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의 주방일기 - 어느 멋진 날

오영
2019-01-14 22:35
432

문탁 주방의 냉장고와 쌀독, 양념통들은 거의 대부분 친구들의 선물로 채워진다. 


평소에도 크고 작은 선물들로 밥상이 차려지지만 철마다, 그 철에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재료를


선물하는 친구들 덕분에 예상치 못했던 잔치가 벌어질 때가 있다. 


운이 좋으면 그 덕에 입이 호사를 할 수 있지만 운이 나빠 그 때를 놓치면 맛은 못보고 "~이 엄청 맛이었다"라는 소문만


듣는 신세가 된다.   



그 동안 난 운이 안 좋은 편이었다.



지난 수요일 오후, 단체카톡방에 사진 하나가 올라왔다.


무심코 사진을 보다가 처음 보는 비주얼에 '뭥미' 했다. 얼핏 보기에 무슨 커다란 파충류처럼 보였다. 


근데.. 그것은 요요샘의 시어머님이 거제도에서 보내주신 아주 귀한, 크고 싱싱한 생물 대구 두 마리였다!


아주 특별한 선물인 만큼 다음날 점심 메뉴를 미리 공지하는  것이었다. 


'ㅎㅎ 이번엔 특식을 맛볼 수 있겠군.' 하고 흐믓해하고 있었는데 그 다음날 점심 당번이 바로 나였다. 


덕분에 메뉴를 고민할 필요도 없게 되었으니 나로선 완전 땡큐였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게다가 다음날 밥당번 짝꿍인 열혈 여울아는 대구지리탕 전문가의 국물내기 비법을 알아오기까지 했다. 이런 준비성이라니!


그 정보에 따르면, 시원하고 담백한 국물맛의 비법은 다시마였다. 오직 다시마만으로 육수내기.   


그 비법대로 다시마를 듬뿍 넣고 끓여낸 후, 다시마는 건져내고 파뿌리와 무, 대구를 넣어 푹 끓였다.


화천의 강현님이 주신 무가 워낙 맛있는데다 대구가 통째로 두 마리나 들어가니 국간장을 살짝 넣고 소금으로만 간을 했는데도


어찌나 달고 맛있던지....


모두가 맛있다는 말을 입이 닳도록 했다. 대부분 집에서는 이런 맛이 안나온다고 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음식 맛의 기본인 재료가 좋은데다 많은 양의 재료들로 풍성하게 끓여내니 맛이 없을 수가 없다.


더군다니 여럿이 함께 그 맛을 즐기며 먹으니 더욱 더 맛있을 수밖에... 

 


대구.jpg



든든한 보양식으로 배를 채우고 나서, 곧바로 단품 생산을 시작했다.

소문으로만 듣던 <토용 약밥>에는 어떤 비법이 숨어 있을까 궁금했다. 토용의 약밥도 맛있다는 소문만 듣고

먹어본 적은 없었다. 난 여태 직접 약밥을 만들어 본 적도, 만드는 과정을 본 적도 없었다. 


토용은 오전부터 왔다갔다 하며 재료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일찌감치 와서 찹쌀을 씻어 물에 담가 놓고 밤을 까고

대추물을 끓이고 간장과 설탕을 계량하느라 바빴다. 재료 준비를 마치자 압력솥에 불린 찹쌀과 밤, 호두, 대추를 넣고

대추 끓인 물에 간장과 설탕을 섞어 밥물로 붓고 밥을 했다. 


약밥2.jpg약밥3.jpg


그 다음 과정은 간단했지만 큰 압력솥과 그보다 작은 솥을 동원해서 여러 번 지어내느라 바빴다.

일단 완성된 약밥을 팬에 고루 담아 모양을 내서 식히면 끝이었다. 달짝지근한 냄새가 주방에 가득 퍼졌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약밥의 비주얼과 달콤한 냄새에 군침이 절로 돌았다. 뜨거운 약밥 한 덩어리를 호호 불어대며 먹으니

그 달달하고 쫀뜩한 맛에  그간의 피로가 싹 가시는 듯했다.

"좀 달다, 괜찮다, 덜 달게 해라. 대추는 많은 게 좋다. 아니다. 잣이 너무 많다. 귀한 잣이니 많이 먹자. 

대추를 더 넣자. 아니다. 밤이 많다. 적다...."  

역시나 오가는 사람들 저마다 한 마디씩 참견을 하며 잔소리를 한다.


마음 급한 사람들은 얼른 잘라 포장을 해서 일을 마무리짓고 싶지만 랩으로 감싸 놓으니 김이 서린다. 마음이 급해도


충분히 식어야 자르기도 쉽고 김이 안서리게 포장도 할 수 있으니 어쩔 수 없다, 쉬어가는 수밖에.


잠시 차 한잔을 앞에 두고 수다가 이어졌다.

세미나를 마친 사람들이 달콤한 냄새에 이끌려 오고 한 입 맛보라고 떼어 주다 보니 나도 덩달아 한 입, 두 입 먹고 말았다.

"이러다 배부르겠네." 싶었지만 멈출 수 없는 맛. 

회의 때문에 뒷정리 못했다고 미안해 하는 여울아가 차를 마시라고 했지만 정말 배불러 마실 수가 없었다.


이번 단품은 그야말로 친구들의 선물로 만들어졌다. 

찹쌀을 선물한 청량리, 가평잣을 선물한 당근, 대추와 호두를 선물하고 일손도 거든 달팽이, 쉐프비를 받지 않고 선물한 토용,

역시 회의 전후에 오가며 일손을 거든 띠우와 여울아... 그리고 주문해 준 친구들, 모두 모두에게 감사한 날이었다.

몸은 다소 고단했지만 이 맛에 사는 거지 싶었다.^^ 멋진 하루였다.

댓글 5
  • 2019-01-15 15:57

    대구탕과 약밥 맛있게 먹었어요~ 수고해주신 셰프님들 고마워요^^

  • 2019-01-15 16:20

    맞습니다~~~~ 이 맛에 삽니다~~~

  • 2019-01-16 15:33

    연짱 2주 내내 근무로 지쳤었는데 대구탕으로 몸보신 잘 했습니다. 

    딱 목요일만 오후 근무인데 목요일 점심으로 끓여주셔서 감사했어요~~~

    약밥은 동생네랑 나눠먹고 직장 동료한테 조금 줬더니 자기는 약밥귀신이라면서 

    앉은자리에서 싹 해치우시더군요 ㅋㅋ

    전 아침 출근전에 먹었는데 든든했어요~

    덕분에 길고 길었던 2주 근무 잘 마쳤어요~~

  • 2019-01-17 19:37

    사는게...  그렇지~~ (새은이 버젼)

    모두들 덕분에 잘 먹고 잘 살고 있어요~ ^ㅇ^

  • 2019-01-22 08:50

    오영님 아침부터 늦게까지 두 탕 뛰느라 더 바쁘셨죠?? 

    토용님과 그날 밤까기부터 뒷정리까지 애써주신 모든 분들께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얌얌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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