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믿음이 도달한 곳 / 윔뱃
문탁
2023-11-28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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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엄마는 아빠와 함께 여동생의 교회에 출석하기로 했다고 말씀하셨다. 부모님은 이제껏 종교를 가지고 계시지 않았다. 갑작스런 결정에 나는 아무 의견도 내지 못했지만, 잔상이 내내 떠올랐다.
나는 여동생의 교회를 좋아하지 않는다. 여동생은 결혼 후 미얀마 선교 중이다. 벌써 9년이 되어간다. 선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여동생의 교회 교리에 의아한 지점이 있었다. 하와가 선악과를 필연적으로 먹었어야 했다거나 중국과 미국의 각주가 독립 분리해서 하나의 국가를 만들 게 될 거라는 설교 등. 그 교회의 목사님의 성경 해석은 너무 편파적이라는 인상이다. 하지만 부모님은 여동생이 그렇게 오래 믿고 있다면, 이유가 있을 거라고 했다. 강하게 반대하지 못했던 건, 부모님의 마음속에 죽음을 해석하는 문제, 신체적으로 약해지는 노년을 신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 같은 걸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생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지만, 그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으며 ‘알 수 없다’는 것. 아마도 그 ‘알 수 없음’이 부모님에게 ‘텅 빈 공간’으로 남아 있는 건 아닐까.
부모님의 종교에 대한 변화된 생각은 나의 종교도 떠올리게 했다. 나도 이제 중년에 들어섰다. 나이듦에서 어떤 종교관을 가지느냐는 어떤 인생의 지도를 가지고 있느냐와 같다. 죽음과 늙어감 속에 자잘한 선택의 문제는 어떤 종교관을 가졌느냐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에세이를 통해 한 번 정리해보고자 한다.
강박증이 만든 텅 빈 공간
한때 교회를 다녔었다. 나에게도 텅 빈 공간이 있었다. 영적인 텅 빈 느낌을 말하는 건 아니다. 나에게 텅 빈 공간이란 신에게 의존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는 의미였다.
이걸 설명하기 위해선, 처음 교회를 출석하게 된 이유부터 시작해야 하겠다. 나는 스스로 교회에 갔다. 신에게 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무렵, 혼자 감당하기 힘든 비밀이 생겼다. 어느 날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는데 그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내가 누군가를 다치게 할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었다. 비논리적이고 원인도 없이 찾아온 생각은 스스로 멈춰지지 않았다. ‘그 생각 자체가 났다는 것에’ 죄책감과 두려움이 동시에 일어났고 나는 일상에서 잘 집중할 수가 없었다. 경험해보지 않는다면, ‘생각을 멈출 수 없다’ 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나조차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교회에 가서 신에게 기도했다. 머릿속에 침투한 생각을 멈추게 해달라고. 그렇게 그것을 멈추게 하려고 특정 행동인 눈물과 기도를 반복했다.
겉보기엔 평범하게 생활했지만 한번 ‘멈출 수 없는 생각’이 찾아오면, 정말 힘들었다. 마치 머릿속에 벌레가 갑작스레 나타나 특정 부분을 건드리는 거 같았다.
당연히 정신과를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어린 탓에 잘 의사를 전달하지 못했던 것인지 엄마는 정신과는 안 된다고 했다. 정신과에 가면 기록이 남겨진다고 엄마는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뭔지도 모르는 이것과 같이 살아갔다. 어른이 되어가면서 나아지는 거 같다, 가도 혹시 이상한 생각의 침투가 올까 봐 내심 두려웠다. 그래서 항상 피난처로 신과 가까이 있었다.
나의 증상의 이름을 정확히 알게 된 건, 삼십 대 중반. 이 증상의 이름은 강박증(obsessive compulsive disorder)이었다. 강박증은 오염 공포로 손을 반복적으로 씻는다거나 문을 잠갔는지 지나치게 확인하는 등 대게 강박적 행동을 동반하며 나타난다. 강박증의 핵심 정의는 뇌에 침투한 ‘어떤 특정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 것’이다. 나의 경우는 ‘안 좋은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 생각 자체가 불쾌감과 죄책감을 불러왔고, 신을 찾게 된다, 로 연결되었다. 많은 경우 어른이 되어서야 겨우 자신의 상태가 강박증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고 한다. 이 자체를 타인에게 설명하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가장 힘든 점은 강박 상태에서 활성화된 뇌의 에너지가 소모적으로 정신을 질질 끌고 다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상의 집중력이 흐트러진다. 강박증에 대해 알아가면서 가장 놀라웠던 건, 나 같은 사람이 세상에 많다는 거였다. 또한, 강박증에 빠진 뇌를 가진 사람은, ‘신에게 기도하지 않아본 적 없다’라고 한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뇌에 침투한 생각을 제발 멈추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고. 그래서 강박증을 가진 사람은 많은 비율로 미신과 종교를 믿는다고 보고 되어 있다.
내가 나를 오래 괴롭혔던, 그래서 신과 나를 연결했던 계기가 강박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날, 축의 시대의 저자 카렌 암스트롱이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이 경험한 빛과 혼절의 경험을 신의 체험이라 보고 수녀의 삶을 선택했는데 뒤늦게 성인이 되어서야 그 경험을 일으킨 것은 측두엽간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기도가 아니라 약을 먹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놀라운 자유로움을 느꼈다고 밝히며 수녀의 길을 멈춘다. 나는 그 일화가 온전히 이해되었다.
나의 ‘텅 빈 공간’은 강박증으로 인한 죄책감, 불쾌감, 두려움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나는 신에게서 서서히 정서적 의존을 떨어트릴 수 있었다. 더 이상 침투한 생각이 찾아와도 강박증의 한 형태일 뿐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텅 빈 공간 – 소속감
그런데도 약간 남아 있는 결핍의 공간이 있었다. 완전히 종교를 포기하기 어려운 이유, 소속감의 문제였다. 나의 사회생활은 대게 실업도 고용도 아닌 애매한 노동 형태, 프리랜서였다. 불완전한 돈벌이보다 더 어려운 건 사람에 대한 연결 부족이었다. 그런 나에게 가장 빨리 접속할 수 있었던 공동체는 교회였다. 정서적 나약함(강박증으로 인한, 그리고 강박증을 스스로 정의할 수 없었던 때에)이 있었기에 더 교회에 끌렸다. 그래서 여러 교회를 전전했다. 그런데 가장 진지하게 오래 다녔던 마지막 교회에서 유일신에 대한 믿음은 오히려 흐려졌다. 그 교회는 개인의 이익이 아닌 공동체의 이익이 우선이며 물질주의의 기복신앙을 경계했고 무차별적인 유일신 신앙은 비판했다. 타 종교에 대해 서로 이해하고 함께 가는 방향성도 옳았다. 하지만 교회가 가는 방향성에 모두 동의하지만, 점점 유일신을 믿을 이유는 없어졌다. 내가 기도하는 대상이 꼭 하나님이어야 하는가? 세상 모든 것에 신이 깃들어 있는데, 왜 굳이 하나님이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은 점점 꼭 그럴 필요는 없다, 는 쪽으로 기울었다. 점점 더 유일신을 믿는다는 거 자체가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어렵다고 생각됐다. 마침 내가 출석하던 청년 모임에서 싸움이 일어났고, 분열되었다. (이 민주적인 교회는 싸움이 잦았다) 그 일을 계기로 교회를 떠났다. 그 후로는 어떤 교회도 가지 않았다.
유일신에 대한 믿음이 강한 교회(이를테면 대형 교회)는 사회에 배타적이었고, 유일신에 대한 믿음보다 타 종교에 대한 개방성을 가진 교회는 내부 분쟁이 너무 잦았다. 인간은 폭력적일 만큼 강한 중심이 없으면 공동체를 유지할 수 없는 걸까? 라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이런 이유로 어떤 교회에서도 온전한 소속감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다 공부 공동체와 접속하게 되면서 공부를 하면서, 사람들과 연결될 방법을 알게 되었다. 유연하고 개방적이면서 같은 공부를 한다는 연결의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종교가 중심이 아닌 공부를 중심으로 한 느슨하고 자유로운 소속감이었다.
매 순간 새로운 신을 만드는 것
지금 나는 인생에 그 어느 때보다 신에게서(그리고 교회에서) 멀어진 상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텅 빈 마음’은 뭔가로 채워져 있다. 나의 ‘텅 빈 마음’이 뭔지를 알게 된 안도감, 논리적 이해가 채워졌다. 그리고 이제 고정된 신에 대한 믿음은 양자역학의 세계에선 회의적이라는 걸 알고 있다.
"나는 <티마이오스> 대화편에 빠져 들어갔고, 물질의 최소 단위를 논한 부분에 이르렀다. (중략) 거기서는 물질의 가장 작은 부분은 직각삼각형으로 이루어지며 이것들이 정삼각형이나 정사각형으로 합쳐진 뒤, 입체기하학의 정다면체, 정사면체, 정팔면체, 정이십면체를 이룬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중략) 그러나 플라톤이 어떤 사고 과정을 통해 입체기하학의 정다면체를 물질의 최소 단위로 보게 된 것인지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부분과 전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19~20p)
<부분과 전체>의 1장에서 하이젠베르크는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읽으며 원자에 대해 사색한다. 플라톤은 물질의 최소 단위는 네 개의 정다면체들이 각각 흙, 불, 공기, 물이라는 네 원소의 기본 단위로, 물질을 최소 단위로 쪼개고 쪼개면 수학적 형태에 이른다고 보았다. 즉, 플라톤은 원자가 고정된 실체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양자역학은 고정된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양자역학에서 신 자체가 없다, 는 완전한 결론에 도달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다만, 고정된 것이 없다는 건 현재로선 확실한 거 같다.)
이중슬릿 실험을 통해 전자는 입자도 되고 파동도 된다. 즉, 어떤 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 관찰 대상에 의해 입자가 될지 파동이 될지 달라진다. 그래서 양자역학에서는 관찰자와 관찰 대상은 같다고 말한다. 순간순간 결정된 것이 없고, 결정자도 없는 상태. ‘서로 상보적인 관계에 있고 그 때문에 서로 모순’(부분과 전체, 338p)이다. 플라톤의 원자론과는 다르게 고정된 실체가 없는 세계다.
이 사이에 신이 작동하는 공간은 없다. 아니, 없어도 돼 보인다. 즉 나는 이 공간에, 여러 조건과 관계 속에서 중첩돼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매 순간의 마주침이 매번 새롭게 창조된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정화스님의 말씀을 붙이자면, 우리는 모두 부족함이 없는 개별적 존재이고, 각자 하나의 완전한 소우주이다. 개인이 소중하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우리는 이미 그 자체로 온전하다. 그러니 지금 이대로 충분하다. 라는 것은 ‘신’의 개입 없이도 그렇다는 거다. 즉, 도달해야만 할 곳은 없고 이 순간만이 전부고 처음이고 마지막이며 유일한 기회다.
다시 부모님이 여동생의 교회에 출석하기로 했다는 말씀을 생각해 본다. 어쩌면 부모님의 마음의 ‘텅 빈 공간’을 나는 전혀 상상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텅 빈 공간’은 개인마다 각기 다른 색깔 띠고 있으며, 각기 다른 두려움이다. 엄마와 아빠도 다를 수 있다. 한 번도 묻지 못했다. 문득 여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와 아빠의 두려움에 대해서, 비어 있는 결핍에 대해서. 그리고 정말 들어봐야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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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