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와 장애가 만날 때  / 무사

문탁
2023-12-31 10:57
232

 

 

 

2학기 공부는 유독 일상과 교차되었다. 길을 걷다 장애를 가진 동물과 마주친다든가 갑자기 호떡이 먹고 싶어져 농인인 상인과 소통을 해야하는 일 등으로 말이다. 직업군인으로 근무했던 수십 년 동안 내 주변에 장애인이 ‘없었다’는 것과 장애를 나와 관련된 이슈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장애인 차별이 비장애중심주의ableism와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을 공부하고 나서야 비로소 관련없어 보였던 군대와 장애를 연결시킬 수 있었다. 

 

 

 

군에서는 운동신경이 없어서 혹은 경험이 많지 않아 헛발질을 일삼고 잘 하지 못하는 이들의 스포츠 경기를 일컫어 ‘장애인 00’이라고 불렀다. 병영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장병들은 “장애인이냐? 고문관이냐?”는 폭언을 일상적으로 들었다. 군대야말로 인간 사회를 적자생존이라는 진화론적 관점으로 설명하는 ‘사회적 다윈주의와 우생학 정책’의 생생한 현장으로 보였다. 한반도의 분단 상황과 한국의 징병제도는 ‘정상 신체를 가진 대한민국 남성’만을 전쟁에 필요한 자원으로 호명해왔다. 군에서 장애인은 철저하게 비가시화되어 있었지만, 비하할 만한 상황이나 대상이 필요하면 여지없이 소환되었다. ‘군인되기에 적합한 신체'라는 기준에 맞추기 위해 애쓰며 그 누구도 장애인되기를 원하지 않(을 줄 알)았다.

 

 

에이블리즘의 원형, 군대

 

 군에는 장애인이 ‘없다’. ‘신체의 정상성’으로 대표되는 조직인 군은 입영단계에서 법령(국방부령 병역판정신체검사등검사규칙)에 근거하여 ‘그냥 인간’을 ‘등급내 인간’과 ‘등급외 인간’으로 분류한다. 이 과정을 통해 장애인의 군내 진입은 ‘원천’ 차단된다. 장애인이 없으니 장애인 편의시설도 필요없다. 장애인 화장실은 고사하고 휠체어 픽토그램조차 보지 못했다. 군 복무 중 장애가 생기는 경우는 어떨까? 장애의 원인이 작전 중의 사유가 아닌 이상 심의를 거쳐 전역 조치 된다. 前 보훈청장 방우진 예비역 중령은 현역시절 유방암이 발병하여 유방 절제수술을 받았다고 의병 전역을 해야만 했고, 故 변희수 하사는 트랜지션 과정에서 고환을 절제했다고 강제 전역을 당했다. ‘군인에 적합한 신체’라는 기준에 따라 군인이 장애인이 되는 순간 군대에서 추방된다. 그러나 유방과 고환이 전투력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군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꽤 오랜 기간 복무한 나로서도 도무지 모르겠다. 백번 양보해서 "축구 잘하는 군인은 무조건 군 생활 잘 해. 다른 것은 볼 필요도 없어.” 라던 어느 지휘관의 말을 인정한다하더라도 유방과 고환이 축구를 하는 것도 아닐텐데 말이다. 

 

장애/동물운동가 수나우라 테일러는 <짐을 끄는 짐승들>에서 강제적 비장애 신체성 체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강제적 비장애 신체성 체계란, 비장애중심주의가 작동하는 하나의 기제로 사람들의 육체적 기능이나 외관을 표준화하는 규범이며,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비장애 신체에 들어맞지 않는 신체를 모두 ‘장애’로 낙인찍는 시스템이다”(246) 국가는 ‘정상 신체’를 가진 대한민국 남성의 군 복무를 신성시하며 여성, 장애인, ‘혼혈’ 남성의 신체를 군에 적합하지 않은 신체로 낙인찍고, 이들을 ‘구성적 외부’로 동원해왔다. ‘병역을 필한 대한민국 남성’의 입장에서도 긍정하기 어려운 징집의 상태를 윤색해 줄 대상이 필요했을지 모르겠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그들 또한 기득권의 자장 안에서 ‘구성적 외부’와 위계적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마치 보상받은 것 같은 착각 속에 살아온 셈이니 말이다. 1999년 ‘제대군인 군가산점 제도’가 위헌 결정을 받기 전까지 그 기득권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이 유명한 결정은 남성 vs 여성 간 젠더 갈등 사례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 헌법소원 청구인에는 지체장애인 3급 3호(장애등급제 폐지 이전 舊 장애인복지법 시행규칙에 따른 것) 남성 장애인도 있었다.

 

 

 

 

‘장애 수행’, ‘트랜스어빌리티’를 통한 에이블리즘 교란

 

 넷플릭스 드라마 <D.P.>가 한동안 화제였다. 좀 과장된 측면은 있지만, 군의 현실을 대체로 잘 묘사했다. 실상이 이렇다보니 할 수만 있다면 병역을 피하고 싶어하는 입영 대상자들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사실 병역기피는 동서고금 할 것 없이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서서히 무너지는 ‘병역필 남성’ 기득권의 허상과 군대의 민낯에 대한 절망은 입영의 문 앞에서 병역을 면제받으려는 욕망과 만나 ‘장애인’ 되기를 희구하는 집단, ‘다른 장애인’으로 현신이 되어 출현한다. 이들은 병역법에 명시된 신체기준에 ‘살짝 어긋난’ 몸, 딱 그만큼의 ‘장애’를 얻기 위해 애쓴다. 병역법상 ‘신체의 정상성’ 기준이 ‘병역면제’ 기준으로 재전유되는 지점이다. 이로써 신성한 국방의 의무와 최상의 전투력 유지라는 외피를 뒤집어 쓴 비장애중심주의, ‘군대적 다윈주의’는 비장애인 입영 대상자들의 ‘장애 수행’을 통해 교란된다. 장애를 의료적 치료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비장애중심주의와 ‘신체의 정상성’이 규범인 사회에서 ‘장애’가 ‘선망’되는 아이러니가 생겨난다. 

 

이 현상은 신체 예술 연구활동가 베서니 스티븐스가 정의한 ‘트랜스어빌리티transability’를 떠올리게 한다. 트랜스어빌리티란 ‘이분화된 신체적 비장애 상태에서 신체적 장애 상태로 전환하려는 욕구나 열망’을 의미한다. 김은정 시러큐스대 여성/젠더학과 교수는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에서 트랜스어빌리티 개념을 소개하며, 치유란 의료적 치료를 넘어 “몸, 정동, 사회적/물질적 조건들에 의도적인, 또한 비의도적인 변화를 촉발하는 전환적 과정”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정상성’이 바람직하다는 신념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장애가 있는 몸을 장애가 없는 몸으로 전환하는 것과 그 반대의 과정이 동일한 것으로 인정되기는 어렵겠지만, 바로 그 ‘정상적인 몸’, ‘선호되는 미’라는 관점을 소거한다면, 성형수술에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몸을 깎아내고 찢고 꿰매는 의료적 ‘치료' 과정이 ‘몸’에 손상을 가하고 ‘장애’를 입히는 것과 무엇이 다른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입영을 기피하기 위해 선택한 ‘장애 수행’이 능동적인 ‘트랜스어빌리티’는 아니지만, 두 행위 모두 비장애와 장애라는 이분법 규범을 교란하며 경계를 흐릿하게 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다양한 방식 중 하나로 볼 여지는 없을까?

 

 균열과 교란은 복무 중에도 발생한다. 분명 입영 단계에서 장애인의 징집을 차단했음에도 불구하고 복무 중 ‘정신장애’ 등의 사유로 현역복무부적합심의를 거쳐 병역처분이 변경 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장애학 연구활동가 김도현은 <장애학의 도전>에서 ‘사회가 장애를 만든다’고 말한다.(31) 현역복무부적합심의와 병역처분변경심의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내가 느꼈던 불편함과 무기력감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군은 ‘등급내 인간’으로 호명한 이들 중 일부를 ‘정상성’ 기준에 맞지 않는다며 다시금 ‘등급외 인간’으로, ‘장애인’으로 선별하여 추방한다. 이 과정은 매주, 전군에서 계속된다. ‘장애’로부터 군대를 ‘보호’하기 위한 반복 속에서 ‘트랜스에이블드’, ‘장애 수행자’들은 사회가, 제도가 ‘장애’를 만드는 요인임을 몸으로 보여주며 교란의 춤을 추고 있다.  

 

 

 

 

 

저출산이 쏘아올린 공, 젠더, 인종을 넘어 장애까지 닿을까?

 

 2005년 육군훈련소 인분사건 이후 군 인권보호 수준은 진일보했다. 금쪽이를 군에 보낸 부모들, 언론, 정치권이 한 목소리를 낸 결과, 인권보호제도가 마련되었고, 장병들의 의식수준은 조금씩 향상되었다. 동성애 장병을 차별해서는 안된다는 규정도 제한적으로나마 포함되었고, 병사들의 복무기간도 점차 단축되었다.

 

현재의 복무기간이 유지되고 저출산 흐름이 계속된다면 2040년 이후 입영 대상은 약 15만명으로 줄어들 전망이다. 올해보다 50%정도 축소되는 공백을 과연 누가 메울까? 국방개혁으로 인한 병력감축과 저출산의 영향으로 입영 대상자가 줄어들자 군은 현역 복무가 가능한 신체등급 기준을 2급에서 3급으로 조정했다. 여성 군인 선발비율도 늘려 작년 기준으로 여성 군인은 전체의 9%를 차지하고 있다. 2010년에는 한국 국적 다문화 장병의 입영을 허용했다. 인종과 피부색 등을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된다는 규정도 산입했다. 당시 글로벌시대 변화하는 한국사회의 다문화적 특성에 대비한다는 취지를 내세웠지만, 병력감축에 따른 안보 공백을 채우고 징병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군은 입대자원 부족과 그로 인한 전력 공백을 신체등급 기준 완화, 여성 군인 확대와 다문화 장병 입대로 채우려 하는 등 인원 수 맞추기에만 급급하다.

 

조직문화는 조직 구성원들의 공유된 가치, 신념, 행동, 배경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국가, 민족에 바탕을 둔 전통적인 개념과 달리 최근에는 인종, 성별, 나이, 신체적 장애 등을 포함한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다. 독일이나 스위스군의 다양성 범주는 한국군보다 포괄적인 개념으로 성, 민족, 인종, 성적 지향성, 연령, 장애, 교육배경, 성장배경, 출생지, 종교, 문화 등을 포함하고 있으며, 각 국방부 예하에 다양성 관리 전담 부서가 설치 되어 있다. 특히 독일 국방부의 다양성 정책은 개개인의 경험과 가능성, 잠재역량에 초점을 맞추고 군내 구성원에 대한 가치판단, 역할, 직책부여에 있어서 편견을 없애고 존중하려는 변화로 평가받고 있다. 반면 한국군이 채택하고 있는 다양성 정책은 병력 공백을 채우기 위한 양적 보완 수단일 뿐 다양성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고 수립한 질적 정책은 아니다. 다양성 관리의 일환으로 내세우는 ‘양성평등’과 ‘다문화’ 정책도 명명에서부터 이미 협소한 범주 인식과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군대에서 장애 역량을 재사유하기

 

“장애라는 존재 자체가 갖는 사회적인 역량에 주목하고 싶었다. 다시 말해 사회적 관계를 상호의존과 공생의 원리에 따라 재구축하며 사회질서를 평등과 협력의 원리에 입각해서 새로이 구성하기 위한 사유와 실천의 실마리를 장애인의 사회적 존재로부터  모색해보고자 한 것이다.”( 「문화과학」 115호 “장애와 역량” 발간사 )

 

군인의 지위 및 복무에 관한 기본법 제20조에는 “군인은…(중략)…국민의 생명ㆍ신체 및 재산을 보호하여”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렇다. 군인은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 에이블리즘 군대가 ‘장애’로부터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동권과 탈시설은 장애인 운동의 오랜 화두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군대는 ‘비장애인’만을 선별하여 ‘시설’에 가두고 이들의 이동권을 제한함으로써 탈시설의 욕망을 키우고 있다. 군대는 ‘장애를 만든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1990년대 이후 국제질서는 복잡해졌고 안보위협은 다양해졌다. 안보의 개념이 군사안보에서 인간안보로 바뀌고 있으며, 군의 활동 역시 국가방어만이 아니라 환경보호, 재난 구조, 지역분쟁 해결 등으로 다변화하고 있다. 전통적 요소로 구성된 물리적 전투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목도하고 있듯이 전쟁은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 군의 전투력에는 물리적 유형력 뿐만 아니라 리더십이나 사기, 연대감, 갈등관리와 같은 무형전력도 포함된다. ‘죽이는’ 실력만이 전투력은 아니라는 말이다. 살리는 것, 함께 사는 것도 중요한 전력이다. 만일 군대에도 미덕이 있다면, 낯설고 다른 존재(자)와 섞이는 일이 유일하지 않을까? 출신도 자라온 환경도 매우 다른 이들이 비자발적으로 섞이는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사회에서 말이다. 블라인드blind 게시판에 “요즘 병사들은 “돌격 앞으로”를 외쳐도 휴대전화만 쳐다보고 있을 것 같다”는 자조섞인 글이 올라온다고 한다. 그들이 휴대전화 대신 낯설고 다른, 그래서 불편한, 그러나 서로에게 생명을 의탁할 수 밖에 없는 동료를 바라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차용환 육사 교수는 “군에서 다양성 관리를 경험한 장병은 조직 내에서의 성과는 물론 제대 이후 사회구성원으로서 사회통합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조직 내 다양성의 증가는 조직의 경쟁력, 응집성, 전문성과 같은 실제적인 성과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며, 윤리적 민감성, 적극적 행동과 같은 규범적 성과가 증대되는 결과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군 여성 군인(조직)은 1950년 500명의 육군 여자의용군으로 창설된 이래 남성 군인의 참전을 각성하게 하는 존재(자)로(1949-1954), 국가총력안보시대의 애국 상징으로(1955-1989), 지식정보화시대 전문직업군인으로(1990 이후) 활용되어 왔다. 전쟁 양상의 변화와 군 활동의 다변화 흐름 속에서 유연함과 잠재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써 군사적 폭력성을 다소나마 약화시키고 전문성을 인정받기도 했지만, 젠더화된 역할 수행을 요구받는 등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여성 군인의 위치성과 관련한 문제적 지점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 군인은 그동안 군인의 전형으로 상정되어온 ‘남성 군인’과는 ‘다른’ 군인으로 출현하여 군의 전통적인 젠더질서에 교란을 가져왔고 그 과정에서 던져온 질문들이 그나마 지금의 변화를 견인해왔다.(고 말하고 싶다.) 다문화 장병의 출현을 통해서도 변화는 감지된다. 2010년부터 장병 임관(입영) 선서문에는 “민족” 이라는 표현이 “국민”으로 변경되었다. 다문화 장병들은 4대 종교에 치우쳐 있는 군내 종교 활동 자유의 폭을 넓히고 식습관, 언어, 역사적 배경과 편견 등 다양한 문화적 차이를 존중해야할 필요성을 존재 자체로 증명하고 있다. 

 

저출산이 쏘아올린 공은 의도치않게 군대의 변화를 재촉하고 있다. 다급해진 군은 부족한 입영자원을 대체하기 위해 여성 군인 비율을 2027년까지 15%로 높이고 다문화 장병의 입대를 적극 장려하고 신체등급 3급으로 한차례 범위를 넓힌 현역 복무 기준을 이제는 4급으로 바꾸려고 한다. 이러한 조치들은 그동안 군이 내세웠던 ‘신체의 정상성’이라는 기준이 얼마나 자의적인 것이었는지를 드러낸다. 얼마 전 뉴욕 타임즈는 칼럼에서 “한국의 저출산은 가족중심주의, 문화적 보수주의의 영향으로 보이며, 한국이 유능한 야전군을 유지하려고 고군분투한다면 북한이 남침할 가능성도 있다”고 경고했다. 언제까지 ‘안보’를 ‘숫자’에만 맡길 것인가? 

댓글 1
  • 2024-01-09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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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약방 에세이
          비자본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에서     세상에 하나뿐인 약국. 동네 사랑방 같은 약국. 마을 건강 플랫폼. 호모큐라스들의 네트워크. 이런 캐치프레이즈들을 내걸고 친구들과 함께 공동체 안에 약국을 열었다. 내 삶의 계획 안에는 없었지만 약국을 기꺼이 오픈하게 된 이유는 친구들과 삶을 함께 도모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저 캐치프레이즈들이 말하듯 내 업에서도 새로움을 모색하고 싶었다. 약 3년 동안 적자와 흑자를 오가는 매출 곡선에 일희일비하면서도 우리는 먹고살 수 있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공동체 친구들과 함께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약국이 공유지로서 작동했기 때문이다. 처방전을 받지 않고도, 한 사람과 2시간이 넘게 상담하고도, 저렴하게 약을 지으면서도 아직 망하지 않았다. 또 우리가 지은 약(주로 쌍화탕)은 다른 인문학 네트워크로, 연대의 현장으로 선물이 되어 흘렀다.       하지만 내 머리와 마음은 분리가 일어나기 일쑤였다. 약국 알바로 살 때가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돈 벌 때는 상품 경제를, 공동체에서 활동할 때는 선물 경제만 생각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약국을 운영하면서 적자일 때 매출을 올릴 방안을 고민해야 했고, 상품을 더 많이 팔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먹고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고민과 노력이 선물 경제로 작동되는 공유지에서는 불편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또 친구들과의 대화가 주로 매출에 대한 이야기로 흐를 때 동학이 아닌 직장 동료 같아서 가끔 헛헛하다. 공부할 시간도 줄었다. 약국 알바 때 보다 수입이 줄어 내 삶이 더 불안정해졌다는 점도 무시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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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
2024.01.13 | 조회 182
인문약방 에세이
애나 칭의 『세계 끝의 버섯』은 자본주의를 연구한 책이다. 나에게 자본주의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마르크스이다. 그는 생산수단을 가진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여 잉여가치를 축적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빈부격차가 가속화되고 결국은 노동자들이 혁명을 일으킨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고, 세계는 자본주의 체제가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 이 정도가 내가 알고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애나 칭은 자본가나 노동자가 아니라 폐허가 된 숲과 그곳에서 자라는 송이버섯을 통해 자본주의 세계를 연구했다. 이 세계에는 성장을 위한 경쟁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협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 비인간을 너머 얽혀있는 다종의 생명체들이 움직이는 방식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 우선은 애나 칭을 따라 폐허가 된 숲으로 들어가 보자.     1.오염에서 창발로   20세기 초 오리건 주의 데슈츠강을 따라 철도가 건설되었다. 숲에서 벌목된 폰데로사 소나무는 철도에 실려 먼 곳까지 팔려나갔다. 1930년대에 이르렀을 때 오리건 주는 미국에서 목재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지역이 되었다. 하지만 1989년 무렵에는 대부분의 제재소가 문을 닫았고 벌목된 숲은 폐허가 되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1854년 일본은 미국과 조약을 맺고 항구를 개방하며 무역을 시작했다. 이들은 서구의 근대화 과정을 좇아 국제무역 시장에서 빠르게 성장했다. 20세기 초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세계경제가 호황을 맞았을 때, 일본 경제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때 일본의 기업들은 생산이 아니라 금융자본에 의해 성장했다. 일본의 무역회사는 “해외 공급사슬 파트너에게 대출이나 장비, 기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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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4.01.13 | 조회 163
인문약방 에세이
      2학기 공부는 유독 일상과 교차되었다. 길을 걷다 장애를 가진 동물과 마주친다든가 갑자기 호떡이 먹고 싶어져 농인인 상인과 소통을 해야하는 일 등으로 말이다. 직업군인으로 근무했던 수십 년 동안 내 주변에 장애인이 ‘없었다’는 것과 장애를 나와 관련된 이슈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장애인 차별이 비장애중심주의ableism와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을 공부하고 나서야 비로소 관련없어 보였던 군대와 장애를 연결시킬 수 있었다.        군에서는 운동신경이 없어서 혹은 경험이 많지 않아 헛발질을 일삼고 잘 하지 못하는 이들의 스포츠 경기를 일컫어 ‘장애인 00’이라고 불렀다. 병영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장병들은 “장애인이냐? 고문관이냐?”는 폭언을 일상적으로 들었다. 군대야말로 인간 사회를 적자생존이라는 진화론적 관점으로 설명하는 ‘사회적 다윈주의와 우생학 정책’의 생생한 현장으로 보였다. 한반도의 분단 상황과 한국의 징병제도는 ‘정상 신체를 가진 대한민국 남성’만을 전쟁에 필요한 자원으로 호명해왔다. 군에서 장애인은 철저하게 비가시화되어 있었지만, 비하할 만한 상황이나 대상이 필요하면 여지없이 소환되었다. ‘군인되기에 적합한 신체'라는 기준에 맞추기 위해 애쓰며 그 누구도 장애인되기를 원하지 않(을 줄 알)았다.     에이블리즘의 원형, 군대    군에는 장애인이 ‘없다’. ‘신체의 정상성’으로 대표되는 조직인 군은 입영단계에서 법령(국방부령 병역판정신체검사등검사규칙)에 근거하여 ‘그냥 인간’을 ‘등급내 인간’과 ‘등급외 인간’으로 분류한다. 이 과정을 통해 장애인의 군내 진입은 ‘원천’ 차단된다. 장애인이 없으니 장애인 편의시설도 필요없다. 장애인 화장실은 고사하고 휠체어 픽토그램조차 보지 못했다. 군 복무 중 장애가 생기는 경우는 어떨까? 장애의 원인이...
      2학기 공부는 유독 일상과 교차되었다. 길을 걷다 장애를 가진 동물과 마주친다든가 갑자기 호떡이 먹고 싶어져 농인인 상인과 소통을 해야하는 일 등으로 말이다. 직업군인으로 근무했던 수십 년 동안 내 주변에 장애인이 ‘없었다’는 것과 장애를 나와 관련된 이슈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장애인 차별이 비장애중심주의ableism와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을 공부하고 나서야 비로소 관련없어 보였던 군대와 장애를 연결시킬 수 있었다.        군에서는 운동신경이 없어서 혹은 경험이 많지 않아 헛발질을 일삼고 잘 하지 못하는 이들의 스포츠 경기를 일컫어 ‘장애인 00’이라고 불렀다. 병영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장병들은 “장애인이냐? 고문관이냐?”는 폭언을 일상적으로 들었다. 군대야말로 인간 사회를 적자생존이라는 진화론적 관점으로 설명하는 ‘사회적 다윈주의와 우생학 정책’의 생생한 현장으로 보였다. 한반도의 분단 상황과 한국의 징병제도는 ‘정상 신체를 가진 대한민국 남성’만을 전쟁에 필요한 자원으로 호명해왔다. 군에서 장애인은 철저하게 비가시화되어 있었지만, 비하할 만한 상황이나 대상이 필요하면 여지없이 소환되었다. ‘군인되기에 적합한 신체'라는 기준에 맞추기 위해 애쓰며 그 누구도 장애인되기를 원하지 않(을 줄 알)았다.     에이블리즘의 원형, 군대    군에는 장애인이 ‘없다’. ‘신체의 정상성’으로 대표되는 조직인 군은 입영단계에서 법령(국방부령 병역판정신체검사등검사규칙)에 근거하여 ‘그냥 인간’을 ‘등급내 인간’과 ‘등급외 인간’으로 분류한다. 이 과정을 통해 장애인의 군내 진입은 ‘원천’ 차단된다. 장애인이 없으니 장애인 편의시설도 필요없다. 장애인 화장실은 고사하고 휠체어 픽토그램조차 보지 못했다. 군 복무 중 장애가 생기는 경우는 어떨까? 장애의 원인이...
문탁
2023.12.31 | 조회 232
인문약방 에세이
    장애인활동지원사를 아시나요   나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그 사람의 목소리와 표정, 일상적인 습관, 스타일 같은 것에 민감한 편이다. 무의식적으로 주변사람들을 관찰하는 습성은 주로 내가 속한 모임에서 불편해 보이는 사람을 빨리 발견하는데서 자각되곤 한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일까를 고민했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끙끙거렸다. 특히 나와 일면식이 없더라도 주변에 바로 식별이 가능한 지체장애인이 나타나면 오지라퍼적인 감각이 더 살아나 온통 신경이 그쪽으로 집중되고 긴장이 되곤 한다. 그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인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말을 꺼내거나 접촉할 수 있을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했다. 물론 그것은 실행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성향 때문이었을까. 나는 회사를 그만두면 돌봄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올해 여름 재취업한 회사를 그만두면서 기회가 왔다. 장애인활동지원사 교육을 신청했고 5일간의 교육을 통해 그 현장의 소리를 들으며 장애, 돌봄, 비장애중심주의, 상호의존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지정된 교육 기관에서 5일간 8시간씩 40시간의 교육을 받으면 실습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고, 현장 실습 10시간까지 완료하면 정식 장애인활동지원사가 된다. 우리나라에서 인정되는 장애의 유형은 신체적 장애와 정신적 장애를 합쳐 15가지이고 신체장애와 관련된 보조기기만 해도 수백 가지인데 50시간의 교육만으로 실무에 투입된다는 게 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지만 나에겐 이론 교육을 받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웠다.   장애인활동지원사의 역할은 신변처리, 가사지원, 이동지원, 커뮤니케이션 보조 등 네 가지이고 구체적으로는 장애에 대한 이해, 장애인의 인권, 활동지원사의...
    장애인활동지원사를 아시나요   나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그 사람의 목소리와 표정, 일상적인 습관, 스타일 같은 것에 민감한 편이다. 무의식적으로 주변사람들을 관찰하는 습성은 주로 내가 속한 모임에서 불편해 보이는 사람을 빨리 발견하는데서 자각되곤 한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일까를 고민했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끙끙거렸다. 특히 나와 일면식이 없더라도 주변에 바로 식별이 가능한 지체장애인이 나타나면 오지라퍼적인 감각이 더 살아나 온통 신경이 그쪽으로 집중되고 긴장이 되곤 한다. 그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인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말을 꺼내거나 접촉할 수 있을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했다. 물론 그것은 실행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성향 때문이었을까. 나는 회사를 그만두면 돌봄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올해 여름 재취업한 회사를 그만두면서 기회가 왔다. 장애인활동지원사 교육을 신청했고 5일간의 교육을 통해 그 현장의 소리를 들으며 장애, 돌봄, 비장애중심주의, 상호의존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지정된 교육 기관에서 5일간 8시간씩 40시간의 교육을 받으면 실습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고, 현장 실습 10시간까지 완료하면 정식 장애인활동지원사가 된다. 우리나라에서 인정되는 장애의 유형은 신체적 장애와 정신적 장애를 합쳐 15가지이고 신체장애와 관련된 보조기기만 해도 수백 가지인데 50시간의 교육만으로 실무에 투입된다는 게 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지만 나에겐 이론 교육을 받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웠다.   장애인활동지원사의 역할은 신변처리, 가사지원, 이동지원, 커뮤니케이션 보조 등 네 가지이고 구체적으로는 장애에 대한 이해, 장애인의 인권, 활동지원사의...
문탁
2023.12.31 | 조회 151
인문약방 에세이
    그는 지금껏 내가 만난 가장 낯선 작가였다.   책을 읽기 전, 단톡방에 올라온 저자 일라이 클레어의 사진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여자라고 들었는데, 두 귀가 다 드러난 반삭에 가까운 짧은 머리, 두툼한 안경을 낀 얼굴에 넓은 어깨, 지퍼 달린 낡은 녹색 점퍼... ‘남자같은 여자’ 내가 갖고 있는 단어의 수준에서 나는 이렇게밖에 정의내릴 수 없었다. 그런데,             글을 보니, 그는 ‘젠더 퀴어’란다. 무슨 뜻이지? 동성애자인가? 소수자 용어에 낯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퀴어는 동성애자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퀴어란, 태어날 때 사회(의사)가 지정해준 생물학적 성과 자기 정체성으로서의 성이 일치하지 않은 사람을 통칭한다. 거기에는 여자지만 남자보다 여성에게 성적으로 더 끌리는 사람, 남녀 모두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는 사람, 사회에서 훈육되는 여성성에 부합하지 않는 여자, 자신을 굳이 남녀이분법에 놓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 … 그러다 보니 나도 퀴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라지 않았다면, 미디어와 문학의 일방적인 이성애적 세례가 없었다면, 혹은 대학 시절 다이크 공동체를 만났다면, 나도 지금과는 다른 젠더가 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에 대한 소개를 좀 더 해보자. 그는 1963년생, 미국 오리건주 시골 벌목 노동자 마을에서 백인 중산층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지정성별로는 여성이지만 자신이 소녀라는 걸 확신할 수 없는 젠더 퀴어였고, 선천적 뇌병변 장애인으로 어려서부터 지진아, 불구, 원숭이 같은 조롱과 비난을 들으며 자랐다. 그는 아주...
    그는 지금껏 내가 만난 가장 낯선 작가였다.   책을 읽기 전, 단톡방에 올라온 저자 일라이 클레어의 사진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여자라고 들었는데, 두 귀가 다 드러난 반삭에 가까운 짧은 머리, 두툼한 안경을 낀 얼굴에 넓은 어깨, 지퍼 달린 낡은 녹색 점퍼... ‘남자같은 여자’ 내가 갖고 있는 단어의 수준에서 나는 이렇게밖에 정의내릴 수 없었다. 그런데,             글을 보니, 그는 ‘젠더 퀴어’란다. 무슨 뜻이지? 동성애자인가? 소수자 용어에 낯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퀴어는 동성애자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퀴어란, 태어날 때 사회(의사)가 지정해준 생물학적 성과 자기 정체성으로서의 성이 일치하지 않은 사람을 통칭한다. 거기에는 여자지만 남자보다 여성에게 성적으로 더 끌리는 사람, 남녀 모두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는 사람, 사회에서 훈육되는 여성성에 부합하지 않는 여자, 자신을 굳이 남녀이분법에 놓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 … 그러다 보니 나도 퀴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라지 않았다면, 미디어와 문학의 일방적인 이성애적 세례가 없었다면, 혹은 대학 시절 다이크 공동체를 만났다면, 나도 지금과는 다른 젠더가 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에 대한 소개를 좀 더 해보자. 그는 1963년생, 미국 오리건주 시골 벌목 노동자 마을에서 백인 중산층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지정성별로는 여성이지만 자신이 소녀라는 걸 확신할 수 없는 젠더 퀴어였고, 선천적 뇌병변 장애인으로 어려서부터 지진아, 불구, 원숭이 같은 조롱과 비난을 들으며 자랐다. 그는 아주...
문탁
2023.12.31 | 조회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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