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귄의 에세이에 덧달다 / 바람
문탁
2023-11-28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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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년은 누구든 거기까지 이르는 자의 것
“노년은 누구든 거기까지 이르는 자의 것이다. 전사들도 늙는다. 나약한 이들도 늙는다. 사실상 개연성으로 따지면 전사들보다 더 많은 나약한 이들이 늙어가게 된다. 노년은 건강하고, 강인하고, 거칠고, 용감무쌍하고, 병들고, 허약하고, 겁이 많고, 무능한 사람들 모두의 것이다.”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23쪽)
누구나 다 늙는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 하루하루를 지내다 어느 날 문득 몸도 마음도 생각처럼 안 따라주는 늙어감을 실감하는 날이 있다. 사회 문화적으로 노인, 노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 저항하고 자연스럽게 늙어가야지 하는 마음 준비를 무색하게 문득 찾아오는 늙음에 대한 표식은 낯설고 당혹스럽다. 온갖 부정적인 이미지가 덧대어 있는 늙은 이, 노인, 노년의 인식을 고스란히 받게 될 날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실감하는, 썩 유쾌하지 않은 경험은 우울함까지 동반한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생각나지 않는 단어로 흐름이 뚝 끊기거나 산으로 가는 경험을 자주 한다. 출근해야 하는데 버스 카드가 안 보이면 그때부턴 멘붕이다. 마을버스 배차 시간이 20분이어서 1~2분 차이로 버스를 놓치면 20분이 날아간다. 단서를 찾기 위해 되돌려 보는, 퇴근 후 일상에서 깜깜하게 증발해 버린 기억 앞에 치매 초기 증상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따라온다. 늙어 가는 중임이 불쑥불쑥 경험되는, 이제 시작이다 싶은 자각은 애틋하다.
태어나고 나이 들고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다 아는 사실이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는 시간을 보내다 보면 슬며시 늙는 게 어때서 하는 저항감도 올라온다. 젊음은 어떤 이에게는 봄과 여름처럼 피어나고 풍성한 시간이겠지만 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살아가는 것보다 살아내느라 애썼던,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했던 시간은 한 번이면 족하다. 젊은 시절의 치열함을 거쳐 순리대로 찾아온 이 늦가을 시간에는 견뎌온 이들에게 주는 위로가 있다. 살아온 시간 동안의 이야기가 내 안에 있고 그 시간을 통과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통찰의 시간은 노년의 것이다.
드라마 디어마이프렌드에서 “늙어서 좋은 이유가 뭔지 아니?” “안 봐도 비디오야, 훤히 다 보여”라며 사랑의 유통 기간을 꿰뚫는 장면이 있다. 경험이란 그런 것, 가보지 않아도 그 끝을 훤히 아는 경지는 젊은이들은 알 수 없는 지혜다. 경험이 부족한 젊은 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혼란은 삶의 또 다른 자양분임을 부정하진 않는다. 하지만 혼란의 과정에 서 가라앉힌 내면의 목소리는 늙은 자의 보물이 된다. 이미 경험하고 있는 늙음, 늙음을 체화하고 있는 르륀에게서 듣는 “나는 연약한 여자다. 항상 그랬다. 니들이 뭔데 노년을 내 것이 아니라고 하는가?”라는 목소리에 힘은 그래서 다르다.
2.노화는 스러져감을 의미하지 않는다
“노화가 스러져감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극심한 경쟁에서 벗어나 평안함을 느끼는 상태라서 현실에 충실하고 마음의 진정한 평화를 찾을 기회가 될 수 있다. 만약 기억력이 온전해서 사고의 활력이 남아 있다면 연륜이 쌓인 지능은 보기 드문 폭과 깊이를 가진 이해력을 발휘한다. 이때 지능은 지식을 수집할 시간도 많았고 비교와 비판을 통해 더 많이 단련된 기능이다.” (32쪽)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지하실에 갇힌 이준하 팀장을 구출하러 ’노벤져스‘가 뭉친다. 말죽거리 애늙은이, 보행 보조기 할머니와 눈이 안 보이는 할아버지,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도라에몽 할머니, 개와 마음을 소통하는 할아버지, 한 사람 같은 쌍둥이 할아버지는 각자 잘 할 수 있는 기술로 이 팀장을 구출하는 과정은 우리의 일상적인 고정관념을 비튼다. 스스로 유통 기간이 다한 늙은이들이 뭘 할 수 있겠냐는 노벤져스의 현실적인 질문에 “늙어보니까 알겠더라고요, 마음이 몸에 있지 않다는 것을요”라며 설득하는 혜자의 말은 울림이 있다.
노년에 접어들었다는 것은 그동안 함께 했던 혈연적 관계망의 책임감에서 벗어나 비로소 세상과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지평이 열리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공부든 낚시든 예술 세계든 추구하고 몰두할 수 있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 노년을 건강하게 보낼 수 있는 바람직한 방향이 아닐까? 함께 하는 도반이나 우정을 쌓을 수 있는 관계가 있다면 노년의 외로움에서도 거리를 둘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나이듦의 자기 서사 세미나는 ‘나이듦’에 대한 화두로 내 연약한 노년을 위해 몰두할 수 있는 공부로서 안성맞춤이다.
점점 더 구체적으로 체화하게 될 노년의 시간으로 다가서고 있지만 두려움에 자리를 내주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을 챙겨 보고 있다. 불혹과 지천명을 보내고 환갑을 맞이하게 된 세월의 시간 덕분이다. 저절로 붉어질 일이 없는 대추 한 알처럼 내 안에 천둥과 태풍과 벼락을 안고 사는 게 삶의 과정임을 받아들일 수 있어서 좋다. 쓸데없이 늙어 가는 게 아니라 무서리와 땡볕과 초승달을 품고 둥글어지며 늙어 가는 지금이 더 편안하다.
3.노년은 마음 상태가 아니다. 노년은 존재 상태이다
“노화에 대한 보상이 있다면 결코 신체적인 기량 측면이 아니다. 때문에 그런 것을 강조하는 문구나 포스터는 나를 아주 성가시게 한다. 나약한 이들을 모욕할 뿐더러 요점이 빗나가 있다. 등이 구부정하고 관절염 걸린 손에 연륜의 더께가 쌓인 얼굴을 한, 두 노인이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는 모습, 진지하고도 속 깊은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포스터라면 좋겠다. 문구는 이렇게 써야겠지. ‘노년은 젊은이들의 것이 아니다’.”(25쪽)
부모님 덕분에 30대 후반에 이미 머리 염색을 해야 했던 나는 딸아이를 결혼시키고 난 뒤 염색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열렬히 환영해 준 곳은 한동안 몸담았던 공동육아 공동체였는데 함께하는 아이들은 1년 동안 늘어 가는 흰머리에 관심을 쏟고 달빛이란 별칭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공동육아 현장을 떠난 후 흰머리를 고수하며 한 구직활동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노동 휴식기를 더 이상 가질 수 없었던 나는 주변의 권유를 받아들여 머리를 염색했다. 염색 효과인지, 시절 인연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 나답게 늙어가겠다는 바람은 의지로만 해결할 수 없는 벽이 있었다.
르귄은 여든 살이 넘게 되면서 자가용을 없애고 난 후 비탈길로 열 블록 떨어진 생협 마트를 한달음에 달려가는 자유를 잃은 대신 돌연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경이로운 해방감이 찾아왔고 일주일에 한 번씩 장 보러 가던 어린 시절의 일상으로 회귀한다. 고령화 시대를 이미 오래전부터 경험하고 있는 일본의 1980년대에 조성된 베드타운에 사는 노인들은 방물단을 기다린다. 유령 도시에 남겨진 노인들은 차도 없지만 걸을 힘도 없어서 먼 거리에 있는 시장을 오 갈 수 없다. 그래서 등장하는 게 예전에 있었던 방물단 같은 방식의 상거래가 이루어진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사는 최선을 다하는 노년의 삶은 뜻밖의 길을 발견하기도 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 하대요‘ ’하나도 안 늙으셨네요‘ ’나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만큼 늙는 법이래요‘라는 늙었다는 현실 부정을 통한 격려는 노년 존재를 부정하는 말이고 노년의 나이를 지우고 노년의 삶을 지울 뿐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긍정적인 사고의 힘을 굳게 믿으나 노화를 겪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루가 다르게 좀처럼 개선될 줄 모르는 상황을 접하고 자신들이 뭘 할 수 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100세 시대를 돕겠다는 수많은 자기 계발서, 동안에 대한 욕망, 성공한 노년 사례, 탄탄한 몸매를 자랑하는 운동하는 노인들은 노년 삶에 적절한 모델이 될 수 없다. 노년의 실존은 몸의 자잘한 부위에 크고 작은 고장이 나거나 어떤 부위가 움직이지 않으며 시작한다. 아무리 총명한 지적 대응 기제로 잘 보상해 본들 노년의 실존은 그런 손실과 제약에 꾸준히 허물어진다. 수선을 피우거나 두려워해도 부질없다. 아무도 그걸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나이를 먹으면 먹은 대로, 있는 그대로 노년을 바라봐야 한다.
4.존경받아 마땅한 용기, 늙음과 죽음을 인정하다
“그냥 척척 해내던 일상생활, 하는 줄도 모르고 해왔던 너무 쉬운 일들이 노년이 되면서 점차 어려워지더니 결국은 그 일을 해내기 위해 진정한 용기가 필요할 때가 온다. 노년은 대개 고통과 위험, 사망이라는 불가피한 종말을 수반한다. 그걸 인정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존경받아 마땅한 용기이다.” (32쪽)
83세를 사는 르귄의 실존은 항상 몸이 아프고 계단을 오르는 것도 힘들어지며 침대를 벗어나기 어려운 상태와 마주한다. 익숙해져야 하는데 그게 힘들고 당최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노년의 일상을 보는 마음은 심란할 수 있다. 그러나 평생 쉼 없이 임무를 수행한 몸이 지치지 않는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나무의 겨울 눈은 여름 절정의 시간에 만들어진다. 다가올 가을과 겨울 준비를 하는 나무의 지혜를 생각한다면 청춘의 여름을 붙잡고 회귀하려는 안티 에이징은 어리석은 자유의지에 불과하다.
노년까지 운 좋게 살아남았어도 불가피한 종말인 죽음은 용기가 필요한 또 하나의 사건이다. ‘계속 살아갈 만큼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필요할 때이다. 연명 장치를 거부하고 자연스러운 마지막 호흡의 삶을 선택한 김수환 추기경, 100세 생일에 이르러 곡기를 끊으며 생을 마감한 스코트 니어링은 멈출 줄 아는 지혜를 보여준 분들이다. 존경받아 마땅한 죽음에서 ‘좋은 삶’과 같은 얼굴을 본다.
부분과 전체를 읽을 때 아인슈타인과 보어, 하이젠베르크 등 물리학자들의 이론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양자역학의 세계를 들여다보게 되면서 죽음에 대한 인식을 다르게 하는 의외의 선물이 있었다. 부분과 연결된 전체, 보이는 질서와 보이지 않는 질서에 대한 통찰로 삶과 죽음의 경계는 달라졌다. 삶의 존재 형태는 바뀌지만 우주 공간의 에너지로 함께 연결되어 있다는 놀라운 인식은 잠들어 있지 않은 죽음, 천 개의 바람이 되는 죽음, 빛으로, 눈으로, 종달새로, 어둠 속의 별로 나와 함께 있는 먼저 간 그들에 대한 애도의 방식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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