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처방전> 17회 이석증편

겸목
2022-10-24 18:17
552

‘월간 부끄러움’

-이석증에 이주란의 단편소설 「넌 쉽게 말했지만」(『한 사람을 위한 마음』, 문학동네, 2019년)을 처방합니다

 

모든 것을 멈추고 싶었다

 

나는 단지 모든 것을 멈추고 싶었고, 그러나 그후의 삶이 두려워 자주 울었다. 그런 나의 매일에 대한 말들은 할 수 없다기보다는 하면 안 되는 것에 가까웠다. 언젠가 결국엔 ‘그만하라’는 말을 들을 것 같아서였다. 그즈음엔 내가 몇 년 전, 오래 알고 지낸 후배에게 들은 “누나, 그렇게 살지 마세요”라는 말을 자주 복기했다. 쉽게 뱉은 말이었을까, 어렵게 꺼낸 말이었을까, 비아냥댄 걸까, 내게 상처를 받았던 걸까. 그러니까 나는 무엇인가? 나는 내가 거의 모든 것을 멈추고 싶었다거나 이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그 말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얼마 전 그 후배를 한번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주란, 「넌 쉽게 말했지만」, 59쪽)

 

H가 직장을 그만둘 때의 심정은 이주란의 단편소설 「넌 쉽게 말했지만」의 주인공과 똑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퇴사에는 공통된 감정도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소설 속 주인공은 “다 싫다는 생각 말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고, “두세 달만 쉬고 싶었는데 아예 그만두지 않는 한, 두세 달을 쉴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직장을 그만두고 서울 외곽에 있는 엄마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누나, 그렇게 살지 마세요”라고 했던 후배의 말을 곱씹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고 싶기 때문이다. “미안해, 시간이 없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 정도로 바빴지만, 번듯한 학벌이나 부모의 경제력이라는 자원을 갖지 못한 20대 여성에게 서울에서의 독립생활은 더 나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최선의 삶이었다.

 

부산이 고향인 H는 아버지와 집을 벗어나기 위해 서울에 취업을 했다. ‘여자다움’을 강요하는 아버지의 시선과 간섭이 청소년기 내내 두 사람 사이의 불화의 원인이었다. H는 대학을 졸업하며, 사회복지학과 전공을 살리면서도 집을 나올 수 있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 서울에 있는 ‘청소년쉼터’를 첫 직장으로 선택했다. 이후 H는 20~30대의 시간을 NG0단체, 사회적 기업, 비인가 대안학교 등 진보적인 사회운동을 하고 있는 단체에서 일했다. H에게 하고 있는 일의 취지나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의 신뢰는 돈독했지만, 활동가가 몇 명 되지 않는 작은 조직의 남성 리더가 갖는 ‘귄위주의적’ 사고방식은 아버지만큼이나 H를 못 견디게 했다. 돌이켜보면, 너무 어려서 당차게 대응하지 못했나 하는 아쉬움이 남고, 똘똘 뭉쳐 싸워볼 수도 있었는데 왜 당하기만 했을까 억울하기도 하다. 진보진영의 권위주의적 행태는 형용모순 같지만, H에게는 현실이었다.

 

아버지와 불화하며 보낸 시간 때문인지, H는 청소년과 함께 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H는 꽤 오랜 시간 여행을 주제로 한 대안학교에서 아이들과 생활했고, 대안학교 교사는 아이들이 몸으로 부딪쳐올 때 함께 뒹굴며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H는 자신이 과연 아이들이 부딪쳐오는 힘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인가 하는 불안과 의심에 사로잡혔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보도가 있던 날, H는 아이들과 제주여행중이었다. ‘전원구조’ 뉴스를 보고 마음 편히 점심식사를 했는데, 이후 상황은 경악스럽게 흘러갔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없었고, 흥분한 아이들은 계속 광화문 시위대 속으로 달려갔다. 그 중에는 경찰에 잡혀간 아이도 있었다.

 

아이들의 마음은 물론 본인의 마음도 추슬러지지 않았지만, 일은 계속됐다, 국내든 해외든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일은 철저히 준비해도 긴장과 불안의 연속이었다. 인원이 적은 대안학교의 특성상 교사는 커피 한 잔을 마시는 모습,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는 자세 하나까지 아이들의 시선 아래 놓였다. H는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아이들에게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워졌다. 스트레스로 몸무게가 심하게 빠지고 잠을 잘 수 없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바닥을 쳤다’고 느껴졌을 때, H는 일을 쉬어보기로 했다. 일보다는 자신을 건사해야 했다. 때마침 코로나가 시작되었고,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코로나의 기간 동안 H는 비교적 긴 휴식기에 접어들었다. 이 기간 동안 H는 디스크수술을 했고 이석증 진단을 받았다. 예전에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속이 메슥거려 병원을 찾은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원인을 찾지 못했다. 여행 일정이 잡히면, 혹시 외지에서 통증이 찾아올까 두려워 미리 약을 타다놓기도 했다. 이번에 이석증 진단을 받고 나니, H는 마음이 편해졌다. 막연히 머리가 왜 아플까 걱정되고 불안한 마음에 붙들려 있는 것보다는, 병명을 알게 되었고 통증이 다시 찾아와도 어떻게 처치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양이와 담배

 

흐미가 흘러나오는 영상을 끄고 붕어빵을 파는 아주머니를 생각한다. 오늘 나오셨을까, 붕어빵을 사올까, 옥수수를 사올까, 엄마는 옥수수를 참 좋아하는데. 그냥 둘 다 살까, 고민하고 생각한다. 얼굴을 씻고 밖으로 나가면서 요즘의 내가 이런 생각들을 열심히 한다는 것을 알았고 기분이 좋았다. 나는 죽어도 알 수 없는 타인의 마음 같은 것을 신경쓰면서 초조해하지 않고 내가 결정하면 되는 것들을 생각하는 것. 그것이 죽느냐 사느냐는 아니고 붕어빵이냐 옥수수냐 하는 것이지만. (같은 책, 53쪽)

 

이주란의 소설 속 주인공은 급식실에 일하러 가는 엄마 대신 저녁밥상을 준비하고, 가끔 유튜브 영상을 보고,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여유 있는 한때를 보내고 있다. 더운 여름날 붕어빵과 옥수수를 파는 아주머니가 장사를 나올까 궁금해 하고, 붕어빵을 살까, 옥수수를 살까 고민하는 자신의 고민의 내용들이 마음에 든다.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계산하거나, 한밤중에 아래층 아저씨가 욕을 하며 쫓아 올라오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며 밤잠을 설쳤던 그녀는 이제 붕어빵과 옥수수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엄마가 일하는 급식실에 취업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계획을 세워보기도 하고, 동네 꼬마들에게 사탕을 사주며 장난스럽게 말을 걸고 있다. 난생 처음 자몽청을 만들며 고생스러웠지만 “망쳤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녀는 스스로에게도 남에게도 너그러워지고 있다.

 

최근 이전 직장 상사가 H에게 안부를 물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

“일주일에 하루는 그림 그리러 가고, 하루는 공부해요. 틈틈이 운동과 산책도 하며 지내요.”

“너는 참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구나. 드물게 이상적인 퇴사자의 모습이네.”

 

물론 H가 하고 싶은 대로 다하고 사는 것은 아니다. 한동안은 실업급여로 생활비를 충당했고, 모아놓은 돈이 떨어질 때쯤 운 좋게 일주일에 이틀 나가는 계약직 일을 하게 되었다. 곧 다시 정규직 일자리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림 그리고 공부하며 살아가는 지금의 생활이 마음에 든다. H의 그림은 형체를 그리기보다는 색깔이나 이미지 표현에 집중되어 있는데, 꿈을 그림으로 표현해보며 자신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고 있다. 공부를 통해 자신의 생각이 단단해진다고 느끼기 때문에 공부도 꾸준히 해나가고 싶다. 2~30대에는 일은 많고 급여는 적은 사회단체 일을 계속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 불안하고 두려웠는데, 40대가 되어보니 그간 잘해냈다는 기특한 마음이 들고 어딜 가도 자기 일을 해내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든다. 다만, 지금처럼 여유 있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조금 더 갖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

 

비혼인 H는 두 마리 고양이, 루나와 봄봄과 살고 있다. 고양이들이 건강했으면 좋겠고, 고양이들이 사는 동안 건강하려면 고양이를 돌보는 자신도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40대의 여성흡연자에 대해 같은 아파트 사람들은 ‘애엄마가 무슨 담배냐?’며 못마땅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 ‘애엄마’가 아닌데도, 애엄마로 취급받는 것이 싫고, 담배를 필 때마다 여성의 흡연을 사회가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노골적으로 받고 싶지도 않다. H의 바람은 소박하다. 담배 한 대 마음 편히 피며 고양이들과 무탈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월간 부끄러움

 

운이 정말 좋았다.

운이 정말 좋았다고 우리는 여러 번 이야기했다. 입장료는 천원이었지만 뭐랄까. 그즈음의 우리에겐 천원짜리 입장료를 내지 않아도 되는 일보다 운이 좋았던 일이 없었던 것이다. (같은 책, 51쪽)

 

소설 속 인물들은 낮술을 마신 김에 즉흥적으로 왕릉이 있는 공원으로 산책을 나가며 현금이 없어 입장료를 내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을 한다. 걱정과 달리 무슨 이유에선지 ‘무료입장일’이라 그들은 무사히 공원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데, “운이 정말 좋았다”를 여러 번 이야기하며 기뻐하는 모습은 돈 없는 청년들의 현재의 모습과 정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모습이 짠해 보이고 속상하지만, 농담하고 웃어넘기는 그들의 모습에서 구질구질한 느낌을 한방에 날려버릴 것 같은 허세와 낙관적인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이주란의 ‘궁상’맞은 이야기들은 한순간에 유머러스하며 사랑스러워진다. ‘이번 생은 망했어’라고 덤덤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의 무심함과 자부심에서 주눅 들었지만 찌그러지지 않는 당당함이 있다. 내세울 만한 일 없이 청춘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지만, 이주란의 인물들은 자신을 돌아보고 다짐하고 서로를 다독이며 그들만의 방식으로 ‘수행’을 계속해나간다. 그간 궁금해 했던 것은 서로간의 이해를 쌓기 위한 궁금증이 아니라 “그저 욕의 다른 얼굴일 뿐이었다”는 것을 자각하고, 너무 쉬운 일들이라고 생각해왔던 미안하고 고맙다는 생각을 “가장 우선으로 여기고” 살고 싶다는 마음을 먹는다.

 

돈이 없으면 불편을 감수해야 하고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돈이 없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주란의 ‘반전’은 많은 것을 할 수 없어 슬프지만, 그 가운데 할 수 있는 것이 있어 행복할 수 있다는 역전적 사고이다. “처음엔 좀 슬프더라도 마지막은 좋았으면 하는”(「한 사람을 위한 마음」) 바람이 있는 한, 누구도 불행하지 않다. 이 바람은 누군가와 함께 뒹굴고 치대고 투덕이며 살아가고 있다는 신뢰 속에서 생기는 희망과 긍정이다. 이주란의 소설에는 ‘외로워도 슬퍼도’ 눈물을 펑펑 흘리는 인물들이 넘쳐나지만, 그들 곁에는 늘 ‘썸’을 타거나, 예전에 헤어졌다 다시 만나거나, 오래된 동네 친구이거나, 직장 동료이거나, 오다가다 만나게 된 사람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친구들이 있다. “월간 자랑”모임, “사진 속의 자신에게 말 걸어보기”모임(「일상생활」)처럼 다소 낯설고 엉뚱해 보이는 모임도 있지만, 이 모임의 취지 또한 혼자 감당하기 버거운 삶의 무게를 웃고, 떠들며, 서로가 있음을 확인함으로써 버텨가기를 희망하는 젊은 여성들의 모임이다.

 

이주란의 소설을 읽어가며 나는 젊은 여성들의 연대가 부러웠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명예’ 남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한 나에게 요즘 쏟아지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익숙하면서도 당황스럽다. 그간 나는 위계적이고 여성 억압적인 질서 바깥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부당한 일을 당하고 있다는 모욕감조차 느낄 수 없었다. 그보다는 모욕의 당사자가 되지 않기 위해 ‘연애-결혼-출산-육아’의 사회적 각본에 나를 맞추어가야 했고, 누군가 모욕당하는 순간이 되면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이런 안도감이 ‘수치스럽다’는 감정을 최근 느끼고 있다. 담배 한 대 마음대로 피울 수 없고, 남자 상사의 ‘꼰대’짓에 대들지 못해 굴욕감이 들었다고 말하는 H와 이야기하며, 그 현장에 내가 있었더라도 H를 편들어주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어 나는 부끄러웠다. 나 살기 바빠서 다른 건 신경 쓸 새도 없었고, 모욕과 수치도 모르고 살아온 시간들이 아깝다. 이 시간들을 벌충하기 위해 나는 자꾸 H에게 만나자고, 차를 마시자고, 함께 일을 해보자고 말을 걸고 있다. 괜히 잘 모르는 고양이 루나와 봄봄의 안부를 묻고 있다. 나는 H의 친구가 되어 버거운 시간들을 버텨나갈 수 있는 안전한 관계를 만들고 싶다. 우리도 “월간 부끄러움” 모임 같은 것을 해보면 서로에게 의지가 되지 않을까?

 

 

댓글 6
  • 2022-10-25 13:24

    내가 끌고온  수레바퀴에 들러붙은 것들을 생각하게 되어요.

    늘 감사히 읽고 있어요. 

  • 2022-10-25 14:06

    남성 중심의 사회가 부끄러웠고,

    여성 연대의 상상력이 부러웠다.

     

    먼저 잘 들어야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ㅎ

  • 2022-10-25 15:21

    그간 궁금해 했던 것은 서로간의 이해를 쌓기 위한 궁금증이 아니라 “그저 욕의 다른 얼굴일 뿐이었다”는 것을 자각하고, 너무 쉬운 일들이라고 생각해왔던 미안하고 고맙다는 생각을 “가장 우선으로 여기고” 살고 싶다는 마음을 먹는다.

    이 문장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싶네요.

  • 2022-10-25 19:19

    H님 스스로를 향한 기특한 마음과 자신감을 지니고 계시니 다른 어떤 일을 하시더라도 여유 잃지 않으실 듯요. 일상의 여유를 누리게 되면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 돌아가지 않음ㅋ 무엇보다 지금의 여유 맘껏 누리시길요~!

    곁을 내주며 안전한 관계.모임을 향한 마무리가 따뜻하면서도 의욕이 느껴집니다! 기쁨과 즐거움은 그 자체로 되었고 이것들과 자랑은 인스타에도 늘어놓을 수 있으니, 월간 부끄러움. 분노. 슬픔도 이야기할 수 있는 관계, 모임을 만들어가면 좋겠어요! 한편으로 월간 도전.창작.재미! 요런 모임도 탐나긴 하네요 ㅎㅎ  

  • 2022-11-09 10:13

    얼마전에 최근 출판된 한국작가들의 소설 몇 권을 읽었습니다.
    그 중에 최은영의 <밤의 여행자들>이라는 작품도 있었는데요.
    문제집 파는 동네 서점 진열대에서 충동적으로 소설을 고르면서 생각했어요.
    이건 분명 겸목의 문학처방전 때문일 거야.
    문학처방전을 읽으며 어느새 내 마음속에 최근 활약하는 여성작가들에 대한 관심이 무럭무럭 싹트고 있었던 게야.
    이주란이라는 이름 석자도 마음 속에 새겨둘게요.^^

    • 2022-11-09 11:26

      저는 요즘 임솔아 라는 이름을 고이 간직하고 있어요^^ 좋은 작가들이 많네요~

겸목의 문학처방전
  무사(無事), 누군가의 분투의 대가 -위암에 황정은의 에세이집『일기』를 처방합니다     황정은을 좋아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   내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무사(無事)는 누군가의 분투를 대가로 치르고 받는 것이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숨 막히는 ‘말’들이 있다는 걸 아니까, 이 고요의 성질에 질식이라는 성분이 있다는 걸 아니까, 어디로도 가지 않고 이렇게 유지하는 고요가 그래도, 그래서, 나는 좀 징그럽습니다. (황정은, 『일기』, 창비, 2022년, 41쪽)   황정은의 에세이집 『일기』는 작고 예쁘다. 친구에게도 가벼운 마음으로 선물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니 친구도 좋아할 거라는 생각으로 택배를 보냈다. 그런데 읽다보니 좋은 선물이었는지 불안해진다. 나에게는 불편하게 읽히는 책을 친구는 어떻게 읽고 있을지 궁금하다. 나에게는 질책으로 다가오는 황정은의 말들을 친구는 어떻게 독해하고 있을지 걱정스럽다. 이런 걱정으로 나는 황정은의 『일기』를 여러 번 읽었다. 여러 번 읽으며 든 생각은, 내가 힘들게 읽은 만큼 황정은 또한 힘들게 썼겠구나 하는, 이상한 동질감이다. 독자가 작가를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나도 힘들게 읽고 그도 힘들게 썼으니 피장파장이라는 느낌이다.   무엇이 읽기에 힘들었을까? ‘징그럽다’는 그의 생생한 감정이다. 나의 무사(無事)함이 누군가의 분투의 대가라는 것을 헤아리기는 쉽지 않다. 무한 경쟁과 탐욕의 시대, 무사하고 무탈함을 바라는 것은 욕망의 기본값이 아닐까? 그런데 오늘날은 ‘보통’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결코 보통의 대가로 이루어지지 않는 시대다. 무사한 보통의 삶은 많은 비용을 치룰 수 있어야 가능하고, 무사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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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목
2023.02.03 | 조회 537
겸목의 문학처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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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목
2022.10.24 | 조회 552
겸목의 문학처방전
우리는 ‘다정한’ 사람이 되기로 했다 -김금희의 소설집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마음산책, 2018년)을 처방합니다     화병, 답답하고 섭섭하고 화가 난다 우리 아파트 종이 배출일이 화요일임을 기억하는 일, 가족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외식 갈 맛집 리스트를 뒤져보는 일, 코로나에 걸린 친구에게 기프티콘을 보내는 일, 카페에서 장시간 있으려면 콘센트가 있는 자리를 골라잡는 일, 식당 키오스크 앞에서 순두부와 비빔밥 사이에서 갈등하는 일 등 인생은 시시콜콜한 작은 일들로 이루어져 있다. 잘 쌓아올린 나무토막들 가운데 한두 개쯤 빼버려도 굳건하게 버티는 젠가게임처럼. 그러나 한두 개쯤 빼버려도 그만인 나무토막들이 수북해질 때 젠가는 균형을 잃고 쓰러진다. 그러니까 티끌같이 작은 일들을 얕잡아봐서는 안 된다. 모든 일의 시작과 끝에는 티도 안 나는, 눈치도 못 채는 작은 틈과 균열이 있다. 그렇다고 강박증에 걸릴 필요는 없다. 약간의 주의력이 필요할 뿐이다. 나는 S와 세 번 만나는 동안 흔히 ‘사소한 일상’이라고 말하는 ‘사소함’을 오래 생각했다.   S는 ‘화병’으로 문학처방전을 의뢰했다. 화병은 일이 잘 안 풀릴 때 가슴이 답답해지고 화가 치밀어 심장에 열이 오르고 온몸이 뜨거워지는 증상을 이른다. S에게는 어떤 답답한 일이 있는지 이야기를 나눠봤다. S의 남편 회사는 몇 년 전에 지방으로 본사를 이전했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본사로 옮겨갔지만, S의 남편은 서울에 남았다. 이 결정이 그의 직장생활에 하나의 이정표가 되리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외부의 시선에 그는 승진이나 일의 성취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다정한’ 사람이 되기로 했다 -김금희의 소설집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마음산책, 2018년)을 처방합니다     화병, 답답하고 섭섭하고 화가 난다 우리 아파트 종이 배출일이 화요일임을 기억하는 일, 가족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외식 갈 맛집 리스트를 뒤져보는 일, 코로나에 걸린 친구에게 기프티콘을 보내는 일, 카페에서 장시간 있으려면 콘센트가 있는 자리를 골라잡는 일, 식당 키오스크 앞에서 순두부와 비빔밥 사이에서 갈등하는 일 등 인생은 시시콜콜한 작은 일들로 이루어져 있다. 잘 쌓아올린 나무토막들 가운데 한두 개쯤 빼버려도 굳건하게 버티는 젠가게임처럼. 그러나 한두 개쯤 빼버려도 그만인 나무토막들이 수북해질 때 젠가는 균형을 잃고 쓰러진다. 그러니까 티끌같이 작은 일들을 얕잡아봐서는 안 된다. 모든 일의 시작과 끝에는 티도 안 나는, 눈치도 못 채는 작은 틈과 균열이 있다. 그렇다고 강박증에 걸릴 필요는 없다. 약간의 주의력이 필요할 뿐이다. 나는 S와 세 번 만나는 동안 흔히 ‘사소한 일상’이라고 말하는 ‘사소함’을 오래 생각했다.   S는 ‘화병’으로 문학처방전을 의뢰했다. 화병은 일이 잘 안 풀릴 때 가슴이 답답해지고 화가 치밀어 심장에 열이 오르고 온몸이 뜨거워지는 증상을 이른다. S에게는 어떤 답답한 일이 있는지 이야기를 나눠봤다. S의 남편 회사는 몇 년 전에 지방으로 본사를 이전했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본사로 옮겨갔지만, S의 남편은 서울에 남았다. 이 결정이 그의 직장생활에 하나의 이정표가 되리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외부의 시선에 그는 승진이나 일의 성취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겸목
2022.08.18 | 조회 495
겸목의 문학처방전
  복잡한 마음, 복잡한 진실 -최정화의 단편소설 「잘못 찾아오다」(문학동네, 2018년)을 처방합니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B와는 가끔 SNS로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다. 그 가끔은 1년이기도 하고 6개월이기도 하다. 나와 B는 5~6년 전에 예술워크숍의 담당자와 참가자로 알게 되었다. 대학 졸업을 앞둔 시기에 연기로 진로를 결정한 B는 가끔 연극 공연을 올리거나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고 가끔 취업상태이기도 했다. 내가 기억하는 B의 20대는 늘 뭔가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매우 열정적이면서도 매우 냉소적인 인상을 주었다. 안 될 거야, 라든가 별 거 없다, 라는 식으로 쿨한 제스처를 보였지만, 그 내면에는 전전긍긍하는 마음이나 간절함이 있어 보였다. 누군들 안 그럴까? 예술지망생이라는 오래된 직업은 열등감과 우월감이 제멋대로 사람을 휘저어 놓는 직업적 특징을 갖고 있지 않던가? 그런 보편적인 모습과 달리 B만의 특징이라고 하면 매우 예의 바르면서도 매우 막무가내의 상태가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만취상태에서도 내가 ‘선생’이라고 무례하게 대하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노력하면서도 한순간에 막말을 날려버리는 후련함이 있었다. 많은 청년들에게서 제멋대로이고 잘난 척하거나 불행한 척하며 폭주하는 건 익히 봐왔지만, 단정하고 예의바른 모습을 유지하려 하다 허물어지는 모습은 좀 새로웠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B는 단정하고 예의바르며 막무가내였다. 내가 기억하는 B의 불일치는 이런 모습이다.   최근 2~3년 동안 B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다. 일과 연기를 병행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여 연기에 집중하려 했는데 하필 코로나가 터져 일이 꼬여버렸다. 주식투자에 중독적으로 빠지기도 했고, 20대를 같이 보낸 남친과도 결별했다....
  복잡한 마음, 복잡한 진실 -최정화의 단편소설 「잘못 찾아오다」(문학동네, 2018년)을 처방합니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B와는 가끔 SNS로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다. 그 가끔은 1년이기도 하고 6개월이기도 하다. 나와 B는 5~6년 전에 예술워크숍의 담당자와 참가자로 알게 되었다. 대학 졸업을 앞둔 시기에 연기로 진로를 결정한 B는 가끔 연극 공연을 올리거나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고 가끔 취업상태이기도 했다. 내가 기억하는 B의 20대는 늘 뭔가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매우 열정적이면서도 매우 냉소적인 인상을 주었다. 안 될 거야, 라든가 별 거 없다, 라는 식으로 쿨한 제스처를 보였지만, 그 내면에는 전전긍긍하는 마음이나 간절함이 있어 보였다. 누군들 안 그럴까? 예술지망생이라는 오래된 직업은 열등감과 우월감이 제멋대로 사람을 휘저어 놓는 직업적 특징을 갖고 있지 않던가? 그런 보편적인 모습과 달리 B만의 특징이라고 하면 매우 예의 바르면서도 매우 막무가내의 상태가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만취상태에서도 내가 ‘선생’이라고 무례하게 대하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노력하면서도 한순간에 막말을 날려버리는 후련함이 있었다. 많은 청년들에게서 제멋대로이고 잘난 척하거나 불행한 척하며 폭주하는 건 익히 봐왔지만, 단정하고 예의바른 모습을 유지하려 하다 허물어지는 모습은 좀 새로웠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B는 단정하고 예의바르며 막무가내였다. 내가 기억하는 B의 불일치는 이런 모습이다.   최근 2~3년 동안 B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다. 일과 연기를 병행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여 연기에 집중하려 했는데 하필 코로나가 터져 일이 꼬여버렸다. 주식투자에 중독적으로 빠지기도 했고, 20대를 같이 보낸 남친과도 결별했다....
겸목
2022.07.10 | 조회 438
겸목의 문학처방전
  침착하고, 꼼꼼하고, 영리하게 ―우울증에 백수린의 단편소설 「폭설」을 처방합니다     ‘지쳤거나 좋아하는 게 없거나’   대학교수인 남편과 세 아이, 한적한 교외의 주택, 그의 조건을 떠올릴 때, Y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이제 막 40대에 접어든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운이 좋은 편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들 부부는 또래들보다 일찍 생활의 기반을 잡았고, 남편의 직업도 안정적이다. 그들 부부에게 위기라고 부를 만한 심각한 문제는 없을 것 같다. 정말 그럴까? Y의 남편은 지방대학 교수라 주중에는 학교가 있는 지역에서 지내고 주말에 집에 온다. 아이들은 네 살, 여덟 살, 열 살, 아직은 부모의 손이 많이 가는 때이다. 그의 남편은 아내에게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하지만, 남편 없이 세 아이를 돌보야 하는 Y의 육아스트레스를 그대로 체감하지는 못한다. 아마도 막연히 아내가 힘들겠구나 짐작하는 정도. 그러나 짐작과 실제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못 견딜 만큼 힘들지는 않아요. 그런데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제가 혼자 아이들을 돌봐야한다는 일에 긴장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그 긴장이 하루하루 쌓이다, 남편이 올 때쯤 되면 참을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아요. 남편은 남편대로 학교와 집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 같고, 우리는 우리대로 남편 없는 생활에 익숙해지는 것 같고. 이런 가족형태가 괜찮은지도 모르겠어요.”     부부는 일본 유학시절에 만나 남편은 박사학위를 따고 Y가 석사학위를 마쳤을 때 결혼을 했다. Y의 전공은 ‘환경경영’이다. 대학부터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Y는...
  침착하고, 꼼꼼하고, 영리하게 ―우울증에 백수린의 단편소설 「폭설」을 처방합니다     ‘지쳤거나 좋아하는 게 없거나’   대학교수인 남편과 세 아이, 한적한 교외의 주택, 그의 조건을 떠올릴 때, Y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이제 막 40대에 접어든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운이 좋은 편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들 부부는 또래들보다 일찍 생활의 기반을 잡았고, 남편의 직업도 안정적이다. 그들 부부에게 위기라고 부를 만한 심각한 문제는 없을 것 같다. 정말 그럴까? Y의 남편은 지방대학 교수라 주중에는 학교가 있는 지역에서 지내고 주말에 집에 온다. 아이들은 네 살, 여덟 살, 열 살, 아직은 부모의 손이 많이 가는 때이다. 그의 남편은 아내에게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하지만, 남편 없이 세 아이를 돌보야 하는 Y의 육아스트레스를 그대로 체감하지는 못한다. 아마도 막연히 아내가 힘들겠구나 짐작하는 정도. 그러나 짐작과 실제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못 견딜 만큼 힘들지는 않아요. 그런데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제가 혼자 아이들을 돌봐야한다는 일에 긴장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그 긴장이 하루하루 쌓이다, 남편이 올 때쯤 되면 참을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아요. 남편은 남편대로 학교와 집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 같고, 우리는 우리대로 남편 없는 생활에 익숙해지는 것 같고. 이런 가족형태가 괜찮은지도 모르겠어요.”     부부는 일본 유학시절에 만나 남편은 박사학위를 따고 Y가 석사학위를 마쳤을 때 결혼을 했다. Y의 전공은 ‘환경경영’이다. 대학부터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Y는...
새털
2022.04.22 | 조회 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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