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철학에서 '트란스첸덴탈'의 번역에 대해-1

세븐
2024-02-18 22:44
215

 칸트 철학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용어 중 대표적인 게 트란스첸덴탈(독일어 transzendental.영어 tranascendental)입니다.
 철학학교 세미나에서 올해 읽게 될 3비판서 중 첫 번째인 <순수이성비판>(백종현 역.아카넷)에서는 이 단어를 '초월적'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칸트철학을 설명하는 '초월철학'에도 이 '트란스첸덴탈'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칸트 책에서 트란스첸덴탈은 무려 948회나 등장한다고 합니다.
단어 사용 빈도를 볼 때 트란스첸덴탈이 칸트 철학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짐작케 합니다.
트란스첸덴탈은 A판(1판)에서 318회, B판(2판)에서 503회 등 합해서 821회 사용됐습니다.
이어 <순수이성비판>의 해설서격인 <형이상학서설> 23회, <실천이성비판> 16회, <판단력비판> 36회, 기타 47회 등입니다.

 

세미나 텍스트인 <순수이성비판>과 다른 텍스트인 <형이상학서설>(이상 아카넷)에서 번역자인 백종현 교수가 이 단어를 규정한 걸 보면 트란스첸덴탈의 뜻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대상들이 아니라, 대상들 일반에 대한 우리의 선험적(아프리오리.a priori) 개념들을 다루는 모든 인식을 초월적(트란스첸덴탈.transzendental)이라고 부른다. 그러한 개념들의 체계는 '초월(트란스첸덴탈) 철학'이라 일컬어질 것이다."(A판 서론 211p)

 

"나는 대상들이 아니라 대상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방식을 이것이 선험적으로 가능하다고 하는 한에서 일반적으로 다루는 모든 인식을 초월적(트란스첸덴탈)이라 부른다."(B판 서론 233p)

 

"우리 인식의 사물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단지 인식능력과의 관계만을 의미하는 초월적(트란스첸덴탈)이라는 말'(<형이상학서설> 180p)

 

 

위의 인용에서처럼 트란스첸덴탈은 대상들이 아니라 대상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 방식을 선험적으로 다루는 방식 또는 모든 경험 이전에 놓인 경험의 조건들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문제는 이 '트란스첸덴탈'이라는 독일어 단어를 놓고 '초월적'과 '선험적'이라는 번역어가 첨예하게 대립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엣센스 독한사전(민중서림)이 두 번역어를 동시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transzental(트란스첸덴탈)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①(스콜라학파에서) 초월적인 ②(칸트 철학에서) 선험적인으로 규정돼 있습니다.
초월적과 선험적이 동시에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 단어는 1세대 칸트 철학자인 최재희(1914~1984) 전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가 <순수이성비판>(박영사)에서 '선험적'으로 번역해 초창기에는 대세로 사용됐습니다.

 

그러나 최재희 교수의 뒤를 이은 백종현(1950~)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가 2006년 출간한 <순수이성비판>(아카넷)에서 '초월적'으로 트란스첸덴탈을 새롭게 번역하면서 논쟁의 단초를 제공했습니다.

 

수면 아래의 번역어 논쟁이 폭발한 건 2019년 10월 4일 한국칸트학회가 한길사를 통해 펴낸 <칸트전집> 1차분 3권 출간 기념 기자 간담회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이충진 칸트학회 회장은 "이번 전집은 칸트학회가 공인하는 번역서"라면서 "번역어가 통일되지 않아 그동안 학회에서 혼란이 많았는데 학회가 번역어를 정함으로써 통일된 용어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며 전집 발간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칸트학회는 트란스첸덴탈을 최재희 교수와 같은 '선험적'으로 번역했고, 이는 백종현 교수의 초월적과 번역어 경쟁 체제를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학회는 한 발 나아가 "백종현 교수의 번역본은 가독성면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건 칸트 연구자들 모두가 하는 이야기다. 이번 전집은 철학 미전공자가 읽도록 가독성을 높였다"며 백 교수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이에 백 교수가  즉각 반발했고, 이는 한겨레신문을 통해 12차례에 걸친 번역어 논쟁이 시작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이어 백 교수가 칸트학회 임원진의 사과와 사퇴를 요구하는 등 번역어 논쟁은 감정싸움으로까지 번졌습니다.

 

특히 트란스첸덴탈이라는 단어는 비슷한 뜻의 라틴어 아프리오리(a priori), 트란스첸덴트(transzdent)의 번역어와도 맞물려 있어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인 상황입니다.
백 교수는 아프리오리를 '선험적'으로, 트란스첸덴트를 '초험적'으로 각각 번역하고 있습니다.
반면 칸트학회는 아프리오리를 그대로 음차해 사용하고, 트란스첸덴탈과 트란스첸덴트를 '선험적'과 '초험적'으로 각각 옮기고 있습니다.

 

우리 세미나에서는 백종현 교수의 책을 텍스트로 사용하는 만큼 그것에 따라 읽으면 될 것입니다.
다만, 다른 번역어를 사용하는 책을 읽을 때는 그 단어의 의미에 집중하면 좋을 듯합니다. 

다음 편에서는 번역어 논쟁의 쟁점을 살펴보겠습니다.

댓글 1
  • 2024-02-18 22:57

    보충 보강 낑왕짱 세븐샘 감사합니다. 세미나때 하신 약속을 이리 지켜주십니다. 독자 입장에서야 여러 번역본을 접할 수 있는게 복일테고 더더군다나 칸트의 경우라면 이런 논쟁은 지켜보는 맛도 있었습니다. 다만 칸트협회판 순수는 기약이 없다하니 아쉬울 따름입니다. 세미나때 말씀드린 것처럼 백종현 교수판이 읽는 맛이 나는 부분도 있지만, 읽는 이의 심기를 건드리기도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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