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1234] 나는 사이보그, 엄마와는 반려종?

인디언
2023-03-05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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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쓰기1234] 나는 사이보그, 엄마와는 반려종?

도나 헤러웨이, 『해러웨이 선언문』

 

 

『해러웨이 선언문』은 페미니스트 도나 해러웨이가 세상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고자 ‘선언’의 형식으로 쓴 <사이보그 선언>(1985)과 <반려종 선언>(2003), 그리고 그 배경과 맥락을 알 수 있는 캐리 울프와의 인터뷰(2014)가 실려 있는 모음집이다. ‘선언’에 나타난 해러웨이의 주장은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다. 페미니즘을 공부하지도 않은 나로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현장에서 부딪쳐야 했던 부당함에 분노하며 나름의 실천을 해왔다고 생각하는 나는 해러웨이를 공부하는 친구들을 스치듯 보면서 그가 궁금해서 책을 읽어보고 싶었다.

 

 

여신보다 사이보그

도나 해러웨이는 이렇게 말했다. ‘<사이보그 선언>에서는 기술과학 속 현대의 삶이 내파(implosions)하는 현상을 페미니즘을 통해 이해하려 했고, 인공두뇌 유기체인 사이보그에 대해서는 축복도 저주도 하지 않는 대신 우주전사는 꿈도 꾸지 못할 목표를 아이러니하게 전유하려는 정신, 곧 비판적 정신을 통해 사이보그의 모습으로 살아가려 노력했다.’ 1985년 신냉전 시대에 쓴 <사이보그 선언>에서 해러웨이는 ‘사이보그’에 대한 이미지를 전복했다. 그가 말하는 사이보그는 ‘집적회로 속의 여성’ 즉, 과학기술 현장에서 일하는 유색인 여성 노동자들이다. 그들은 일하면서 기계와 하나의 정보체계로 묶인 사이보그다.

 

“기계는 우리이고, 우리의 작동 방식, 체현의 한 양상이다. 우리는 기계를 책임감 있게 대할 수 있다. 그들은 우리를 지배하거나 협박하지 않는다. 우리는 경계에 책임이 있다. 우리는 그들이다.”(83쪽)

 

해러웨이의 문제의식은 ‘우리’를 어떤 정체성으로 가두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페미니스트 정치를 개념화할 것인가에 있었다. 당시 진보진영이나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과학기술에 적대적이었다. 그들의 비판은 서구적 이분법(남성/여성, 인간/동물, 생명/기계, 정신/육체, 삶/죽음, 문명/야만, 백인/유색인 등등)에 기댄 것이었고, 해러웨이는 이들의 반과학기술 주장이 이분법적 구도를 더 강화시킨다고 보았다. 그래서 사이보그라는 형상, 이미지로 얻을 수 있는 효과를 생각하고 논란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의도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기존의 정치와는 다른 정치적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 자원으로서의 효과, 여성, 어머니는 자연적이거나 보편적인 정체성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효과. 사이보그 이미지가 우리 자신에게 우리의 몸과 도구를 설명해왔던 이원론의 미로에서 탈출하는 길을 보여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이보그 젠더는 전면적 복수를 행하는 부분적 가능성이다. 인종, 젠더, 자본은 전체와 부분에 대한 사이보그 이론을 요청한다. 사이보그에게는 총체적 이론을 생산해내려는 충동이 없지만, 경계 및 경계의 구성과 해체에 대한 친숙한 경험은 있다. 파급력 있는 행위를 위해, 과학기술에 대한 한 관점과 지배의 정보과학에 도전하는 방법을 하나 제시할 정치적 언어가 되기를 기다리는 신화 체계가 있는 것이다.”(84-85쪽)

 

현실 세계와 어떻게든 맞붙어 씨름하는 것을 중시하는 해러웨이는 ‘공통 언어를 향한 꿈’이 아니라 ‘기계, 정체성, 범주, 관계, 우주 설화를 구축하는 동시에 파괴하는 불신앙을 통한 강력한 이종언어를 향한 꿈’으로 ‘여신보다는 사이보그가 되겠다.’고 선언한다.

 

닥치고 훈련!

해러웨이는 2003년에 두 번째 선언을 한다. <반려종 선언>에 대해 해러웨이는 ‘동거와 공진화 그리고 종의 경계를 넘어 구현된 사회성에 관한 이야기’로, ‘적당히 꿰맞춘 두 형상-사이보그와 반려종-중 어느 쪽이 현대의 생활 세계를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정치와 존재론에 더 생산적으로 관여하는지 묻는다.’고 썼다. ‘사이보그가 충분히 퀴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려종이라는 다른 형상을 선택했다’고도 한다. 이제 사이보그는 ‘반려종 가족에 속한 동생’이다.

 

반려종(Companion Species)은 반려 동물과는 다르다. ‘반려’의 어원은 ‘쿰-파니스(cum-panis), 빵을 함께 나눈다’는 뜻이다. 해러웨이에게 반려종은 밥을 나누고 몸을 나누는 관계를 뜻하는 말로 서로의 몸을 밥으로 내줘야 살 수 있는 필멸의 존재다. 먹지 않으면 죽고, 죽으면 내 몸의 여러 존재들이 다른 밥상을 차린다.

 

해러웨이는 이 선언에서 ‘개와 인간의 관계를 진지하게 대하는 일을 통해 소중한 타자성을 확산시키는 데 보탬이 될 윤리와 정치를 배우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개-인간 세계의 이야기를 통해 자연문화에서 역사가 중요한 이유를 납득시킬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탐사하겠다고 밝힌다. <반려종 선언>은 개와 사람이 서로에게 소중한 타자가 되면서 함께 살아가는, 역사적으로 한결같이 특수한 삶 속에서, 자연과 문화가 내파하는 현상과 관련되어 있다. 해러웨이는 <사이보그 선언>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부분적 연결’을 찾는다.

 

“동물들과 함께 살고, 그들/우리의 이야기에 거주하면서 관계의 진실을 말하려 애쓰는 것, 진행 중인 역사 속에서 공존하는 것. 이게 바로 반려종의 일이며 반려종에게 분석의 최소 단위는 ‘관계’다.”(140쪽)

 

해러웨이는 개와 인간의 반려종을 이야기하기 위해 진화, 사랑, 어질리티 훈련, 품종 등의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펼쳐나간다. 이를 통해 ‘서로 다르게 물려받은 역사, 그리고 불가능에 가깝지만, 절대적으로 필요한 공동의 미래 모두를 책임질 수 있는, 부조화스러운 행위주체들과 삶의 방식을 적당히 꿰맞추는 작업 즉, 소중한 타자성’을 이야기한다.

 

사랑에 대해서는 역사적 상황 속에 놓인 개와 인간, 그리고 그들의 사랑이 소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사랑의 담론(개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능력이 있다)을 반대한다.

 

“골치 아픈 조건들을 맞춰가면서 사랑을 지속하려는 노력은 아주 다른 문제다. 친밀한 타자를 더 잘 알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별수 없이 겪게 되는 우습고도 비극적인 실수들은, 그 타자가 동물이건 인간이건 또한 무생물이건 간에 내 존경심을 자아낸다.”(161쪽)

 

훈련은 개들 자신이 즐겁게 어울려 놀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으로, 일대일 관계, 연결된 타자성을 통해 개가 누구이며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한다. 반려종 관계에서는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환원 불가능한 차이를 넘어 이루어지는 ‘소통’이 중요하다. 함께 사는 상대에 대한 책임은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최선을 다해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응답-능력, 혹은 상대를 책임진다는 것은 타고난 능력이 아니다. 얼굴을 마주하는 곳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심신을 바치는 고통스런 노력을 통해 배양된다. 많이 차이나는 존재들이 함께 하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훈련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상대에 대한 ‘존중’이 관건이다. 서로 다른 종들이 반려종이 된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호기심과 경의를 가지고 땀 흘려 서로를 알아가는 것이다. 닥치고 훈련! 이것이 그가 그의 개와 서로에게 소중한 타자가 되기 위한 방법이다.

 

“나는 종 안팎에서 맺어진 모든 윤리적 관계는 관계-속의-타자성에 대한 지속적 관심이라는 가늘고 섬세하며 질긴 실로 뜨개질한 편직물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하나가 아니며, 함께 살아감으로써 존재한다. 누가 있으며 누가 생겨나고 있는지 묻는 것이 의무다.”(178쪽)

 

‘여자’라는 정체성으로

해러웨이는 정체성에 근거한 정치를 반대한다. 정체성의 정치는 필연적으로 정체성 바깥의 존재들에 대한 배제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또 사실 정체성으로는 현실을 잘 설명할 수 없다는 이유도 있고, 현실에서 정체성을 가르는 기준이 분명하지 않다는 점도 있다. <사이보그 선언>이나 <반려종 선언>이나 정체성에 근거하지 않고 어떻게 차별과 억압에 맞서는 정치를 기획할 것인가의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해러웨이가 <사이보그 선언>을 쓴 1985년에 나는 석사를 마치고 연구소에 들어갔다. 퍼스널컴퓨터가 일반화되기 전 거대한 컴퓨터에 자료를 넣고 돌려 나온 데이터로 보고서를 쓰는 나는 해러웨이식으로 말하면 사이보그였을 수 있다. 그러나 사이보그가 되지도 못했고 내가 사이보그인지도 알지 못했다. 남녀차별이 심한 사회적 상황과 조직에서 약자 ‘여성’인 나는 싸우고 또 싸웠다. 조직 내에는 젠더와 계급문제가 얽혀 있었다. 연구원/비연구원의 위계와 남성/여성의 젠더가 한쪽으로 쏠려 있었고, 노조를 만들었지만 같은 위계 안에서 젠더문제는 싸워도 싸워도 끝이 없었고, 다른 위계 사이의 젠더문제 또한 위계로 인해 ‘연대’가 쉽지 않았다. 그때 ‘남자’는 ‘나=여자’의 적이었다. 다른 위계에 속한 여자들에게는 오히려 내가 적이 되기도 했고 젠더를 기준으로 정체성을 가른 나에게는 그것이 무척 힘들었었다.

 

집에서도 ‘남자=남편’은 경계의 대상이었다. 남녀차별의 실마리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흥분했다. 딸은 동지 같았고 아들은 경계의 대상까지는 아니었지만 동지라는 느낌은 없었다. 지금도 그 때 만큼은 아니지만 며느리가 같은 편으로 느껴지고 아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관찰하게 된다. 내가 알고 실천한 페미니즘은 젠더라는 범주의 정체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순수한 소수자성이 아니라 잡종성을 강점으로 바꿀 수 있는 교활함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이다. 권력이 약한 자들은 무구성의 유혹에 빠지지 않으면서 어떻게 지금과는 다른 삶을 만들 수 있을지를 모색하는 정치투쟁을 벌여야 한다는데......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엄마는 반려종?

해러웨이는 무수하게 적용될 수 있는 ‘차이의 관계’를 개라는 반려종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사이보그도 가장 최근에 나타난 반려종이라고 보면 <반려종 선언>은 <사이보그 선언>의 확장판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같이 살던 반려견이 있었다. 반려종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그 개와 살면서 인간이나 개나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까맣고 윤기 나던 털이 잿빛으로 변해가는 것이 내 머리가 그렇게 변해가는 것과 거의 동시에 진행되었고, 허리 아파 꼼짝 못하고 누워있을 때 그 친구도 척추와 다리관절에 문제가 생겨 나처럼 한방치료를 받았다. 그 친구는 우리 식구들을 좋아했고 늘 우리와 같이 있고 싶어 했다(고 생각했다). 19년을 가족으로 살면서 나는 엄마 마음으로 개를 돌보았지만 해러웨이처럼 생각할 수는 없었다. 지금 그 친구가 있다해도 딥키스를 나눌 수는 없을 것이고 어떻게 반려종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반려종 선언>을 읽으며 차이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 건 오히려 엄마였다. 3년째 같이 살게 된 엄마가 요즘 나는 많이 낯설다. 내가 알던 엄마의 모습은 점점 사라지고 매일매일 낯선 모습의 엄마가 내 앞에 있다. 엄마는 나에게 ‘당연히’ 소중한 타자라고 머리 속으로만 생각했을까. 나는 엄마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최선을 다해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가? 심신을 바치는 고통스런 노력을 하고 있는가? 엄마를 신뢰하고 존중하고 있는가? 나는 엄마를 책임지겠다고 생각했지만 응답-능력을 키우기 위한 훈련은 무시했다. 엄마는 단어가 잘 생각나지 않아 말을 잘 못하는데 말을 하기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말이 아닌 다른 방식의 소통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 개를 아기처럼 여기고 엄마 역할을 하듯 엄마의 보호자 역할만 하고 있는 나. 엄마를 신뢰하지 못하고 존중은커녕 무시하고 있는 나. 같은 언어를 쓰고 서로 모르는 게 별로 없다고 생각하며 지내온 나와 엄마의 역사가 있음에도 나는 왜 엄마가 낯설게 느껴지는 걸까.

 

엄마랑 함께 잘 살고 잘 죽고 싶은 나는 해러웨이에게 ‘가늘고 섬세하며 질긴 실로 뜨개질한 편직물’ 같은 ‘지속적인 관심’을 배운 것으로 만족하며, 『내가 알던 그 사람』이나 『치매가 인생의 끝은 아니니까』라는 책을 읽는 게 더 나을까?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

 

 

댓글 8
  • 2023-03-06 09:58

    사이보그 되기는 어렵군요. 그 전에 제대로 된 인간이라도 먼저 되어야겠어요^^

  • 2023-03-06 10:35

    <반려종 선언>을 읽으면서 인디언샘이 엄마와의 관계를 생각하는 게 저는 십분 공감이 되더라고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해 온 소위 '인간성'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나이 들어가는 부모님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까.
    비인간 동물과의 관계는 인간들 사이의 수많은 차이에 대해서도,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하게 하는 것 같아요.

  • 2023-03-06 15:23

    균류넷 - 인공지능 - 사이보그 담론 각각이 내용은 다르지만 '인간 존재'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하는 주제들 같습니다. 제가 반려종 선언을 사놓기만 하고 읽어보질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무수한 문제들을 어떻게든 해보려면 우리 스스로 다른 종들의 '반려종'이 되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Be the Dog!

  • 2023-03-06 16:30

    인디언님의 글로 해러웨이를 다시 정리해보니 "닥치고 훈련"이 가장 또렷이 기억되네요!!

  • 2023-03-06 20:04

    맞다, 쌤 달곰이 맞죠? 아닌가? 강아지 이름요. 오늘 종일 기억이 안났었는데 지금 문득 생각났어요. 썜 글을 읽다 보니 과일 맛있게 먹던 순둥이, 그 귀엽던 강아지가 보고싶네요ㅠ 해러웨이는 전 많이 어려웠어요. 언제 다시 읽어 보고 싶긴 하군요

    • 2023-03-06 20:48

      맞아요, 우리 달곰이 ㅎㅎ 샘 기억력 좋으네요^^

  • 2023-03-15 09:39

    ㅎㅎㅎ 제목이 너무 좋고 재밌었어요
    나는 사이보그? 엄마와는 반려종?
    저 홀로 이번 1234 최고의 제목으로 꼽아봅니다 ! ㅎㅎ

  • 2023-03-18 08:06

    저도 요즘 관계에서의 맹점같은 게 있는 게 아닐까 고민하고 있는데요, 해러웨이가 그 힌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네요ㅎㅎ. 재밌는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