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약방 에세이
      치유의 본능을 깨우자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_ 고미숙     김은영         1. 『동의보감』은 삶의 비전서다   저자, 고미숙은 40대에 생긴 종양의 치료법이 수술밖에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들었지만, 수술 없이 스스로 종양을 감당해 보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먼저, 병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된다. 대체 병이 왜 생겨났을까, 원인이 무엇일까, 그런데 그 원인은 또 어디서 온 것인지, 그리고 왜 하필 그 병일까 등등. 질문이 다시 새로운 질문으로 이어졌고, 병에 대한 질문은 결국 나의 몸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병은 귀찮은 불청객이 아니라 나와 몸을 이어주는 메시지임을 깨닫게 된다. 이는 공동체 안에서의 ‘몸들’에 대한 탐구로 연결되었고, 『동의보감』과 접속하게 되면서, 이제까지의 ‘앎’들이 재배치되어 연결되는 ‘운명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인식론 안에서 몸은 그 자체로 생명이고 자연이며, 우주와 연결되는 하나의 세계임을 알게 되었고, 몸을 치유하는 것은 삶을 치유하는 일과 같음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동의보감』은 질병과 치료에 국한되는 의서가 아니다. 알려진 대로 『동의보감』은 선조의 명으로 편찬되었고, 약이나 침으로 하는 치료 보다 수양을 우선시 하라는 특급 요청이 그 중심 내용을 이루며, 무엇보다 그 기저에는 중국 의학사의 엑기스가 깔려있다. 『동의보감』이 의서를 넘어 생명과 자연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는 텍스트임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내경편]의 첫 장에 등장하는 ‘신형장부도’와 손진인의 멘트를 들 수 있다.   신형장부도란 몸의 형태와 오장육부를 그린...
      치유의 본능을 깨우자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_ 고미숙     김은영         1. 『동의보감』은 삶의 비전서다   저자, 고미숙은 40대에 생긴 종양의 치료법이 수술밖에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들었지만, 수술 없이 스스로 종양을 감당해 보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먼저, 병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된다. 대체 병이 왜 생겨났을까, 원인이 무엇일까, 그런데 그 원인은 또 어디서 온 것인지, 그리고 왜 하필 그 병일까 등등. 질문이 다시 새로운 질문으로 이어졌고, 병에 대한 질문은 결국 나의 몸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병은 귀찮은 불청객이 아니라 나와 몸을 이어주는 메시지임을 깨닫게 된다. 이는 공동체 안에서의 ‘몸들’에 대한 탐구로 연결되었고, 『동의보감』과 접속하게 되면서, 이제까지의 ‘앎’들이 재배치되어 연결되는 ‘운명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인식론 안에서 몸은 그 자체로 생명이고 자연이며, 우주와 연결되는 하나의 세계임을 알게 되었고, 몸을 치유하는 것은 삶을 치유하는 일과 같음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동의보감』은 질병과 치료에 국한되는 의서가 아니다. 알려진 대로 『동의보감』은 선조의 명으로 편찬되었고, 약이나 침으로 하는 치료 보다 수양을 우선시 하라는 특급 요청이 그 중심 내용을 이루며, 무엇보다 그 기저에는 중국 의학사의 엑기스가 깔려있다. 『동의보감』이 의서를 넘어 생명과 자연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는 텍스트임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내경편]의 첫 장에 등장하는 ‘신형장부도’와 손진인의 멘트를 들 수 있다.   신형장부도란 몸의 형태와 오장육부를 그린...
문탁
2023.09.11 | 조회 374
인문약방 에세이
      『동의보감』으로 새롭게 보는 질병과 양생   지현       1.앞만 보고 달리다가 고꾸라지다   나의 통증연대기는 서른일곱 살에 심각한 요통이 찾아오면서 시작됐다. 퇴사를 하고 정형외과와 한방병원 등을 전전한 끝에 통증은 경감됐지만 그때를 기점으로 다양한 병증이 발현됐다. 술이나 커피는 물론 홍차, 녹차, 심지어 초콜릿을 먹어도 밤에 잠을 못 잘 정도로 카페인에 민감해졌다. 고춧가루가 든 음식을 먹으면 밤에 잘 때 땀을 많이 흘리는 바람에(도한) 김치나 라면도 먹을 수가 없었다.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피부에 뭐가 나거나 두통이 생기곤 했다. 햇볕을 많이 쬐거나 과로를 하면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렸고, 말을 좀 많이 하면 확 까부라졌다. 9 to 6의 노동을 감당할 수 없는 몸이 돼 버렸다.   만일 40대 중후반에 몸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30대 중반이었던 나는 그걸 받아들이기엔 아직 젊었다. 활동가로서 부조리한 세상을 바꿔야 하는데, 더 많은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전문가로 성장해야 하는데... 발만 동동 굴렀다. 한창 자기 분야에서 입지를 쌓아가고 있는 친구들이나 옛 동료들을 보면 부러움과 질투심에 속이 시끄러웠다. 몸, 몸, 몸. 이놈의 몸이 원흉이었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한 번도 제대로 마주한 적 없는 이 ‘몸’이라는 녀석. 당시 나에게 ‘몸’은 내가 사고 싶은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었다.   누구나 살면서 크고 작은 장애물을 만나는데 나에겐 그게 몸이었다. 지난...
      『동의보감』으로 새롭게 보는 질병과 양생   지현       1.앞만 보고 달리다가 고꾸라지다   나의 통증연대기는 서른일곱 살에 심각한 요통이 찾아오면서 시작됐다. 퇴사를 하고 정형외과와 한방병원 등을 전전한 끝에 통증은 경감됐지만 그때를 기점으로 다양한 병증이 발현됐다. 술이나 커피는 물론 홍차, 녹차, 심지어 초콜릿을 먹어도 밤에 잠을 못 잘 정도로 카페인에 민감해졌다. 고춧가루가 든 음식을 먹으면 밤에 잘 때 땀을 많이 흘리는 바람에(도한) 김치나 라면도 먹을 수가 없었다.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피부에 뭐가 나거나 두통이 생기곤 했다. 햇볕을 많이 쬐거나 과로를 하면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렸고, 말을 좀 많이 하면 확 까부라졌다. 9 to 6의 노동을 감당할 수 없는 몸이 돼 버렸다.   만일 40대 중후반에 몸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30대 중반이었던 나는 그걸 받아들이기엔 아직 젊었다. 활동가로서 부조리한 세상을 바꿔야 하는데, 더 많은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전문가로 성장해야 하는데... 발만 동동 굴렀다. 한창 자기 분야에서 입지를 쌓아가고 있는 친구들이나 옛 동료들을 보면 부러움과 질투심에 속이 시끄러웠다. 몸, 몸, 몸. 이놈의 몸이 원흉이었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한 번도 제대로 마주한 적 없는 이 ‘몸’이라는 녀석. 당시 나에게 ‘몸’은 내가 사고 싶은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었다.   누구나 살면서 크고 작은 장애물을 만나는데 나에겐 그게 몸이었다. 지난...
문탁
2023.09.11 | 조회 203
인문약방 에세이
      몸 = 신체 + 정신 + 자연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를 읽고     김지영     1. 한의학, 친근하지만 관심은 없습니다   동의보감은 총 25권(번역본은 총 2,500쪽)에 달한다고 한다. 분량에서부터 엄청나게 방대한 의서라는 것을 알게 한다. 내 또래에서 동의보감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1999년 방영돼 국민드라마 반열에 오른 <허준>을 통해 애민정신이 넘치는 명의가 불굴의 의지로 완성시킨 한의학의 자랑스런 유산으로,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한 그 의서 아닌가. 그렇게 친근했지만 나는 동의보감을 읽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세계기록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이나 의궤 등은 한번쯤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같은 기록유산인 동의보감은 그렇지 않았다. 한의학 전공자가 아닌 내가 의서를 본다한들 이해나 할 수 있을까? 침술을 익힐 수 있는 것도 아닐테고 어디에 써먹는다고 그걸 읽겠나? 바탕엔 이런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의서는 그렇다치고 한의원은 나와 얼마나 가까운가? 한의원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보약이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서 자란 나는 성장기에 보약 한 첩 먹어본 기억이 없다. 어린 시절 한의원 이미지는 보약 짓는 곳, 부자들의 구역이었다. 내가 한의원 문턱을 처음 넘은 건 서른을 훌쩍 넘었을 때로 기억한다. 딱히 아픈 곳은 없었지만 나도 이제 보약 한 재 지어 먹을 정도는 된다는 생각으로 한의원에 갔다. 맥을 짚은 후 한의사는 내 체질에 대해 설명해주었는데, 무슨 체질이라고 했는지 지금은 까먹었다. 그 때 먹은 보약이...
      몸 = 신체 + 정신 + 자연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를 읽고     김지영     1. 한의학, 친근하지만 관심은 없습니다   동의보감은 총 25권(번역본은 총 2,500쪽)에 달한다고 한다. 분량에서부터 엄청나게 방대한 의서라는 것을 알게 한다. 내 또래에서 동의보감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1999년 방영돼 국민드라마 반열에 오른 <허준>을 통해 애민정신이 넘치는 명의가 불굴의 의지로 완성시킨 한의학의 자랑스런 유산으로,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한 그 의서 아닌가. 그렇게 친근했지만 나는 동의보감을 읽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세계기록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이나 의궤 등은 한번쯤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같은 기록유산인 동의보감은 그렇지 않았다. 한의학 전공자가 아닌 내가 의서를 본다한들 이해나 할 수 있을까? 침술을 익힐 수 있는 것도 아닐테고 어디에 써먹는다고 그걸 읽겠나? 바탕엔 이런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의서는 그렇다치고 한의원은 나와 얼마나 가까운가? 한의원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보약이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서 자란 나는 성장기에 보약 한 첩 먹어본 기억이 없다. 어린 시절 한의원 이미지는 보약 짓는 곳, 부자들의 구역이었다. 내가 한의원 문턱을 처음 넘은 건 서른을 훌쩍 넘었을 때로 기억한다. 딱히 아픈 곳은 없었지만 나도 이제 보약 한 재 지어 먹을 정도는 된다는 생각으로 한의원에 갔다. 맥을 짚은 후 한의사는 내 체질에 대해 설명해주었는데, 무슨 체질이라고 했는지 지금은 까먹었다. 그 때 먹은 보약이...
문탁
2023.09.11 | 조회 175
인문약방 에세이
    복직과 두려움, 떨쳐낼 수 있을까?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리뷰       박정은       1.작은 갈등도 없기를 바라는 마음   일주일 뒤에 5년간 휴직이 끝나고 출근을 한다. 어제 개학준비로 학교에 가서 동료교사들의 말을 들어보니 민원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도시학교보다 시골학교는 상대적으로 덜하지만 5년 전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학생과도 잘 지내야 하는데 학부모는 더 큰 고민으로 보였다. 학부모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게 민원이 발생하지 않는데 중요해보였다. 학생에 대해 보이는 대로 말을 하면 불쾌해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어떤 자세로 학교로 돌아가야 할까.   복직을 앞두고 참 마음이 편안하지 못한데 그 이유가 뭘까? 갈등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관계에서 갈등은 생기기 마련인데 그것조차 인정하고 싶지 않다. 오직 완전무결하게 평안하기만을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작은 갈등에도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다. 왜 사건이 발생하고 생기는 감정들을 가볍게 털어버리지 못할까. 감정들을 꽁꽁 싸매고 행여 흩어질까 재차 확인하고 묶어둔다. 산다는 것이 사건의 연속인데 다음 사건이 일어나면 앞서 묵혀둔 감정 위에 새로 생긴 감정을 덧씌운다. 점점 몸과 마음이 무거워져 천근만근이다. 그러다보면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오기를 날짜만 새고 있는 자신을 볼 수 있다.   담임인 나조차도 학교를 즐겁게 다닐 수 없는데 아이들한테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말이 안 된다. 사건의 연속 속에서 가볍게, 즐겁게 학교에 다닐 수 있는 방법은 있을까. <동의보감> 속에서 지금 나의 두려움을...
    복직과 두려움, 떨쳐낼 수 있을까?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리뷰       박정은       1.작은 갈등도 없기를 바라는 마음   일주일 뒤에 5년간 휴직이 끝나고 출근을 한다. 어제 개학준비로 학교에 가서 동료교사들의 말을 들어보니 민원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도시학교보다 시골학교는 상대적으로 덜하지만 5년 전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학생과도 잘 지내야 하는데 학부모는 더 큰 고민으로 보였다. 학부모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게 민원이 발생하지 않는데 중요해보였다. 학생에 대해 보이는 대로 말을 하면 불쾌해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어떤 자세로 학교로 돌아가야 할까.   복직을 앞두고 참 마음이 편안하지 못한데 그 이유가 뭘까? 갈등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관계에서 갈등은 생기기 마련인데 그것조차 인정하고 싶지 않다. 오직 완전무결하게 평안하기만을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작은 갈등에도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다. 왜 사건이 발생하고 생기는 감정들을 가볍게 털어버리지 못할까. 감정들을 꽁꽁 싸매고 행여 흩어질까 재차 확인하고 묶어둔다. 산다는 것이 사건의 연속인데 다음 사건이 일어나면 앞서 묵혀둔 감정 위에 새로 생긴 감정을 덧씌운다. 점점 몸과 마음이 무거워져 천근만근이다. 그러다보면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오기를 날짜만 새고 있는 자신을 볼 수 있다.   담임인 나조차도 학교를 즐겁게 다닐 수 없는데 아이들한테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말이 안 된다. 사건의 연속 속에서 가볍게, 즐겁게 학교에 다닐 수 있는 방법은 있을까. <동의보감> 속에서 지금 나의 두려움을...
문탁
2023.09.11 | 조회 185
몸의 일기
        해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국을 탈주한 퀴어다. 판에 박힌 일상과 화폐 증식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버스 한 대 다니지 않았던 시골 벽지 동네에 자랐다. 어릴 적 우리 집은 그 동네에서도 매우 가난한 축이었다.  부모임이 어떤 사건으로 인해 허리띠를 졸라 모아 놓은 전 재산을 하루 아침에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우리 집은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큰 부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가진 건 아니지만 난 성인이 되어서도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될까 겁이 났다. 아버지와는 한번도 대화해 본 기억이 없다. 평소엔 내가 납득하기 어려운 사소한 일에 윽박을 지르거나 술을 마시고 나면 자살하겠다고 농약병을 찾아 공포에 떨어야 했다. 아프다고 하면 혼이 났기에 몸이 불편해도 눈치를 보며 숨겨야 했다.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나는 성적 지향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분명하게 인지하게 되었다. 당시엔 게이라는 말조차 생경했고 성소수자라는 단어도 없었다. 얼마 전 한국 게이들 사이에서 유행했다는 웃픈 농담이 기억난다. 본인이 성소수자라는 걸 처음 인지했을 때 세상에 본인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 홍석천과 자신, 그 둘밖에 없는 것으로 알았다는 것이다. 홍석천이 나와 비슷한 나이이고 그가 일종의 아웃팅으로 동성애자로 알려진 게 서른이 되어서였다. 당시 나처럼 시골에서 자란 성소수자는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모를 수밖에 없었다. 내 감정이 나에겐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다.      영화 <클로즈> 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알아볼 수 없도록 벽을 조금씩 쌓았다. 최선을 다해 튼튼하게 쌓는 게 목표였다. 나를 드러내야 하는 자리를 피했다. 사람들과의 자리에서는 어떤 말을 하기 전 자기 검열을 해야 했고 행동도 조심스러웠다. 나를 오픈했을 경우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압력을  견디어 낼 자신이 없었기에 벽장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내 자아가 벽장 안에 축소되어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그 근저에는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난, 아버지, 이성애만이 “존재”하는 세상, 이 모두가 나를 움츠려 들게 했다. 두려움이란 감정 때문에 힘들었고 그 원인은 모두 잘못된 시대와 나라에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두려움은 내 괴로움의 원천이었다. 이를 극복하고 싶었다. 하지만 스스로 넘어서기에 너무 높다란 벽과 같은 것이었다.       약 이 년 전 두려움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다. 당시 나는 동양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이곳 미국에서의 생활이 내게 많은 자유를 안겨주기도 했지만 두려움과 자의식이 나를 여전히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코로나로 인해 한국 인문학 공동체 강의가 온라인으로 열렸고 거기서 명리학의 기초적인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내 사주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난민인권센터 2014. 8. 21       나는 천간은 계수(癸水)이고 지지는 해수(亥水)인 계해(癸亥) 일주이다. 거기다 동짓달에 태어났으니 차가운 얼음장 아래로 졸졸 흐르는 시냇물의 기운이 내 안에 잠재되어 있다. 월지 또한 자수(子水)이니 내 안은 온통 물기운으로 치성하다. 계해 일주는 성실함과 융통성을 무기로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으며 천천히 전진하는 타입이다. 해수는 역마의 기운을 품고 있어 해외로 나갈 가능성 또한 품고 있다.  나처럼 수렴의 기운이 강한 사주는 자의식과 망상이 강하게 나타날 수 있다. 과잉 해석을 하기 쉽고 사소한 것도 감추고 자신의 속내를 잘 드러내려 하지 하는 속성도 가지고 있다.  이럴 경우 생명력을 발산하고 자기를 표현하는 능력인 식상(食傷)에 해당하는 봄의 기운이 필요하다. 하지만 난 목(木)기운, 즉 식상이 전혀 없다. 따라서 내 사주는 융통성, 꾸준함, 요령 등을 갖춘 반면 순환이 잘 되지 않아 속을 알기 어렵다. 또 남들에게 음흉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이렇게 펼쳐진 내 사주를 보고 흠칫 놀랐다. 나의 내향성, 성실함, 말재주와 표현력의 빈곤, 자의식 과잉, 협소한 인간관계 등이 내 안에 내재해 있었다니. 거기다 역마의 기운은 미국으로의 이주에 일조를 했을려나. 사주를 해석하고 나서 내 팔의 잔털들이 쭈뼛 세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때까지 내가 굳게 믿어왔던 두려움에 대한 해석이 틀리지는 않지만 협소했을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를 괴롭혀왔던 두려움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게 되었다.      앞으로 이어질 다섯 편의 글을 통해 내가 두려움을 대했던 방식을 돌아보려고 한다. 자유로워지기 위해 좀더 큰 도시로, 그리고 미국으로 이주를 했던 과정을 차근히 짚어보면서 나를 지배했던 두려움을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해 보려고 한다. 궁극적으로는 이 글을 통해 두려움을 어떻게 수용할지를 탐구하고 싶다.  다음 편에서는 어릴 적 경험한 난관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시도한 “탈주”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해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국을 탈주한 퀴어다. 판에 박힌 일상과 화폐 증식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버스 한 대 다니지 않았던 시골 벽지 동네에 자랐다. 어릴 적 우리 집은 그 동네에서도 매우 가난한 축이었다.  부모임이 어떤 사건으로 인해 허리띠를 졸라 모아 놓은 전 재산을 하루 아침에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우리 집은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큰 부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가진 건 아니지만 난 성인이 되어서도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될까 겁이 났다. 아버지와는 한번도 대화해 본 기억이 없다. 평소엔 내가 납득하기 어려운 사소한 일에 윽박을 지르거나 술을 마시고 나면 자살하겠다고 농약병을 찾아 공포에 떨어야 했다. 아프다고 하면 혼이 났기에 몸이 불편해도 눈치를 보며 숨겨야 했다.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나는 성적 지향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분명하게 인지하게 되었다. 당시엔 게이라는 말조차 생경했고 성소수자라는 단어도 없었다. 얼마 전 한국 게이들 사이에서 유행했다는 웃픈 농담이 기억난다. 본인이 성소수자라는 걸 처음 인지했을 때 세상에 본인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 홍석천과 자신, 그 둘밖에 없는 것으로 알았다는 것이다. 홍석천이 나와 비슷한 나이이고 그가 일종의 아웃팅으로 동성애자로 알려진 게 서른이 되어서였다. 당시 나처럼 시골에서 자란 성소수자는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모를 수밖에 없었다. 내 감정이 나에겐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다.      영화 <클로즈> 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알아볼 수 없도록 벽을 조금씩 쌓았다. 최선을 다해 튼튼하게 쌓는 게 목표였다. 나를 드러내야 하는 자리를 피했다. 사람들과의 자리에서는 어떤 말을 하기 전 자기 검열을 해야 했고 행동도 조심스러웠다. 나를 오픈했을 경우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압력을  견디어 낼 자신이 없었기에 벽장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내 자아가 벽장 안에 축소되어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그 근저에는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난, 아버지, 이성애만이 “존재”하는 세상, 이 모두가 나를 움츠려 들게 했다. 두려움이란 감정 때문에 힘들었고 그 원인은 모두 잘못된 시대와 나라에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두려움은 내 괴로움의 원천이었다. 이를 극복하고 싶었다. 하지만 스스로 넘어서기에 너무 높다란 벽과 같은 것이었다.       약 이 년 전 두려움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다. 당시 나는 동양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이곳 미국에서의 생활이 내게 많은 자유를 안겨주기도 했지만 두려움과 자의식이 나를 여전히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코로나로 인해 한국 인문학 공동체 강의가 온라인으로 열렸고 거기서 명리학의 기초적인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내 사주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난민인권센터 2014. 8. 21       나는 천간은 계수(癸水)이고 지지는 해수(亥水)인 계해(癸亥) 일주이다. 거기다 동짓달에 태어났으니 차가운 얼음장 아래로 졸졸 흐르는 시냇물의 기운이 내 안에 잠재되어 있다. 월지 또한 자수(子水)이니 내 안은 온통 물기운으로 치성하다. 계해 일주는 성실함과 융통성을 무기로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으며 천천히 전진하는 타입이다. 해수는 역마의 기운을 품고 있어 해외로 나갈 가능성 또한 품고 있다.  나처럼 수렴의 기운이 강한 사주는 자의식과 망상이 강하게 나타날 수 있다. 과잉 해석을 하기 쉽고 사소한 것도 감추고 자신의 속내를 잘 드러내려 하지 하는 속성도 가지고 있다.  이럴 경우 생명력을 발산하고 자기를 표현하는 능력인 식상(食傷)에 해당하는 봄의 기운이 필요하다. 하지만 난 목(木)기운, 즉 식상이 전혀 없다. 따라서 내 사주는 융통성, 꾸준함, 요령 등을 갖춘 반면 순환이 잘 되지 않아 속을 알기 어렵다. 또 남들에게 음흉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이렇게 펼쳐진 내 사주를 보고 흠칫 놀랐다. 나의 내향성, 성실함, 말재주와 표현력의 빈곤, 자의식 과잉, 협소한 인간관계 등이 내 안에 내재해 있었다니. 거기다 역마의 기운은 미국으로의 이주에 일조를 했을려나. 사주를 해석하고 나서 내 팔의 잔털들이 쭈뼛 세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때까지 내가 굳게 믿어왔던 두려움에 대한 해석이 틀리지는 않지만 협소했을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를 괴롭혀왔던 두려움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게 되었다.      앞으로 이어질 다섯 편의 글을 통해 내가 두려움을 대했던 방식을 돌아보려고 한다. 자유로워지기 위해 좀더 큰 도시로, 그리고 미국으로 이주를 했던 과정을 차근히 짚어보면서 나를 지배했던 두려움을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해 보려고 한다. 궁극적으로는 이 글을 통해 두려움을 어떻게 수용할지를 탐구하고 싶다.  다음 편에서는 어릴 적 경험한 난관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시도한 “탈주”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문탁
2023.09.08 | 조회 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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