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고전학교] 사기열전 <염파 인상여열전> 후기

곰곰
2023-06-21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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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때 조나라에 염파라는 백전노장이 있었다. 전국시대 말기 최강대국은 진(秦)나라. 진나라는 서쪽에서 점차 동쪽으로 진출했다. 천하통일이 머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진나라와 조나라는 국경이 붙어 있었다. 그래서 조나라는 늘 침략대상 1순위. 그걸 간신히 막아낸 사람이 염파였다. 

 

그런데 진나라 소왕이 조나라 왕에게 대대로 전하는 보물 화씨벽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성 15개와 바꾸자는 조건을 내걸고 사신을 보내왔다. 그러나 거짓말이었다. 아무리 옥이 좋다 하더라도 성 15개와 바꾼다는 건,,, 좀 그렇다. 화씨벽을 뺏고 싶어하는 진나라의 속셈을 알았지만 조나라 입장에선 난감했다. 거절했다간 진나라의 공격을 받을 것 같고 받아 들였다간 화씨벽만 잃을 것 같고.. 이때 임금의 측근이었던 환관 무현이 인상여라는 자신의 식객을 추천했다. 인상여가 화씨벽을 진나라 왕에게 바쳤지만 소왕은 비빈과 신하들을 불러 화씨벽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좋아할 뿐 성에 대해선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인상여는 소왕이 성을 내 줄 생각이 없음을 감지하고는 ‘이 화씨벽에는 작은 흠(하자,瑕疵)이 하나 있’다면서 일단 옥을 돌려 받았다. 그러고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진 소왕을 나무라며 성을 주지 않으면 옥을 던져 깨 버리겠다고 협박한다. 그는 이 문제를 조나라 왕이 신하를 모두 불러 상의 했었는데, 그 자리에서 신하들은 한결같이 ‘진나라는 지나치게 욕심이 많아 자신의 강대함만 믿고 화씨벽을 차지하려 한다, 화씨벽을 주고 대신 받기로 한 성은 얻지 못할 것’이라 했다. 그럼에도 자신은 ‘일반 백성의 사귐에도 오히려 서로 속이지 않거늘, 하물며 큰 나라끼리 사귀는데 그럴 수 있겠느냐’며 진나라의 위엄을 존중하려 했는데, 진나라 왕께서는 예절을 하잖게 여기며 아주 거만하시다며 화를 낸다. 힘이 약한 나라의, 환관의 사인이었던 그가 큰 나라의, 그것도 권력의 정점에 있던 왕에게 이런 말을 했다니.. 용기가 놀라울 따름이다.

 

당황한 소왕은 그러겠노라 답했다. 인상여는 조나라 왕도 이 옥을 진나라로 보낼 때 닷새 동안 목욕재계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보냈으니 소왕께서도 닷새 동안 목욕재계한 뒤에 와서 받아가라고 말한다. 성 15개를 주겠다는 문서도 함께 가지고 오란 말도 덧붙였다. 옥이 탐이 난 소왕은 그가 시키는 대로 하고 닷새 후에 왔는데, 옥이 없다. 인상여가 그 사이에 옥을 조나라로 돌려보낸 것이다. 옥을 온전히 보전해서 조나라로 돌려보냈다는 뜻의 ‘완벽귀조’(完璧歸趙)라는 사자성어가 여기서 나왔다. 그리고 ‘완벽’이라는 단어 또한 여기서 파생되었다. ‘완벽’은 아주 빈틈이 없고 철두철미한 태도를 가르키는 줄 알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비롯되었고 뜻밖의 뜻을 가지고 있어 새로웠다. 여튼 내가 소왕이었더라면 이런 상황에 아주 노하였을 것 같은데, 그는 상여를 죽이면 화씨벽도 얻지 못하고 진-조나라간 우호관계만 끊어질 것이라며 후한 예물을 주고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그렇게 해서 인상여는 큰 공을 세우고 상대부가 되었다. 

 

그 뒤 인상여가 외교 무대에서 소왕을 한번 더 골탕 먹이는 사건이 벌어진다. 자기 목의 피를 뿌려서라도 소왕이 분부(옹기로 만든 악기)를 연주하기를 청한 것이다. 굳이 목숨을 걸면서까지 진나라 왕에게 악기를 연주하도록 한 까닭은 무엇일까? 진왕이 먼저 조나라 왕에게 거문고를 연주하게 한 것은 조나라가 마치 진나라의 속국인 것처럼 업신여겼기 때문이고, 이를 알아차린 그는 조나라가 진나라와 대등한 나라임을 분명히 하려 했다. 강대국을 상대로 대등한 외교를 펼쳤다는 점에서 인상여의 행동은 높이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강한 사람에겐 약하고 약한 사람에게 강한 것이 비겁하단 걸 알지만, 이를 고치기는 힘든데, 인상여는 확실히 달랐던 것 같다.(지금의 우리 외교와는 달라도 너무 달라서..더.욱.) 참다운 용기란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겐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인상여는 그것을 몸소 보여줌으로써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적대시했던 염파장군까지도 감동시킨다.

 

다른 사람들에겐 인상여의 승승장구가 괜찮은데, 염파는 못 견딘다. 자신은 평생 수많은 전투에 나가 목숨 걸고 싸워서 어렵게 상경이 되었는데 인상여는 혀와 입을 놀려 자신과 같은 반열에 올라섰다. 무장 입장에서 인정하기 힘든 사실이었다. 그는 “내가 인상여를 만나면 모욕을 주겠다”고 말하며 다녔다. 인상여는 이 이야기를 듣고 아침에 출근하다 염파의 수레가 보이면 수레를 돌려 도망친다. 그런데 인상여는 그렇다 치더라도 인상여의 사인들은 괴로웠다. 인상여는 나쁜 말을 퍼뜨리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지나치게 겁을 내는 사람이니 부끄러워서 이만 물러나겠다며 농성을 했다. 인상여는 “내가 천하의 진나라 소왕 앞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큰소리를 친 사람이다. 그런데 염파가 뭐가 두려워서 도망을 다니겠느냐. 지금 조나라는 진나라의 위협 때문에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 있다. 이러한 때에 무관을 대표하는 염파와 문관을 대표하는 내가 서로 반목하여 싸우면 나라가 어찌 되겠느냐. 선국후사(先國後私) 아니겠느냐”고 한다. 여기서 드러나는 인상여의 공사구별 정신! 나라를 먼저 위하고 사사로움은 나중 일이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염파는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자신은 질투심에 사로잡혀 미천한 출신 인상여가 벼락출세했다고 욕을 하고 다녔는데 정작 인상여는 나라를 위하고 있었다니 그럴만도 하다. 염파는 웃통을 벗고 가시나무를 짊어진 채 인상여를 찾아가 죄를 청한다. 여기서 ‘부형청죄(負荊請罪)’라는 유명한 사자성어도 나온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문경지교(刎頸之交)’, 목숨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을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됐다. 관포지교와 죽마고우도 좋지만 문경지교는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우정이니…가장 단단한 우정이지 싶다.  

 

 

태사공은 말한다.

“죽음을 알면 반드시 용기가 솟아나게 된다. 죽는 것 그 자체가 어려운 게 아니고 죽음에 대처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인상여가 화씨벽을 돌려받고 진나라 왕 주위의 신하들을 꾸짖을 때 그 형세는 기껏해야 죽음뿐이었다. 선비 중에 어떤 이는 겁을 집어먹고 감히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러나 상여가 한번 용기를 내자 그 위세가 상대편 나라까지 떨쳤고 물러나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염파에게 겸손히 양보하니 그 이름은 태산처럼 무거워졌다. 인상여는 지혜와 용기 두가지를 모두 갖춘 인물이라 말할 수 있다.”

 

이 열전은 전국시대 말기 조나라 인물들, 인상여, 염파, 조사, 조사의 부인, 조괄, 이목 등의 이야기를 하나로 이어서 만든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태사공은 인상여에 대해서만 후하게 평할 뿐 다른 인물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왜 그랬을까? 백기가 장평대전에서 항복한 조나라 병사 수십만명을 속여서 생매장한 것, 몽염이 진시황의 영토확장정책 때문에 수많은 백성에게 고통을 준 것에 대한 사마천의 혹평을 떠올려보면, 폭력 정치에 대한 그의 반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인상여는 진나라와의 외교에서도 그렇고 염파와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그렇고,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을 만큼 용기가 있었지만 어떠한 폭력적 상황도 만들지 않으려 애쓴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공사구별에 대한 태도 또한 사마천이 개인적인 불행에도 불구하고 <사기>를 끝까지 집필했던 것과 닮아 보이기도 하고..

 

강한 사람에게는 커녕 누구에게도 할 말 못하는 나는 인상여 같은 사람이 되긴 틀린 것 같고, 인상여 같은 친구를 만나고 싶다는 소망이 생긴다. 그럼 일단 가시나무 짊어지는 것부터 연습을 좀 해봐야 하나 어쩌나…ㅋ 

댓글 2
  • 2023-06-21 14:33

    ㅋㅋㅋ
    가시나무 짊어지지 않아도 그런 사람이 오겠죠?
    물수능을 지시한 후폭풍을 우려하여 프랑스로 떠나는, 외교를 국내정치용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리더를 두고 있어서 답답할 뿐......

  • 2023-06-21 23:44

    순수하고, 솔직하고, 사적인 의도가 없는 분노는
    염파를 더욱더 빛나게 한다.
    그 심성을 아는 인상여는 우정으로 서로 답한다.
    둘의 목적은 선국후사(先國後私) 이니, 문경지교 같은 아름다운 말은 남겼다고 생각한다.
    염파의 순수의 최고봉은 쓰여지기를 바라는 모습이다.
    염파는 비록 늙은 몸이지만 쓰임받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趙使者既見廉頗, 廉頗為之一飯鬥米, 肉十斤, 被甲上馬, 以示尚可用.
    (조나라의 사신이 염파를 만났다. 염파는 밥 한 말과 고기 열 근을 먹고는 갑옷을 입고 말에 뛰어올라
    아직도 자신이 쓸모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我思用趙人 (나는 조나라의 병사들을 지휘하고 싶다.) 아!눈물난다.
    선사후국(先私後國)의 목적으로 전달하는 소식만을 듣고서, 왕은 염파를 쓰지 않았다.
    趙王아~ 직접 니 눈으로 염파의 상태를 확인하지 그랬니!

    잘못된 결정의 최대 피해자는 예나 지금이나 민초들이다.
    염파장군을 믿고 따라 나섰을 졸병들,
    왕은 멍청하고, 귀가 얇아,
    노장은 내치고 ,헛똑똑이 내세우고,
    진격하다가 태행로가 끊기자,
    살려준다기에 믿고 총과 칼을 전부 다 버렸는데,
    항복한 40만 조나라 백성을 산채로 땅에 묻고......
    (요즘은 길을 걷다가도.......ㅠㅠ)
    평원군이 지혜롭다?백기가 명장이다?
    WTF !!!

    (인상여만큼은 아니지만 할말 한건가? 흠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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