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약방 에세이
        “우주는 다른 말로 바꾸면 시공간이다. 시간과 공간은 둘이 아니다. 시간은 공간의 다른 펼침이다. 그리고 그 시공간이 변화해 가는 리듬을 자연이라 한다. 스스로 그러함이란 변화의 ‘차서’(시간적 순서와 공간적 질서)를 뜻한다. 차서를 어길 때 우리는 부자연스럽다고 느낀다(고미숙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지난 2년 간의 세미나가 마무리되고 있다. 세미나의 제목대로 나는 공부를 통해 50대와 노년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방향을 찾고 싶었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간 책들이 많았지만 영감을 준 저자들도 꽤 있었다. 디디에 에리봉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연구하고 기술해야 하는지에 관한 모델을 보여 주었다. 파커 파머는 내 삶을 있는 그대로 보고 “온전한 나”를 수용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데비라 리비나 폴 칼라니티처럼 당당하고 의연하게 삶과 죽음을 대하는 작가들의 용기를 본받고 싶기도 했다. 세미나 공부가 나를 탐구하는 데 귀중한 시발점이 되었다.    난 공부를 통해 소명까진 아니더라도 그래도 세상에 이로운 그런 무언가를 찾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없던 소명이 짠 하고 갑자기 나타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세미나에서 읽었던 많은 책들의 공통된 테마였던 몸과 일상에 좀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내 몸을 어떻게 쓰고 일상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탐구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쉰을 넘긴 내 몸은 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풀타임에 주말 알바까지 견디어 냈던 청년기의 강단은 오간데 없다. 이제 서너 시간 일하면 왼쪽 어깨에 통증이 오고 드러눕고 싶다. 한쪽 귀의 청력 상실로 누가 왼쪽에서 말을 건네면 되물어야 할 때가 많다. 앞으로 내 몸은 가속도가 붙어 정상성에서 조금씩 멀어지게 될 것이다.    난 내 몸을 수치들과 동일시했다. 나이, 몸무게, 혈압, 콜레스테롤 등의 숫자와 앓고 있는 질병이 내 몸을 설명하는 언어였다. 또 몸과 마음을 분리시켜 이해했다. 건강 검진 결과상의 수치와 정신적 스트레스를 따로 관리하면(‘관리 받으면’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된다고 생각했다. 사십 대 초반까지만 해도 난 예순까진 전일제 노동을 너끈히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만큼 몸에 대해 무지했고 일상에 대한 상상력도 빈곤했다. 돈 버는 노동과 그것을 잊게 해주는 여가 말고, 일상을 세심하게 설계해 보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내 형편상 돈 버는 게 중요했고 젊은 신체였기에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내 몸은 노동에 적합한 신체로 길들여졌다. 적어도 8시간은 집중해서 일할 수 있는 몸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몸의 동작과 동선도 화폐의 증식을 위한 공간에 최적화되었을 것이다. 내 몸에 이상이 생기고 일에서 번아웃을 경험할 때까지 몸과 일상의 중요성에 대해 제대로 성찰하지 못했다.          소외된 몸, 문제적 몸   몸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건 내 신체의 이곳 저곳이 고장나기 시작하면서다. 약 7년 전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오른쪽 귀에서 회오리 바람 소리 같은 게 들렸다. 멈추지 않았다. 난 오른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비인후과 전문의를 찾았고 MRI 촬영을 했다. 다음엔 신경과 전문의와 미팅이 이어졌다. 모두들 이상이 없다고 하였다. 의사들은 서로를 추천하기만할 뿐 소통하지 않았다. 아무도 청력 손실의 원인을 찾지 못했다. 난 당시 역류성 식도염도 앓고 있었다. 가슴에서 타는 듯한 작열감이 느껴졌다. 가정의학 전문의는 약을 처방하였다. 한 달이 지나도 증상 개선은 없었고 변비 등의 부작용만 겪었다. 음식과 생활 습관을 바꿔야 할 것 같아 얘기를 꺼냈는데 의사는 별 관심이 없었다. 약을 바꿔보자는 얘기만 하였다. 난 분과화된 의료시스템의 한계를 경험했다. 슬프게도 의사들은 내 몸에 대해 잘 몰랐다. 관심을 기울일 여유도 없어 보였다. 내가 내 몸에 대해 무지한 채로 살아왔던 건 말할 것도 없다.    청력은 어떻게 할 수 없었지만 식도염에 대해서는 원인을 알아보기로 했다. 난 그날그날 먹은 음식들을 기록하는 일지를 썼다. 여러 자료를 찾아본 결과 나의 식습관에 답이 있을 것 같아서였다. 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빈 속에 뜨거운 커피를 몇 잔씩 들이키는 습관이 있었다. 오후에도 늘 커피를 마셔야 했다. 모닝 커피를 카페인이 없는 걸로 바꿨다. 저녁 식사 후 TV를 보며 즐겨먹었던 초콜릿이나 감자칩도 범인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음식들을 줄이거나 끊으려 노력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지금도 완전히 끊지 못하고 있지만, 난 횟수나 양을 현격하게 줄였다. 그 덕분인지 식습관을 바꾼 지1년 후 즈음엔 위산 역류가 거의 사라졌다. 역류성 식도염은 단지 음식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내 몸이 커피와 초콜릿, 감자칩 등에 길들여지게 된 데 원인이 있었다. 일상, 특히 일에서 내 몸이 소외되어 있었고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는 음식이라는 손쉬운 보상이 필요했다. 습관을 바꾸어 병이 좋아진 경험을 했다. 그럼에도 나는 몸에 대해 공부를 하겠다거나 일상의 활동과 리듬을 점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특정 질병에 걸리면 내 몸과 질병에 대한 공부를 부지런히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었다. 내 몸에 지독히 들러붙은 습관들을 하나씩 점검할 좋은 기회였는데도 말이다. 내 몸은 소외된 채 문제로 남았다.      자연의 리듬과 차서   고미숙은 일상의 활동을 어떻게 구성할지에 관한 힌트를 우주(또는 자연)의 리듬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동양 우주론에서는 인간의 몸이 “우주적 질료들의 재배치”를 통해 구성되었다 본다.  우리의 몸을 지수화풍 (불교) 또는 목화토금수 (음양오행론)라는 자연적 질료들의 조합으로 이해한 것이다. 저자는 이는 그럴 듯하게 포장하기 위해 사용한 은유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실상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과학자들은 초신성의 폭발로 탄소, 산소, 질소 등이 탄생했고, 이는 인간이라는 생명이 탄생하는 데 가장 핵심이 되는 요소가 되었다고 가정한다. 죽은 후 우리 몸이 바람과 공기, 물로 흩어지게 된다는 사실 또한 몸이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조합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 몸을 우주의 축소판, 즉 소우주로 보는 동양사상에서는 삶의 이치를 자연의 순환에서 찾았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또는 우주적) 리듬에 따라 사는 게 가장 자연스럽고 인간다운 삶이다.  지구에 춘하추동이라는 사계절이 있듯이 우리의 몸에는 이에 대응하는 생로병사라는 리듬이 있다.  봄은 생동하는 에너지가 비전을 낳게 하고(목) 여름은 불과 같은 맹렬함을 발휘하게 한다(화). 가을은 튼실한 열매를 맺는데 주력하는 때이고(금) 겨울은 삶에 대한 성찰이 이뤄지는 계절이다(수).  우리의 전체 인생 뿐 아니라 하루의 일상에도 목화토금수라는 변전하는 오행의 리듬이 적용된다.    나는 생애 주기에서 가을의 중간 즈음에 위치해 있다. 부산하게 움직이며 활동했던 여름은 이제 뒤안길로 사라졌고 이제 열매를 거둘 때이다. 어쩔 수 없는 현실적 조건과 나의 무지  때문에 자본이 심어준 욕망을 추종했다. 나의 여름은 뚜렷한 방향이 없었다. 수확의 시기인 50대에 내가 어떤 열매를 거둘지, 아니면 특별한 열매가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나의 일상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몸도 시공간도 달라진 50대 일상의 차서 (“시간적 순서와 공간적 질서”)는 봄여름의 속도나 활동들과는 달라야 한다. 나의 일상을 살피고 차서에 맞는 활동들을 탐색할 시점이다.          미국의 여성 작가 르 귄은 일상적 활동들을 어떻게 구성하고 해석할 것인지를 날카롭게 통찰한다. 그녀의  생활 에세이집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에서 르 귄은 일과 여가의 이분법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하버드 대학 동창회에서 그녀와 동기들을 대상으로 보낸 설문 조사가 그 계기였다. 그 설문에는 여가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설문지를 만들었던 사람은 통상적인 이해에 기초하여 여가를 규정했다. 설문에서 제시된 여가의 예는  TV시청, 골프, 보드게임, 독서, 그림 그리기, 글쓰기 등이었다. 이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은 노동이고 자발적으로 하는 오락이나 의미 있는 일은 여가라는 통념적 이분법에 기초한 것이었다. 르귄은 본인의 인생에서 여가(spare) 시간은 따로 없었다고 말한다. 평생 프리랜서 작가로 살았던 그녀에게 글쓰는 일은 자발적으로 하는 분주한 노동이고, 여행이나 독서 뿐 아니라 장보기, 낮잠 자기, 고양이와 놀고 소통하는 것도 일상을 꽉 채우는(occupied) 활동이다. 그녀의 통찰 덕분에 난 노동과 여가라는 이분법로 구분될 수 없는 소중한 일상적 활동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연결과 교감 – 목수벌과 저녁 밥상   일상을 재구성 해야겠다는 생각을 처음 한 것은 자연의 리듬에 어긋나 살았던 몸이 신호를 보냈기 떄문이었다.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 나는 일종의 번아웃을 겪었다. 당시 나는 산책을 하기로 했다. 숨쉴 수 있는 시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퇴근 후,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고 동네의 산책길이나 근처 공원들을 걸었다. 지금 직장을 얻기 몇 년 전 나는 오래된 나무, 수많은 네 발 동물들, 다양한 종의 새와 벌 등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동네로 이사한 상태였다. 걷기는 그간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초봄이 되면 난 꿀벌이나 목수벌이 나타나길 기다린다. 이들을 처음 목격하는 날에 내 가슴은 뭉클하고 벅차 오른다. 운수대통한 날이다. 벌들마다 선호하는 꽃들이 있다. 클로버, 이름 없는 들꽃, 호박꽃, 화려한 장미 중 어느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각기 다른 종류의 벌들을 손님으로 맞이하게 된다. 여름 초저녁엔 앞마당에 앉아 반딧불이를 관찰한다. 일 분 동안 시야에 들어오는 반딧불이가 몇 마리인지 센 다음 이를 기록해 둔다. 이를 열 번 정도 반복한다. 며칠 동안 과업을 수행하고 숫자를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같은 도시에 사는 과학자에게 보낸다. 난 반딧불이들, 과학자, 그리고 이에 참가하는 (누구인지 잘은 모르지만) 이웃들과 연결되었다고 느낀다.  이 활동들로 인해 몸이 금방 좋아지지는 않았다. 대신 난 내가 살고 있는 시공간과 조금씩 연결되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이는 내가 생명체들과 네트워크를 맺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해주었다. 이들과 감응할 수 있는 신체를 가졌다는 게 감사했다. 난 주위에 생태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크고 작은 모임들이 조직되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야생화 모임, 새 관찰 모임, 나무 돌보기 모임 등. 내 몸과 일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 생명체들과 그리고 타자들과 보다 긴밀히 연결되고 싶었다. 가능한 한 노동을 줄이고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활동으로 일상을 채워가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이전의 나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욕망은 낯선 것이었다. 계속 확장하고 싶은 기분 좋은 욕망이었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과의 연결을 일상 속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나와 파트너는 둘 다 일을 하기 때문에 돌아가면서 저녁을 한다 (내가 더 자주하긴 하지만^^). 지금의 저녁 메뉴 루틴이 정해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서로의 취향을 알아가고 이를 조율하면서 여러 메뉴가 탄생했다. 나와 상대의 다른 입맛을 절충하여 밥을 하는 것은 처음엔 피곤한 작업이었지만 이제 소중한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2년 전부터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파트너 어머니와 같이 저녁을 먹게 되었다. 그녀는 고기를 거의 먹지 않는 나와 달리 육식 위주의 식사를 한다. 음식이 조금이라도 본인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금새 포크를 내려 놓을 만큼 까다롭다. 난 세 사람의 취향을 고려해 메뉴를 정하고 장보고 요리를 한다. 시간을 필요로 하는 노동이다. 이는 요리에 소질도 없고 이제 귀찮아 하는 80대의 그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돌봄이다. 같이 밥 먹고 대화하면서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고 있다. 생명체들과 교감하는 것, 밥을 하고 같이 먹는 것, 이는 모두 르 귄의 말대로 통상적 노동도 여가 활동도 아니다. 무엇보다 나를 소외시키지 않는 일상의 활동들이다. 거기에는 연결과 교감이 있다.      낯선 욕망, 새로운 실험   내가 회사일을 하면서 매일 산책하고 저녁을 해 먹고 공부할 시간을 낼 수 있었던 건 코로나 이후 근무 형태가 변해 재택 근무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또 나는 번아웃을 겪은 후 상사와 면담을 하여 근무시간을 줄였다(당연히 급여가 줄었다). 그리고 휴가를 최대한 다 썼다. 2년동안 세미나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에세이 기간엔 동료들이 얼굴보기 힘들다는 말을 했을 정도로 휴가를 자주 썼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최근 몇 년 간 노동 이외의 활동을 내 시공간에 들일 수 있었던 것은 자유롭고 유연한 직장 분위기의 덕이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노동 위주의 일상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계속 틈새를 찾았기 때문이다.     이제 틈새를 찾는 데서 한 걸음 나아가 연결과 교감을 위한 삶의 영역을 점차 넓히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그게 50대의 내 몸이 나에게 보내는 신호이자 메시지이다.  그 메시지의 주 내용은 일상의 차서를 자연의 리듬에 맞추고 생명체와 타자들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활동을 모색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자기 소외적 노동의 비중을 대폭 줄이고 걷고, 운동하고, 생명체들과 소통하고, 밥하고, 먹고, 돌보고, 공부하는 일을 말한다. 40대의 일상과 비교해 보면 이는 매우 낯선 욕망들이다. 따라서 내 몸은 이러한 일상을 다소 생소하게 느낄 것이다. 적응하는 데 시간도 소요될 것이다. 걸려 넘어질 수도 있고 갈등 상황도 생겨날 것이다. 두렵기도 하지만 지금이 낯선 욕망을 따를 여러 조건이 무르익었다고 느껴진다. 새로운 시공간의 차서에 조응하는 일상의 실험이 기대된다.     
        “우주는 다른 말로 바꾸면 시공간이다. 시간과 공간은 둘이 아니다. 시간은 공간의 다른 펼침이다. 그리고 그 시공간이 변화해 가는 리듬을 자연이라 한다. 스스로 그러함이란 변화의 ‘차서’(시간적 순서와 공간적 질서)를 뜻한다. 차서를 어길 때 우리는 부자연스럽다고 느낀다(고미숙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지난 2년 간의 세미나가 마무리되고 있다. 세미나의 제목대로 나는 공부를 통해 50대와 노년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방향을 찾고 싶었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간 책들이 많았지만 영감을 준 저자들도 꽤 있었다. 디디에 에리봉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연구하고 기술해야 하는지에 관한 모델을 보여 주었다. 파커 파머는 내 삶을 있는 그대로 보고 “온전한 나”를 수용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데비라 리비나 폴 칼라니티처럼 당당하고 의연하게 삶과 죽음을 대하는 작가들의 용기를 본받고 싶기도 했다. 세미나 공부가 나를 탐구하는 데 귀중한 시발점이 되었다.    난 공부를 통해 소명까진 아니더라도 그래도 세상에 이로운 그런 무언가를 찾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없던 소명이 짠 하고 갑자기 나타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세미나에서 읽었던 많은 책들의 공통된 테마였던 몸과 일상에 좀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내 몸을 어떻게 쓰고 일상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탐구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쉰을 넘긴 내 몸은 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풀타임에 주말 알바까지 견디어 냈던 청년기의 강단은 오간데 없다. 이제 서너 시간 일하면 왼쪽 어깨에 통증이 오고 드러눕고 싶다. 한쪽 귀의 청력 상실로 누가 왼쪽에서 말을 건네면 되물어야 할 때가 많다. 앞으로 내 몸은 가속도가 붙어 정상성에서 조금씩 멀어지게 될 것이다.    난 내 몸을 수치들과 동일시했다. 나이, 몸무게, 혈압, 콜레스테롤 등의 숫자와 앓고 있는 질병이 내 몸을 설명하는 언어였다. 또 몸과 마음을 분리시켜 이해했다. 건강 검진 결과상의 수치와 정신적 스트레스를 따로 관리하면(‘관리 받으면’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된다고 생각했다. 사십 대 초반까지만 해도 난 예순까진 전일제 노동을 너끈히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만큼 몸에 대해 무지했고 일상에 대한 상상력도 빈곤했다. 돈 버는 노동과 그것을 잊게 해주는 여가 말고, 일상을 세심하게 설계해 보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내 형편상 돈 버는 게 중요했고 젊은 신체였기에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내 몸은 노동에 적합한 신체로 길들여졌다. 적어도 8시간은 집중해서 일할 수 있는 몸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몸의 동작과 동선도 화폐의 증식을 위한 공간에 최적화되었을 것이다. 내 몸에 이상이 생기고 일에서 번아웃을 경험할 때까지 몸과 일상의 중요성에 대해 제대로 성찰하지 못했다.          소외된 몸, 문제적 몸   몸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건 내 신체의 이곳 저곳이 고장나기 시작하면서다. 약 7년 전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오른쪽 귀에서 회오리 바람 소리 같은 게 들렸다. 멈추지 않았다. 난 오른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비인후과 전문의를 찾았고 MRI 촬영을 했다. 다음엔 신경과 전문의와 미팅이 이어졌다. 모두들 이상이 없다고 하였다. 의사들은 서로를 추천하기만할 뿐 소통하지 않았다. 아무도 청력 손실의 원인을 찾지 못했다. 난 당시 역류성 식도염도 앓고 있었다. 가슴에서 타는 듯한 작열감이 느껴졌다. 가정의학 전문의는 약을 처방하였다. 한 달이 지나도 증상 개선은 없었고 변비 등의 부작용만 겪었다. 음식과 생활 습관을 바꿔야 할 것 같아 얘기를 꺼냈는데 의사는 별 관심이 없었다. 약을 바꿔보자는 얘기만 하였다. 난 분과화된 의료시스템의 한계를 경험했다. 슬프게도 의사들은 내 몸에 대해 잘 몰랐다. 관심을 기울일 여유도 없어 보였다. 내가 내 몸에 대해 무지한 채로 살아왔던 건 말할 것도 없다.    청력은 어떻게 할 수 없었지만 식도염에 대해서는 원인을 알아보기로 했다. 난 그날그날 먹은 음식들을 기록하는 일지를 썼다. 여러 자료를 찾아본 결과 나의 식습관에 답이 있을 것 같아서였다. 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빈 속에 뜨거운 커피를 몇 잔씩 들이키는 습관이 있었다. 오후에도 늘 커피를 마셔야 했다. 모닝 커피를 카페인이 없는 걸로 바꿨다. 저녁 식사 후 TV를 보며 즐겨먹었던 초콜릿이나 감자칩도 범인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음식들을 줄이거나 끊으려 노력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지금도 완전히 끊지 못하고 있지만, 난 횟수나 양을 현격하게 줄였다. 그 덕분인지 식습관을 바꾼 지1년 후 즈음엔 위산 역류가 거의 사라졌다. 역류성 식도염은 단지 음식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내 몸이 커피와 초콜릿, 감자칩 등에 길들여지게 된 데 원인이 있었다. 일상, 특히 일에서 내 몸이 소외되어 있었고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는 음식이라는 손쉬운 보상이 필요했다. 습관을 바꾸어 병이 좋아진 경험을 했다. 그럼에도 나는 몸에 대해 공부를 하겠다거나 일상의 활동과 리듬을 점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특정 질병에 걸리면 내 몸과 질병에 대한 공부를 부지런히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었다. 내 몸에 지독히 들러붙은 습관들을 하나씩 점검할 좋은 기회였는데도 말이다. 내 몸은 소외된 채 문제로 남았다.      자연의 리듬과 차서   고미숙은 일상의 활동을 어떻게 구성할지에 관한 힌트를 우주(또는 자연)의 리듬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동양 우주론에서는 인간의 몸이 “우주적 질료들의 재배치”를 통해 구성되었다 본다.  우리의 몸을 지수화풍 (불교) 또는 목화토금수 (음양오행론)라는 자연적 질료들의 조합으로 이해한 것이다. 저자는 이는 그럴 듯하게 포장하기 위해 사용한 은유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실상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과학자들은 초신성의 폭발로 탄소, 산소, 질소 등이 탄생했고, 이는 인간이라는 생명이 탄생하는 데 가장 핵심이 되는 요소가 되었다고 가정한다. 죽은 후 우리 몸이 바람과 공기, 물로 흩어지게 된다는 사실 또한 몸이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조합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 몸을 우주의 축소판, 즉 소우주로 보는 동양사상에서는 삶의 이치를 자연의 순환에서 찾았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또는 우주적) 리듬에 따라 사는 게 가장 자연스럽고 인간다운 삶이다.  지구에 춘하추동이라는 사계절이 있듯이 우리의 몸에는 이에 대응하는 생로병사라는 리듬이 있다.  봄은 생동하는 에너지가 비전을 낳게 하고(목) 여름은 불과 같은 맹렬함을 발휘하게 한다(화). 가을은 튼실한 열매를 맺는데 주력하는 때이고(금) 겨울은 삶에 대한 성찰이 이뤄지는 계절이다(수).  우리의 전체 인생 뿐 아니라 하루의 일상에도 목화토금수라는 변전하는 오행의 리듬이 적용된다.    나는 생애 주기에서 가을의 중간 즈음에 위치해 있다. 부산하게 움직이며 활동했던 여름은 이제 뒤안길로 사라졌고 이제 열매를 거둘 때이다. 어쩔 수 없는 현실적 조건과 나의 무지  때문에 자본이 심어준 욕망을 추종했다. 나의 여름은 뚜렷한 방향이 없었다. 수확의 시기인 50대에 내가 어떤 열매를 거둘지, 아니면 특별한 열매가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나의 일상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몸도 시공간도 달라진 50대 일상의 차서 (“시간적 순서와 공간적 질서”)는 봄여름의 속도나 활동들과는 달라야 한다. 나의 일상을 살피고 차서에 맞는 활동들을 탐색할 시점이다.          미국의 여성 작가 르 귄은 일상적 활동들을 어떻게 구성하고 해석할 것인지를 날카롭게 통찰한다. 그녀의  생활 에세이집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에서 르 귄은 일과 여가의 이분법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하버드 대학 동창회에서 그녀와 동기들을 대상으로 보낸 설문 조사가 그 계기였다. 그 설문에는 여가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설문지를 만들었던 사람은 통상적인 이해에 기초하여 여가를 규정했다. 설문에서 제시된 여가의 예는  TV시청, 골프, 보드게임, 독서, 그림 그리기, 글쓰기 등이었다. 이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은 노동이고 자발적으로 하는 오락이나 의미 있는 일은 여가라는 통념적 이분법에 기초한 것이었다. 르귄은 본인의 인생에서 여가(spare) 시간은 따로 없었다고 말한다. 평생 프리랜서 작가로 살았던 그녀에게 글쓰는 일은 자발적으로 하는 분주한 노동이고, 여행이나 독서 뿐 아니라 장보기, 낮잠 자기, 고양이와 놀고 소통하는 것도 일상을 꽉 채우는(occupied) 활동이다. 그녀의 통찰 덕분에 난 노동과 여가라는 이분법로 구분될 수 없는 소중한 일상적 활동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연결과 교감 – 목수벌과 저녁 밥상   일상을 재구성 해야겠다는 생각을 처음 한 것은 자연의 리듬에 어긋나 살았던 몸이 신호를 보냈기 떄문이었다.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 나는 일종의 번아웃을 겪었다. 당시 나는 산책을 하기로 했다. 숨쉴 수 있는 시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퇴근 후,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고 동네의 산책길이나 근처 공원들을 걸었다. 지금 직장을 얻기 몇 년 전 나는 오래된 나무, 수많은 네 발 동물들, 다양한 종의 새와 벌 등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동네로 이사한 상태였다. 걷기는 그간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초봄이 되면 난 꿀벌이나 목수벌이 나타나길 기다린다. 이들을 처음 목격하는 날에 내 가슴은 뭉클하고 벅차 오른다. 운수대통한 날이다. 벌들마다 선호하는 꽃들이 있다. 클로버, 이름 없는 들꽃, 호박꽃, 화려한 장미 중 어느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각기 다른 종류의 벌들을 손님으로 맞이하게 된다. 여름 초저녁엔 앞마당에 앉아 반딧불이를 관찰한다. 일 분 동안 시야에 들어오는 반딧불이가 몇 마리인지 센 다음 이를 기록해 둔다. 이를 열 번 정도 반복한다. 며칠 동안 과업을 수행하고 숫자를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같은 도시에 사는 과학자에게 보낸다. 난 반딧불이들, 과학자, 그리고 이에 참가하는 (누구인지 잘은 모르지만) 이웃들과 연결되었다고 느낀다.  이 활동들로 인해 몸이 금방 좋아지지는 않았다. 대신 난 내가 살고 있는 시공간과 조금씩 연결되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이는 내가 생명체들과 네트워크를 맺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해주었다. 이들과 감응할 수 있는 신체를 가졌다는 게 감사했다. 난 주위에 생태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크고 작은 모임들이 조직되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야생화 모임, 새 관찰 모임, 나무 돌보기 모임 등. 내 몸과 일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 생명체들과 그리고 타자들과 보다 긴밀히 연결되고 싶었다. 가능한 한 노동을 줄이고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활동으로 일상을 채워가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이전의 나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욕망은 낯선 것이었다. 계속 확장하고 싶은 기분 좋은 욕망이었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과의 연결을 일상 속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나와 파트너는 둘 다 일을 하기 때문에 돌아가면서 저녁을 한다 (내가 더 자주하긴 하지만^^). 지금의 저녁 메뉴 루틴이 정해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서로의 취향을 알아가고 이를 조율하면서 여러 메뉴가 탄생했다. 나와 상대의 다른 입맛을 절충하여 밥을 하는 것은 처음엔 피곤한 작업이었지만 이제 소중한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2년 전부터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파트너 어머니와 같이 저녁을 먹게 되었다. 그녀는 고기를 거의 먹지 않는 나와 달리 육식 위주의 식사를 한다. 음식이 조금이라도 본인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금새 포크를 내려 놓을 만큼 까다롭다. 난 세 사람의 취향을 고려해 메뉴를 정하고 장보고 요리를 한다. 시간을 필요로 하는 노동이다. 이는 요리에 소질도 없고 이제 귀찮아 하는 80대의 그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돌봄이다. 같이 밥 먹고 대화하면서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고 있다. 생명체들과 교감하는 것, 밥을 하고 같이 먹는 것, 이는 모두 르 귄의 말대로 통상적 노동도 여가 활동도 아니다. 무엇보다 나를 소외시키지 않는 일상의 활동들이다. 거기에는 연결과 교감이 있다.      낯선 욕망, 새로운 실험   내가 회사일을 하면서 매일 산책하고 저녁을 해 먹고 공부할 시간을 낼 수 있었던 건 코로나 이후 근무 형태가 변해 재택 근무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또 나는 번아웃을 겪은 후 상사와 면담을 하여 근무시간을 줄였다(당연히 급여가 줄었다). 그리고 휴가를 최대한 다 썼다. 2년동안 세미나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에세이 기간엔 동료들이 얼굴보기 힘들다는 말을 했을 정도로 휴가를 자주 썼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최근 몇 년 간 노동 이외의 활동을 내 시공간에 들일 수 있었던 것은 자유롭고 유연한 직장 분위기의 덕이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노동 위주의 일상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계속 틈새를 찾았기 때문이다.     이제 틈새를 찾는 데서 한 걸음 나아가 연결과 교감을 위한 삶의 영역을 점차 넓히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그게 50대의 내 몸이 나에게 보내는 신호이자 메시지이다.  그 메시지의 주 내용은 일상의 차서를 자연의 리듬에 맞추고 생명체와 타자들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활동을 모색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자기 소외적 노동의 비중을 대폭 줄이고 걷고, 운동하고, 생명체들과 소통하고, 밥하고, 먹고, 돌보고, 공부하는 일을 말한다. 40대의 일상과 비교해 보면 이는 매우 낯선 욕망들이다. 따라서 내 몸은 이러한 일상을 다소 생소하게 느낄 것이다. 적응하는 데 시간도 소요될 것이다. 걸려 넘어질 수도 있고 갈등 상황도 생겨날 것이다. 두렵기도 하지만 지금이 낯선 욕망을 따를 여러 조건이 무르익었다고 느껴진다. 새로운 시공간의 차서에 조응하는 일상의 실험이 기대된다.     
문탁
2023.11.28 | 조회 117
인문약방 에세이
        최근 엄마는 아빠와 함께 여동생의 교회에 출석하기로 했다고 말씀하셨다. 부모님은 이제껏 종교를 가지고 계시지 않았다. 갑작스런 결정에 나는 아무 의견도 내지 못했지만, 잔상이 내내 떠올랐다.   나는 여동생의 교회를 좋아하지 않는다. 여동생은 결혼 후 미얀마 선교 중이다. 벌써 9년이 되어간다. 선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여동생의 교회 교리에 의아한 지점이 있었다. 하와가 선악과를 필연적으로 먹었어야 했다거나 중국과 미국의 각주가 독립 분리해서 하나의 국가를 만들 게 될 거라는 설교 등. 그 교회의 목사님의 성경 해석은 너무 편파적이라는 인상이다. 하지만 부모님은 여동생이 그렇게 오래 믿고 있다면, 이유가 있을 거라고 했다. 강하게 반대하지 못했던 건, 부모님의 마음속에 죽음을 해석하는 문제, 신체적으로 약해지는 노년을 신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 같은 걸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생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지만, 그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으며 ‘알 수 없다’는 것. 아마도 그 ‘알 수 없음’이 부모님에게 ‘텅 빈 공간’으로 남아 있는 건 아닐까.   부모님의 종교에 대한 변화된 생각은 나의 종교도 떠올리게 했다. 나도 이제 중년에 들어섰다. 나이듦에서 어떤 종교관을 가지느냐는 어떤 인생의 지도를 가지고 있느냐와 같다. 죽음과 늙어감 속에 자잘한 선택의 문제는 어떤 종교관을 가졌느냐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에세이를 통해 한 번 정리해보고자 한다.           강박증이 만든 텅 빈 공간   한때 교회를 다녔었다. 나에게도...
        최근 엄마는 아빠와 함께 여동생의 교회에 출석하기로 했다고 말씀하셨다. 부모님은 이제껏 종교를 가지고 계시지 않았다. 갑작스런 결정에 나는 아무 의견도 내지 못했지만, 잔상이 내내 떠올랐다.   나는 여동생의 교회를 좋아하지 않는다. 여동생은 결혼 후 미얀마 선교 중이다. 벌써 9년이 되어간다. 선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여동생의 교회 교리에 의아한 지점이 있었다. 하와가 선악과를 필연적으로 먹었어야 했다거나 중국과 미국의 각주가 독립 분리해서 하나의 국가를 만들 게 될 거라는 설교 등. 그 교회의 목사님의 성경 해석은 너무 편파적이라는 인상이다. 하지만 부모님은 여동생이 그렇게 오래 믿고 있다면, 이유가 있을 거라고 했다. 강하게 반대하지 못했던 건, 부모님의 마음속에 죽음을 해석하는 문제, 신체적으로 약해지는 노년을 신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 같은 걸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생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지만, 그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으며 ‘알 수 없다’는 것. 아마도 그 ‘알 수 없음’이 부모님에게 ‘텅 빈 공간’으로 남아 있는 건 아닐까.   부모님의 종교에 대한 변화된 생각은 나의 종교도 떠올리게 했다. 나도 이제 중년에 들어섰다. 나이듦에서 어떤 종교관을 가지느냐는 어떤 인생의 지도를 가지고 있느냐와 같다. 죽음과 늙어감 속에 자잘한 선택의 문제는 어떤 종교관을 가졌느냐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에세이를 통해 한 번 정리해보고자 한다.           강박증이 만든 텅 빈 공간   한때 교회를 다녔었다. 나에게도...
문탁
2023.11.28 | 조회 156
인문약방 에세이
      1. 노년은 누구든 거기까지 이르는 자의 것   “노년은 누구든 거기까지 이르는 자의 것이다. 전사들도 늙는다. 나약한 이들도 늙는다. 사실상 개연성으로 따지면 전사들보다 더 많은 나약한 이들이 늙어가게 된다. 노년은 건강하고, 강인하고, 거칠고, 용감무쌍하고, 병들고, 허약하고, 겁이 많고, 무능한 사람들 모두의 것이다.”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23쪽)   누구나 다 늙는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 하루하루를 지내다 어느 날 문득 몸도 마음도 생각처럼 안 따라주는 늙어감을 실감하는 날이 있다. 사회 문화적으로 노인, 노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 저항하고 자연스럽게 늙어가야지 하는 마음 준비를 무색하게 문득 찾아오는 늙음에 대한 표식은 낯설고 당혹스럽다. 온갖 부정적인 이미지가 덧대어 있는 늙은 이, 노인, 노년의 인식을 고스란히 받게 될 날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실감하는, 썩 유쾌하지 않은 경험은 우울함까지 동반한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생각나지 않는 단어로 흐름이 뚝 끊기거나 산으로 가는 경험을 자주 한다. 출근해야 하는데 버스 카드가 안 보이면 그때부턴 멘붕이다. 마을버스 배차 시간이 20분이어서 1~2분 차이로 버스를 놓치면 20분이 날아간다. 단서를 찾기 위해 되돌려 보는, 퇴근 후 일상에서 깜깜하게 증발해 버린 기억 앞에 치매 초기 증상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따라온다. 늙어 가는 중임이 불쑥불쑥 경험되는, 이제 시작이다 싶은 자각은 애틋하다.   태어나고 나이 들고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다 아는 사실이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는 시간을 보내다 보면 슬며시 늙는 게 어때서 하는 저항감도...
      1. 노년은 누구든 거기까지 이르는 자의 것   “노년은 누구든 거기까지 이르는 자의 것이다. 전사들도 늙는다. 나약한 이들도 늙는다. 사실상 개연성으로 따지면 전사들보다 더 많은 나약한 이들이 늙어가게 된다. 노년은 건강하고, 강인하고, 거칠고, 용감무쌍하고, 병들고, 허약하고, 겁이 많고, 무능한 사람들 모두의 것이다.”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23쪽)   누구나 다 늙는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 하루하루를 지내다 어느 날 문득 몸도 마음도 생각처럼 안 따라주는 늙어감을 실감하는 날이 있다. 사회 문화적으로 노인, 노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 저항하고 자연스럽게 늙어가야지 하는 마음 준비를 무색하게 문득 찾아오는 늙음에 대한 표식은 낯설고 당혹스럽다. 온갖 부정적인 이미지가 덧대어 있는 늙은 이, 노인, 노년의 인식을 고스란히 받게 될 날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실감하는, 썩 유쾌하지 않은 경험은 우울함까지 동반한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생각나지 않는 단어로 흐름이 뚝 끊기거나 산으로 가는 경험을 자주 한다. 출근해야 하는데 버스 카드가 안 보이면 그때부턴 멘붕이다. 마을버스 배차 시간이 20분이어서 1~2분 차이로 버스를 놓치면 20분이 날아간다. 단서를 찾기 위해 되돌려 보는, 퇴근 후 일상에서 깜깜하게 증발해 버린 기억 앞에 치매 초기 증상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따라온다. 늙어 가는 중임이 불쑥불쑥 경험되는, 이제 시작이다 싶은 자각은 애틋하다.   태어나고 나이 들고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다 아는 사실이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는 시간을 보내다 보면 슬며시 늙는 게 어때서 하는 저항감도...
문탁
2023.11.28 | 조회 204
인문약방 에세이
    1. a=a, b=b   초등학교 수학시간에 우리는 ‘등식의 성질’에 관해 배운다. 주어진 등식에 있어서 좌변과 우변 양쪽에 사칙연산을 똑같이 수행해도 등식은 성립한다는 성질이다. 덧셈을 예로 들면 a=b라 전제할 때 a+c=b+c가 성립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나눗셈의 연산을 수행하려들면 예외사항을 가르쳐준다. 0으로는 나눌 수 없다고 한다. 임의의 수로 나누어도 등식은 보장하지만 0은 빼고 하란다. 이렇게 금지된 0을 고등과정에서는 ‘불능’이라는 낙인을 찍어 판단을 보류시킨다. 덕분에 우리는 고민 없이 이 단순한 등식의 성질을 기반으로한 쪽이 0인 방정식도 장착하고 미적분(f’(x)=0)도 장착하며 나아가 더 복잡하고 섬세한 기술을 장착해서 무엇이든 증명하고 안전하게 답에 도달한다. 이런 답들은 절대 섞이지 않는다. 도착지는 a이거나 b이지 a이면서 b일수는 없다.   이렇게 안전한 수학체계의 존재를 확신한 수학자가 있었다. 수학적 체계를 엄격하고 세심 히 설계하면 그 체계 내에서는 절대 모순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던 힐베르트,   그는 1930년, 세상 모든 수학자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수학은 완전한가”. 즉 수학은 세상의 모든 참인 명제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는 가이고 두 번째 “수학은 일관된가” 로 수학적 체계 내에서 수학은 모순을 발생시키지 않는 가이며 마지막으로 세 번째 “수학은 결정가능한가”는 주어진 어떤 명제가 자명한 공리를 따르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가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은 1931년, 쿠르트 괴델의 < 불완전성정리 >를 통해 아님이 증명되었다. 그는 증명도...
    1. a=a, b=b   초등학교 수학시간에 우리는 ‘등식의 성질’에 관해 배운다. 주어진 등식에 있어서 좌변과 우변 양쪽에 사칙연산을 똑같이 수행해도 등식은 성립한다는 성질이다. 덧셈을 예로 들면 a=b라 전제할 때 a+c=b+c가 성립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나눗셈의 연산을 수행하려들면 예외사항을 가르쳐준다. 0으로는 나눌 수 없다고 한다. 임의의 수로 나누어도 등식은 보장하지만 0은 빼고 하란다. 이렇게 금지된 0을 고등과정에서는 ‘불능’이라는 낙인을 찍어 판단을 보류시킨다. 덕분에 우리는 고민 없이 이 단순한 등식의 성질을 기반으로한 쪽이 0인 방정식도 장착하고 미적분(f’(x)=0)도 장착하며 나아가 더 복잡하고 섬세한 기술을 장착해서 무엇이든 증명하고 안전하게 답에 도달한다. 이런 답들은 절대 섞이지 않는다. 도착지는 a이거나 b이지 a이면서 b일수는 없다.   이렇게 안전한 수학체계의 존재를 확신한 수학자가 있었다. 수학적 체계를 엄격하고 세심 히 설계하면 그 체계 내에서는 절대 모순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던 힐베르트,   그는 1930년, 세상 모든 수학자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수학은 완전한가”. 즉 수학은 세상의 모든 참인 명제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는 가이고 두 번째 “수학은 일관된가” 로 수학적 체계 내에서 수학은 모순을 발생시키지 않는 가이며 마지막으로 세 번째 “수학은 결정가능한가”는 주어진 어떤 명제가 자명한 공리를 따르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가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은 1931년, 쿠르트 괴델의 < 불완전성정리 >를 통해 아님이 증명되었다. 그는 증명도...
문탁
2023.11.28 | 조회 89
문탁의 나이듦 리뷰
*이 글은 <녹색평론> 182호 (2023 여름)에 실린 글입니다. 여기에 다시 게재합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각자도사 사회>(송병기, 어크로스, 2023)-               9년 전 혼자 살던 어머니가 화장실에서 넘어져 응급실에 실려 갔다. 아, 계속 혼자 사시게 하는 건 위험하구나. 결국 난 어머니와 살림을 합쳤다. 다소간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래도 어머니를 눈앞에서 보고 있는 편이 맘이 편할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깨달았다. 아, 망했구나. 그러니까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은 MZ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같은 소위 베이비붐 세대들에게도 부모 돌봄이 닥치면, ‘이생망’ 소리가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나온다. 왜 우리는 누군가를 돌보기 위해서는 자기 삶을 망칠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여야 하나? 왜 우리는 누군가에게 돌봄을 받고 오래 사느니 그냥 빨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의료인류학자인 저자는 바로 그런 현실을 낳고 있는 우리 사회의 나이듦과 질병, 죽음의 맥락을 세심하게 들춰낸다.     1. 왜 노인은 애물단지가 되었을까?   책의 앞부분, 아주 인상적인 에피소드가 나온다. 서울 한 요양원의 오후 4시, 팥죽이 간식으로 제공되었다. 그런데 어떤 할머니 한 분이 가장 먼저 거실에 도착해서 신속하게 음식을 먹고 자리를 떴다. 저자는 그분을 좇아가서 대화를 시작한다. 그리고 알게 된다. 할머니가 팥죽을 좋아한 게 아니라 그 반대라는 것을. 할머니는 매번 간식으로 나오는 팥죽을 먹는게 고역인 분이다. 그런데도 “일하는 분들과 딸에게 짐이 되지 않기...
*이 글은 <녹색평론> 182호 (2023 여름)에 실린 글입니다. 여기에 다시 게재합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각자도사 사회>(송병기, 어크로스, 2023)-               9년 전 혼자 살던 어머니가 화장실에서 넘어져 응급실에 실려 갔다. 아, 계속 혼자 사시게 하는 건 위험하구나. 결국 난 어머니와 살림을 합쳤다. 다소간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래도 어머니를 눈앞에서 보고 있는 편이 맘이 편할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깨달았다. 아, 망했구나. 그러니까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은 MZ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같은 소위 베이비붐 세대들에게도 부모 돌봄이 닥치면, ‘이생망’ 소리가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나온다. 왜 우리는 누군가를 돌보기 위해서는 자기 삶을 망칠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여야 하나? 왜 우리는 누군가에게 돌봄을 받고 오래 사느니 그냥 빨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의료인류학자인 저자는 바로 그런 현실을 낳고 있는 우리 사회의 나이듦과 질병, 죽음의 맥락을 세심하게 들춰낸다.     1. 왜 노인은 애물단지가 되었을까?   책의 앞부분, 아주 인상적인 에피소드가 나온다. 서울 한 요양원의 오후 4시, 팥죽이 간식으로 제공되었다. 그런데 어떤 할머니 한 분이 가장 먼저 거실에 도착해서 신속하게 음식을 먹고 자리를 떴다. 저자는 그분을 좇아가서 대화를 시작한다. 그리고 알게 된다. 할머니가 팥죽을 좋아한 게 아니라 그 반대라는 것을. 할머니는 매번 간식으로 나오는 팥죽을 먹는게 고역인 분이다. 그런데도 “일하는 분들과 딸에게 짐이 되지 않기...
문탁
2023.11.23 | 조회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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