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일기
          해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국을 탈주한 퀴어다. 판에 박힌 일상과 화폐 증식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서울에선 누군가와 연애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와 같은 성향의 친구들도 만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어느 날 한 잡지 커버의 “호모”란 단어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선데이 서울”이었다. 남성 동성애자들이 변태 성욕자로 등장하는 선정적이고 과장된 기사였지만 난 선데이서울이 고마웠다. 공중파 방송에서도 비슷한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정보들을 짜깁기한 끝에 종로3가에 남성 동성애자들이 모이는 극장과 지하 술집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극장에 가기로 결심한 날 내 심장은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날 보고 있을 것 같았다. 매표소를 빙빙 돌다 돌아오는 일이 몇 번 반복되었다. 식은 땀을 흘리며 겨우 들어갔다.  구석에서 곁눈질만 하다가 나오곤 했다. 만남의 방식이 낯설었지만 종로라는 공간이 있다는 게 기뻤다.    90년 대 초 동성애자들이 종로에 있는 은밀한 공간에 얼굴을 내미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그 사건을 ‘종로에 데뷔’했다고 표현했다. 데뷔 년도는 상대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정보였다. 이름이나 학교, 직장, 사는 동네 등은 대놓고 묻지 않았다. 웬만큼 친해져 신뢰할 수 있을 때까지는. 나처럼 갓 데뷔한 20대부터 장년층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백수들도 눈에 띄었고 소수지만 정해진 거처 없이 반노숙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발렌타인 30년산을 파는 지하 술집엔 돈이 꽤 있거나 결혼한 중년들이 드나들었다. 당시 한국 사회에 동성애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했다면 선데이서울의 기사 제목처럼  변태적 욕망을 가진 “호모”일 뿐이었다. 이러한 인식에 대한 수용인지 체념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을 성적 대상화하는 무수한 은어들을 발명했다. 자기바하적 언어 없이는 대화를 이어가기 어려워 보였다. 사람들이 술자리를 파하고 돌아갈 무렵 종로는 깨어나기 시작했다. 어두운 공원에서의 크루징과 새벽녘까지 이어지는 지하 술집에서의 유흥이 낯설고 기괴했다. 난 적응하기 어려웠고 적응하고 싶지 않았다.        종로3가의 대표적인 게이바 "프렌즈"의 천정남님 인터뷰(https://www.sqcf.org/blog/?q=YToy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zOjQ6InBhZ2UiO2k6Nzt9&bmode=view&idx=3612737&t=board)       종로에서 두번의 연애를 했다. 마법에 걸린 기분이었다. 그 사람이 세상의 전부로 여겨졌고 놓치고 싶지 않았다. 상대들은 나와 달랐다. A는 어린 나이에 데뷔해서 연애 경력이 몇 번 있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술에 취해 자신은 남성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신이 달라질 것이라고 울부짖었다. 곧 종로에 발길을 끊겠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B는 경제적으로 안정되면 결혼을 할 거라고 했다. 여자 친구가 있었다고 했지만 난 그가 여성과 사귀거나 같이 사는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자신을 수용하기 힘들어 하는 사람들과의 연애는 짧은 인연으로 끝이 났다. 친구를 만들었지만 친밀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한 친구는 나중에 본인이 갓 결혼을 했음을 밝혔다. 그는 나를 포함한 알고 지내던 친구들에게 수첩에 있는 자신의 삐삐 번호를 지우라고 ‘명령’했다. 자신은 다시는 종로에 나올 일이 없으니 절대 연락하지 말라고. 과민반응에 화가 났지만 그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나도 그만큼 가슴 졸이며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상이 두려워 비밀을 옷섶에 한가득 감추고 나온 사람들 사이에서 달달한 연애가 싹트거나 신뢰에 기반을 둔 우정이 생겨나기 쉽지 않았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난 종로를 등질 수 없었다. 종로는 들끓는 에로스와 끈끈한 우정을 기대하며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기대가 번번이 무산되더라도 말이다.       ‘이중생활’로 몸과 마음은 긴장 모드 상태였다. 이 긴장감을 해소할 뚜렷한 해법은 없었지만 종로 밖 세상에서 나를 조금이라도 드러낼 방법을 찾고 싶었다. 상담을 받기로 했다. 먼저 심리 검사를 받았다. 수 백 개의 검사 문항 중 성지향성을 묻는 질문이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검사 결과가 나오고 나서 상담이 시작되었다. 상담사가 나의 성정체성에 관한 결과를 얘기해 주길 기다렸다. 난 고백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결과를 쭉 설명하다 마지막에 주춤했다. 내가 남성성도 강하나 섬세한 면이 있다는 식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불분명하지만 동성애자와 상담할 준비가 되지 않은 건 분명했다. 이 일 이후 정신과 전문의를 찾아가 보기도 했다. 그는 여성과 성관계를 시도하라는 어이없는 해결책을 제시했다. 모욕적으로 느껴졌다.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세상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서른을 넘기게 되자 종로 밖의 세상은 내게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난 소위 결혼적령기가 되었고 아파트 전세를 마련한 상태였다. 직장 생활도 안정기에 접어 들었다. 다들 결혼을 해야 한다고 성화였다. 서른이 넘도록 여자친구 한번 사귀지 않는 나를 걱정하고 손주를 고대하는 어머니를 실망시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가족과 인연이 끊어질 각오로 커밍아웃할 용기는 없었다. 가족들이 나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은 사회적인 낙인 이상의 두려움이었다. 그래서 일기장도 자물쇠가 달린 걸 썼다. 가족들이 방문했다가 우연히라도 들춰 볼까 염려되어서였다. 결혼할 마음이 전혀 없음에도 가족들에게 뭔가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보여줘야 했다. 맘에 1도 없는 선자리에 몇 번이나 나갔다. 당시만 해도 결혼 제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남성은 신체적 또는 정신적 결함이 있을 거란 오명을 썼다. 그 뿐 아니라  이는 가부장의 위치가 주는 사회적 특권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남성 동성애자들 사이에선 이혼할망정 결혼은 한번 해야 남은 인생이 편하다는 농담까지 있었다. 어쨌든 공개적으로 남성성을 증명한 셈이니까.          난 고등학교 때부터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해 불편함을 느꼈다. 교련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과목이었다. 술자리에서 군대 이야기가 나올라치면 귀를 막았다. 마초적 남성들을 속으로 비웃었으나 돌이켜 보면 스스로 믿었던 만큼 가부장적 위계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대학교 때부터 집안의 호주이자 가장이 되었다. 졸업 후 그간 의무를 다하지 못했단 찜찜함을 털어내고 싶어 집에 돈들어가는 일은 주로 내가 감당했다. 거기엔 능력있는 가장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었다. 나는 또 가족을 갖고 싶었다. 4인 대신 2인의 스위트 홈을 완성하고 싶었다. 그림 같은 이층 집은 못짓더라도 서울 한복판에 내 명의의 아파트를 사고 거기에 달콤한 가정을 들이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인연이 찾아온다 해도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그런 관계가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들었지만 2인가족의 꿈을 놓지 않았다.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부장적 권위에 알레르기를 일으키면서도 그것이 발명해 낸 가족제도 안으로 들어가고픈 욕망이 숨어 있었다. 그게 모순이었지만 에로스적 기운이 넘쳐났던 청년은 주어진 조건에서 무언가를 꿈꾸고 싶었다.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기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해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국을 탈주한 퀴어다. 판에 박힌 일상과 화폐 증식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서울에선 누군가와 연애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와 같은 성향의 친구들도 만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어느 날 한 잡지 커버의 “호모”란 단어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선데이 서울”이었다. 남성 동성애자들이 변태 성욕자로 등장하는 선정적이고 과장된 기사였지만 난 선데이서울이 고마웠다. 공중파 방송에서도 비슷한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정보들을 짜깁기한 끝에 종로3가에 남성 동성애자들이 모이는 극장과 지하 술집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극장에 가기로 결심한 날 내 심장은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날 보고 있을 것 같았다. 매표소를 빙빙 돌다 돌아오는 일이 몇 번 반복되었다. 식은 땀을 흘리며 겨우 들어갔다.  구석에서 곁눈질만 하다가 나오곤 했다. 만남의 방식이 낯설었지만 종로라는 공간이 있다는 게 기뻤다.    90년 대 초 동성애자들이 종로에 있는 은밀한 공간에 얼굴을 내미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그 사건을 ‘종로에 데뷔’했다고 표현했다. 데뷔 년도는 상대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정보였다. 이름이나 학교, 직장, 사는 동네 등은 대놓고 묻지 않았다. 웬만큼 친해져 신뢰할 수 있을 때까지는. 나처럼 갓 데뷔한 20대부터 장년층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백수들도 눈에 띄었고 소수지만 정해진 거처 없이 반노숙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발렌타인 30년산을 파는 지하 술집엔 돈이 꽤 있거나 결혼한 중년들이 드나들었다. 당시 한국 사회에 동성애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했다면 선데이서울의 기사 제목처럼  변태적 욕망을 가진 “호모”일 뿐이었다. 이러한 인식에 대한 수용인지 체념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을 성적 대상화하는 무수한 은어들을 발명했다. 자기바하적 언어 없이는 대화를 이어가기 어려워 보였다. 사람들이 술자리를 파하고 돌아갈 무렵 종로는 깨어나기 시작했다. 어두운 공원에서의 크루징과 새벽녘까지 이어지는 지하 술집에서의 유흥이 낯설고 기괴했다. 난 적응하기 어려웠고 적응하고 싶지 않았다.        종로3가의 대표적인 게이바 "프렌즈"의 천정남님 인터뷰(https://www.sqcf.org/blog/?q=YToy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zOjQ6InBhZ2UiO2k6Nzt9&bmode=view&idx=3612737&t=board)       종로에서 두번의 연애를 했다. 마법에 걸린 기분이었다. 그 사람이 세상의 전부로 여겨졌고 놓치고 싶지 않았다. 상대들은 나와 달랐다. A는 어린 나이에 데뷔해서 연애 경력이 몇 번 있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술에 취해 자신은 남성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신이 달라질 것이라고 울부짖었다. 곧 종로에 발길을 끊겠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B는 경제적으로 안정되면 결혼을 할 거라고 했다. 여자 친구가 있었다고 했지만 난 그가 여성과 사귀거나 같이 사는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자신을 수용하기 힘들어 하는 사람들과의 연애는 짧은 인연으로 끝이 났다. 친구를 만들었지만 친밀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한 친구는 나중에 본인이 갓 결혼을 했음을 밝혔다. 그는 나를 포함한 알고 지내던 친구들에게 수첩에 있는 자신의 삐삐 번호를 지우라고 ‘명령’했다. 자신은 다시는 종로에 나올 일이 없으니 절대 연락하지 말라고. 과민반응에 화가 났지만 그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나도 그만큼 가슴 졸이며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상이 두려워 비밀을 옷섶에 한가득 감추고 나온 사람들 사이에서 달달한 연애가 싹트거나 신뢰에 기반을 둔 우정이 생겨나기 쉽지 않았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난 종로를 등질 수 없었다. 종로는 들끓는 에로스와 끈끈한 우정을 기대하며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기대가 번번이 무산되더라도 말이다.       ‘이중생활’로 몸과 마음은 긴장 모드 상태였다. 이 긴장감을 해소할 뚜렷한 해법은 없었지만 종로 밖 세상에서 나를 조금이라도 드러낼 방법을 찾고 싶었다. 상담을 받기로 했다. 먼저 심리 검사를 받았다. 수 백 개의 검사 문항 중 성지향성을 묻는 질문이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검사 결과가 나오고 나서 상담이 시작되었다. 상담사가 나의 성정체성에 관한 결과를 얘기해 주길 기다렸다. 난 고백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결과를 쭉 설명하다 마지막에 주춤했다. 내가 남성성도 강하나 섬세한 면이 있다는 식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불분명하지만 동성애자와 상담할 준비가 되지 않은 건 분명했다. 이 일 이후 정신과 전문의를 찾아가 보기도 했다. 그는 여성과 성관계를 시도하라는 어이없는 해결책을 제시했다. 모욕적으로 느껴졌다.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세상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서른을 넘기게 되자 종로 밖의 세상은 내게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난 소위 결혼적령기가 되었고 아파트 전세를 마련한 상태였다. 직장 생활도 안정기에 접어 들었다. 다들 결혼을 해야 한다고 성화였다. 서른이 넘도록 여자친구 한번 사귀지 않는 나를 걱정하고 손주를 고대하는 어머니를 실망시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가족과 인연이 끊어질 각오로 커밍아웃할 용기는 없었다. 가족들이 나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은 사회적인 낙인 이상의 두려움이었다. 그래서 일기장도 자물쇠가 달린 걸 썼다. 가족들이 방문했다가 우연히라도 들춰 볼까 염려되어서였다. 결혼할 마음이 전혀 없음에도 가족들에게 뭔가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보여줘야 했다. 맘에 1도 없는 선자리에 몇 번이나 나갔다. 당시만 해도 결혼 제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남성은 신체적 또는 정신적 결함이 있을 거란 오명을 썼다. 그 뿐 아니라  이는 가부장의 위치가 주는 사회적 특권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남성 동성애자들 사이에선 이혼할망정 결혼은 한번 해야 남은 인생이 편하다는 농담까지 있었다. 어쨌든 공개적으로 남성성을 증명한 셈이니까.          난 고등학교 때부터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해 불편함을 느꼈다. 교련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과목이었다. 술자리에서 군대 이야기가 나올라치면 귀를 막았다. 마초적 남성들을 속으로 비웃었으나 돌이켜 보면 스스로 믿었던 만큼 가부장적 위계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대학교 때부터 집안의 호주이자 가장이 되었다. 졸업 후 그간 의무를 다하지 못했단 찜찜함을 털어내고 싶어 집에 돈들어가는 일은 주로 내가 감당했다. 거기엔 능력있는 가장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었다. 나는 또 가족을 갖고 싶었다. 4인 대신 2인의 스위트 홈을 완성하고 싶었다. 그림 같은 이층 집은 못짓더라도 서울 한복판에 내 명의의 아파트를 사고 거기에 달콤한 가정을 들이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인연이 찾아온다 해도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그런 관계가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들었지만 2인가족의 꿈을 놓지 않았다.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부장적 권위에 알레르기를 일으키면서도 그것이 발명해 낸 가족제도 안으로 들어가고픈 욕망이 숨어 있었다. 그게 모순이었지만 에로스적 기운이 넘쳐났던 청년은 주어진 조건에서 무언가를 꿈꾸고 싶었다.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기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문탁
2023.10.06 | 조회 359
기린의 걷다보면
                  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양생을 위한 담론을 생산하고 생업도 마련하는 기회를 잡아 소속을 인문약방 팀으로 옮겨 일리치 약국 정규직이 되었다.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에 도전중이다.     1.준비   작년에 이어 올해는 9월 23일에 기후정의행진이 있다는 소식이 공동체 홈페이지에 올라왔다. 올해 행진에는 소창조각보로 플랭카드를 만들자는 제안도 함께였다. 토요일 오전에 세미나를 하고 시청역까지 가면 본집회는 참여할 수 있는 일정이었다. 행진 2주전, 파지사유 벽면이 하얗게 칠해졌고, 푸른 빛깔로 물들인 커다란 천이 걸렸다. 그 위에 에코실험실에서 활동하는 친구들이 소창조각보에 메시지를 담아 한 장씩 붙여나갔다. 이번 행진의 슬로건인 ‘위기를 넘는 우리의 힘’이라던가 문어, 고래, 녹아내리는 빙하도 보였다. 세미나를 하러 온 친구들을 불러다 소창조각을 내밀면 대부분 진지하게 뭔가를 그리거나 썼다. 내가 속해 있는 ‘양생프로젝트세미나’팀은 요즘 한창 읽고 있는 도나 해러웨이의 책에서 따온 문장들로 조각보를 채웠다. ‘우리는 모두 크리터(미생물, 식물, 동물, 인간과 비인간, 그리고 때로는 기계까지 포함하는 잡다한 것들)다’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 ‘우리는 모두 퇴비다’ 등이었다.      행진 전날, 에코실험실팀이 친구들이 그려준 소창조각보를 떼어내 일일이 이어 시침질을 해서 커다란 플랭카드를 만들었다. 망토로 쓸 수 있는 크기와 몇 사람이 펼쳐서 잡을 수 있는 크기로 두 개로 완성되었다. 작년 행진 때 종이박스를 재활용해서 각자 만들었던 피켓에 비하면 한...
                  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양생을 위한 담론을 생산하고 생업도 마련하는 기회를 잡아 소속을 인문약방 팀으로 옮겨 일리치 약국 정규직이 되었다.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에 도전중이다.     1.준비   작년에 이어 올해는 9월 23일에 기후정의행진이 있다는 소식이 공동체 홈페이지에 올라왔다. 올해 행진에는 소창조각보로 플랭카드를 만들자는 제안도 함께였다. 토요일 오전에 세미나를 하고 시청역까지 가면 본집회는 참여할 수 있는 일정이었다. 행진 2주전, 파지사유 벽면이 하얗게 칠해졌고, 푸른 빛깔로 물들인 커다란 천이 걸렸다. 그 위에 에코실험실에서 활동하는 친구들이 소창조각보에 메시지를 담아 한 장씩 붙여나갔다. 이번 행진의 슬로건인 ‘위기를 넘는 우리의 힘’이라던가 문어, 고래, 녹아내리는 빙하도 보였다. 세미나를 하러 온 친구들을 불러다 소창조각을 내밀면 대부분 진지하게 뭔가를 그리거나 썼다. 내가 속해 있는 ‘양생프로젝트세미나’팀은 요즘 한창 읽고 있는 도나 해러웨이의 책에서 따온 문장들로 조각보를 채웠다. ‘우리는 모두 크리터(미생물, 식물, 동물, 인간과 비인간, 그리고 때로는 기계까지 포함하는 잡다한 것들)다’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 ‘우리는 모두 퇴비다’ 등이었다.      행진 전날, 에코실험실팀이 친구들이 그려준 소창조각보를 떼어내 일일이 이어 시침질을 해서 커다란 플랭카드를 만들었다. 망토로 쓸 수 있는 크기와 몇 사람이 펼쳐서 잡을 수 있는 크기로 두 개로 완성되었다. 작년 행진 때 종이박스를 재활용해서 각자 만들었던 피켓에 비하면 한...
기린
2023.10.06 | 조회 365
정화와 임수의 좌충우돌 가족-되기
            임수(壬) 루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대학원에서 10년을 세포만 쳐다보며 지냈다. 졸업 후 방황하다가 문탁에서 정화(丁) 무사와 사주명리를 만나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요즘이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나 역시 궁금하다.     정임합목 양생하우스 반려식물들을 소개합니다       0. 인트로 : 방울토마토 가위질 대환장 파티   임수 : 정화야.. 정화야.. 방울토마토가 이상해진 거 같아. 내가 사고 쳤나봐ㅠ 정화 : (자고 있다가) 어? 방울토마토가 왜? 임수 : (핸드폰을 들이밀며) 이렇게 잘라주면 된다고 했는데~ 이상하다. 이리와봐 (방울토마토 앞에 모여) 정화 : 어..어.. 이거 좀 이상한데??     정임합목의 ‘방울토마토 가위질 대환장 파티’ 사건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정화가 밤샘근무를 마치고 돌아와 잠든 휴일 아침, 임수는 베란다에 심은 지 한 달 정도 된 방울토마토 모종의 곁순*을 제거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처음 해보는 작업이라 긴장도 했지만 어느새 과감한 가위질이 이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인터넷에서 봤던 곁순치기와 사뭇 달라보였다. 순간 등짝이 오싹해졌고 큰 사고를 쳤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바로 정화를 깨워서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식물과 그리 친하지 않은 정화도 이상하다는 걸 한 번에 감지했다. 곁순이 아닌 원줄기를 모두 잘라서 외목대 방울토마토를 만든 것이다. 식물분자생물학 학위는 초보 식집사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무용지물이었다.   관심이 지나쳐서 반려식물들을 무지개 다리로 몰아넣기도 했고, 바쁠 때는 물주는 것조차 버거웠던 식집사 생활이 거의...
            임수(壬) 루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대학원에서 10년을 세포만 쳐다보며 지냈다. 졸업 후 방황하다가 문탁에서 정화(丁) 무사와 사주명리를 만나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요즘이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나 역시 궁금하다.     정임합목 양생하우스 반려식물들을 소개합니다       0. 인트로 : 방울토마토 가위질 대환장 파티   임수 : 정화야.. 정화야.. 방울토마토가 이상해진 거 같아. 내가 사고 쳤나봐ㅠ 정화 : (자고 있다가) 어? 방울토마토가 왜? 임수 : (핸드폰을 들이밀며) 이렇게 잘라주면 된다고 했는데~ 이상하다. 이리와봐 (방울토마토 앞에 모여) 정화 : 어..어.. 이거 좀 이상한데??     정임합목의 ‘방울토마토 가위질 대환장 파티’ 사건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정화가 밤샘근무를 마치고 돌아와 잠든 휴일 아침, 임수는 베란다에 심은 지 한 달 정도 된 방울토마토 모종의 곁순*을 제거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처음 해보는 작업이라 긴장도 했지만 어느새 과감한 가위질이 이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인터넷에서 봤던 곁순치기와 사뭇 달라보였다. 순간 등짝이 오싹해졌고 큰 사고를 쳤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바로 정화를 깨워서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식물과 그리 친하지 않은 정화도 이상하다는 걸 한 번에 감지했다. 곁순이 아닌 원줄기를 모두 잘라서 외목대 방울토마토를 만든 것이다. 식물분자생물학 학위는 초보 식집사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무용지물이었다.   관심이 지나쳐서 반려식물들을 무지개 다리로 몰아넣기도 했고, 바쁠 때는 물주는 것조차 버거웠던 식집사 생활이 거의...
루틴
2023.10.01 | 조회 404
동물을 만나러 갑니다
        경덕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2022. 7~). 난잡한 공부가 체질이라 여러 세미나와 워크숍을 유랑한다. 난잡함이 지나쳐 찢어진 가랑이를 수습하느라 하반기에는 몸을 사리고 있다.         비질(vigil), 기어코 응시하기     도축장 가는 길   도축장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캘린더에는 '비질(vigil)1) 모임, 9:30, 오산역' 이라고 적혀있었다. 월요일 아침, 나는 출근하는 인간들로 꽉 찬 지하철에 탑승했다.   몸을 비집고 들어가 좌석에 앉아있는 사람들 앞에 섰다. 한참을 가야 해서 자리에 앉고 싶었지만 내 앞에 앉은 사람들은 금방 내릴 것 같지 않았다. 그들은 자고 있거나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그런 태연한 모습이 그날따라 유난히 못마땅했다. 벌써부터 피곤하고 짜증이 올라와 눈을 감고 숨을 깊게 쉬었다. 같은 시간 트럭에 실려오고 있을 돼지들이 떠올랐다. 몇 시간 후면 만나게 될 존재들, 오늘 보고 다시는 못 볼 존재들이었다. 출근길 지하철 인파에 섞여 나는 도축장에 가고 있었다. 자리에 앉지 못해 피곤하고 짜증이 올라오는 상태로 나는 죽기 전의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있었다. 낯설고 기이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오산역에 도착해서 사람들을 만났다. 비질 모임을 주최한 사이 님2), 새벽이생추어리 활동가들, 개별적으로 비질을 신청한 사람들이 모였다. 어느 신문사의 기자 님3)도 나중에 합류했다. 각자 챙겨온 준비물을 점검했다. 돼지들에게 물을 주기 위한 페트병과 물 분사기, 찐 감자와 고구마를 꺼냈다. 물 조절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페트병 뚜껑에는 작은 구멍을 뚫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도 있어 약간...
        경덕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2022. 7~). 난잡한 공부가 체질이라 여러 세미나와 워크숍을 유랑한다. 난잡함이 지나쳐 찢어진 가랑이를 수습하느라 하반기에는 몸을 사리고 있다.         비질(vigil), 기어코 응시하기     도축장 가는 길   도축장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캘린더에는 '비질(vigil)1) 모임, 9:30, 오산역' 이라고 적혀있었다. 월요일 아침, 나는 출근하는 인간들로 꽉 찬 지하철에 탑승했다.   몸을 비집고 들어가 좌석에 앉아있는 사람들 앞에 섰다. 한참을 가야 해서 자리에 앉고 싶었지만 내 앞에 앉은 사람들은 금방 내릴 것 같지 않았다. 그들은 자고 있거나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그런 태연한 모습이 그날따라 유난히 못마땅했다. 벌써부터 피곤하고 짜증이 올라와 눈을 감고 숨을 깊게 쉬었다. 같은 시간 트럭에 실려오고 있을 돼지들이 떠올랐다. 몇 시간 후면 만나게 될 존재들, 오늘 보고 다시는 못 볼 존재들이었다. 출근길 지하철 인파에 섞여 나는 도축장에 가고 있었다. 자리에 앉지 못해 피곤하고 짜증이 올라오는 상태로 나는 죽기 전의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있었다. 낯설고 기이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오산역에 도착해서 사람들을 만났다. 비질 모임을 주최한 사이 님2), 새벽이생추어리 활동가들, 개별적으로 비질을 신청한 사람들이 모였다. 어느 신문사의 기자 님3)도 나중에 합류했다. 각자 챙겨온 준비물을 점검했다. 돼지들에게 물을 주기 위한 페트병과 물 분사기, 찐 감자와 고구마를 꺼냈다. 물 조절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페트병 뚜껑에는 작은 구멍을 뚫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도 있어 약간...
경덕
2023.09.22 | 조회 731
현민의 독국유학기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Heimat   정민   최근엔 정민이 왔다 갔다. 그 애는 나의 바로 밑 동생이다. 세자매 중 나와 정민은 극도로 상극의 삶을 산다. 그 애는 중학생 때부터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느라 12시 이전에 집에 들어온 적이 없다면 나는 친구들과 노느라 12시 전에 집에 들어간 적이 없던 것 같다. 그 애는 꿈이 없는 게 불안해서 공부를 했다면 나는 꿈 같은 거 생길 수 있는 사회냐고 화를 내는 편이었다. 우리가 삶을 사는 모습은 너무나도 다르지만 그 애는 내 인생에서 가장 웃긴 사람 중 하나다. 우리는 서로에게 인생 최고의 개그맨이다. 나의 지겨운 가정사를 가장 잘 아는 사람, 그것으로 극도의 유머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그 애가 유일하다.   한 달이 지나고 공항에 그 애를 데려다주는 길에는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독일에서 만나는 외국인들 중에서도 먼 나라에서 온 편인 나는 그 거리감을 대체로 즐겼다. 하지만 비행기에 앉아서 하루쯤 지나면 도착하는 게 한국이라니 문득 너무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아무 소리나 시작했다. 나 만약에 한국에 돌아가야 되면 어떡하지? 진짜 돌아가야 되면 거기서 뭘 할 수 있지? 정민은 말했다. 왜 자꾸 한국에 돌아갈 생각을 해? 언니...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Heimat   정민   최근엔 정민이 왔다 갔다. 그 애는 나의 바로 밑 동생이다. 세자매 중 나와 정민은 극도로 상극의 삶을 산다. 그 애는 중학생 때부터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느라 12시 이전에 집에 들어온 적이 없다면 나는 친구들과 노느라 12시 전에 집에 들어간 적이 없던 것 같다. 그 애는 꿈이 없는 게 불안해서 공부를 했다면 나는 꿈 같은 거 생길 수 있는 사회냐고 화를 내는 편이었다. 우리가 삶을 사는 모습은 너무나도 다르지만 그 애는 내 인생에서 가장 웃긴 사람 중 하나다. 우리는 서로에게 인생 최고의 개그맨이다. 나의 지겨운 가정사를 가장 잘 아는 사람, 그것으로 극도의 유머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그 애가 유일하다.   한 달이 지나고 공항에 그 애를 데려다주는 길에는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독일에서 만나는 외국인들 중에서도 먼 나라에서 온 편인 나는 그 거리감을 대체로 즐겼다. 하지만 비행기에 앉아서 하루쯤 지나면 도착하는 게 한국이라니 문득 너무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아무 소리나 시작했다. 나 만약에 한국에 돌아가야 되면 어떡하지? 진짜 돌아가야 되면 거기서 뭘 할 수 있지? 정민은 말했다. 왜 자꾸 한국에 돌아갈 생각을 해? 언니...
현민
2023.09.19 | 조회 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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