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위’ 있는 학교에서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기 (모로)
문탁
2023-07-20 14:32
248
‘품위’ 있는 학교에서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기
모로
초등학교 4학년인 나의 아들은 아스퍼거 증후군이다. 고기능 자폐라고도 부른다. 인지나 생활에는 어려움이 없으나 사회성만 떨어지는 경우다. 거기에 상위 1%의 지능을 가진 영재이기도 하고, ADHD가 있고, 간혹 틱도 보인다. 이렇게 동시에 두 개의 특성을 가진 것을 2E(twice exceptional)라고도 하는데, 두 번의 예외라는 뜻이다. 2E들은 어느 집단에도 속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영재 집단에서는 비슷한 관심사를 만날 수 있지만, 소통이 잘되지 않는다. 장애 집단에서의 반복적인 행동 수정 교육은 흥미를 떨어트린다. 아이들은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 사이의 간극이 커서, 자랄수록 정신적인 문제가 두드러진다고 한다. 이렇다 보니 유치원 시절부터 초등학교에 이르기까지 난관의 연속이었다. 학교를 빠지는 건 기본, 단체 운동이나 학원은 다녀보지도 못했다.
학기 초에 공개수업을 했는데, 교실에서 만난 아이는 내 걱정보다 많이 자라있었다. 물론 수업 중간에 큰 소리로 “엄마 왔어?” 인사를 하고, 심지어 뭔가를 보여주겠다며 뒤에 서 있는 나에게 걸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선생님이 지시하는 것을 수행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고, 꽤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나의 눈에 띄는 것은 반 친구들의 태도였다. 아들은 다행히 여러 가지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인복이 있다. 쉬는 시간에도 몇몇 아이들이 몰려와 이것저것 말을 걸어주고, 대답을 안 하는 아들을 위해 서로 주고받는 손 하트를 날렸다. 수업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조별로 구성된 팀원들은 누가 시키기라도 한 양 우리 아이를 전담 마크하고 있었고, “지금은 이거 하는 거 아니지.”라며 단속시켰다. 아이들은 사려 깊었고 따뜻해 보였다. 크게 문제는 없는 평화로운 수업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속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아들은 아이들과 선생님의 배려로 ‘도와줘야 하는 아이’가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아들은 어느 날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교실에서 자꾸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되는 게 너무 힘들다고. 자기도 안 하고 싶은데 나도 모르게 그렇게 돼버리는 게 너무 힘들다며, 울었다.
야스퍼거 증후군을 앓았다고 알려져 있는 인물들
학교라는 구조. 그 속에서 장애가 되는 현실
확장된 구조적 의미에서의 억압이란 일상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미디어와 문화의 상투적 관념 속에서, 관료제 위계 체계와 시장 질서 속에서 – 즉, 보통의 일상생활 과정에서 – 선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종종 무의식적으로 지니는 이런저런 생각과 반응에서 야기된 결과물 때문에 일부 사람들이 겪는 극심한 부정의를 말한다. (『차이의 정치와 정의』 , p107)
누구보다 먼저 아이의 다름을 인지했고, 정신과 상담이나 진단에 두려워하지 않았다. 장애는 병이 아니다. 고칠 수가 없는 다름의 영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면 좀 다르긴 해도, 얼추 비슷하게 사람들과 섞여 살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처음 담임 선생님이 특수교육대상자 이야기를 했을 때, 장애 등록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무척 놀랐다. “우리 아이가 그 정도라고요? 일상생활은 무리 없이 할 수 있는데…. 이 정도면 괜찮은 거 같은데….” 라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내가 판단을 잘못한 걸까? 아니다. 돌이켜보니 그것은 구조의 문제였다. 나와 아들의 관계, 즉 가정에서의 생활은 불편함이 없다. 물론 키우기 힘들었고, 가끔은 둘이 싸우기는 하지만 대체로 친구 같은 사이좋은 모자다. 오히려 자기가 몰두하는 일에는 누구보다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 대화를 나누는 것이 즐겁다. 하지만 그건 가정주부인 내가 외동인 아이를 키우는 구조 속에서나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씩 천천히 알려주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일들이 24명의 학생이 모여있는 교실 안에서는 문제가 된다. 학교에서는 바르게 앉아서, 주어진 결과물을, 정해진 시간 안에 제출해야 하는 큰 산이 놓여있었고, 아들은 그런 걸 해내지 못한다. 게다가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에는 통 관심이 없다. 어릴 때부터 관심사가 한정적이라 그것을 넓혀주는데 노력했다. 국기에 관심을 가지면 지도를 들이밀고, 지도를 좋아하면 기호 책을 주고, 그러다 우주로, 화학으로 나아갔다. 물론 10번 시도하면 1~2번 성공할까 말까 했지만, 결국은 새로운 관심사를 찾아냈다. 자기가 흥미 있는 쪽으로 물꼬를 터주면 자연스레 흘러가는 아이다. 하지만 고정된 구조 속에 넣어놓고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자, 돌발 행동이 늘어났다.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고, 손발을 꿈틀거리고, 노래를 흥얼거렸다. 누가 봐도 ADHD다. 하지만 나에게 정말 흥미 없는 수업을 하루 4~5시간 동안 들으라고 시킨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아이를 보며 바퀴가 수백 톤인 커다란 자동차 같다는 생각을 한다. 처음에 자동차를 움직이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드는데, 일단 출발하면 스스로 잘 굴러간다. 그러다 가속도가 붙는 순간 어마어마하게 빨라지는 그런 차 말이다. 이런 아이들은 학교라는 구조 속에서 이해도 못 하고, 집중력도 약한 영락없는 장애아가 된다.
억압은 어디에서 오는가
아이리스 메리언 영의 『차이의 정치와 정의』에는 억압의 5가지 형태가 나온다. 억압은 착취, 주변화, 무력감, 문화 제국주의, 폭력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중에서 주변화란 노동 시스템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주변에 놓인 삶을 벗어나지 못하는 현상을 뜻한다. 주로 노인이나 직업이 없는 청년, 흑인, 싱글맘, 장애인 등이 이에 속한다. 가장 큰 문제는 본인의 삶을 주체적으로 꾸려가지 못한 채 타인의 보살핌에 의존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는 다른 억압의 모습인 무력화와도 이어진다. 이들은 점점 권한이나 권력을 가지지 못하게 되어 의사 결정의 범위가 좁아지는 이유로 무력화를 경험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아브젝트한 것’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집단에 근거한 두려움이나 혐오를 나타내는 행위 및 상호작용을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주체가 어떤 특정한 사안, 이미지, 환상 – 즉 혐오, 욕지기, 심란함으로 반응할 수 있는 어떤 공포스러운 것 – 을 맞닥뜨릴 때 갖게 되는 혐기와 역겨움의 감정이 바로 아브젝시옹이다. 아브젝트한 것은 혐오와 역겨움을 주는 동시에 매혹적이기도 하다. (『차이의 정치와 정의』 , 313p)
그렇다면 이러한 억압은 어디에서부터 만들어졌을까. 아브젝트하다는 것은 한 마디로 본능적인 혐오 같은 느낌이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배우지 않아도 자신의 배설물을 멀리한다. 그것은 더럽다는 인식 이전에 이미 배설된 것이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다시 내 몸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만들어진다. 아브젝트한 것들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를 통해 나 자신의 경계가 지켜지는 셈이다. 어쩌면 억울하다는 생각도 든다. 의식의 영역이 아닌 걸 어쩌란 말인가. 하지만 우리가 의식하든 아니든 그것은 자아와 타자를 만드는 경계를 짓고, 다시 구조화된다. 결국 그 경계가 사회적으로 결합하게 되면, 주체의 정체성과 불안으로 고정화된다.
영은 장애인 차별주의 역시 아브젝트한 것에 대한 경계 불안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노인이나 장애인을 만날 때, 우리는 자기 죽음과 직면하기 때문이다. 사실 나와 장애인은 다르지 않다. 누구나 장애를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무의식에서 타자라고 생각했던 차이가 사실은 나와 같은 것임을 인식하게 된다. 그것은 다시 나와의 구별을 만들기 위해 경계를 만든다.
이것은 품위 규범과도 이어진다. 품위는 사회 질서다. 과거 백인 부르주아 남성의 품위는 아직까지 우리의 뇌리에 남아서 영향력을 미친다. 이런 도식 속에서 유색인들은 도덕관념이 없고, 청결하지 않고, 자기 통제력이 결여된 존재로 본다. 장애 역시 눈으로 보기에 ‘품위’와는 거리가 멀다. 이들 집단의 그 어떤 특징은 종종 다른 사람들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불안, 초조감이나 혐오를 일으킨다. 장애 역시 자신의 신체에 묶여있을 수밖에 없다. 그 속에서 항상 자신의 품위를 입증해야 하는 어려움이 생긴다. 신체적으로 보이는 아이의 어려움 때문에 – 눈 맞춤의 어려움,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집중력 문제, 자기 관심사에만 몰두하는 성향 등 – 아들 역시 학교 내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품위를 입증해야 한다. 거기에서부터 억압이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품위’를 깨트릴 수 있을까? 무의식 안에 숨어있는 구조 자체를 변화시키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 무의식적인 차별에서 당당하지 못하다. 혼자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였다. 모르는 흑인 남성과 둘이 엘리베이터 안에 남겨지자, 나도 모르게 벽 쪽으로 몸을 밀어붙인 채 힐끔거렸다. 또한, 휠체어를 타고 가는 사람이나 신체장애인들을 ‘쳐다보게’ 되는 문제가 있다. 그게 혹은 도와주고 싶은 마음일지라도 그 마음 안에는 차별이 존재한다.
서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
우리가 서로의 삶을 지켜내기 위해 애쓰는 이유는, 각자의 삶보다 먼저 있으면서 각자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유대관계 안에 우리가 이미 하나로 묶여있다는 데 있다. 나의 삶은 상대방의 삶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수 없고, 판타지는 사회적 삶과 그런 식으로 맞물려 있다. (『비폭력의 힘』 , 123p)
주디스 버틀러는 『비폭력의 힘』에서 상호의존성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혼자서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다. 살아가기 위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버틀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을 대입가능성의 예를 들고 와서 설명한다. 우리는 종종 저 사람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 혹은 폭력적인 생각을 한다. 동시에 내가 이렇게 행동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 역시 나에게 이러한 행동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한다. 다른 사람을 향한 공격성이 사실 나 자신을 향한 공격성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그 행위를 멈출 수 있다. 이로써 나의 삶과 다른 삶이 서로의 자리에 대치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둘 간의 철저한 분리가 불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도덕감을 만들고 다른 사람을 지켜내기 위한 토대가 된다.
버틀러는 멜라닌 클라인의 『사랑, 죄책감, 보상』이라는 책을 들고 와서 논의를 구체화한다. 이 책에서는 사랑과 미움의 역학을 개인심리학과 사회심리학의 수렴점으로 보고 있다. 다른 사람과의 진정한 공감은 과거 양육자에게서 받았거나, 받고 싶었던 판타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하거나 동일시할 때 양육자에게 느꼈던 방식을 떠올리게 된다. 좋은 양육자 연기를 통해 우리가 받은, 혹은 받지 못했지만 지나버린 시절을 보상한다. 어린 시절의 아이를 떠올려본다. 눈만 마주쳐도 까르르 웃던 미소, 꼬물꼬물 밥을 먹는 볼때기, 정수리의 냄새까지 사랑스러웠던 그 시절. 양육자로부터 받았던 사랑, 혹은 받지 못했던 사랑들이 우리 모두에게 남아있다. 이를 보상해주는 것이 사랑의 근본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고 있을 때, 나는 나 자신에게 보상하는 것과 같다. 이는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려는 노력 속에 들어있는 자기중심적인 무언가다. 사랑하면서 동시에 미워하는 복잡한 인과관계 속에서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는 발판을 만든다. 버틀러는 우리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타인과 나의 경계가 옅어지는 경험을 통해서만 변화의 기초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타인을, 더 나아가서 나라를, 우주를 세상 만물 전체를 나로 인식한다면,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면, 우리는 조금 달라질 수 있을까.
아이의 장애가 무대 위에 서는 순간
통행하기 위해, 음식을 먹기 위해, 숨을 쉬기 위해 지지기구를 필요로 하는 것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만이 아니다. 인간의 이 모든 기본적 기능은 저마다 모종의 지지가 있어야 유지될 수 있다. (『비폭력의 힘』 , 60p)
나는 아이에 대해 양가감정을 가진다. 아이에겐 능력과 재능이 있다. 동시에 누구나 볼 수 있는 발달적인 문제가 있다. 글을 쓰면서 나 역시도 영재성을 원하고, 장애는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느꼈다. 그 두 개는 다르지 않다. 그 속에서 어떤 것만 발전시키고 어떤 것만 소장시킬 순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두렵다. 고통스럽게도, 장애인 중에서 가장 높은 사망률을 보이는 것이 자폐인이다. 자폐인들의 평균 수명은 고작 24살 정도다. 많은 사람이 자살로 생을 마무리한다. 이런 배치 속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난 후, 아이를 잃게 될까 봐. 분명히 빛나는 부분이 있었는데, 결국 좌절하게 되는 건 아닐지가 무섭다. 그래서 나는 홈스쿨링을 고민한다. 나라면 이 아이 하나는 어떻게든 행복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이 좋아하는 길을 만들어 줄 수 있지 않을까. 한편으론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아이를 숨기는 것이 더 편해서 그런 걸까를 반성한다. 아이의 장애는 아이 스스로가 힘든가. 보는 내가 더 힘든가. 어렵다. 고민만 하다 모든 걸 놓치게 될 것만 같다. 하지만 방법은 없다. 중요한 건 장애냐 영재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양가감정 속에서 고민하는 것, 그리고 아이의 든든한 지지기반이 되어주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아닐까.
며칠 전에 아이는 갑자기 2학기 반장선거에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제껏 반장선거를 하면 입후보는커녕 종이에 친구 이름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놀랐다. 자신이 해본 적이 없는 일이라서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러면서도 0표를 받으면 어쩌냐고 걱정을 했다. 나는 그럴 일은 없다고, 자신의 이름을 쓰면 무조건 1표는 받게 되니 걱정하지 말고 나가보라고 했다. 아이가 반장이 되는 일은 어려울 것이다. 그것보다도 2학기가 되면, 아니 막상 당일이 되면 앞에 나가서 한마디도 못 하고 내려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는 것만으로도, 아이의 장애가 무대 위에 서는 그 순간이 가장 큰 변화다. 그 속에서 아이는 천천히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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