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천대유 후기

겨울
2023-07-09 18:52
170

늦어도 한참 늦은 후기를 쓰려니 세미나 때 오갔던 말들은 다 사라지고 나에게 주역은 뭘까? 하는 생각만 둥둥 떠다닌다.

나의 주역과의 인연은, 발목 골절로 집에만 있어야 할 때 마침 주역64일 낭독을 한다기에 옳다구나 하고 신청한 데서 시작되었다. 그 후 64일 동안 개근상에 목멘 사람처럼 거의 하루도 안 거르고 주역 괘사와 효사를 읽었지만 이게 뭔 말? 오리무중이 이런 경우를 말하는 거구나 하는 깨달음만 남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금요클래식에서 4번에 걸친 주역 안내를 받을 기회가 있었고 비로소 뭔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으니, 이 때가 주역공부를 시작한 첫 날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게 주역공부를 하던 중, 수(需)괘에서 서괘전에 나온 말을 읽다가 이게 무슨 개그 소잰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앞의 몽(蒙)괘가 어림이니 길러야 하고 기를 때 필요한 것은 음식이라서 ‘수는 음식의 도’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개그 같은 논리란 말인가?

그러나 이끌어주시는 선생님들의 진지한 해석에 귀 기울이면서, 감히 서괘전의 주역 해석을 두고 개그를 생각한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점점 주역에 빠져들었다.

내가 맡은 괘는 그 유명한 화천대유괘! 인터넷 검색어로 등장하는 부동산투긴지 뭔지 하는 데서 등장한 탐욕스러운 자들의 그 화천대유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 게 진심으로 새로웠다.

대유괘(䷍)는 크게 소유한다, 크게 있다는 뜻을 지닌 괘라고 한다. 강건함을 나타내는 하늘 천 건괘(☰)가 아래에 있고 문명을 뜻하는 불 화 리괘(☲)가 위에 있어서, 해가 하늘 위에 높이 떠서 온 세상을 비추는 형상이다. 제왕의 자리인 오효 하나만이 음이고 나머지 모든 효가 양으로, 온유한 왕을 강건한 다섯 신하가 모신다는 괘다. 특히 내괘인 건괘의 중간에 위치한 구이효는 강한 신하로서 외괘인 리괘의 중간 자리(육오효)의 왕을 따르며, 왕 또한 건(하늘)의 주체인 구이의 신하에게 응한다. 이는 하늘의 운행에 순응하는 것이므로 하늘에 응하고 때에 맞게 행하는 것이 된다.

효사를 보면, 부유함을 누리더라도 어렵게 여기고 조심할 줄 알면 허물이 없다고 하고, 군주에게 신임을 받는 신하로서 수레에 짐을 쌓아 나아가면 허물이 없다고 한다. 이는 당시 강력한 운송수단인 수레에 짐을 쌓아올려서 군주의 명에 의해 필요한 곳에 가져다준다는 뜻이 아닐까, 하는 이야기가 세미나 중에 오갔던 것 같다.

다음으로, 제후(신하)는 대유의 때를 맞아 크게 소유한 것을 반드시 천자(=사회전체)를 형통하게 하기 위해 써야 한다. 즉 소유한 것을 개인의 소유가 아닌 공유의 개념으로 여겨야 하는데, 소인은 자신의 소유라 생각하여 그렇게 하지 못한다. 뒤이어 지나치게 소유하지 않도록 인간 스스로 한계를 설정하라는 경계의 말이 나오고, 군주가 믿음으로 아랫사람을 대하면 아랫사람도 성실함으로 윗사람을 섬길 것이며, 온유한 군주로서 위엄이 있어야 한다고 하며, 마지막으로 하늘로부터 도우므로 길하여 이롭지 않음이 없다는 말로 마무리된다.

나는 이런 해석을 접하면서 문득 요즘 누구나 피부로 느끼는 기후위기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태양에너지야말로 인간이 소유한 가장 큰 에너지이며 그 에너지로 온갖 생물이 자라날 수 있다는 점에서, 풍부한 자연의 혜택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크게 소유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인간사에서만이 아니라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지나치게 소유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며, 공유의 개념으로 자연을 대해야 기후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닐까, 등등의 생각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화천대유괘는, 괘사를 가지고도 효사 하나하나를 가지고도 생각할 거리가 참 많은 괘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주역의 괘사 효사를 낭독하던 몇 달 전이나 주역 상경을 어찌어찌 끝낸 지금이나, 주역, 하면 오리무중이기는 마찬가지이긴 하나, 나는 그때도 지금도 주역이 재미있다. 그 무궁무진한 해석이 흥미진진하다. 그래서 앞으로 오래오래 주역을 붙들고 있을 것 같다.

(너무 늦은 후기라 세미나 시간에 오간 얘기들을 담을 수 없어서 많이 아쉽다. 앞으로는 늦지 않게 후기를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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