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일기
          해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국을 탈주한 퀴어다. 판에 박힌 일상과 화폐 증식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미국 생활에서 성정체성으로 인해 무시 당하거나 차별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다양한 배경의 소수자들이 정착하는 대도시들에서만 살았고, 내가 이주한 이후  동성애자의 법적 권리가 빠른 속도로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공적인 영역에서는 성지향성으로 인한 차별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법과 시스템이 잘 마련되어 있었다. 일터와 학교에서는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명시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일자리에 지원하는 과정에서도 성지향성 뿐 아니라 나이, 출신국, 시민권 여부를 밝히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일을 꾸준히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제도적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퀴어 공동체에서 나의 인종, 국적, 이민자로서의 지위 등이  쉽게 수용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남들과 ‘다름’으로 인해 배제를 경험했던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나를 ‘다른’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미묘한 배제를 경험했다. 당시 게이 남성들은  LGBT 포털 사이트나 온라인 데이트 서비스를 통해 친구를 만들거나  데이트 상대를 만났다. 난 연애 상대를 찾는 상당수의 게시물들을 보고 흠칫 놀랐다. 그 글들은 본인이 찾는 이상적 상대의 조건들을 열거한 후, 마지막에 “흑인과 동양인은 제외”라는 문구로 마무리 되어 있었다. 이 끝 문장의 모든 글자들은 대문자로 강조되어 있었다. 왜 카스트로에서 흑인들을 보기 어려운지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어떤 이는 내게 시민권자인지 물었다. 만일 시민권이 없다면 골치 아프니 친구나 연애 상대에서 제외시키겠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나의 피부색과 이방인으로서의 위치로 인한 배제를 경험하면서 내상을 입었다. 머리 속에선 내가 아니라 수면 아래에서 작동하는 공동체 내 소수자 소외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몸과 마음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다. 우선 상대의 무지와 배려심 부족에 화가 났다. 실망스러웠다. 특정하기 힘든 감정이 일어났다. 당시에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것은 수치심이었다. 난 차별이나 부당한 대우에 대해 크게 저항하지 않았다. 나의 성정체성을 애써 감추지 않아도 되는 샌프란 시스코가 여전히 좋았다. 어딜 가든 세상은 완벽할 수 없으니 어쩌다 겪는 부당함을 어느 정도 안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신 내가 소수자의 위치에 놓이게 되는 상황을 가능한 최선을 다해 피하고 싶었다. 이러한 생각은 아이러니하게도 게이 공동체에서 소수자인 내가, 집단 내 주류의 문화와 생활 방식에 동화되고 싶은 욕망을 갖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미디어와 책으로 접한 미국의 퀴어 공동체는 연대, 상호 부조, 성적인 자유, 저항의 정신을 기반으로 하는 이상적인 것이었다. 2000년 대 후반 이후 내가 목격한 것은 이와는 차이가 있었다. 당시 많은 이들이 샌프란시스코 베이를 조망할 수 있는 넓은 집, 안정적 관계를 맺고 있는 파트너, 성공적인 커리어, 식스팩이 선명한 근육질의 몸 등을 욕망했다. 중산층 출신의 젊은 백인들, 그 중에서도 전문직이나 안정적 직장을 가진 이들이 접근 가능한 것이었다. 이를 성취했거나 바라는 이들은 동성애자 인권에 민감하고 진보 정치를 옹호하는 이들과 동일한 사람들이었다. 남성 동성애자들의 욕망이 주류 이성애자들과 별 차이가 없어진 것은, 동성애자 인권의 향상과 신자유주의의 영향력 확산 등 사회 경제적 조건에 일부 원인이 있을 것이다. 난 퀴어 공동체 내 이런 주류 문화가 불편했다. 소비주의적 욕망이 과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나와 비슷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찾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나 또한 거기에 합류하고 싶었다.  양쪽 발이 안되면 한 발이라도 걸치고 싶었다.    당시 나는 중산층 게이 시민이 되기엔 자격 미달이었다. ‘표준’(?) 신체에 비해 왜소한 몸, 한국식 억양이 들어간 영어, 미국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스펙, (초기) 임시 영주권자로서의 지위. 난 가능한 것들은 노력으로 극복하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안정적 일자리를 얻을 방법을 모색했다. 미국 사회에서 통할 수 있는사회 문화적 자본이 부족한 상태라 힘에 부쳤다. 공부에 관심이 없었음에도 학교를 다녔고 일터에서도 인정받기 위해 애썼다. 나의 한국식 액센트가 의사소통에 별 지장을 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교정하려 했다. 어수룩한 이민자로 보일까 염려되어서였다.        왼쪽은 실화를 바탕으로 동성애자의 인권에 대해 환기했던 영화 <필라델피아> (1994), 오른쪽은 두 커플의 남성이 서로 사랑해서 원래의 부인과 이혼하고 동성결혼하여 제2의 인생을 사는 내용이 담긴, 넷플릭스 드라마 <그레이스 앤 프랭키> 그런데 둘 다 주인공 직업이 변호사이다. 그리고 모두 백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2인가족을 만들고 싶었다. 이를 평생 유지하고 싶었다.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관계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한 사람에게 헌신하는 관계가 여러 다양한 관계 형태 중 하나일 뿐이라고 받아들였다 (퀴어 공동체에는 아직 법적 인정을 받지 못하는 다양한 관계들이 존재한다) . 주위의 친구들도 결혼으로 맺어지지 않은 관계들을 쿨하게 받아들인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법적으로 인정 받은 커플이나 장기간의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을 보다 ‘도덕적’이라고 여긴다. 나 또한 이러한 암묵적인 도덕 규범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 글을 쓰면서 그동안 깊이 생각하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과  마주해야 했다. 나의   소수자로서의 조건들에 대해 강한 수치심을 내가 느꼈다는 것이다. 왜 그동안 이를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했을까. 수치심을 인정하면 내가 초라하고 가치 없는 존재가 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류의 가치관과 생활 양식에 한편으로는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난 그것들을 욕망했다. 소수자 공동체 내에서 다시금 소수자가 되도록 하는 나의 정체성들을 과도하게 의식하고 감추려 했다. 실제로는 내 배경에 부끄러움을 느낀 셈이다. 수치심을 인정하지 못해서 생긴 모순으로 인해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이성애 규범이 성소수자에게 미치는 잔인함에 민감하게 반응하였지만 제2언어 구사자, 이민자, 시간제 노동자 등이 겪는 (나도 일부 경험한) 차별이나 어려움들엔 고개를 돌리거나 무감각해졌다. 게이 공동체 내부의 주류적 규범과 생활방식이 그 안의 소수자들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싶어 했다. 수치심을 느끼지 않기 위한 방어책이었다. 결국 나 또한 퀴어 공동체의 정상성 규범이 강화되는 데 기여한 셈이다.        김조광수 감독의 영화 <메이드 인 루프탑>                            
          해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국을 탈주한 퀴어다. 판에 박힌 일상과 화폐 증식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미국 생활에서 성정체성으로 인해 무시 당하거나 차별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다양한 배경의 소수자들이 정착하는 대도시들에서만 살았고, 내가 이주한 이후  동성애자의 법적 권리가 빠른 속도로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공적인 영역에서는 성지향성으로 인한 차별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법과 시스템이 잘 마련되어 있었다. 일터와 학교에서는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명시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일자리에 지원하는 과정에서도 성지향성 뿐 아니라 나이, 출신국, 시민권 여부를 밝히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일을 꾸준히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제도적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퀴어 공동체에서 나의 인종, 국적, 이민자로서의 지위 등이  쉽게 수용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남들과 ‘다름’으로 인해 배제를 경험했던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나를 ‘다른’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미묘한 배제를 경험했다. 당시 게이 남성들은  LGBT 포털 사이트나 온라인 데이트 서비스를 통해 친구를 만들거나  데이트 상대를 만났다. 난 연애 상대를 찾는 상당수의 게시물들을 보고 흠칫 놀랐다. 그 글들은 본인이 찾는 이상적 상대의 조건들을 열거한 후, 마지막에 “흑인과 동양인은 제외”라는 문구로 마무리 되어 있었다. 이 끝 문장의 모든 글자들은 대문자로 강조되어 있었다. 왜 카스트로에서 흑인들을 보기 어려운지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어떤 이는 내게 시민권자인지 물었다. 만일 시민권이 없다면 골치 아프니 친구나 연애 상대에서 제외시키겠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나의 피부색과 이방인으로서의 위치로 인한 배제를 경험하면서 내상을 입었다. 머리 속에선 내가 아니라 수면 아래에서 작동하는 공동체 내 소수자 소외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몸과 마음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다. 우선 상대의 무지와 배려심 부족에 화가 났다. 실망스러웠다. 특정하기 힘든 감정이 일어났다. 당시에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것은 수치심이었다. 난 차별이나 부당한 대우에 대해 크게 저항하지 않았다. 나의 성정체성을 애써 감추지 않아도 되는 샌프란 시스코가 여전히 좋았다. 어딜 가든 세상은 완벽할 수 없으니 어쩌다 겪는 부당함을 어느 정도 안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신 내가 소수자의 위치에 놓이게 되는 상황을 가능한 최선을 다해 피하고 싶었다. 이러한 생각은 아이러니하게도 게이 공동체에서 소수자인 내가, 집단 내 주류의 문화와 생활 방식에 동화되고 싶은 욕망을 갖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미디어와 책으로 접한 미국의 퀴어 공동체는 연대, 상호 부조, 성적인 자유, 저항의 정신을 기반으로 하는 이상적인 것이었다. 2000년 대 후반 이후 내가 목격한 것은 이와는 차이가 있었다. 당시 많은 이들이 샌프란시스코 베이를 조망할 수 있는 넓은 집, 안정적 관계를 맺고 있는 파트너, 성공적인 커리어, 식스팩이 선명한 근육질의 몸 등을 욕망했다. 중산층 출신의 젊은 백인들, 그 중에서도 전문직이나 안정적 직장을 가진 이들이 접근 가능한 것이었다. 이를 성취했거나 바라는 이들은 동성애자 인권에 민감하고 진보 정치를 옹호하는 이들과 동일한 사람들이었다. 남성 동성애자들의 욕망이 주류 이성애자들과 별 차이가 없어진 것은, 동성애자 인권의 향상과 신자유주의의 영향력 확산 등 사회 경제적 조건에 일부 원인이 있을 것이다. 난 퀴어 공동체 내 이런 주류 문화가 불편했다. 소비주의적 욕망이 과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나와 비슷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찾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나 또한 거기에 합류하고 싶었다.  양쪽 발이 안되면 한 발이라도 걸치고 싶었다.    당시 나는 중산층 게이 시민이 되기엔 자격 미달이었다. ‘표준’(?) 신체에 비해 왜소한 몸, 한국식 억양이 들어간 영어, 미국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스펙, (초기) 임시 영주권자로서의 지위. 난 가능한 것들은 노력으로 극복하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안정적 일자리를 얻을 방법을 모색했다. 미국 사회에서 통할 수 있는사회 문화적 자본이 부족한 상태라 힘에 부쳤다. 공부에 관심이 없었음에도 학교를 다녔고 일터에서도 인정받기 위해 애썼다. 나의 한국식 액센트가 의사소통에 별 지장을 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교정하려 했다. 어수룩한 이민자로 보일까 염려되어서였다.        왼쪽은 실화를 바탕으로 동성애자의 인권에 대해 환기했던 영화 <필라델피아> (1994), 오른쪽은 두 커플의 남성이 서로 사랑해서 원래의 부인과 이혼하고 동성결혼하여 제2의 인생을 사는 내용이 담긴, 넷플릭스 드라마 <그레이스 앤 프랭키> 그런데 둘 다 주인공 직업이 변호사이다. 그리고 모두 백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2인가족을 만들고 싶었다. 이를 평생 유지하고 싶었다.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관계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한 사람에게 헌신하는 관계가 여러 다양한 관계 형태 중 하나일 뿐이라고 받아들였다 (퀴어 공동체에는 아직 법적 인정을 받지 못하는 다양한 관계들이 존재한다) . 주위의 친구들도 결혼으로 맺어지지 않은 관계들을 쿨하게 받아들인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법적으로 인정 받은 커플이나 장기간의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을 보다 ‘도덕적’이라고 여긴다. 나 또한 이러한 암묵적인 도덕 규범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 글을 쓰면서 그동안 깊이 생각하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과  마주해야 했다. 나의   소수자로서의 조건들에 대해 강한 수치심을 내가 느꼈다는 것이다. 왜 그동안 이를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했을까. 수치심을 인정하면 내가 초라하고 가치 없는 존재가 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류의 가치관과 생활 양식에 한편으로는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난 그것들을 욕망했다. 소수자 공동체 내에서 다시금 소수자가 되도록 하는 나의 정체성들을 과도하게 의식하고 감추려 했다. 실제로는 내 배경에 부끄러움을 느낀 셈이다. 수치심을 인정하지 못해서 생긴 모순으로 인해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이성애 규범이 성소수자에게 미치는 잔인함에 민감하게 반응하였지만 제2언어 구사자, 이민자, 시간제 노동자 등이 겪는 (나도 일부 경험한) 차별이나 어려움들엔 고개를 돌리거나 무감각해졌다. 게이 공동체 내부의 주류적 규범과 생활방식이 그 안의 소수자들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싶어 했다. 수치심을 느끼지 않기 위한 방어책이었다. 결국 나 또한 퀴어 공동체의 정상성 규범이 강화되는 데 기여한 셈이다.        김조광수 감독의 영화 <메이드 인 루프탑>                            
문탁
2023.11.22 | 조회 118
현민의 독국유학기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미친 인간들의 안전한 파티   나의 셰어하우스에는 풀타임 직장인이 두 명 있다. 그들은 아침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한다. 그들은 거의 홈 오피스를 해서 집에서 자주 보이지만 늘 지쳐있고, 하루만 사무실에 다녀오는 날에는 진을 다 빼고 온다. ‘일하기’는 중요하지만 앞으로 남은 모든 날을 이렇게 하루하루 진을 빼며 사는 것인가 가늠해 보기 시작하면 주 4일제 실현이 간절해진다. 이들이 일만큼 열심히 하는 것이 있다면 저녁에 부엌에 둘러앉아 담배를 물고 진토닉을 마시기 시작하다가, 주방에 있는 큰 스피커에 노래를 연결해 테크노 음악을 틀기 시작한 후 자정쯤 파티에 가거나, 지하실에 내려가 디제잉을 하며 파티를 벌이는 것이 있다. 매주 서너 병의 진을 사와 자신들이 다 마신 사실을 잊고 그 술들이 다 어디 갔냐고 묻는 사람들. 이들의 특징으로는 파티와 술과 담배 따위에 매우 후하다는 점이 있다. 자신이 마셔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이들, 함께 마실 사람이 항상 필요한 이들. 제안하면 거절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들과 잦은 파티를 가진다. 우리는 종종 방탕히 노는 시간으로부터 삶의 아름다움을 본다. 그럴 때가 오면 가끔은 해야 할 일을 못 해도, 밥을 못 먹어도 즐겨 마땅했다는 확신이 든다.   독일 클럽에는 무엇이 있는가   나의...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미친 인간들의 안전한 파티   나의 셰어하우스에는 풀타임 직장인이 두 명 있다. 그들은 아침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한다. 그들은 거의 홈 오피스를 해서 집에서 자주 보이지만 늘 지쳐있고, 하루만 사무실에 다녀오는 날에는 진을 다 빼고 온다. ‘일하기’는 중요하지만 앞으로 남은 모든 날을 이렇게 하루하루 진을 빼며 사는 것인가 가늠해 보기 시작하면 주 4일제 실현이 간절해진다. 이들이 일만큼 열심히 하는 것이 있다면 저녁에 부엌에 둘러앉아 담배를 물고 진토닉을 마시기 시작하다가, 주방에 있는 큰 스피커에 노래를 연결해 테크노 음악을 틀기 시작한 후 자정쯤 파티에 가거나, 지하실에 내려가 디제잉을 하며 파티를 벌이는 것이 있다. 매주 서너 병의 진을 사와 자신들이 다 마신 사실을 잊고 그 술들이 다 어디 갔냐고 묻는 사람들. 이들의 특징으로는 파티와 술과 담배 따위에 매우 후하다는 점이 있다. 자신이 마셔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이들, 함께 마실 사람이 항상 필요한 이들. 제안하면 거절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들과 잦은 파티를 가진다. 우리는 종종 방탕히 노는 시간으로부터 삶의 아름다움을 본다. 그럴 때가 오면 가끔은 해야 할 일을 못 해도, 밥을 못 먹어도 즐겨 마땅했다는 확신이 든다.   독일 클럽에는 무엇이 있는가   나의...
현민
2023.11.21 | 조회 371
남어진의 현장분투기
                  심장병은 응급실 1순위 ​ 두해 전 즈음, 2020년 12월 초 겨울이었다. 11월부터 바깥에서 데크를 만드는 작업을 했다. 손도 얼고 드릴도 어는 추위가 찾아왔지만 마감 날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 날도 종일 열심히 일했다. 겨울에 종일 바깥에서 일하다가 집으로 들어오면 몸이 녹진녹진해지면서 모든 의욕이 다 사라진다.   겨울에 바깥에 오래 나가 있으면 몸이 퉁퉁 붓는데, 부었던 몸이 녹을 때까지, 씻지도 않고 방바닥에 들러붙어 있다가 자기 직전에 어쩔 수 없이 씻었다. 씻고 나오는데 식은땀이 나면서 어질어질하길래 ‘어 몸이 이상하네?’라고 생각하며 물을 마셨다. 물을 마시던 중에 쓰러졌다. 일어나 보니 2ℓ짜리 생수가 거실 바닥에 다 쏟아져 있었다. 내가 정신을 잃었던 것인지, 잤던 것인지 모르겠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빨래 바구니에 들어있는 수건을 가져와 방바닥을 닦고 나니, 그제서야 무서웠다.   “아…… 나 죽을 뻔했네?”   나는 보통 심각하다고 판단되는 외상이 없으면 병원은 쳐다보지도 않고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날은 느낀 적 없던 공포가 찾아왔다. ‘혼자 사는 내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는데, 쓰러지다가 재수없게 머리를 박았거나 심장이 멈췄더라면 죽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다음날 동네 병원에 가서 이런저런 검사를 받고, 부정맥이 의심된다며 대학 병원에 가보라는 의뢰서를 받았다. 뭘 대학 병원까지 가냐, 하는 생각에 집으로 갔다. 그런데 다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완전 쫄아 버린 나는 결국 응급실로...
                  심장병은 응급실 1순위 ​ 두해 전 즈음, 2020년 12월 초 겨울이었다. 11월부터 바깥에서 데크를 만드는 작업을 했다. 손도 얼고 드릴도 어는 추위가 찾아왔지만 마감 날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 날도 종일 열심히 일했다. 겨울에 종일 바깥에서 일하다가 집으로 들어오면 몸이 녹진녹진해지면서 모든 의욕이 다 사라진다.   겨울에 바깥에 오래 나가 있으면 몸이 퉁퉁 붓는데, 부었던 몸이 녹을 때까지, 씻지도 않고 방바닥에 들러붙어 있다가 자기 직전에 어쩔 수 없이 씻었다. 씻고 나오는데 식은땀이 나면서 어질어질하길래 ‘어 몸이 이상하네?’라고 생각하며 물을 마셨다. 물을 마시던 중에 쓰러졌다. 일어나 보니 2ℓ짜리 생수가 거실 바닥에 다 쏟아져 있었다. 내가 정신을 잃었던 것인지, 잤던 것인지 모르겠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빨래 바구니에 들어있는 수건을 가져와 방바닥을 닦고 나니, 그제서야 무서웠다.   “아…… 나 죽을 뻔했네?”   나는 보통 심각하다고 판단되는 외상이 없으면 병원은 쳐다보지도 않고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날은 느낀 적 없던 공포가 찾아왔다. ‘혼자 사는 내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는데, 쓰러지다가 재수없게 머리를 박았거나 심장이 멈췄더라면 죽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다음날 동네 병원에 가서 이런저런 검사를 받고, 부정맥이 의심된다며 대학 병원에 가보라는 의뢰서를 받았다. 뭘 대학 병원까지 가냐, 하는 생각에 집으로 갔다. 그런데 다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완전 쫄아 버린 나는 결국 응급실로...
문탁
2023.11.13 | 조회 283
기린의 걷다보면
          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양생을 위한 담론을 생산하고 생업도 마련하는 기회를 잡아 소속을 인문약방 팀으로 옮겨 일리치 약국 정규직이 되었다.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에 도전중이다.     나는 남산 밑에 자리했던(지금은 안산으로 옮긴)예술대학을 다녔다. 지하철 4호선 명동역에서 퍼시픽호텔이 있는 방향으로 나와서 경사진 골목을 올라가면 강의를 듣던 건물이 있었다. 그 골목을 끝까지 올라가면 남산자락으로 통했다. 하지만 나는 학교를 다닐 때 한 번도 골목 끝까지 올라 남산까지 가본 적이 없었다. 학교에서 집까지 거리가 멀기도 했고, 주말에는 2년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학교 집만 오가며 보냈던 것 같다. 10월에 날씨 좋을 때 남산 둘레길을 걷자고 친구들과 약속을 잡았다. 학교를 졸업한지 25년이 흘러갔는데 그 골목은 그대로일지 궁금했다. 10월 15일 일요일, 서울 시청까지 가는 광역버스를 타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뭔지 모르게 설레었다.   약속장소인 덕수궁 앞에서 먼저 와있던 두 친구를 만났다. 공동체에서 만나 함께 공부하고 밥 먹고 활동하다 보니 따로  보면 각각 다르지만, 뭉쳐 있으면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닮아 보이는 사이가 된 친구들이다. 안으로 들어가 국립현대 미술관 덕수궁에서 <가장 진지한 고백: 장욱진 회고전>을 관람했다. 이름은 처음 듣는 화가였는데, 그림은 달력에서 본 기억이 나는 그림도 있었다. 한 친구는 그림 한 점 한 점을 대하는 폼이 참으로 진지해서 전시회의 제목에 걸맞은 관람객이었다. 반면,...
          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양생을 위한 담론을 생산하고 생업도 마련하는 기회를 잡아 소속을 인문약방 팀으로 옮겨 일리치 약국 정규직이 되었다.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에 도전중이다.     나는 남산 밑에 자리했던(지금은 안산으로 옮긴)예술대학을 다녔다. 지하철 4호선 명동역에서 퍼시픽호텔이 있는 방향으로 나와서 경사진 골목을 올라가면 강의를 듣던 건물이 있었다. 그 골목을 끝까지 올라가면 남산자락으로 통했다. 하지만 나는 학교를 다닐 때 한 번도 골목 끝까지 올라 남산까지 가본 적이 없었다. 학교에서 집까지 거리가 멀기도 했고, 주말에는 2년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학교 집만 오가며 보냈던 것 같다. 10월에 날씨 좋을 때 남산 둘레길을 걷자고 친구들과 약속을 잡았다. 학교를 졸업한지 25년이 흘러갔는데 그 골목은 그대로일지 궁금했다. 10월 15일 일요일, 서울 시청까지 가는 광역버스를 타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뭔지 모르게 설레었다.   약속장소인 덕수궁 앞에서 먼저 와있던 두 친구를 만났다. 공동체에서 만나 함께 공부하고 밥 먹고 활동하다 보니 따로  보면 각각 다르지만, 뭉쳐 있으면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닮아 보이는 사이가 된 친구들이다. 안으로 들어가 국립현대 미술관 덕수궁에서 <가장 진지한 고백: 장욱진 회고전>을 관람했다. 이름은 처음 듣는 화가였는데, 그림은 달력에서 본 기억이 나는 그림도 있었다. 한 친구는 그림 한 점 한 점을 대하는 폼이 참으로 진지해서 전시회의 제목에 걸맞은 관람객이었다. 반면,...
기린
2023.11.06 | 조회 414
정화와 임수의 좌충우돌 가족-되기
  (정임합목형) 무진장 실험   2023.10.31. 정화편 Designed by Cho-hui           (앞으로 꽃길만 걷고 싶은) 백수 꿈나무 살림의료사회적협동조합 조합원, 희망법/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한국성폭력상담소 후원회원 문탁에서 함께 공부하던 임수를 꼬드겨 '쫌 다른 가족-되기' 실험 중 소박하게 꾸린 정임합목 양생하우스에서 앎과 삶에 관해 질문하며 살고 있다.     2024 제주 일년살이   추석 연휴에 임수와 제주 여행을 다녀왔다. 조천 바닷가 부근 한 곳에만 오래 머물렀다. 특별한 계획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햇살 가득한 바닷가 산책을 하고 요가를 했다. 충분히 쉬면서 (읽어야할 책 말고) 읽고 싶었던 책을 읽었다. 설렁설렁 동네길을 걷고 동네 이모네집(옥이이모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짐은 단출했다. 캐리어 두 개와 간단한 음식만으로 보름을 사는데 크게 불편함은 없었다. 한림 <달리책방>에 가보기도 했다. 이곳에서 올 3월 문탁샘(<이반일리치 강의>)과 기린샘(<나는 공동체로 출근한다>)의 북토크가 열렸었다. 쥔장분들(달리님, 어리님)은 명절 첫 손님이라며 반갑게 맞아주셨고 대화는 1박 2일 동안 종횡무진 이어졌다. 루틴 보살의 사주토크, 북토크 뒷이야기, 책이야기, 나무이야기를 하며 일상을 나누었고, 맛집에서의 저녁 식사, 해장국, 느지리오름 아침 산책, 커피까지 더할나위 없는 시간이었다. 섬에서 명절을 보내는 이들을 위한 <무조리실>의 제주토박이 명절정찬도 감사한 식사였다. 이뿐이랴. 함덕 서우봉에서 바라본 슈퍼문, 붉은오름 정상에서 마주한 오름군 파노라마, 친구들이 소개해 준 사라봉, 별도봉의 산책길도 참 예뻤다. 바로 이 별도봉 산책길에서 작당모의가 시작되었다. 제주도립미술관 국제특별전 전시 주제(이주하는 인간, Homo migratio)마저 우리의 등을 떠밀었다. 그동안의 제주...
  (정임합목형) 무진장 실험   2023.10.31. 정화편 Designed by Cho-hui           (앞으로 꽃길만 걷고 싶은) 백수 꿈나무 살림의료사회적협동조합 조합원, 희망법/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한국성폭력상담소 후원회원 문탁에서 함께 공부하던 임수를 꼬드겨 '쫌 다른 가족-되기' 실험 중 소박하게 꾸린 정임합목 양생하우스에서 앎과 삶에 관해 질문하며 살고 있다.     2024 제주 일년살이   추석 연휴에 임수와 제주 여행을 다녀왔다. 조천 바닷가 부근 한 곳에만 오래 머물렀다. 특별한 계획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햇살 가득한 바닷가 산책을 하고 요가를 했다. 충분히 쉬면서 (읽어야할 책 말고) 읽고 싶었던 책을 읽었다. 설렁설렁 동네길을 걷고 동네 이모네집(옥이이모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짐은 단출했다. 캐리어 두 개와 간단한 음식만으로 보름을 사는데 크게 불편함은 없었다. 한림 <달리책방>에 가보기도 했다. 이곳에서 올 3월 문탁샘(<이반일리치 강의>)과 기린샘(<나는 공동체로 출근한다>)의 북토크가 열렸었다. 쥔장분들(달리님, 어리님)은 명절 첫 손님이라며 반갑게 맞아주셨고 대화는 1박 2일 동안 종횡무진 이어졌다. 루틴 보살의 사주토크, 북토크 뒷이야기, 책이야기, 나무이야기를 하며 일상을 나누었고, 맛집에서의 저녁 식사, 해장국, 느지리오름 아침 산책, 커피까지 더할나위 없는 시간이었다. 섬에서 명절을 보내는 이들을 위한 <무조리실>의 제주토박이 명절정찬도 감사한 식사였다. 이뿐이랴. 함덕 서우봉에서 바라본 슈퍼문, 붉은오름 정상에서 마주한 오름군 파노라마, 친구들이 소개해 준 사라봉, 별도봉의 산책길도 참 예뻤다. 바로 이 별도봉 산책길에서 작당모의가 시작되었다. 제주도립미술관 국제특별전 전시 주제(이주하는 인간, Homo migratio)마저 우리의 등을 떠밀었다. 그동안의 제주...
musa
2023.10.31 | 조회 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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