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 1234] 이 책들을 읽고 무엇이 변했냐고 물으신다면

도라지
2023-03-05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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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의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을 읽고 그의 다른 책들까지 읽고 싶어졌다. 노동 현장에서 한 해에 2000명 이상 죽는 우리 노동의 현실을 쓴 노동자 쓰러지다, 노동자들의 투쟁과 연대하는 사람들을 기록한 여기, 우리, 함께, 희정의 첫 번째 산문집 두번째 글쓰기-당신의 노동을 쓰는 나의 노동에 관하여. 네 권의 책 모두 세상에 잘 드러나지 않는 노동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함께 읽기는 수월했다. 하지만 쓰면서는 후회 했다. (하나만 잘할걸)

 

“이들은 왜 싸우는가.”

누군가를 하늘에 오르게 하고, 망루에 가두고, 쇠사슬에 몸 묶게 하는 세상을 함께 살아가기에,

우리는 사람이 싸우는 이유에 대답해야한다.

희정 <여기, 우리, 함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작년 가을 『쇳밥 일지』라는 책이 내 트위터 타임라인에 이슈로 떠올랐었다. 문재인 전대통령이 용접공의 삶을 이야기한 이 책에 극찬의 트윗을 올렸기 때문이다. 유명인이 추천을 하면 그런가보다만 하고 더 관심을 안 갖던 내가 이 책을 읽기까지 이유는 있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 유최안. 그는 작년 여름 가슴에 ‘대우조선’이라고 박힌 낡은 용접 작업복을 입고 스스로를 0.3평 철창 안에 가두고 용접했다. 하청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알리겠다고 쇠창살 구조물 안에서 31일간 투쟁하던 그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은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였다. 궁금했다. 어떻게 산다는 것일까? 대체 어떻기에 저토록 극렬한 고통을 감내하며 존재투쟁을 벌이는 것일까? 한동안 그의 기사를 찾아 읽다가 묵직한 마음을 털어내듯 투쟁기금을 이체하고 그를 잊었다.

 

『쇳밥 일지』를 읽으면 용접노동자의 삶을 알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기 전, 저자 천현우의 인터뷰 기사를 찾아보았다. 읽는 동시에 감춰둔 무언가를 들킨 기분이 들었다. 그는 말했다. “거둬주세요. 하청 노동자를 향한 연민의 시선.”

 

언제나 광장에서 우는 사람이 더 억울한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나에게 연민이란 우는 사람의 세계에 동참하여 함께 슬퍼하겠다는 마음. 그 마음이 있어야 가능해지는 것이 ‘연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늘 그것으로 끝이기도 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시간과 품을 들여 자세히 듣지 않았다. 나의 연민은 얕은 정의감이었고 잠시 머무는 관심에 불과해 금새 사라져버렸다. 천현우의 당부는 어쩌면 이런 나를 향하는 것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뒤늦게 밀린 숙제들이 보였다.

 

 

처음부터 있었지만 문제가 되지 못했다.

 

1234 책목록에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이 들어간 것은 일종의 부채감에서였다. 그동안 문탁에서 연대해 온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지만, 유독 반올림 관련해서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이 책을 꼭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나는 그 석연찮던 마음에 대한 답을 찾았을까? 문제의 실마리는 의외의 방향에서 풀렸다.

 

반도체 노동자들이 아플 때 그게 왜 직업병이냐고 묻는 사람은 없다. 산재승인도 잘 나는 편이고 삼성 같은 대기업은 보상지원 시스템도 생겼다. 물론 여기까지 오는데 오래 걸렸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데 있다. 직업병의 피해가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의 자녀들에게도 나타나고 있었다.

 

“그들의 자녀는 반도체 제조 과정에서 쓰이는 화학물질과 방사선에 노출됐다. 이들이 수정란, 정자, 태아와 같은 상태로 존재할 때 일어난 일이었다.” 아이들이 태어나서 얻은 병명은 다양하다. 선천성 식도폐쇄, 콩팥무발생증, 방광요관역류, IgA신증 등. 반도체 산업의 생식독성과 2세 질환 직업병 문제가, 문제가 되기 힘들었던 이유 중에는 그것이 젠더 문제라는 면도 있었다. 한국사회에서 아픈 아이를 출산하면 엄마는 ‘임신 중에 자신이 무엇을 잘못해서 그런가’ 죄책감에 시달린다. 사회적 규범 자체가 여성들을 옭아매기 때문이다. 그래서 2세 질환 직업병은 독자적인 이슈가 되기 더 어려웠다고 저자는 말한다.

 

한국은 2세 질환 직업병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은 피해 당사자, 노동조합, 반올림 활동가 그리고 의료·법률 종사자들이 2세 질환 직업병 문제를 이 사회의 상식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책은 2세 질환 직업병의 원인을 생식 독성 물질이라는 환경적인 요인으로만 한정하지 않는다. 오퍼레이터라는 여성의 일자리를 통해 일반 여성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을 자세히 살핀다. 한국사회는 여성 노동자가 안전하게 일할 일터가 드물다. 업무상 재해의 판단 기준은 남성의 신체나 남성 노동자 중심의 산재에 있기 때문에 여성 노동자의 직업병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전자산업 대부분 말단 생산직 직원의 성별을 ‘여성’으로 맞춰놓았다. 여성 오퍼레이터는 단순·반복작업에 종사하고, 남성 엔지니어는 특정한 기술을 가지고 일을 한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여성의 일이 상대적으로 덜 힘들고 덜 위험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오퍼레이터는 업무의 특성상 순간적인 직접 노출 사고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 특정 성별의 일이 덜 위험할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으로 현장에서는 말단-여성-생산직 오퍼레이터들에겐 위험 정보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여성이라서’라는 이유 말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다.

 

 

 

 

연대를 책으로 배웠어요.

 

2017년 6월 17일 문탁 홈페이지 ‘문탁풍경’에는 삼성전자 서초 사옥 반올림 농성장에 지지 방문을 간 문탁 친구들의 사진이 올라와 있다. 나는 친구들의 활동을 통해 반올림에 대해 처음 알았다.

 

2017년은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황유미의 10주기가 되는 해였다. 2007년 황유미의 사망이후 반올림은 정부와 삼성을 상대로 반도체 노동자들의 직업병 피해를 산재로 인정받기 위한 투쟁을 해왔고, 2017년 대법원은 첨단산업 산재 판단기준을 제시했다. 그러나 삼성은 대법원의 조정 권고안을 거부했고 반올림은 이 사안에 대해 1천일 넘는 농성을 했다. 문탁에서 반올림 농성장을 방문한 시기는 이때였던 것 같다. 이후 2018년 삼성전자는 대법원이 제시한 중재안을 받아들였고 공식적인 사과, 보상, 재발방지책을 약속했다.

 

당시 나는 친구들이 지지방문하는 모습도 보았고, ‘먼지 없는 방’ 클린룸과 영화로 제작된 황유미의 이야기도 알고 있었지만 이 문제에 관심이 가질 않았다. 하얀 방진복을 입은 반도체 노동자들의 모습이 낯선 면도 있었고. 초일류라 불리는 삼성의 노동자가 벌이는 투쟁이라는 사안이 굉장히 나와 연관 없어 보였다. 한마디로 그들의 존재가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내 가방엔 친구가 준 반올림 뱃지가 달렸고, 서초동 농성장은 가까웠으며, 우리가 쓰고 있는 전기전자제품 중에 반도체가 들어가지 않는 것 또한 찾아보기 힘들다는 걸 생각하면 이건 분명 좀 이상한 일이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에 대해 이견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공사장에서 일어난 산재 사고는, 길 가던 행인이 무너진 담벼락에 깔렸다는 소식보다 경각심을 주지 않는다. 그곳은 내가 매일 지나는 길목이지만, 공사장은 내가 일할 가능성이 없는 공간이다그럴 만한사람들이라 그 죽음이 당연한 듯했고, 나와 관계없는 사람이라 믿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넘길 수 있었다.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p.224

 

고백하건데 나에게 ‘노동자’는 낯선 단어였다. ‘반도체 노동자’는 더 낯설었다. 내가 가진 이해의 틀이 좁았기 때문일까? 삶의 경험이 미천해서였을까? 나에게서 노동자는 타자 이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이름을 가지지 못했다. 누구나 일을 하며 사는데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이해가 잘 안 된다. 노동자에 대한 나의 편견은 미디어가 제공한 이미지 때문은 아니었을까? 짐작만 해 볼 뿐이다.

 

타자에 대한 상상력을 넓히려면 그를 하나의 주체로 올곧게 인식해야 한다. 나와 같은 일상을 누리고 서로 관계 맺는 존재로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보인다.  -여기,우리,함께 p.86

 

스스로를 기록 노동자라고 말하는 ‘희정’. 인터뷰 방식의 르포글을 이전에 별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비교를 할 순 없겠지만,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의 저자 희정은 자신의 인터뷰이가 독자에게 특정한 사건의 피해당사자로 또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납작하게 독해될까 염려한다. 그는 故황유미를 이전의 자신의 글에서 아빠의 어린 딸, 착한 딸로만 그린 것이 후회 되어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고 고백한다. 그래서일까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에서 희정은 인터뷰이들이 무엇보다 아픈 아이를 키우는 모성으로 고정될 것을 경계한다. 사건이 아닌 사람을 쓰려는 희정의 애씀은 독자에게(나에게) 전달된다.

 

절망이든 피해든, 세상에 변하지 않고 멈춰있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절망적 상황이라고 쉽게 말하겠지만. 그 절망만을 부각시키는 시선이 피해를 고정시킨다. ‘아픈 사람’, ‘가련한 피해자’, ‘비통한 부모’, ‘눈물짓는 어머니의 모습으로만 그들을 묶어두는 말은 당사자를 세상과 만나지 못하게 한다.사람들은 자신이 묶어둔 대상을 오래 보지 않는다. 고통에 머무는 사람을 오래 보는 일은 내키지 않으니까. 잠깐 보는 존재이니, 이들의 삶을 볼 필요가 없다-여기,우리,함께 p.338

 

내가 그의 글을 통해 본 노동자의 삶은 굉장히 다양한 복합성을 가진, 많은 역할을 하는 모습이었다. 또한 노동자들의 일상과 고민들이 나와 너무 닮아서, 그들이 아픔으로 인해 잃게 될 것들이 결코 그들만의 특별한 무엇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무고한 내 일상이 상실할 수있는 건강과 사랑하는 존재들. 그것을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참혹한 것일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희정의 글을 읽다보면 ‘연대’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이며, 그 속에서 함께 변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함께 살기 위해 우리사이의 간격을 잰다. 그와 나 사이 거리를 좁히고자 한다면, 그와 나 사이의 거리감을 인지해야 한다. ‘지금 이 상태로그와 나는 우리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꼭 우리가 되어야 하는지를 묻고, 그가 원하는 것이 정말 우리인지를 묻고, 그리고 우리가 우리일 수 없는 세상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것은 권리일 수도, 저항일 수도, 전복일 수도, 환대일 수도 있다.

그렇게 돌고 돌아 인터뷰이들이 나와 부대끼며 살아가는 존재임을 인정한다. 오늘도 꾸역꾸역, 느리게, 내가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자각을 한다.  -두번째 글쓰기 p.64

 

지금까지 내가 해온 소위 ‘연대’란 약간의 시혜적인 나눔이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겠다. 내가 조금 더 가진 것 같으니 이것을 내어 주겠어요! 내가 만든 이미지 안에서 나 혼자 그들과 연대했고, 주었다고 착각했다.

 

숙제로 시작한 독서였지만 읽고 나니. 나를 둘러싼 세상이 조금 달라졌다. 노동관련 기사를 찾아 읽는 나. 심지어 술술 읽혀서 읽으면서 놀라기까지 한다. 그만큼 이전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말도 된다. 남은 1234를 통해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하지만 잘 안 보였던 이야기. 눈에 붉을 밝혀야 드러나는 이야기들을 찾아서 읽고 써볼 생각이다. 전혀 모르고 있었던 이야기를 하게 될 수도. 알고 있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알지 못했던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연대’란 무엇일까?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연대’가 타인을 어떤 시선으로 봐야하는지, 어떤 태도여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의미심장한 다짐이나 희생이 있어야 가능한 일은 더더욱 아니다. 우선 되어야 할 것은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존재임을 아는 것. 그래서 알려고 노력한다. 내가 상대를 알기 위해 노력하고. 때론 내가 타인이 알려고 노력하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연대’는 상호적이 것이 아닐까?

 

인간이 책 몇 권 읽고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읽은 인간은 안 읽은 인간과는 다를 거라 믿고.  읽는다. 

 

 

 

 

 

 

댓글 8
  • 2023-03-06 09:52

    도라지님의 고민은 평소 저도 하던거라 공감이 많이 되었어요. 공부로 연결시킨 샘, 응원합니다!

  • 2023-03-06 10:45

    오늘 아침 한겨레 신문의 홍은전 칼럼에 실린 장애활동가 이규식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의 자서전이 나왔다는 소식이었는데요. 언어장애를 가진 이규식의 말을 듣는 것은 무척 힘들다고 합니다.
    이 자서전은 이규식의 동료 몇 명이 모여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쓰면서 만들었다고 해요.
    홍은전 작가가 자기 인생이 책을 낼 만큼 가치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자기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이야기했다고 해요.
    그걸 읽는데 엄청 가슴이 묵직했어요. 도라지님이 누군가의 이야기를 읽고 듣고 쓰는 것도 그런 행위인 것 같아요.

    • 2023-03-06 18:20

      방금 칼럼을 찾아 읽었어요.
      (눈물이 좀 났어요.)

      잘 듣는 사람이 되기 위해 먼저 잘 읽어보겠습니다.

      • 2023-03-06 19:08

        저도 기사 찾아볼께요
        그런데...2층 샘들 다들 부지런히 읽고 쓰고 계시네요.

  • 2023-03-06 13:29

    책들을 읽고 변해가는 도라지님이 '보입니다'!

  • 2023-03-06 15:27

    제가 지금은 이와 같은 이야기를 피하고만 싶지만, 도라지샘 덕에 그나마라도 듣고 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고민들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늘 생각만 하다 마는 문제였거든요. 감사하다는 이야깁니다. ^^ 여전히 듣고만 있는 상태이지만, 내년쯤에 더 잘 들을 수 있는 상태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감사합니다.

  • 2023-03-06 16:26

    읽은 인간은 안 읽은 인간과 다를거라 믿어봅니다^^ 잘 읽었어요~

  • 2023-03-07 15:18

    책 몇 권 읽고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하셨지만 크게 달라진 것 같아요. 연대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고 독자(저)에게도 전달이 되었습니다! 인식이 실천! 공부하고 나눠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