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공 4회차 후기 : 신생의 죽음, 효를 둘러싼 딜레마

토용
2023-06-17 14:25
142

진(晉)나라 태자 신생이 죽었다. 진 헌공 21년의 일이다.

진나라는 헌공 5년에 여융을 정벌하고 여희와 여희의 여동생을 데리고 와서 부인으로 삼고 총애를 하였다. 여희를 들이기전 헌공이 거북점과 시초점을 쳤는데, 거북점은 불길하다 하였고 시초점은 길하다는 점괘가 나왔다. 헌공이 시초점을 따르겠다고 하자 복인(卜人)은 거북점이 시초점보다 확률이 높기 때문에 거북점을 따라야 한다고 하였으나, 헌공은 듣지 않는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헌공에게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태자인 신생과 중이(나중에 춘추오패 중 하나였던 문공이 됨), 이오가 여희의 계략에 희생이 된다. 여희가 신생을 태자의 지위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의 아들 해제를 태자로 만들기 위한 계략은 앞서 장공 28년, 민공 2년에 나온다.

 

태자 신생이 죽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제사고기 독극물 사건이다. 여희가 신생에게 헌공이 제강(신생의 어머니)의 꿈을 꾸었으니 제사를 지내라고 한다. 이에 신생이 제사를 지내고 술과 제사고기를 가져온다. 여희는 그 고기를 6일 동안 방치해 두었다가 헌공이 사냥에서 돌아오자 고기에 독을 바르고 헌공에게 올린다. 헌공이 먹기 전 술을 땅에 뿌리자 땅이 부풀어 오르고, 고기를 개에게 주자 개가 죽는다. 헌공을 모시던 내시에게 먹도록 하자 그도 죽는다. 이에 신생의 스승 두원관은 죽임을 당하고, 신생은 목매어 자살한다.

 

태자 신생의 죽음은 당시에 꽤나 시끌벅적한 사건이었던 것 같다. 『좌전』에서도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고 있고, 『국어』 <진어>, 『사기』 <진세가>, 『여씨춘추』 등 여러 책들에도 보인다. 특히 <진어>에는 굉장히 자세하게 기록되어있다.

 

신생의 죽음이 많은 기록으로 남겨진 것은 그가 죽기 전에 했던 말도 그 중 하나의 이유인 듯하다. 신생은 죽기 전 왜 모함을 받았는데 해명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신생은 “임금께서는 여희가 없으면 편히 거처하지 못하시고 배불리 드시지도 않으신다. 내가 무죄함을 밝힌다면 여희는 반드시 죄를 받게 될 것이다. 임금께서는 늙으셨으니 여희를 잃으면 반드시 즐거워하지 않으실 것이고 이렇게 되는 것을 나도 즐거워하지 않는다.” 라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도망을 가라는 말에 신생은 임금을 시해하려했다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도망가면 누가 나를 받아주겠느냐고 말하고 목매어 죽는다.

 

<진어>에는 당시 신생의 대답이 좀 더 길게 나온다. 일부만 옮겨보면,

 

“내가 양설대부한테 들으니 그의 말이 ‘임금은 공경으로 섬기고 아버지는 효도로 섬겨야 한다.’고 하였다. 명령을 받아 변심하지 않는 것이 공경이요, 〈아버지께서〉 편안해 하시는 바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이 효도이다. 명령을 버림은 불경이요, 명령을 멋대로 만들어내는 것은 불효이다. 또 내가 무슨 도모를 하겠느냐? 아버지가 사랑하는 사람을 이간시키면서 아버지가 내리시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누리는 것은 불충이며, 남을 폐출시키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것은 양심의 올곧지 않음이다. 효‧경‧충‧정(孝‧敬‧忠‧貞)은 아버지께서 훌륭하게 여기시는 바이다. 아버지께서 훌륭하게 여기시는 것을 버리고 스스로의 길을 도모하는 것은 효도에서 멀어지는 일이다. 나는 나를 위한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예기』 <단궁 상>에는 신생의 대답에 대한 논평이 있다.

 

“저 어버이를 잘 섬기지 못하는 자는 작은 사랑에 끌려 은혜를 해치고, 고식적인 방법을 쓰다가 덕을 해쳐서, 자기의 입장에서 말할 수 있는데도 말하지 않고, 일에 있어서 간할 수 있는데도 간하지 않아서, 망설이며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어버이의 뜻을 따르기만 하다가 어버이의 명령에 의해 목숨을 잃고 어버이를 의롭지 못하다는 오명에 빠뜨리는 지경에 이르게 한다.

진 헌공이 세자 신생을 죽이려 할 때, 신생은 어버이에게 말할 수 있었는데도 말하지 않으면서 또 임금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하고, 의리상 도망갈 수 있었음에도 도망가지 않으면서 또 천하에 어찌 아버지 없는 나라가 있겠느냐고 하며, 심지어 자신의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도 잊고서 나라에 환란이 많은 것을 근심하고, 죽고 사는 큰 법칙도 돌아보지 않으면서 또 재배하는 하찮은 의식은 삼갔으니, 이는 공손함일 뿐 효도는 아니다.”

 

효를 둘러싼 딜레마. 이런 비극은 秦나라 말 진시황과 맏아들 부소 사이에서도 똑같이 벌어진다. 좀 더 생각해볼 문제이다.

 

 

 

댓글 1
  • 2023-06-18 14:04

    그러네요.
    역사 속에서 어리석은 헌공으로 남게 했으니,
    뷸효도 이런 불효가 아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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