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의 연대기 #3- 종로에 데뷔하다
문탁
2023-10-06 08:45
359
해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국을 탈주한 퀴어다.
판에 박힌 일상과 화폐 증식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서울에선 누군가와 연애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와 같은 성향의 친구들도 만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어느 날 한 잡지 커버의 “호모”란 단어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선데이 서울”이었다. 남성 동성애자들이 변태 성욕자로 등장하는 선정적이고 과장된 기사였지만 난 선데이서울이 고마웠다. 공중파 방송에서도 비슷한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정보들을 짜깁기한 끝에 종로3가에 남성 동성애자들이 모이는 극장과 지하 술집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극장에 가기로 결심한 날 내 심장은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날 보고 있을 것 같았다. 매표소를 빙빙 돌다 돌아오는 일이 몇 번 반복되었다. 식은 땀을 흘리며 겨우 들어갔다. 구석에서 곁눈질만 하다가 나오곤 했다. 만남의 방식이 낯설었지만 종로라는 공간이 있다는 게 기뻤다.
90년 대 초 동성애자들이 종로에 있는 은밀한 공간에 얼굴을 내미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그 사건을 ‘종로에 데뷔’했다고 표현했다. 데뷔 년도는 상대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정보였다. 이름이나 학교, 직장, 사는 동네 등은 대놓고 묻지 않았다. 웬만큼 친해져 신뢰할 수 있을 때까지는. 나처럼 갓 데뷔한 20대부터 장년층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백수들도 눈에 띄었고 소수지만 정해진 거처 없이 반노숙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발렌타인 30년산을 파는 지하 술집엔 돈이 꽤 있거나 결혼한 중년들이 드나들었다. 당시 한국 사회에 동성애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했다면 선데이서울의 기사 제목처럼 변태적 욕망을 가진 “호모”일 뿐이었다. 이러한 인식에 대한 수용인지 체념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을 성적 대상화하는 무수한 은어들을 발명했다. 자기바하적 언어 없이는 대화를 이어가기 어려워 보였다. 사람들이 술자리를 파하고 돌아갈 무렵 종로는 깨어나기 시작했다. 어두운 공원에서의 크루징과 새벽녘까지 이어지는 지하 술집에서의 유흥이 낯설고 기괴했다. 난 적응하기 어려웠고 적응하고 싶지 않았다.
종로3가의 대표적인 게이바 "프렌즈"의 천정남님 인터뷰(https://www.sqcf.org/blog/?q=YToy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zOjQ6InBhZ2UiO2k6Nzt9&bmode=view&idx=3612737&t=board)
종로에서 두번의 연애를 했다. 마법에 걸린 기분이었다. 그 사람이 세상의 전부로 여겨졌고 놓치고 싶지 않았다. 상대들은 나와 달랐다. A는 어린 나이에 데뷔해서 연애 경력이 몇 번 있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술에 취해 자신은 남성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신이 달라질 것이라고 울부짖었다. 곧 종로에 발길을 끊겠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B는 경제적으로 안정되면 결혼을 할 거라고 했다. 여자 친구가 있었다고 했지만 난 그가 여성과 사귀거나 같이 사는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자신을 수용하기 힘들어 하는 사람들과의 연애는 짧은 인연으로 끝이 났다. 친구를 만들었지만 친밀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한 친구는 나중에 본인이 갓 결혼을 했음을 밝혔다. 그는 나를 포함한 알고 지내던 친구들에게 수첩에 있는 자신의 삐삐 번호를 지우라고 ‘명령’했다. 자신은 다시는 종로에 나올 일이 없으니 절대 연락하지 말라고. 과민반응에 화가 났지만 그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나도 그만큼 가슴 졸이며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상이 두려워 비밀을 옷섶에 한가득 감추고 나온 사람들 사이에서 달달한 연애가 싹트거나 신뢰에 기반을 둔 우정이 생겨나기 쉽지 않았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난 종로를 등질 수 없었다. 종로는 들끓는 에로스와 끈끈한 우정을 기대하며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기대가 번번이 무산되더라도 말이다.
‘이중생활’로 몸과 마음은 긴장 모드 상태였다. 이 긴장감을 해소할 뚜렷한 해법은 없었지만 종로 밖 세상에서 나를 조금이라도 드러낼 방법을 찾고 싶었다. 상담을 받기로 했다. 먼저 심리 검사를 받았다. 수 백 개의 검사 문항 중 성지향성을 묻는 질문이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검사 결과가 나오고 나서 상담이 시작되었다. 상담사가 나의 성정체성에 관한 결과를 얘기해 주길 기다렸다. 난 고백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결과를 쭉 설명하다 마지막에 주춤했다. 내가 남성성도 강하나 섬세한 면이 있다는 식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불분명하지만 동성애자와 상담할 준비가 되지 않은 건 분명했다. 이 일 이후 정신과 전문의를 찾아가 보기도 했다. 그는 여성과 성관계를 시도하라는 어이없는 해결책을 제시했다. 모욕적으로 느껴졌다.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세상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서른을 넘기게 되자 종로 밖의 세상은 내게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난 소위 결혼적령기가 되었고 아파트 전세를 마련한 상태였다. 직장 생활도 안정기에 접어 들었다. 다들 결혼을 해야 한다고 성화였다. 서른이 넘도록 여자친구 한번 사귀지 않는 나를 걱정하고 손주를 고대하는 어머니를 실망시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가족과 인연이 끊어질 각오로 커밍아웃할 용기는 없었다. 가족들이 나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은 사회적인 낙인 이상의 두려움이었다. 그래서 일기장도 자물쇠가 달린 걸 썼다. 가족들이 방문했다가 우연히라도 들춰 볼까 염려되어서였다. 결혼할 마음이 전혀 없음에도 가족들에게 뭔가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보여줘야 했다. 맘에 1도 없는 선자리에 몇 번이나 나갔다. 당시만 해도 결혼 제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남성은 신체적 또는 정신적 결함이 있을 거란 오명을 썼다. 그 뿐 아니라 이는 가부장의 위치가 주는 사회적 특권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남성 동성애자들 사이에선 이혼할망정 결혼은 한번 해야 남은 인생이 편하다는 농담까지 있었다. 어쨌든 공개적으로 남성성을 증명한 셈이니까.
난 고등학교 때부터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해 불편함을 느꼈다. 교련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과목이었다. 술자리에서 군대 이야기가 나올라치면 귀를 막았다. 마초적 남성들을 속으로 비웃었으나 돌이켜 보면 스스로 믿었던 만큼 가부장적 위계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대학교 때부터 집안의 호주이자 가장이 되었다. 졸업 후 그간 의무를 다하지 못했단 찜찜함을 털어내고 싶어 집에 돈들어가는 일은 주로 내가 감당했다. 거기엔 능력있는 가장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었다. 나는 또 가족을 갖고 싶었다. 4인 대신 2인의 스위트 홈을 완성하고 싶었다. 그림 같은 이층 집은 못짓더라도 서울 한복판에 내 명의의 아파트를 사고 거기에 달콤한 가정을 들이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인연이 찾아온다 해도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그런 관계가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들었지만 2인가족의 꿈을 놓지 않았다.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부장적 권위에 알레르기를 일으키면서도 그것이 발명해 낸 가족제도 안으로 들어가고픈 욕망이 숨어 있었다. 그게 모순이었지만 에로스적 기운이 넘쳐났던 청년은 주어진 조건에서 무언가를 꿈꾸고 싶었다.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기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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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쌤 글이 항상 차분하고 따뜻해서 좋아요! 쌤이 스스로 발명해나가는 세상을 응원합니다~~ 이번주에는 차분히 줌에 들어갈거에요 오랫만에 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