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철학입문] 2회차 에피쿠로스 메모

정군
2023-10-14 11:49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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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시간에는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 두 편을 읽습니다.

 

댓글 7
  • 2023-10-14 13:23

    14쪽 5절
    - 사려깊음/아름다움/정직함이 즐거움/쾌락과 다르지 않다는 내용이다. 우리가 평소에 쓰는 쾌락의 뜻과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쾌락이 얼마나 다른지 잘 보여주는 문장 같다.

    21쪽 32절
    - 자연이 곧 상호이득의 협정이기 때문에, 계약을 맺을 수 없는 짐승은 인간의 지위를 갖지 못할 뿐더러 자연이라는 틀에도 포함될 수 없다. 그렇다면 짐승은 뭐라고 생각해야하는가? 그냥 오브젝트?

    45p.
    “우리는 미래가 우리의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우리 것이 아니지도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미래가 분명히 올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되고, 미래가 올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해서 완전히 기대를 버려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요즘 세대들에게도 참 좋은 말이다. 그런데 왜 요즘 세대들에게도 좋은 말이 될 수 있는 걸까? 단순히 ‘좋은 격언’이라고 하기엔 유독 에피쿠로스 세대의 말들이 괜찮게 느껴진다. (아닌가? 아닐 수도 있고) 그 이유에 대해 괜히 생각해보았다.
    에피쿠로스는 세상이 인격을 가진 ‘신’의 의지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는 생각을 타파하려는 듯 보인다. 그가 삶의 의미를 ‘쾌락’에서 찾는 것도, 세상의 모든 일을 자연학을 통해 해석할 수 있다고 보는 것도, ‘어차피 신의 뜻대로 될 텐데’ 같은 비관주의를 타파하고자 한 게 아닐까? 내 느낌에 에피쿠로스가 근본적으로 주장하고자 했던 건 ‘쾌락’을 통한 삶의 의미인데, 그 주장을 펼치기 위해(즉 신의 위상을 끌어내리기 위해) 원자론을 열심히 판 게 아닌가 싶다.
    요즘 세대는 더 이상 신앙을 가지고 세상을 해석하지 않는다. 신의 자리에 과학이 들어와 모든 걸 과학의 시선을 보려 한다. 그리고 이런 과학주의적 태도와 에피쿠로스의 태도가 맞물려 원자론 뿐 아니라 윤리나 삶의 방식에서도 시너지를 내는 게 아닌가 싶다.

    55p.
    “우리는 분명한 것으로부터 불분명한 것을 추론할 때 감각에 의존해야 한다” 왜 불분명함에도 감각에 의존해서 추론해야할까? 우리는 알 수 없으니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말한 사람도 있지 않았나. 그럼에도 강조하는 건 신의 위상을 끌어내리기 위한 것. 모든 건 자연학을 통해 해석할 수 있다.

    58p.
    “영상”typoi
    에피쿠로스는 시각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영상이 외부 대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후, 공기를 통과해서 우리 망막에 부딪힘으로써 시각을 가능하게 한다. 여기서 영상은 외부 대상과 모양이 똑같으나, 단지 속이 비어있다.

    그렇다면 영상의 수는 무한한가? 뚫어져라 보면 대상은 닳을 수도 있나?ㅎ

  • 2023-10-14 13:25

    p 44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산 사람에게는 아직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은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p 47 쾌락주의자들의 쾌락은 방탕한 자들의 쾌락이나 육체적인 쾌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쾌락은 몸의 고통이나 마음의 혼란으로부터의 자유이다.
    p 50 잘못된 판단을 내렸으나 우연 때문에 성공하는 것보다는, 옳게 판단했음에도 불구하고 행동으로 자신의 판단을 입증하지 못한 편이 낫기 때문이다.

    이번강의의 책은 잠언으로 읽어지며 저로선 특별히 사족을 붙일게 없습니다. 쾌락주의자는 감각을 중요시 여기며 자족의 삶을 원하기에 자연이치나 천체의 이치(p 51-p 111)를 알아 삶을 살아가는데 두려움을 없애려고 한 것 같고 삶의 있어 철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 같습니다
    책 꼽문으론 위 세 문장을 추렸습니다. ㅜㅜ

  • 2023-10-14 14:29

    우리가 “쾌락이 목적이다”고 할 때, 이 말은, 우리를 잘 모르거나 우리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방탕한 자들의 쾌락이나 육체적인 쾌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쾌락은 몸의 고통이나 마음의 혼란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왜냐하면 삶을 즐겁게 만드는 것은 계속 술을 마시고 흥청거리는 일도 아니고, 욕구를 만족시키는 일도 아니며, 물고기를 마음껏 먹거나 풍성한 식탁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모든 선택과 기피의 동기를 발견하고 공허한 추측들-이것 때문에 마음의 가장 큰 고통이 생겨난다-을 몰아내면서, 멀쩡한 정신으로 계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p.47~48)

    에피쿠로스가 살았던 시대는 알렉산더 왕이 죽은 이후 권력투쟁이 벌어지면서 전쟁의 위협으로 불안한 세상이었다. 그리스는 피폐화 되어갔고 국가를 지탱하던 중류층도 점차 빈민화되었다. 그래서 그리스 민주주의도 함께 흔들렸고 불안한 사회 정황 속에서 정치철학이나 윤리학은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각 개인의 행복을 확보할 수 있는가이다. 즉 저 자신에 의존하여 어떻게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것인가를 화두로 삼았다. (『쾌락』p.8) 전쟁에서 죽는 사람들이 많아 죽음의 두려움과 불안한 미래에 대한 공포로부터 에피쿠로스는 고통을 줄이고 행복하게 사는 법을 얘기하며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세계를 통일하거나 거대한 전제국가를 이루는 목표를 세우지는 않았다.(이점에서 플라톤과 대조) 에피쿠로스는 정치적 활동에 반대하였다. 정치적 활동은 근심만 만들어낼 뿐이기 때문이다.(『서양철학사』p.190) 그는 혼란한 삶 가운데 마음의 평온(ataraxia아타락시아)을 회복하는 법을 설파했다.(퀴레네 학파와 달리 지속적이고 정적인 쾌락을 추구하였다.) 그의 철학에서 모든 선과 악은 쾌락과 고통의 지각에서 오는 것으로 죽음은 몸과 영혼의 종말, 죽음과 함께 모든 감각과 의식이 끝나기 때문에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 신들은 불사의 존재, 축복받은 존재로 이 외에 어떤 부가적인 가치를 신에게 부과하는 것은 불경한 행위라고 한다. 에피쿠로스는 신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신들은 인간을 신경쓰지 않는다고 믿었다. 고통의 부재는 죽음의 공포와 신의 응보로부터 자유롭고 고요한 상태로 우리가 고통으로 괴롭지 않을 때 더 이상의 쾌락이 필요 없고,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평안한 상태(ataraxia)가 된다. “신에 대해 경건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자연의 목적을 잘 계산한 사람”(p.48)이 되는 것이 에피쿠로스 철학의 목적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점을 깨달아야 한다. 마음속에 가장 큰 괴로움이 생겨나는 이유는 1)사람들이 “천체는 축복받고 불멸하는 존재(다시 말해 신)이며, 자신의 의지와 행위, 동기-하지만 사실상 이것들은 신의 본성과 양립 불가능하다-를 가진다”고 믿기 때문에 2)사람들이 어떤 영원한 비극-전설 속에서 묘사되는-을 항상 기대하고 마음속에 그려보거나, 죽을 때 감각이 없어짐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3)사람들이 분명한 개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무 생각 없는 마음 상태에 의해서 그러한 두려움을 가지기 때문에, 만약 사람들의 고통에 한계를 그어주지 못한다면, 판단에 의해서 이런 믿음에 도달했을 때와 같거나 아니면 더 큰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마음의 평안ataraxia은 이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며, 보편적이고 가장 중요한 원리들을 계속 기억함을 뜻한다.<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p.86~87)

  • 2023-10-14 14:39

    에피쿠로스는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믿음에 익숙해지라고 말한다. 죽음과 두려움...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말이다. 지난 시즌 스토아학파에 꽂혀 있었을 때 많이 했던, 많이 들었던 말이다. 그러나 둘(정원학파와 스토아학파)이 말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차이가 난다. 가령 에피쿠로스도 이 구절을 말하면서 스토아의 논리를 깐다.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을 때 고통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죽게 된다는 예상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헛소리를 하는 셈이다. 왜냐하면 죽음이 닥쳐왔을 때 고통스럽지 않은데도 죽을 것을 예상해서 미리 고통스러워하는 일은 헛되기 때문이다.”(43쪽) 헐, ‘헛소리’란다. 위안이 되었던 구절이었는데... 스토아학파에게 있어 죽음은 자기에게 달린 일이 아니다. 자기가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일에 매달려 슬퍼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도 그들이 인생의 목표로 삼는 행복에 하등의 이로움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마음을 뒤흔들고 고통스럽게 하고 행복하지 않게 만든다. 그래서 자기에게 달린 일과 자기와 무관한 일을 나누는 것이 그들에게는 필요하다. 그리고 이 일에는 ‘이성’이 큰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에피쿠로스에게서 죽음은 어떻게 사고 되는 걸까.
    책을 읽다가 드는 생각은, 에피쿠로스는 ‘이성’을 그다지 많이 사용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감각과 느낌pathos”이 진리 판단의 기준(73)이라고 말한다. 위에서 말하듯, 죽음의 순간은 바로 감각이 없어지는 순간이고 감각이 없어지지만 슬프니 두렵니 하는 것들을 감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죽음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이렇게 이성이 아닌 감각을 들고 있는 에피쿠로스. 그렇지만 감각이 참이라는 것은 어떻게 증명되는가. 이에 대한 설명은 <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의 원자론 설명에서 이야기된다. “우리는 항상 감각이나 느낌을 판단 기준으로 사용해서—왜냐하면 이로써 가장 분명한 믿음의 근거를 얻을 수 있으므로--“영혼이란 미세한 입자들로 구성된 물체이며, 몸 전체에 고루 퍼져 있고, 열기와 혼합된 바람과 매우 유사하며, 어떤 관점에서는 바람과 닮은 반면 다른 관점에서는 열기와 닮았다”고 생각해야 한다. 한편 바람이나 열기보다 훨씬 더 미세한 제3의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아주 작기 때문에 몸의 나머지 구조와 더 잘 조화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영혼의 능력과 느낌의 작용, 운동의 용이함, 사고, 우리가 죽는 순간 잃는 것들에 의해 증명된다. 한편 우리는 영혼이 감각의 주요한 원인임을 깨달아야 한다. 하지만 몸의 나머지....”(73) 영혼은 미세한 입자들로 구성되었는데 이것은 바람과 열기와 닮았다. 혹은 습기 뭐 이런 느낌. 원자들로 이뤄진 바람과 열기 등처럼 보이는 어떠한 구성을 영혼이라고, 그래서 영혼은 비물질적인 뭐시기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게다가 그는 우주는 원자와 허공으로 이뤄져 있다고 했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것은 원자들의 흐름으로 볼 수 있다. 나아가 그는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이유까지도 원자로 말하는데, 감각은 ”몸과 영혼(원자)가 결합함으로써 생겨난 2차적 속성(74, 61각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감각은 대상과의 접촉이 전제되기에 항상 원자와 원자의 접촉이나 결합 그래서 우연적이고 상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감각과 지각, 사고와 관련해서는 <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에 잘 나와 있는데, 어려우니까...그건 다음에.
    그러면 자연학에서 죽음을 다루거나 감각/느낌을 통한 진리 판단 이외에 그러면 죽음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했을 때, 에피쿠로스의 입장에 섰을 때 윤리적인 실천은 어떻게 될까. 두려워할 이유가 없기에 마음의 평정을 이룰 수 있다. 죽음이 삶의 중단이고 삶의 부재이지만 이것은 악이 아니다. 미래의 아무것도 아닌 죽음 때문에 현재를, 행복과 즐거운 삶을 부정하지 말라고, 지금 가장 즐거운 시간을 향유하도록 노력하라(44)고 그는 말한다.

  • 2023-10-14 15:38

    43쪽 ““죽음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믿음에 익숙해져라. 왜냐하면 모든 좋고 나쁨은 감각에 있는데, 죽으면 감각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게 되면, 가사성도 즐겁게 된다. 이것은 그러한 앎이 우리에게 무한한 시간의 삶을 보태어주기 때문이 아니라, 불멸에 대한 갈망을 제거시켜주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해 에피쿠로스와 플라톤은 동일하게 관조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 지점에 이르기까지의 맥락은 다르다. 플라톤은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육체가 죽은 후에도 영혼은 존재’한다고 믿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다. 육체의 죽음을 통해 ‘영혼’은 불완전한 세상에서 벗어나 완전한 ‘로고스(이성)’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다. 소크라테스가 태연하게 독약을 마시는 위대한 철학자의 모습을 보여준 이유이다.
    이와 달리, 에피쿠로스에게 ‘신’은 완전히 행복하고 평온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관심이 없다. 세상은 알아서 자연 법칙에 의해 움직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진리의 기준은 세상을 만나고 인식하게 해주는 ‘감각’이다. 우리의 쾌락과 고통의 느낌도 ‘감각’에 의존한다. 그리고 자연은 나누어지지 않는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죽음이란 자연의 일부인 ‘원자’로 돌아가는 것이고, 원자는 감각이 사라진 상태이므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죽음을 통해 ‘불멸’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죽음’을 긍정하는 플라톤과 불멸에 대한 갈망을 ‘고통’으로 보고, 그 고통을 제거시켜준다는 의미에서 ‘죽음’을 긍정하는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전혀 다른 관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의 죽음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현대인에게 죽음은 두려움이고 가능하면 피해야만 하는 부정적인 대상이다. 두 철학자를 통해 죽음에 대한 개념을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보게 된다.

  • 2023-10-14 23:54

    자연에 대한 탐구는 사람을 자랑하거나 허풍떨거나 교양을 과시하는 자로 만들지 않고, 자존심 있으며, 스스로 만족하고, 재산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장점을 자랑하는 자로 만든다.(p.30)

    몇 달 전 『쾌락』을 읽었을 때는 아타락시아에 흥미를 느꼈지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자연학에는 그다지 관심이 가지 않았었다. <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는 집중을 해서 읽어야 했고, 그럼에도 너무 재미가 없었고, 무식해서 과학적 사실 관계를 따질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사실 따진다는게 의미가 없는 일이기는 하다.) 그런데 에피쿠로스는 자연학에 관한 책을 37권이나 썼다. 그만큼 중요하게 여겼다는 반증이다.
    에피쿠로스가 자연학 탐구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궁극적으로 행복을 위해서였다.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지식들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자연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천체 현상과 신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자연학 탐구를 통해 증명하고자 했다. 그는 공포와 불안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데서 생긴다고 여겼다. 자연학 탐구는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을 얻는 길이었다.
    에피쿠로스는 천체의 본성이 어떤 것인지, 천체 현상이 생기는 원인은 무엇인지, 그리고 거기에는 여러 원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어떤 현상이 여러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음을 알고, 그 여러 방식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안다면 평정심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주의 본성에 관한 탐구는 아타락시아를 위한 것이다. 천체 현상은 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연법칙에 의한 것이다. ‘비이성적 믿음’, ‘근거 없는 상상’이 필요 없다. 원인은 여러 가지이기 때문에 가능한 모든 이론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번에 <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으면서 에피쿠로스의 자연학에 대한 탐구가 고통에서의 해방을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재 근거를 과학적 탐구에서 비롯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세계가 무한하다는 인식과 함께 원자의 운동을 알아야 존재하는 것들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태 그 자체를 보는 것에는 연습과 습관보다는 인식이 기여한다.”(p.40), “영혼이 감각의 주요한 원인”(p.74)이며 영혼 안에 있는 원자들의 운동 때문에 감각이 생겨난다고 하는데, 인간의 정신능력, 이성이라고 할 수 있는 인식능력을 원자에서부터 가져온다는 점에서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이 존재론 탐구에 있어서 중요한 기반이 되는 것 같다.

  • 2023-10-15 01:38

    p86 사람들의 마음 속에 괴로움이 생겨나는 이유는 신의 존재를 믿으며, 죽음을 두려워 하며, 아무 개념없는 마음의 상태에 의해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마음의 평안(아타락시아)은 이 모든 고통으로 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며 보편적이고 중요한 원인들을 계속 기억함을 뜻한다. p47 마음의 혼란으로부터의 자유, 어떤 욕망을 선택하고 어떤 욕망- 공허한 추측들-을 기피해야 하는지 잘 계산하는 일이다. p48 이 모든 것의 시작이자 가장 큰 선은 사려깊음이다. '사려깊고 아름답고 정의롭게 살지 않고서 즐겁게 사는 것은 불가능하며, 즐겁게 살지 않고서 사려깊고 아름답고 정의롭게 사는 것도 불가능하다. p49 사려깊은 사람은 우연을 신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비이성적인 방식으로 큰 성과를 이루는 것보다 이성적으로 숙고했으나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는 편이 낫다. p43 죽음이 아무것도 아니다. 죽으면 감각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산 사람에게는 아직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은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p44 잘 사는 것과 잘 죽는 것의 연습은 동일한 것이다. p45 우리는 미래가 우리의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완전히 우리 것이 아니지도 않다. 미래가 분명하게 올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되고 미래가 올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해서 완전히 기대를 버려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p 90 천체 현상에 대한 앎의 목적이 마음의 평안과 확고한 믿음 이외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p91 천체 현상이 우리 감각에 드러나는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p103 미신은 추방되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힌트를 얻기 위해 보이는 현상을 제대로 따라 간다면 미신은 제거될 것이다. 감각이 진리의 기준이다.

    p27-23 모든 우정은 그 자체로 바람직하다. -25 자연의 목적에 따라 평가한다면 가난은 큰 부이다. 반면 무제한적인 부는 큰 가난이다. p30-44 현자는 받기보다는 나눠주는 것을 더 잘 안다. 그가 발견한 자기 만족이라는 보물은 아주 크다 p35-78 고결한 사람은 현명함과 우정에 신경을 쓴다. 전자는 사멸하는 선이고 후자는 불멸하는 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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