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회> 오래 보아야 예쁘다

루틴
2023-11-30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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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壬) 루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대학원에서 10년을 세포만 쳐다보며 지냈다.

졸업 후 방황하다가 문탁에서 정화(丁) 무사와 사주명리를 만나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요즘이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나 역시 궁금하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 

 

1. 오래된 장식품

 

우리 집 책장은 책으로 가득 차있지만 항상 한켠에는 여유 공간이 있다. 여행에서 가져온 작은 소품들, 엽서들을 전시한다. 12월이 되면 어김없이 작은 트리, 루돌프인형, 희미한 조명들까지 그 공간을 채운다. 이제 곧 크리스마스임을 알 수 있다. 정화의 감성으로 한껏 포근해진 공간을 임수는 감사히 즐긴다.

 

정화는 어릴 적부터 크리스마스트리 주변의 따뜻한 빛이 좋았다고 한다. 모태신앙의 영향인데 개종의 과정 중에 있는 지금도 정화는 자신만의 리츄얼로 12월이 되면 크리스마스 장식품을 꺼내서 책장의 한켠을 꾸민다. 그 장식품 안에는 10년의 세월을 훌쩍 넘긴 물건들이 있다. 모두 빛에 바래지도 않았고 깔끔하다. 정화가 말하기 전까지 그렇게 오래된 줄 몰랐을 정도였다.

 

올해도 어김없이 책장 한켠을 채운 크리스마스 트리와 그 친구들

 

우리 집에는 오래된 물건들이 많다. 물론 큰집으로 이사 오면서 새로운 가구들도 많이 늘어났지만 여전히 오래된 물건들이 많다. 임수도 물욕이 많지 않기도 하고 새로운 걸 잘 사질 않으니 오래된 물건들이 종종 있다. 하지만 정화와 임수의 물건상태는 사뭇 다르다. 정화의 물건들은 트렌디하지는 않지만 제 역할을 다한다. 깔끔하고 정돈되어있으며 심지어 사랑을 받는 듯 은은한 광택이 돈다.

 

2. 정화의 생활명품

 

11월 25일 토요일자 경향신문에 미니멀리즘과 관련된 칼럼이 하나 실렸다. 이 칼럼에서 다룬 <단순한 열망>에서는 상업적 미니멀리즘 트렌드의 한 갈래로 ‘이케아 미니멀리즘’을 소개한다. 일반적으로 미니멀리즘은 ‘세련된 라이프스타일’처럼 여겨져 왔는데 가성비 좋기로 유명한 이케아와는 언뜻 매치되지 않아 보였다. 이케아 미니멀리즘이란 한번 쓰고 버려도 상관없는 값싼 물건들을 사는 ‘가성비’ 좋은 소비를 일컫는 말이다. 물건의 의미를 상실한 채 언제든 대체가능한 물건을 소비하는 현상은 값싼 노동력과 환경오염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지적하며 주변 물건과 좋은 관계 맺기에 대해서 사유한다.

 

 미니멀한 환상

 

임수는 물욕이 없고 대체로 가성비 좋은 물건을 구매하는 편인데, 이러한 소비성향이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무소유'와 가까워 보여 나름 자부심을 느껴왔지만, 사실 물건과의 관계맺기를 포기해 버리는 이케아 미니멀리즘은 아닐까? 의구심이 들었다. 물건과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은 물건을 험하게 쓰는 태도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그에 비해 정화는 일상을 풍요롭게 하는 물건을 종종 사는 편이다. 양쪽 날이 분리되는 가위, 초경량 휴대용 독서대, 크기를 반으로 줄인 종이티슈, 발목을 조이지 않는 방한양말 등등. 임수가 생각하지도 못한 생활 속 불편한 점을 찾아내서 일상을 좀 더 윤택하게 하는 물건들이 많다. 보통 이런 생활물품을 소비하다보면 물건에 지배되는 경우가 많고 자본주의에 이끌려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사는 경우가 허다한데, 정화는 좀 달랐다. 자신의 생활에 꼭 맞는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는 물건을 잘 찾는 안목이 있었다. 가히 정화의 ‘생활명품’들이었다(<윤광준의 생활명품 101> 중)

 

윤광준의 생활명품 101선

 

정화의 생활명품은 쓰는 사람과 물건의 TPO(Time, Place, Occasion)가 적절하다. 쓰는 사람의 입장만이 아니라 그 물건이 제 역할을 하도록 돕는다. 쓰고 난 뒤 정리는 물론이고, 망가져있으면 방치하지 않고 보수하고, 떠나보내야 할 때는 감사함을 표시한다. 새로운 물건으로 대체되어도 옛날 물건과의 추억을 종종 떠올리기도 한다. 정화는 값에 상관없이 자신의 삶 속에서 함께하는 물건들을 참 소중히 여긴다. 정화에게 물건은 한번 쓰고 버려도 상관없는 언제든 교체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정화와 함께하는 물건들은 자연스레 생활명품 반열에 오른다.

 

정화의 생활명품들

 

물건에게도 예를 다한다고 생각을 하니 물건에 대한 집착으로 보이던 정화의 태도가 물건과 소통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임수는 사람들을 부품처럼 취급하는 자본주의 실상에 대해서는 분노하면서 정작 물건은 함부로 쓴다. 인간중심적 태도가 여실히 드러난다.

 

임수는 오래된 물건이지만 엣지있게 잘 사용하고 싶은 로망이 있다. 어느 도시의 오래된 건물이나 물건에 빛이 날 때 왠지 모를 따뜻함을 느낀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귀찮아서 대충 쓰게 되거나 또는 안 쓰고 말지가 된다. 그러다보니 제대로 소비하는 즐거움마저 잃게 된다.

 

3. 전전긍긍이 아닌 건건함으로

 

물건에도 예를 다하는 정화의 비결은 뭘까? 유독 정화의 물건에서 광이 나는 이유가 따로 있을까? 자신이 머무는 공간을 느낌 있게 바꾸는 일은 단순히 감성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옆에서 차근히 지켜보니 감성을 넘어 성실함이 동반된다. 정화는 물건을 보좌하듯이 바삐 움직인다. 때가 되면 꺼내서 닦고, 사용할 때도 햇빛에 바래지 않게 위치를 조절하고, 혹시나 망가진 부분이 있으면 수리한다. 계절 물건은 방치하지 않고 깨끗하게 닦아서 먼지가 앉지 않게 잘 보관해둔다. 그러면 다음해에 그 물건이 같은 자리를 또 채운다.

 

크리스마스 장식품뿐 아니라 계절별 이불과 옷, 선풍기, 온열기, 자동차, 하루하루 사용한 물건들 모두 감사히 사용하고 제 위치에 정돈해놓는다. 한번은 브리타 정수기통 아래가 조금 깨져서 울퉁불퉁해졌었다. 정화는 싱크대 상판이 긁히지 않고 깨진 부위가 더 커지지 않도록 정수기통의 위치를 실리콘 받침대 위로 정한 후 임수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부탁의 말도 남긴다. 하지만 임수의 스케일에는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다. 정화와 임수는 물건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어긋남이 있었다. 별 생각 없이 밑바닥이 거친 브리타 정수기통을 싱크대 상판에 함부로 두는 순간 정화의 잔소리가 날아온다. 한소리 들은 임수는 괜히 심통이 난다.  

 

임수도 정화가 잘 관리한 물건과 공간을 쓸 때는 기분이 참 좋다. 하지만 자신도 지켜야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귀찮고 답답해진다. 그런 정화에게 "이런 거 다 지키고 살면 치매 걸린다"고 훈수를 둔 적도 있다. 집에서 조차 살얼음 걷듯 전전긍긍하는 모습처럼 비춰지기도 했다. 임수에게는 상기를 계속 시켜도 놓치는 것들이 정화에게는 몸속 어딘가에 자동키가 켜지듯이 스텝바이스텝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구삼효, 군자가 종일토록 그침 없이 힘쓰며 저녁이 되어도 두려운 듯이 하면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다.” <내 인생의 주역 1.중천건, 전전긍긍이 아니라 종일건건>

 

청소를 한번 할라 치면 임수는 물을 사방 군데 다 튀겨가며 그동안 미뤄놨던 청소란 청소를 다하고 지쳐서는 다른 일들은 뒷전이다. 반면 정화는 소리 없이 사부작 사부작 일을 한다. 임수입장에서는“청소 했었어?”이럴 정도로 소소하게 그리고 꾸준히 한다. 소소하다는 건 청소를 한 번에 끝내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늘은 변기, 내일은 욕조 이렇게 나눠서 한다. 근데 하루하루가 쌓이다 보니 정화의 손길이 닿지 않는 물건과 공간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에서 윤이 나는 굉장히 신기한 체험을 하게 된다.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초반에 많이 싸웠던 이유 중에 하나였다. 한번 할 때 끝장을 보는 임수와 달리 조금씩 건건히 하는 정화, 사주를 공부한 뒤 임수는 변명을 해보기도 했다. 정화는 안정적인 기운을 타고났으니 주변 환경이 안정적이어서 건건하게 일을 할 수 있는 것이고 임수는 불안정한 기운을 타고났으니 물들어왔을 때 노를 저어야한다고 말이다. 

 

정화는 좋아하는 걸 오래 즐기기 위해서 한 번에 에너지를 쏟지 않고 매사를 건건하게 수행한다. 그래야 내일도 즐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항상 꾸준하다. 그런 모습이 때로는 부럽기도 하고 불만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가 주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순간, 그 태도는 비난과 싸움의 대상에서 벗어난다.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면 상대의 모습을 인정하고 나와 달라도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을 내볼 수도 있다. 임수가 하나부터 열까지 정화가 요구하는 말을 다 들을 수는 없어도 노력은 해볼 수 있다. 에너지를 한곳에만 잔뜩 쏟는 방식을 고쳐보기도 하고, 좀처럼 하기 싫은 마음이 올라와도 다독여 볼 수 도 있다. 그리고 고마운 마음을 자주 비추며, 정말 하기 싫을 때는 양해를 구해보는 노력을 해본다. 그래도 싸우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지만^^;;

 

4. 마치며

 

이번 연재가 정화와 임수의 좌충우돌 가족-되기 임수편 마지막 글이다. 가까운 사람의 좋은 점을 발견하는 건 상대의 역할 같기도 하다. 처음부터 좋게 보이지 않는다. 나와 다르고 어색하고 이해가 안갈 때가 많다. 그래서 자주 싸운다. 하지만 상대방의 행동이 나를 망치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믿음만 있다면 귀를 기울여보자. 그러다 보면 이해가 가기도 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이런 순간들이 쌓이다보니 티격태격했지만 4년의 세월을 무탈하게 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댓글 6
  • 2023-12-01 09:32

    아니 제 방한양말이 왜 저기에 있는 건가요? 매우 민망하네요^^;;
    제가 그런 사람인 줄도 모르고 살아왔는데 잊고 지냈던 마음을, 별것도 아닌 제 물건을 예쁘게 보아준 임수에게 고맙습니다.
    임수편 마지막 연재글 잘 읽었습니다. 일년동안 너무 고생많았어요^^

    • 2023-12-01 14:34

      글구 저 양말은 다리가 잘 붓는 당뇨질환자용 양말인데, 발목부분이 낙낙하고 재질이 도톰해서 저는 방한용 양말로 신고 있어요.
      크리스마스 산타 양말로도 활용 가능합니다.

  • 2023-12-01 13:08

    생활명품! 끌리는 용어예요^^
    저도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그간 연재하느라 임수 수고 많았어요!!

  • 2023-12-01 13:46

    다른 점이 많은 임수와 정화, 둘이 맨날 싸운다고 쓰면서도 두 사람이 서로를 살피는 모습이 참 따뜻하고 세심하군요!

  • 2023-12-01 14:05

    그래서 우리 임수님이 어쩌다 정화님 이야기할 때면
    눈 속에 하트도 있고 별도 있고 양말도 있었군요. ^^

    사부작거리며 서로를 위해 마음 쓰는
    정임합목하우스 포에버~~~🙏

  • 2023-12-01 16:09

    루틴, 애쓰셨습니다~~ 차이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시간들이 쌓여가고 있군요^^ 알흠답습니다그려~~~

인문약방 에세이
    1.몸은 흐른다 _노년과 장애   요즘 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학생들과 ‘장애를 만드는 사회구조’라는 주제로 사람들이 이동할 때 겪는 불편함에 대해 설문조사를 하고 있다. ‘평균’이라는 몸을 기준으로 사회가 암묵적으로 지정한 특정한 속도에 대해서 질문하는 조사이다. 예를 들면 횡단보도를 건널 때의 신호 변경이 자신의 보폭에 적당하지, 지하철이나 버스 승차시의 단차에서는 어떤지 등을 묻는다. 한 번은 동네 공원에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계신 노인 분들에게 질문을 했을 때였다. 80대의 한 할머니께서는 우리의 질문을 듣고는 ‘횡단보도 신호가 너무 빨리 바뀐다’, ‘안내판의 글자들은 너무 작아서 보기가 힘들다’고 맞장구를 치셨다. 또 이런 조사를 해줘서 정말 고맙다고 하시며, 사탕까지 주고 가셨다.   설문조사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쉽게 특정 연령층의 사람들로부터 ‘무릎이 아파서 오래 걷기 힘들다, 핸드폰 글자가 잘 보이지 않는다, 잘 안 들린다’라는 말을 듣는다. 나는 이것이 각자의 생애주기에 따라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몸의 변화라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장애와 무관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 시력도 저하되고, 귀도 어두워지고, 무릎도 아프게 된다. 말하자면 누구나 장애를 갖게 되기 마련인 것이다. 하지만 ‘평균 몸의 속도’를 기준으로 구축된 사회에서는 노년층이 스스로를 ‘정상신체’에서 배제된 몸으로 살게 만든다. 나이 듦은 우리 모두가 맞이할 존재 상태이다. 우리의 질문만으로도 ‘고맙다’고 하신 할머니의 말씀은 노년의 존재 상태가 어떻게 배제되고, 비가시화 되었는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노년의 존재 상태는 장애와도 교차한다. ‘전국장애인투쟁보고서_버스를타자’(2002) 다큐를 본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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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
2023.12.04 | 조회 203
인문약방 에세이
      1. 나는 실패한 걸까?   10대까지는 스무살이 목표인 것처럼 살았다. 그 때가 되면 나를 옭아맨 숱한 규제들이 한 방에 펑하고 날아갈 거라 생각했다. 스물은 성인이 된다는 것이고, 그것은 내게 자유와 같은 말로 이해되었다. 구체적인 꿈을 갖지 못한 채 나는 맹목적으로 스무살을 갈망했다. 막상 20대가 되니 혼란스러웠다. 내가 대학을 왜 갔는지 그제서야 스스로에게 물었다. 난 뭘 기대했던 걸까? 방황하던 눈길에 걸린 현수막에 이끌려 충동적으로 학보사에 들어갔다. 거기서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사회를 만났다. 나는 강의실보다 학보사와 인쇄소, 시위 현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한편으론, 부모의 걱정거리가 돼서는 안 된다는 걱정이 늘 따라다녔다. 무엇 하나에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며 살았다.   대학 졸업 후 2년을 학생운동조직에서 일했다. 확신보다는 대의에 대한 당위로 선택한 길이었다. 거기서 전 남편을 만났다. 나는 결혼을 부모로부터 벗어날 최선의 길로 생각했다. 삶을 직시하지 않은 비겁함은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로 숨겨졌다. 결혼을 한 후에야 깨달았다. 우리는 삶을 책임질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그와 헤어진 건 막 서른이 됐을 때였다. 아들이 만 세살이 되기 전이었다. 나는 아들과 함께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부모의 그늘로 다시 들어갔다. 어린 아들의 돌봄 뿐 아니라 내 한 몸 사는데 필요한 가사까지 전적으로 부모님께 의탁하며, 구애없이 사회생활을 했다. 서른이면 젊음이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서른이 넘어서도 나는 여전히 젊었고, 사회생활에서 새로운 기회도 생겼다.   나는 30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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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
2023.12.04 | 조회 115
인문약방 에세이
      1. 나의 방황이 시작되다   2020년 여름이 찾아올 무렵, 나는 번아웃에 빠졌다. 2007년 입사 이후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회사는 그동안의 내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일을 완벽하게 끝내고 느낄 수 있는 그 뿌듯함이 내가 일을 열심히 하도록 하는 동기부여가 되었다. 자발적인 야근도 모자라 집에 가서도 다하지 못한 일을 마무리해오곤 했다. 일이 아무리 많이 쌓여 있어도 재미있기만 했고, 하나씩 업무를 완수할 때마다 느끼는 성취감은 달콤했으며, 직장동료들로부터 나의 업무능력을 인정받기라도 하면 난 지칠 줄 모르고 더 열심히 일에 매달렸다. 이렇게 누구보다도 업무에 대한 열정이 넘쳤던, 회사 내 대표적인 워커홀릭이었던 내가 어느 순간 일에 대해 흥미를 잃었다. 업무를 처리하면서 느꼈던 보람은 점점 줄어들었고, 그에 비례하게 조직에 대해 내가 느끼는 회의감은 점차 커져 갔다.         조직생활에 대해 회의감이 든다는 것은 나의 지난 삶을 부정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왜 그렇게 바보같이 일만 열심히 했을까?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조직에 충성한 것일까? 지금까지의 삶은 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것이라 애써 위안했지만, 이제부터는 달라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과, 성공, 능력, 인정, 승진과 같은 것들이 더이상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삶의 방향을 바꿔야 할 때가 온 것이다. 타인이 정한 기준과 평가에 맞춰서 살아왔던 내가, 이제는 내 인생의 주체로 살아가고 싶어졌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아내는 것은 나에게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인생의 방향은커녕 난 ‘내가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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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
2023.12.04 | 조회 72
인문약방 에세이
    1.과학적 세계관으로 삶을 해석하기   이 소설은, 테드 창의 소설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수록된 여덟 편의 소설 중 하나이다. 테드 창은 쓰는 작품 마다 SF계의 유명한 상은 다 휩쓸어 버리는, 현존하는 최고의 SF 소설가로 평가 받는 작가이다. 그가 쓰는 글은 과학적 사실이나 법칙이 정교하게 잘 짜여진 세계관 안에서 펼쳐져, 이야기를 따라가기 위해선 작가가 연결하고 있는 과학적 지식에 대해 ‘자유롭게’ 사고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하드 SF’ 소설 중에서도 더욱 하드하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대중 친화적인 익숙한 장르적 요소 또한 갖춰 SF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도 감정 이입할 수 있는 보편적 공감도 녹여 넣는, 넘사벽 소설가이다.   나 역시 이 여덟 개의 소설 중 어느 것도 만만한 것이 없었다. 좀 익숙한 소재이다 싶으면 상상만으론 따라가기 어려운 설정이 나오고, 그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선 과학적 지식과 철학적 사고가 결합된 단계들이 필요해 나무위키와 유투브의 영상들을 PC창에 여러 개를 띄어두고서 책을 읽어야 했다.   그의 소설은 SF 장르이지만 판타지 요소가 첨가되어 있거나, 판타지 장르다 싶으면 SF적 요소를 덧붙여 전개한 것들이 나와서 상상력과 과학적 논리가 정교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보여주는 이야기들의 공통된 주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포함한) 우주는 논리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주는 기계와도 같은 것이라 과학을 통해 그것을 탐구하면 그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그래서 소설에...
    1.과학적 세계관으로 삶을 해석하기   이 소설은, 테드 창의 소설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수록된 여덟 편의 소설 중 하나이다. 테드 창은 쓰는 작품 마다 SF계의 유명한 상은 다 휩쓸어 버리는, 현존하는 최고의 SF 소설가로 평가 받는 작가이다. 그가 쓰는 글은 과학적 사실이나 법칙이 정교하게 잘 짜여진 세계관 안에서 펼쳐져, 이야기를 따라가기 위해선 작가가 연결하고 있는 과학적 지식에 대해 ‘자유롭게’ 사고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하드 SF’ 소설 중에서도 더욱 하드하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대중 친화적인 익숙한 장르적 요소 또한 갖춰 SF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도 감정 이입할 수 있는 보편적 공감도 녹여 넣는, 넘사벽 소설가이다.   나 역시 이 여덟 개의 소설 중 어느 것도 만만한 것이 없었다. 좀 익숙한 소재이다 싶으면 상상만으론 따라가기 어려운 설정이 나오고, 그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선 과학적 지식과 철학적 사고가 결합된 단계들이 필요해 나무위키와 유투브의 영상들을 PC창에 여러 개를 띄어두고서 책을 읽어야 했다.   그의 소설은 SF 장르이지만 판타지 요소가 첨가되어 있거나, 판타지 장르다 싶으면 SF적 요소를 덧붙여 전개한 것들이 나와서 상상력과 과학적 논리가 정교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보여주는 이야기들의 공통된 주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포함한) 우주는 논리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주는 기계와도 같은 것이라 과학을 통해 그것을 탐구하면 그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그래서 소설에...
문탁
2023.12.04 | 조회 146
정화와 임수의 좌충우돌 가족-되기
              임수(壬) 루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대학원에서 10년을 세포만 쳐다보며 지냈다. 졸업 후 방황하다가 문탁에서 정화(丁) 무사와 사주명리를 만나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요즘이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나 역시 궁금하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    1. 오래된 장식품   우리 집 책장은 책으로 가득 차있지만 항상 한켠에는 여유 공간이 있다. 여행에서 가져온 작은 소품들, 엽서들을 전시한다. 12월이 되면 어김없이 작은 트리, 루돌프인형, 희미한 조명들까지 그 공간을 채운다. 이제 곧 크리스마스임을 알 수 있다. 정화의 감성으로 한껏 포근해진 공간을 임수는 감사히 즐긴다.   정화는 어릴 적부터 크리스마스트리 주변의 따뜻한 빛이 좋았다고 한다. 모태신앙의 영향인데 개종의 과정 중에 있는 지금도 정화는 자신만의 리츄얼로 12월이 되면 크리스마스 장식품을 꺼내서 책장의 한켠을 꾸민다. 그 장식품 안에는 10년의 세월을 훌쩍 넘긴 물건들이 있다. 모두 빛에 바래지도 않았고 깔끔하다. 정화가 말하기 전까지 그렇게 오래된 줄 몰랐을 정도였다.   올해도 어김없이 책장 한켠을 채운 크리스마스 트리와 그 친구들   우리 집에는 오래된 물건들이 많다. 물론 큰집으로 이사 오면서 새로운 가구들도 많이 늘어났지만 여전히 오래된 물건들이 많다. 임수도 물욕이 많지 않기도 하고 새로운 걸 잘 사질 않으니 오래된 물건들이 종종 있다. 하지만 정화와 임수의 물건상태는 사뭇 다르다. 정화의 물건들은 트렌디하지는 않지만 제 역할을 다한다. 깔끔하고 정돈되어있으며 심지어 사랑을...
              임수(壬) 루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대학원에서 10년을 세포만 쳐다보며 지냈다. 졸업 후 방황하다가 문탁에서 정화(丁) 무사와 사주명리를 만나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요즘이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나 역시 궁금하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    1. 오래된 장식품   우리 집 책장은 책으로 가득 차있지만 항상 한켠에는 여유 공간이 있다. 여행에서 가져온 작은 소품들, 엽서들을 전시한다. 12월이 되면 어김없이 작은 트리, 루돌프인형, 희미한 조명들까지 그 공간을 채운다. 이제 곧 크리스마스임을 알 수 있다. 정화의 감성으로 한껏 포근해진 공간을 임수는 감사히 즐긴다.   정화는 어릴 적부터 크리스마스트리 주변의 따뜻한 빛이 좋았다고 한다. 모태신앙의 영향인데 개종의 과정 중에 있는 지금도 정화는 자신만의 리츄얼로 12월이 되면 크리스마스 장식품을 꺼내서 책장의 한켠을 꾸민다. 그 장식품 안에는 10년의 세월을 훌쩍 넘긴 물건들이 있다. 모두 빛에 바래지도 않았고 깔끔하다. 정화가 말하기 전까지 그렇게 오래된 줄 몰랐을 정도였다.   올해도 어김없이 책장 한켠을 채운 크리스마스 트리와 그 친구들   우리 집에는 오래된 물건들이 많다. 물론 큰집으로 이사 오면서 새로운 가구들도 많이 늘어났지만 여전히 오래된 물건들이 많다. 임수도 물욕이 많지 않기도 하고 새로운 걸 잘 사질 않으니 오래된 물건들이 종종 있다. 하지만 정화와 임수의 물건상태는 사뭇 다르다. 정화의 물건들은 트렌디하지는 않지만 제 역할을 다한다. 깔끔하고 정돈되어있으며 심지어 사랑을...
루틴
2023.11.30 | 조회 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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