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라의 암 이야기3> 수술이 가장 쉬웠어요

문탁
2023-04-19 09:35
240

 

 

 

 

 

 

 

노라

얼마나 놀기 좋아하면...ㅎㅎ..

문탁의 터줏대감이다. 모르는게 있으면 나에게^^

 

 

 

항암 중 ‘잘 먹어야 한다!’는 꼭 지켜야 하는 암환자 수칙이다. 그러다 5차쯤 되니 꾀가 생겼다. 항암하고 3주째는 어쨌든 몸이 회복되더라는 기억을 가지고 있던 나는 5차, 6차 때 먹는 것을 소홀히 해 버렸다. 몸은 회복되지 않았다! 기력은 거의 바닥이었고 이러다간 수술도 못 받을까 걱정 될 지경이었다. 이전에 항암 하시던 아빠가 뭐 드시라 할 때마다 짜증을 내셨는데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겪어봐야 알게 된다! 설상가상 항암제 부작용으로 손톱이 곪고 빠졌다. 마치 백설공주에게 독 사과를 권하던 마귀할멈 손톱처럼 검게 되었다. “더 늦었으면 큰일 날 뻔 했지요?” 심각한 표정으로 치료하던 외과의사에게 물었다. 대답은 “이미 많이 늦으셨어요.” 데쟈뷰다! 처음 검사한 유방외과에서 한 질문이 “혹시 심각한가요?”였다. 그 때 대답도 “예. ……”

 

 

항암 중 나는 문탁 친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특히 이 병을 미리 거쳐 간 바람님과 간호사였던 달팽이, 여여님과 상의했다. 어느 병원에 가야 할지,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언제 마음이 아픈지, 문탁 친구들은 병명이 나오지 않았을 때부터 심난한 나와 가족들이 먹을 반찬을 준비해 주었다. 매일 아침 친구들로 구성된 ‘써포터즈’가 카톡으로 안부를 물었다. 지난 밤 얼마나 아팠는지? 무얼 먹었는지? 잘 잤는지? 그들과의 대화로 나는 하루를 시작했다. ‘하이 에브리원!’ 이라는 인사는 내가 몸이 좀 나아졌다는 신호였다. 친구들은 화요일마다 돌아가며 도시락을 가져다주었다. 물김치, 도미찜, 계란말이, 미역국, 소고기, 닭죽…… 난 이런 관심과 사랑을 한꺼번에 받은 경험이 없다보니 어떻게 보답해야 하나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행복했다! 그래서 나도 중간 중간 나보다 더 도움이 필요한 친구들에게 내가 받은 사랑을 나눠 주었다. ‘선물의 순환’을 배운 사람답게!!

 

 

출처: 경향신문 <한뼘양생> 2022.04.07

 

 

 

5달 동안의 긴 항암이 끝났다. 이제 수술이다! 수술을 준비할 때 제일 큰 고민은 ‘전절제냐? 부분절제냐?’다. 그러나 그것은 의사의 결정이고,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전절제인 경우에 복원을 하느냐 미복원으로 남느냐에 대한 문제였다. 의사는 처음부터 전절제를 얘기했고, 복원은 성형외과와 상담해야했다. 복원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모두 통증과 기간과 돈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나는 전이와 재발이 잘 되는 유방암이었기에 두려움이 컸다. 언제 재발되어 또 수술할지 모르는데 지금 예쁜 가슴을 가지려고 복원 수술하라니 말도 안돼! 내가 이 나이에 다시 결혼 할 것도 아니고, 가슴 하나는 없는 셈 치겠다, 아마조네스의 전사처럼 살겠다! 라고 주장했다. 조심스럽게 복원을 조언하는 이들의 말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복원을 권하는 사람들에게 반박할 미복원에 대한 자료만 인터넷으로 찾았다.

 

 

인생은 예상대로 진행되지 않는 법! 나는 선항암이 잘되었기에 수술 전 검사에서 암세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고 나왔다. 의사는 수술 전 날 활짝 웃으며 도전정신(?)을 가지고 부분절제를 해보자고 했다. 난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 못하고 전절제도 상관없다고 주장하다 남편에게 한마디 들었다.(의사의 마음을 못 읽는다고 ㅠㅠ) 그래서 부분절제로 방향을 틀었다. 예상보다 긴 수술시간이 들었다.(원래는 1시간 반 그러나 4시간으로) 나는 의사의 도전의식 덕분에 부분절제를 하였고, 그 근처에 있는 모든 근육과 조직들을 끌어 모아 원래 가슴처럼 복원이 되었다. (이건 무척 드문 일로 내가 엄청 운이 좋은 것이다!) 의사는 인턴들을 쭉 데리고 병실에 와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잘 봐! 내가 원래 꺼보다 더 잘 만들었지?” 만약 내가 전절제를 계속 주장했다면? 지금 무지 힘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성성의 상징 운운을 떠나서, 한쪽 가슴이 없으면 그 무게만큼 몸의 균형이 안 맞아 척추가 휜다. 그리고 어깨가 안쪽으로 말려들어 평생 통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나는 여러 사람의 의견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끝까지 고집부리지 않고 얼른 방향을 수정한 내가 기특했다!

 

 

 

 

 

일주일 넘는 입원기간에 누가 나를 간병할 것인가? 병원에 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요즘 남자 보호자들이 부쩍 늘었다. 아들의 부축을 받거나, 남편과 동행하는 환자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여자병실에서 간호하는 남자 보호자들은 환자들의 원망의 대상이 된다. 밤마다 코골이 때문에 잠을 못 잤다는 댓글이 아주 많았다. 간병인으로 남편을 데리고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끝에 통 크게 남편의 코를 위해(?) 1인실을 신청하기고 했다. 돈은 아깝지만 좋은 호텔에서 일주일 보냈다 셈 치자고 생각했다. 입원수속을 밟는데 1인실이 마감 되었단다 ㅠㅠ 내가 갈수 있는 곳은 이제 5인실 간호병동(보호자 출입금지)과 하룻밤 150만원인 VIP병동뿐이다. 남편이 갑자기 허세를 부리며 돈이 문제냐며 같이 VIP병동으로 가자고 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아까부터 웃고 있었다. 지혜로운 나는 일주일치 VIP병동 입원비를 내 통장에 넣어 달라고 하고, 쓸쓸하게 보호자가 갈 수 없는 5인실 간호병동으로 갔다. 이제부터 일주일 넘게 혼자 있어야 한다. 통장에 들어온 그 돈이 나의 두려움과 허전함을 달래줄 수 있을까? …… 충분히 달래주었다!

 

 

난 이전에도 수술을 두 번 했다. 아이를 낳을 때 수술실로 들어가는 침대에 누워 기도했다. 위험한 상황이 되면 아이를 먼저 구해 달라고! 그런데 이번에는 홀로 긴 시간 수술 대기실에 누워 있었다. 갑자기 내가 이전에 공부했던 루쉰의 소설 『아Q정전』이 생각났다. 형장에 끌려가던 ‘아Q’처럼 뭔 노래라도 하나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대 사랑 받는 난, 행복한 사람……’ 뜬금없이 이 노래가 생각났다. 항암 할 때의 모든 고통은 잊혔고 고마웠던 일들만 기억나는 순간이었다.

 

 

다음 번에는 방심하면 안 되는 <방사선 치료 이야기>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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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의 암 이야기는, 일리치약국 뉴스레터 <건강한달>에 2022년7월부터 6개월간 연재되었습니다.

이제 여기 홈페이지 <자기돌봄의 기술>에 Re-Play 합니다.

 

1편: "우리 엄마 아미래"  https://moontaknet.com/?page_id=14957&uid=38860&mod=document

2편: 항암'산'을 넘다 https://moontaknet.com/?page_id=14957&uid=38861&mod=document&pageid=1

3편: 수술이 가장 쉬었어요

4편: 방심하면 안 되는 방사선 치료 https://moontaknet.com/?page_id=14957&uid=38870&mod=document&pageid=1

5편: 돈 많이 든 '재활치료' https://moontaknet.com/?page_id=14957&uid=38871&mod=document&pageid=1

6편: 사람이 아주 겸손해질 때 https://moontaknet.com/?page_id=14957&uid=38872&mod=docu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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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일기
        해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국을 탈주한 퀴어다. 판에 박힌 일상과 화폐 증식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버스 한 대 다니지 않았던 시골 벽지 동네에 자랐다. 어릴 적 우리 집은 그 동네에서도 매우 가난한 축이었다.  부모임이 어떤 사건으로 인해 허리띠를 졸라 모아 놓은 전 재산을 하루 아침에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우리 집은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큰 부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가진 건 아니지만 난 성인이 되어서도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될까 겁이 났다. 아버지와는 한번도 대화해 본 기억이 없다. 평소엔 내가 납득하기 어려운 사소한 일에 윽박을 지르거나 술을 마시고 나면 자살하겠다고 농약병을 찾아 공포에 떨어야 했다. 아프다고 하면 혼이 났기에 몸이 불편해도 눈치를 보며 숨겨야 했다.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나는 성적 지향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분명하게 인지하게 되었다. 당시엔 게이라는 말조차 생경했고 성소수자라는 단어도 없었다. 얼마 전 한국 게이들 사이에서 유행했다는 웃픈 농담이 기억난다. 본인이 성소수자라는 걸 처음 인지했을 때 세상에 본인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 홍석천과 자신, 그 둘밖에 없는 것으로 알았다는 것이다. 홍석천이 나와 비슷한 나이이고 그가 일종의 아웃팅으로 동성애자로 알려진 게 서른이 되어서였다. 당시 나처럼 시골에서 자란 성소수자는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모를 수밖에 없었다. 내 감정이 나에겐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다.      영화 <클로즈> 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알아볼 수 없도록 벽을 조금씩 쌓았다. 최선을 다해 튼튼하게 쌓는 게 목표였다. 나를 드러내야 하는 자리를 피했다. 사람들과의 자리에서는 어떤 말을 하기 전 자기 검열을 해야 했고 행동도 조심스러웠다. 나를 오픈했을 경우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압력을  견디어 낼 자신이 없었기에 벽장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내 자아가 벽장 안에 축소되어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그 근저에는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난, 아버지, 이성애만이 “존재”하는 세상, 이 모두가 나를 움츠려 들게 했다. 두려움이란 감정 때문에 힘들었고 그 원인은 모두 잘못된 시대와 나라에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두려움은 내 괴로움의 원천이었다. 이를 극복하고 싶었다. 하지만 스스로 넘어서기에 너무 높다란 벽과 같은 것이었다.       약 이 년 전 두려움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다. 당시 나는 동양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이곳 미국에서의 생활이 내게 많은 자유를 안겨주기도 했지만 두려움과 자의식이 나를 여전히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코로나로 인해 한국 인문학 공동체 강의가 온라인으로 열렸고 거기서 명리학의 기초적인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내 사주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난민인권센터 2014. 8. 21       나는 천간은 계수(癸水)이고 지지는 해수(亥水)인 계해(癸亥) 일주이다. 거기다 동짓달에 태어났으니 차가운 얼음장 아래로 졸졸 흐르는 시냇물의 기운이 내 안에 잠재되어 있다. 월지 또한 자수(子水)이니 내 안은 온통 물기운으로 치성하다. 계해 일주는 성실함과 융통성을 무기로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으며 천천히 전진하는 타입이다. 해수는 역마의 기운을 품고 있어 해외로 나갈 가능성 또한 품고 있다.  나처럼 수렴의 기운이 강한 사주는 자의식과 망상이 강하게 나타날 수 있다. 과잉 해석을 하기 쉽고 사소한 것도 감추고 자신의 속내를 잘 드러내려 하지 하는 속성도 가지고 있다.  이럴 경우 생명력을 발산하고 자기를 표현하는 능력인 식상(食傷)에 해당하는 봄의 기운이 필요하다. 하지만 난 목(木)기운, 즉 식상이 전혀 없다. 따라서 내 사주는 융통성, 꾸준함, 요령 등을 갖춘 반면 순환이 잘 되지 않아 속을 알기 어렵다. 또 남들에게 음흉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이렇게 펼쳐진 내 사주를 보고 흠칫 놀랐다. 나의 내향성, 성실함, 말재주와 표현력의 빈곤, 자의식 과잉, 협소한 인간관계 등이 내 안에 내재해 있었다니. 거기다 역마의 기운은 미국으로의 이주에 일조를 했을려나. 사주를 해석하고 나서 내 팔의 잔털들이 쭈뼛 세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때까지 내가 굳게 믿어왔던 두려움에 대한 해석이 틀리지는 않지만 협소했을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를 괴롭혀왔던 두려움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게 되었다.      앞으로 이어질 다섯 편의 글을 통해 내가 두려움을 대했던 방식을 돌아보려고 한다. 자유로워지기 위해 좀더 큰 도시로, 그리고 미국으로 이주를 했던 과정을 차근히 짚어보면서 나를 지배했던 두려움을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해 보려고 한다. 궁극적으로는 이 글을 통해 두려움을 어떻게 수용할지를 탐구하고 싶다.  다음 편에서는 어릴 적 경험한 난관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시도한 “탈주”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해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국을 탈주한 퀴어다. 판에 박힌 일상과 화폐 증식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버스 한 대 다니지 않았던 시골 벽지 동네에 자랐다. 어릴 적 우리 집은 그 동네에서도 매우 가난한 축이었다.  부모임이 어떤 사건으로 인해 허리띠를 졸라 모아 놓은 전 재산을 하루 아침에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우리 집은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큰 부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가진 건 아니지만 난 성인이 되어서도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될까 겁이 났다. 아버지와는 한번도 대화해 본 기억이 없다. 평소엔 내가 납득하기 어려운 사소한 일에 윽박을 지르거나 술을 마시고 나면 자살하겠다고 농약병을 찾아 공포에 떨어야 했다. 아프다고 하면 혼이 났기에 몸이 불편해도 눈치를 보며 숨겨야 했다.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나는 성적 지향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분명하게 인지하게 되었다. 당시엔 게이라는 말조차 생경했고 성소수자라는 단어도 없었다. 얼마 전 한국 게이들 사이에서 유행했다는 웃픈 농담이 기억난다. 본인이 성소수자라는 걸 처음 인지했을 때 세상에 본인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 홍석천과 자신, 그 둘밖에 없는 것으로 알았다는 것이다. 홍석천이 나와 비슷한 나이이고 그가 일종의 아웃팅으로 동성애자로 알려진 게 서른이 되어서였다. 당시 나처럼 시골에서 자란 성소수자는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모를 수밖에 없었다. 내 감정이 나에겐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다.      영화 <클로즈> 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알아볼 수 없도록 벽을 조금씩 쌓았다. 최선을 다해 튼튼하게 쌓는 게 목표였다. 나를 드러내야 하는 자리를 피했다. 사람들과의 자리에서는 어떤 말을 하기 전 자기 검열을 해야 했고 행동도 조심스러웠다. 나를 오픈했을 경우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압력을  견디어 낼 자신이 없었기에 벽장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내 자아가 벽장 안에 축소되어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그 근저에는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난, 아버지, 이성애만이 “존재”하는 세상, 이 모두가 나를 움츠려 들게 했다. 두려움이란 감정 때문에 힘들었고 그 원인은 모두 잘못된 시대와 나라에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두려움은 내 괴로움의 원천이었다. 이를 극복하고 싶었다. 하지만 스스로 넘어서기에 너무 높다란 벽과 같은 것이었다.       약 이 년 전 두려움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다. 당시 나는 동양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이곳 미국에서의 생활이 내게 많은 자유를 안겨주기도 했지만 두려움과 자의식이 나를 여전히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코로나로 인해 한국 인문학 공동체 강의가 온라인으로 열렸고 거기서 명리학의 기초적인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내 사주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난민인권센터 2014. 8. 21       나는 천간은 계수(癸水)이고 지지는 해수(亥水)인 계해(癸亥) 일주이다. 거기다 동짓달에 태어났으니 차가운 얼음장 아래로 졸졸 흐르는 시냇물의 기운이 내 안에 잠재되어 있다. 월지 또한 자수(子水)이니 내 안은 온통 물기운으로 치성하다. 계해 일주는 성실함과 융통성을 무기로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으며 천천히 전진하는 타입이다. 해수는 역마의 기운을 품고 있어 해외로 나갈 가능성 또한 품고 있다.  나처럼 수렴의 기운이 강한 사주는 자의식과 망상이 강하게 나타날 수 있다. 과잉 해석을 하기 쉽고 사소한 것도 감추고 자신의 속내를 잘 드러내려 하지 하는 속성도 가지고 있다.  이럴 경우 생명력을 발산하고 자기를 표현하는 능력인 식상(食傷)에 해당하는 봄의 기운이 필요하다. 하지만 난 목(木)기운, 즉 식상이 전혀 없다. 따라서 내 사주는 융통성, 꾸준함, 요령 등을 갖춘 반면 순환이 잘 되지 않아 속을 알기 어렵다. 또 남들에게 음흉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이렇게 펼쳐진 내 사주를 보고 흠칫 놀랐다. 나의 내향성, 성실함, 말재주와 표현력의 빈곤, 자의식 과잉, 협소한 인간관계 등이 내 안에 내재해 있었다니. 거기다 역마의 기운은 미국으로의 이주에 일조를 했을려나. 사주를 해석하고 나서 내 팔의 잔털들이 쭈뼛 세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때까지 내가 굳게 믿어왔던 두려움에 대한 해석이 틀리지는 않지만 협소했을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를 괴롭혀왔던 두려움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게 되었다.      앞으로 이어질 다섯 편의 글을 통해 내가 두려움을 대했던 방식을 돌아보려고 한다. 자유로워지기 위해 좀더 큰 도시로, 그리고 미국으로 이주를 했던 과정을 차근히 짚어보면서 나를 지배했던 두려움을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해 보려고 한다. 궁극적으로는 이 글을 통해 두려움을 어떻게 수용할지를 탐구하고 싶다.  다음 편에서는 어릴 적 경험한 난관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시도한 “탈주”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문탁
2023.09.08 | 조회 370
몸의 일기
              노라 얼마나 놀기 좋아하면...ㅎㅎ.. 문탁의 터줏대감이다. 모르는게 있으면 나에게^^         몇 년 전부터 파지사유 2층에 아주 예민한 부부가 살고 있다. 그들은 파지사유에서 나는 작은 소음 즉, 의자 끄는 소리, 가죽 망치 소리에도 힘들어 했다. 그런데 요즘 몇 달 안 내려 와서 무슨 일이 있나 했더니 그분들이 임신을 하셨단다. 누구는 임신을 해서 신경이 무뎌진 거 아닐까 했지만, 난 그분들이 이제 삼가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일 꺼라 말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사람이 제일 겸손해질 때가 아이를 가지고 키울 때, 그리고 암환자 중간검사 기다릴 때인 것 같다. 나는 6개월에 한 번씩 중간검사를 한다. 재발과 전이가 많은 암이라 온갖 검사를 하루 종일 한다. 한 달 전부터 모든 신경이 예민해지고 반성모드가 된다. 내가 그날 아이스크림을 왜 먹었을까? 운동을 왜 빼먹었을까? 요즘 고기를 넘 많이 먹은 게 아닐까? 샐러드 안 먹은 거, 잡곡 안 먹은 거 등등 모두 반성할 일 뿐이다.     중간검사에서 아무 이상 없다는 결과가 나오면 온 세상을 얻은 듯 기쁘다. 다시 6달, 새 생명을 얻은 것이다. (나는 그럴 때마다 특별회비를 낸다!) 환우 커뮤니티에 6개월 검진 통과, 1년, 3년, 5년 통과 글들이 올라오면 수십 개의 댓글이 쭈욱 달린다. 좋은 기운을 함께 나누겠다는 뜻이다. 그 분들의 히스토리를 검색하고 나와 비슷한 병력을 확인하면 안심이 된다. 나도 잘하면...
              노라 얼마나 놀기 좋아하면...ㅎㅎ.. 문탁의 터줏대감이다. 모르는게 있으면 나에게^^         몇 년 전부터 파지사유 2층에 아주 예민한 부부가 살고 있다. 그들은 파지사유에서 나는 작은 소음 즉, 의자 끄는 소리, 가죽 망치 소리에도 힘들어 했다. 그런데 요즘 몇 달 안 내려 와서 무슨 일이 있나 했더니 그분들이 임신을 하셨단다. 누구는 임신을 해서 신경이 무뎌진 거 아닐까 했지만, 난 그분들이 이제 삼가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일 꺼라 말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사람이 제일 겸손해질 때가 아이를 가지고 키울 때, 그리고 암환자 중간검사 기다릴 때인 것 같다. 나는 6개월에 한 번씩 중간검사를 한다. 재발과 전이가 많은 암이라 온갖 검사를 하루 종일 한다. 한 달 전부터 모든 신경이 예민해지고 반성모드가 된다. 내가 그날 아이스크림을 왜 먹었을까? 운동을 왜 빼먹었을까? 요즘 고기를 넘 많이 먹은 게 아닐까? 샐러드 안 먹은 거, 잡곡 안 먹은 거 등등 모두 반성할 일 뿐이다.     중간검사에서 아무 이상 없다는 결과가 나오면 온 세상을 얻은 듯 기쁘다. 다시 6달, 새 생명을 얻은 것이다. (나는 그럴 때마다 특별회비를 낸다!) 환우 커뮤니티에 6개월 검진 통과, 1년, 3년, 5년 통과 글들이 올라오면 수십 개의 댓글이 쭈욱 달린다. 좋은 기운을 함께 나누겠다는 뜻이다. 그 분들의 히스토리를 검색하고 나와 비슷한 병력을 확인하면 안심이 된다. 나도 잘하면...
문탁
2023.05.05 | 조회 391
몸의 일기
              노라 얼마나 놀기 좋아하면...ㅎㅎ.. 문탁의 터줏대감이다. 모르는게 있으면 나에게^^       1년이 금방 지나갔다. 힘든 일도 금방 잊혀 진다. 겉으로 보기엔 전혀 환자 같지 않은 내가 작년 이맘땐 무엇을 하고 있었나? 정답! 표적항암과 재활치료를 계속하고 있었다. 난 암이 림프절까지 침범하였기에 수술에서 림프절을 40개 넘게 떼어내었다. 림프액은 림프관을 따라 흐르면서 몸의 순환과 균형을 맞추는 일은 한다. 림프액이 잘 흐르지 않아 부종이 올까 늘 조심해야 한다. 일단 왼손으로 5kg 넘는 짐을 들면 안 되고, 압박 스타킹을 왼팔에 끼고 있어야 되고, 림프 마사지를 해줘야 한다. 림프절이 부어서 팔이 코끼리 다리처럼 되면 다시 큰 수술을 해야 한다. 그런데 림프절을 보호한다고 왼팔을 안 쓰다 보니, 어느 날 왼쪽 어깨가 굳어 버렸다. 대신 오른쪽 어깨를 많이 쓰다 보니 그 어깨에도 문제가 생겼다. 밤마다 어깨가 아파 울면서 잠을 깼다. 난 재활의학과로 옮겨가 도수치료를 받아야 했다.             도수치료는 일주일에 세 번, 하루에 30분씩 받는다. 한 번에 10만원씩 지불하다보니 돈이 푹푹 들어갔다. 국가에서 암환자라 주던 중증환자 혜택은 (치료비의 5%) 여기서는 없다. 첫 날 치료를 받으며 난 ‘독립투사’는 절대 못 하겠다 생각했다. 고문기구판 같은 곳에 매달려서 협착된 근육조직을 뜯어내는 것은 너무 아팠다. 신음과 고함을 지르는 고문을 자발적으로 받으러 가야했다. 치료사는 매일 팔운동을 해야 한다며 그 주에 해야...
              노라 얼마나 놀기 좋아하면...ㅎㅎ.. 문탁의 터줏대감이다. 모르는게 있으면 나에게^^       1년이 금방 지나갔다. 힘든 일도 금방 잊혀 진다. 겉으로 보기엔 전혀 환자 같지 않은 내가 작년 이맘땐 무엇을 하고 있었나? 정답! 표적항암과 재활치료를 계속하고 있었다. 난 암이 림프절까지 침범하였기에 수술에서 림프절을 40개 넘게 떼어내었다. 림프액은 림프관을 따라 흐르면서 몸의 순환과 균형을 맞추는 일은 한다. 림프액이 잘 흐르지 않아 부종이 올까 늘 조심해야 한다. 일단 왼손으로 5kg 넘는 짐을 들면 안 되고, 압박 스타킹을 왼팔에 끼고 있어야 되고, 림프 마사지를 해줘야 한다. 림프절이 부어서 팔이 코끼리 다리처럼 되면 다시 큰 수술을 해야 한다. 그런데 림프절을 보호한다고 왼팔을 안 쓰다 보니, 어느 날 왼쪽 어깨가 굳어 버렸다. 대신 오른쪽 어깨를 많이 쓰다 보니 그 어깨에도 문제가 생겼다. 밤마다 어깨가 아파 울면서 잠을 깼다. 난 재활의학과로 옮겨가 도수치료를 받아야 했다.             도수치료는 일주일에 세 번, 하루에 30분씩 받는다. 한 번에 10만원씩 지불하다보니 돈이 푹푹 들어갔다. 국가에서 암환자라 주던 중증환자 혜택은 (치료비의 5%) 여기서는 없다. 첫 날 치료를 받으며 난 ‘독립투사’는 절대 못 하겠다 생각했다. 고문기구판 같은 곳에 매달려서 협착된 근육조직을 뜯어내는 것은 너무 아팠다. 신음과 고함을 지르는 고문을 자발적으로 받으러 가야했다. 치료사는 매일 팔운동을 해야 한다며 그 주에 해야...
문탁
2023.04.19 | 조회 250
몸의 일기
              노라 얼마나 놀기 좋아하면...ㅎㅎ.. 문탁의 터줏대감이다. 모르는게 있으면 나에게^^         간호병동 입원 기간은 예상했던 일주일이 넘어 12일 동안이었다. 간호병동은 간호사가 상주하며 환자들을 돌봐주는 시스템인데 가격은 5인실 입원비에 2만원만 추가하면 된다. 나는 그곳에서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되어 계속 잠만 잤다! 걱정 없이 푹 잤기에 회복도 빨랐다. 무통주사 한번 누르지 않는 나를 보고 간호사는 고통을 잘 못 느끼는 체질인 것 같다고 했다. 좋은 뜻인가? 무뎌서 암세포가 그리 커지도록 못 알아챈 거 아닐까? 보호자 없는 병실에서 그 긴 날을 보내는 동안 남편과 아이들은 잠시 휴가를 얻었다. ‘골룸’처럼 돌아다니는 환자가 집에 없다는 것만으로도 가족들은 해방감을 느꼈으리라. 아이들이 집을 엄청 깨끗하게 치웠다고 카톡으로 알려왔다. 그동안 책장 가득히 쌓여 있던 내 책들도 다 버렸다. (나쁜 놈들!) 밤마다 맥주파티를 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수술이 잘 된 것을 축하하며, 집이 깨끗해진 것도 축하하며! 주치의가 도전정신을 갖고 수술한 덕분에 수술은 잘 되었고, 네 개씩 맞던 항암제 ‘약빨’이 잘 들었기에 ‘완전관해’도 되었다. 완전관해란 암 세포의 흔적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뜻으로 나와 같은 종류의 유방암에선 30~40%의 환자들에게 해당된다.     암 진단을 받고 항암을 하는 동안 커다란 고민 중 하나는 부모님께 나의 상황을 알려야 하느냐, 마느냐 이다. 부모님의 연세가 80이 넘으셨기에, 나는 이 소식을 듣고 매일 밤 울고 계실 엄마를 상상하는 것조차...
              노라 얼마나 놀기 좋아하면...ㅎㅎ.. 문탁의 터줏대감이다. 모르는게 있으면 나에게^^         간호병동 입원 기간은 예상했던 일주일이 넘어 12일 동안이었다. 간호병동은 간호사가 상주하며 환자들을 돌봐주는 시스템인데 가격은 5인실 입원비에 2만원만 추가하면 된다. 나는 그곳에서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되어 계속 잠만 잤다! 걱정 없이 푹 잤기에 회복도 빨랐다. 무통주사 한번 누르지 않는 나를 보고 간호사는 고통을 잘 못 느끼는 체질인 것 같다고 했다. 좋은 뜻인가? 무뎌서 암세포가 그리 커지도록 못 알아챈 거 아닐까? 보호자 없는 병실에서 그 긴 날을 보내는 동안 남편과 아이들은 잠시 휴가를 얻었다. ‘골룸’처럼 돌아다니는 환자가 집에 없다는 것만으로도 가족들은 해방감을 느꼈으리라. 아이들이 집을 엄청 깨끗하게 치웠다고 카톡으로 알려왔다. 그동안 책장 가득히 쌓여 있던 내 책들도 다 버렸다. (나쁜 놈들!) 밤마다 맥주파티를 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수술이 잘 된 것을 축하하며, 집이 깨끗해진 것도 축하하며! 주치의가 도전정신을 갖고 수술한 덕분에 수술은 잘 되었고, 네 개씩 맞던 항암제 ‘약빨’이 잘 들었기에 ‘완전관해’도 되었다. 완전관해란 암 세포의 흔적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뜻으로 나와 같은 종류의 유방암에선 30~40%의 환자들에게 해당된다.     암 진단을 받고 항암을 하는 동안 커다란 고민 중 하나는 부모님께 나의 상황을 알려야 하느냐, 마느냐 이다. 부모님의 연세가 80이 넘으셨기에, 나는 이 소식을 듣고 매일 밤 울고 계실 엄마를 상상하는 것조차...
문탁
2023.04.19 | 조회 277
몸의 일기
              노라 얼마나 놀기 좋아하면...ㅎㅎ.. 문탁의 터줏대감이다. 모르는게 있으면 나에게^^       항암 중 ‘잘 먹어야 한다!’는 꼭 지켜야 하는 암환자 수칙이다. 그러다 5차쯤 되니 꾀가 생겼다. 항암하고 3주째는 어쨌든 몸이 회복되더라는 기억을 가지고 있던 나는 5차, 6차 때 먹는 것을 소홀히 해 버렸다. 몸은 회복되지 않았다! 기력은 거의 바닥이었고 이러다간 수술도 못 받을까 걱정 될 지경이었다. 이전에 항암 하시던 아빠가 뭐 드시라 할 때마다 짜증을 내셨는데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겪어봐야 알게 된다! 설상가상 항암제 부작용으로 손톱이 곪고 빠졌다. 마치 백설공주에게 독 사과를 권하던 마귀할멈 손톱처럼 검게 되었다. “더 늦었으면 큰일 날 뻔 했지요?” 심각한 표정으로 치료하던 외과의사에게 물었다. 대답은 “이미 많이 늦으셨어요.” 데쟈뷰다! 처음 검사한 유방외과에서 한 질문이 “혹시 심각한가요?”였다. 그 때 대답도 “예. ……”     항암 중 나는 문탁 친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특히 이 병을 미리 거쳐 간 바람님과 간호사였던 달팽이, 여여님과 상의했다. 어느 병원에 가야 할지,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언제 마음이 아픈지, 문탁 친구들은 병명이 나오지 않았을 때부터 심난한 나와 가족들이 먹을 반찬을 준비해 주었다. 매일 아침 친구들로 구성된 ‘써포터즈’가 카톡으로 안부를 물었다. 지난 밤 얼마나 아팠는지? 무얼 먹었는지? 잘 잤는지? 그들과의 대화로 나는 하루를 시작했다. ‘하이 에브리원!’ 이라는 인사는 내가 몸이 좀 나아졌다는 신호였다....
              노라 얼마나 놀기 좋아하면...ㅎㅎ.. 문탁의 터줏대감이다. 모르는게 있으면 나에게^^       항암 중 ‘잘 먹어야 한다!’는 꼭 지켜야 하는 암환자 수칙이다. 그러다 5차쯤 되니 꾀가 생겼다. 항암하고 3주째는 어쨌든 몸이 회복되더라는 기억을 가지고 있던 나는 5차, 6차 때 먹는 것을 소홀히 해 버렸다. 몸은 회복되지 않았다! 기력은 거의 바닥이었고 이러다간 수술도 못 받을까 걱정 될 지경이었다. 이전에 항암 하시던 아빠가 뭐 드시라 할 때마다 짜증을 내셨는데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겪어봐야 알게 된다! 설상가상 항암제 부작용으로 손톱이 곪고 빠졌다. 마치 백설공주에게 독 사과를 권하던 마귀할멈 손톱처럼 검게 되었다. “더 늦었으면 큰일 날 뻔 했지요?” 심각한 표정으로 치료하던 외과의사에게 물었다. 대답은 “이미 많이 늦으셨어요.” 데쟈뷰다! 처음 검사한 유방외과에서 한 질문이 “혹시 심각한가요?”였다. 그 때 대답도 “예. ……”     항암 중 나는 문탁 친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특히 이 병을 미리 거쳐 간 바람님과 간호사였던 달팽이, 여여님과 상의했다. 어느 병원에 가야 할지,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언제 마음이 아픈지, 문탁 친구들은 병명이 나오지 않았을 때부터 심난한 나와 가족들이 먹을 반찬을 준비해 주었다. 매일 아침 친구들로 구성된 ‘써포터즈’가 카톡으로 안부를 물었다. 지난 밤 얼마나 아팠는지? 무얼 먹었는지? 잘 잤는지? 그들과의 대화로 나는 하루를 시작했다. ‘하이 에브리원!’ 이라는 인사는 내가 몸이 좀 나아졌다는 신호였다....
문탁
2023.04.19 | 조회 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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