 그것이 신을 사랑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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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대해 충분히 비탄하되 판단을 중지할 준비가 되었는가. 이번 학기 공부로부터 도망친 나는 결국 진공 상태 마냥 그 어떤 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나를 징징거림의 홍수 속에 몰아 넣었던 너는 결국 공부를 했구나. 부럽다.
몰아넣었다니.. 의도치 않았으나 유감이오
덕분에 공부했으니 고맙고
공부를 포기하지 않을 것을 아니 응원하오
두분의 우정이 아주 멋지십니다. 두 분다 계속 정진하세요.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