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차 질문

임혜란
2023-11-10 22:35
97

p 38.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댓글 6
  • 2023-11-11 14:34

    p.11
    "사회적 처분에 맡겨져 있는 생산력"이라고 할 때, 사회적 처분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상업 공황 같은 것을 의미하는건가요? 그리고 상업 공황은 부르주아 계급에 의한 생산양식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인가요? 공장제 수공업 정도 되는 시기? 본격적인 프롤레타리아가 등장하기 이전?

    p.12
    현대 노동자들, 프롤레타리아들은 부르주아지가 공황을 겪고 위기에 처했을 때, 그 타개책으로 나타난 것인가요? 프롤레타리아트의 등장 시기가 궁금합니다.

    p.17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도움을 호소하고 정치 운동에 끌어들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p.21
    "부르주아 계급의 존재와 지배를 위한 본질적 조건은 私人 수중으로의 부의 누적, 자본의 형성과 증식이며, 자본의 조건은 임금 노동이다."
    부르주아 계급을 私人이라고 지칭하고 있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부르주아 계급만 사인이라고 하는게 이상합니다. 私人에 대비되는 公人의 개념이 있나요?

    공산주의자들과 프롤레타리아당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궁금합니다.

    부르주아지의 봉건 절대주의에 대한 혁명은 성공했는데, 프롤레타리아트의 부르주아지에 대한 혁명은 왜 성공하지 못했을까요? 프롤레타리아트 자체의 미발전, 프롤레타리아트 해방의 물질적 조건들의 결여로 불가피하게 좌초했다고 하는데(51), '물질적 조건'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나요?

  • 2023-11-11 14:43

    인류의 역사를 경제적 관점에서 조명한 점, 사회 구조를 파악하여 이를 계급 투쟁으로 검토하도록 하는 점이 <공산주의 선언>인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잘 설명하지만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정의는 광범위하고 모호한 느낌이 듭니다.

  • 2023-11-11 15:47

    엥겔스가 쓴 서문‘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은 변한다. 선언 이후 공산주의 운동은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흘러갔다. 그래서 일견 그들의 언급은 “이미 낡은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상황이 변하였다고 해도 “이 선언에 개진되어 있는 일반적인 원칙들은 대체로 오늘날에도 완전히 정당하다.” 어째서? 그들이 혁명의 원칙을 항상 변화하는 역사적 상황에 놓고 구상했기 때문이다. 가령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8) 계급투쟁을 낳는 생산수단과 생산력의 문제는 살아있는 생물처럼 역사적 시기마다 다른 얼굴일지라도 항상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그 투쟁을 맡은 자들의 이름과 얼굴은 달라도 계급투쟁은 항존한다. 이 공산당 선언이 어느 장르에 들어가야 할지는 몰라도, 개인적으로 눈에 띄는 부분은 칼 맑스라는 ‘역사가’의 시선이다.
    “하지만 부르주아지는 자신에게 죽음을 가져오는 무기들을 벼려 냈을 뿐만이 아니라, 이 무기들을 지니게 될 사람들도 낳았다. 현대 노동자들, 프롤레타리아들을.”(16) 이 구절을 읽으면서 자기 안에는 생명의 씨앗도 있지만 멸망의 씨앗까지도 함께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부모가 자식에게 죽는다는 것, 그런데 다시 보면 부모는 자기를 죽인 자식에 의해서 생명을 영속하구나 이런 생각도 들고 ... 혹은 존재들은 잠재성을 다 갖고 있는, ‘에어리언’이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부르조아지라든가 프롤레타리아트가 본래적이고 태생적인 존재는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생산수단의 소유에 따른 역사 위에서 이들이 맡은 한 시절의 역할이다. 그래서 부르조아지가 끝 간 데까지 가면 “자신들이 노예를 부양해야 하는 그런 처지에”(24) 빠지기 때문이다. 인격적으로 영원한 것은 없지만, 한번 대공업의 자본주의 사회로 들어간 순간, 쳇바퀴 돌 듯 그 순환은 영원하다. 그러면 공산주의는 어떻게 이 사슬을 끊고자 하는가.

    공산주의자들이 그 밖의 다른 프롤레타리아트당들과 구별되는 것은,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의 다양한 일국적 투쟁에서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적에 상관없는 공동의 이해관계를 내세우고 주장한다는 점과 다른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투쟁이 경과하는 다양한 발전 단계에서 항상 전체 운동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점뿐이다.(26)

    위의 글귀나 뒤 엥겔스의 서문들을 읽으면서 왜 이들이 ‘사회주의’라는 말 대신에 ‘공산주의’라는 말을 발명할 수밖에 없었는지가 상상되었다. 아마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일반 세력들의 다양한 세력화를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꿈꾸는 혁명은, 당시의 사회주의당이나 노동자당이나 이른바 프로레타리아트당과는 달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공산당의 특징은, 위의 언급에서 보자면 일국적 투쟁이 아니라 세계적이라는 것과 항상 전체 운동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점이다. 전자에 관해서 부르조아지는 ‘일국적’ 즉 “하나의 국민, 하나의 정부, 하나의 법률, 하나의 전국적 계급 이해관계, 하나의 관세선”을 필요로 한다. 이를 위해서 정치적으로 세력화하고, “한 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자기 자신의 형상대로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14) 그런데 ‘역사적’으로는 일국적 다음에 나오는 것은 국제적이다. 즉 특정 단계에 이르면 자본은 국경에 막히지 않는다. 그래서 공산당의 임무 또한 ‘처음(?)’에는 일국적이었다가 어느 단계를 넘어가면 ‘인터-내셔날’한 것이 된다. 그렇게 저 멀리 최종의 목적으로 제시된 ‘국적에 상관없는 공동의 이해관계.’ 후자의 전체 운동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점을 맑스는 들고 있는데, 잘 모르겠다. 윗 구절을 이어서 나오는 부분을 보면서 뭔 소리인지 살펴보자.
    공산주의자들은 ‘실천적으로는’ 이렇고, ‘이론적으로는’ “그 밖의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에 비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조건, 진행, 일반적 결과 따위에 대한 통찰에서 앞선다.”(26) 즉 전위로서의 공산주의자이다. 이렇게 보면 노동자라고 해서 모두 같은 노동자인 건 아니고 프롤레타리아라고 해서 모두 같은 프롤레타리아는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으로서의 형성”이 필요하다. 계급성을 획득할 것이 필요한 것. 프롤레타리아-되기. 그럼 뭐를 ‘믿어야’ 혹은 ‘알아야’ 혹은 어떻게 해야 프롤레타리아가 될 수 있는가. 다른 건 몰라도, 맑스는 ‘소유관계의 철폐’에 대해서 이어서 쓰고 있다. 그러면서 하는 말, “이제까지의 소유관계들의 철폐는 공산주의를 독특하게 특징짓는 것이 아니다.”(26) 이들이 노리는 것은 (현대의 부르조아적) “사적 소유 폐지”(27)이다. 이에 대한 반론(노동하여 얻은 소유를 폐지하잔 말이냐?)에서 자본은 인격적 힘이 아나라 하나의 사회적 힘이라고 말하고, 소유의 사회적 성격을 다르게 만들고 실천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다만 이렇게 취득할 때 나타나는 비참한 성격을 폐지하고자 할 뿐”(28)이다. 여기까지 쓰고 잠시 얼음. 으흠, 분명 처음 읽었을 때랑 느낌과 해석이 다르다. 소유의 사회적 성격, 자본의 사회적 성격을 다르게 정의하자는, 더 이상 부르조아적 소유가 아닌 모두의 것으로 하자....뭐 이런 식의 생각이 들었던 듯도 한데....

  • 2023-11-11 17:06

    34쪽 “인간들의 생활 조건들, 그들의 사회적 관계들, 그들의 사회생활 따위와 더불어 그들의 관념, 견해, 개념, 한마디로 그들의 의식 또한 변한다는 것을 파악하는 데에 더 깊은 통찰이 필요하단 말인가? 이념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것은 정신적 생산이 물질적 생산과 더불어 변화된다는 것 말고 달리 무엇인가? 한 시대의 지배적 이념은 항상 지배계급의 이념이었을 뿐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관념, 이념 등은 생활 조건들에 따라 달라진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생활 조건은 지배계급이 쥐고 있으므로 한 시대의 지배적 의식은 지배계급의 의식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35쪽 “모든 세기의 사회적 의식이 그 모든 잡다함과 다양성에도 일정한 공통의 형태 안에서, 계급대립이 모두 없어져야만 완전히 해체되는 의식 형태들 안에서 운동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주장에 대해 의문점을 적어보자면, ‘계급투쟁’을 통해 ‘계급대립’을 모두 없애려는 실천도 결국 그 시대의 환경에서 만들어진 이념이며 관념이 아니겠냐는 점이다. 또 하나는 ‘계급대립’이라는 것이 소유관계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니체가 말하는 힘들 안에서 일어나는 ‘힘에의 의지’ 같은 원초적인 자연적인 운동, 에너지같은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공산주의혁명도 끊임없이 변천하는 계급대립의 흐름 중 하나일 뿐, 계급을 없어지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 2023-11-12 00:03

    맑스와 앵갤스가 이야기하는 진정한 의미의 ’혁명‘을 보면, 오히려 부르주아지가 먼저 혁명을 일으킨 것처럼 보인다. 기존에 있었던 계급과 권력 구조를 파괴하고 재건설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이 지배권을 얻은 곳에서, 모든 봉건적, 가부장제적, 목가적 관계를 파괴했다.(11)“

    자본주의 혁명? 화폐혁명이라고나 할까. 다만 그 혁명이 계급 뿐 아니라 관계와 삶의 지층을 모두 ‘냉혹한 현금계산’이나 ‘유급임금노동자’로 바꿔놓았다는 게 맑스의 비판점인 것 같다.

    하지만 내게 이미 자본주의적 사고가 뿌리 내려서인지, 아니면 내가 MZ세대여서인지, 공산주의 선언은 내게 크게 와닿지 않았다. 우선 나는 개인(혹은 특정 집단)의 이득과 정치가 거의 동일시 되는 요즘의 분위기에 익숙한데, 프롤레타리아로서 어떠한 대의를 위해 움직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조금 놀라울 정도다. 시대적 맥락도 다르고 내가 이 선언의 구체적인 내용을 몰라서이기도 하겠지만. 개인의 이득보다 우선시 돼야할 명분이 와닿지 않는다.
    비슷한 맥락에서 사적 소유의 폐지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할지 감이 안잡혀서 ‘진정한’ 공산주의가 가능한 것인지도 헷갈린다.

    + 17p.
    “현대 공업은 가부장제적 장인의 작은 작업실을 산업자본가의 거대한 공장으로 바꾸어 놓았다. 공장에 한데 모인 노동자 대중은 군대식으로 조직된다. 그들은 산업 사병으로서, 하사관들과 장교로 이루어진 완전한 위계제의 감시 아래 놓인다.”

    주변에 인문학 공부를 하며 반자본적인 삶, 대안적인 삶을 모색하는 남성들을 보면 대부분 군대에서 ‘뭔가 잘못됨’을 느끼고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군대라는 공간이 얼마나 위계적이고 효율적으로 굴러가는지, 자본주의 모델이 얼마나 군대와 닮아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것 같다. 반면 나는, 군대를 가지 않았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섬뜩함에 예민하지 못한 것일까? 그냥 떠오른 생각...

  • 2023-11-12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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