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1234] 생명의 세계에 개체란 없다

요요
2023-03-05 10:25
734

생명의 세계에 개체란 없다

『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 멀린 셀드레이크

 

인간과 비인간을 ‘진정한 정신’과 ‘진정한 이해력’을 기준으로 삼아 칼로 무 자르듯

깔끔하게 선을 그어 구분할 수 있다는 생각은 ‘고대의 신화’일 뿐이다.(대니얼 데닛)

 

작년 여름 나는 버섯에 꽂혔다. 여름 장마가 그친 어느 날 뒷산 산책길에 우연히 길가에 모습을 드러낸 버섯을 발견한 뒤부터였다. 봄 내내 탄천을 산책하며 1~2주 사이에도 지배종이 바뀌는 풀꽃들의 생태에 관심을 기울인 때문인지 유심히 버섯을 관찰했다. 색깔도 모습도 다양한 버섯이 알고 싶어서 사진을 찍고, 검색을 하고, 버섯 도감을 사서 살펴보면서 버섯의 모양과 이름을 익히기 시작했다. 고동색 광대버섯, 말불버섯, 방귀버섯, 흰가시 광대버섯, 비탈 광대버섯, 먹물버섯, 털귀신 그물버섯, 노란분말 그물버섯 등등 버섯 이름과 종류를 하나 둘 알게 되어 즐거웠다.

 

그렇게 산책을 다녀온 후 공부방에서 종종 버섯 도감 삼매에 빠져있던 나에게 정군님이 『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를 선물했다. 이 책을 통해 나는 버섯과 곰팡이의 세계를 접하고, 생명의 상호의존에 대해 경이감을 느꼈다. 버섯의 세계를 알면 알수록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것 같은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체가 과연 존재하는지, 생명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지, 또 인간중심적 관점을 넘어서려면 자연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등의 철학적 물음이 떠올랐다. 무아를 가르치는 불교와 차이의 철학과 진화생물학이 소통하는 느낌 마저 들었다. 철학도 불교도 생물학도 결국은 생명의 문제에 대한 물음이니 어찌 아니 그렇겠는가.

 

 

버섯은 거대한 네트워크의 아주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1969년 이후 생물학은 모든 생물을 다섯 개의 계로 분류하고 있다(휘태거의 5계설). 진핵세포가 아닌 원핵생물계, 단세포 진핵생물인 원생생물계, 그리고 다세포 진핵생물인 균계, 식물계, 동물계. 나의 관심을 끈 버섯은 이 중에서 균계에 속하는 생명체다. 균계란 곰팡이다. 식물계가 생산자, 동물계가 소비자라면, 균계는 분해자다. 곰팡이가 없다면 부패는 없다. 곰팡이는 자기 주변을 분해하여 영양을 얻는다. 우리는 곰팡이를 작고 별볼일 없는 생명체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곰팡이는 단지 인간에게 해롭거나 유익한 생명체 그 이상으로 생명의 네트워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버섯이 곰팡이라면 버섯 하나하나는 독립된 개체일까? 아니다. 버섯은 거대한 네트워크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다. 버섯은 식물로 말하자면 일종의 열매로 버섯의 몸은 숲 아래에 거미줄처럼 연결된 균사 네트워크(균사체)다. 균사는 머리카락의 5분의 1 정도 굵기로 직경 2~20나노미터의 가느다란 곰팡이 실이다. 티스푼으로 고작 한 스푼 정도에 불과한 1그램의 흙속에 있는 균사를 이어 붙이면 짧게는 수백미터에서 길게는 십키로까지 이을 수 있을 정도로 땅은 균사로 가득 차 있다. 균류는 포자로 번식하는데 버섯은 균사체로부터 부풀어 올라 포자를 생산하는 자실체(字實體), 포자 주머니이다. 포자를 퍼뜨리는 것, 그것이 버섯의 존재 이유다. 고급요리에 쓰이는 트러플(송로버섯) 같은 경우는 땅속에서 풍기는 강한 냄새로 다른 동물을 유혹하여 밖으로 나와 포자를 퍼뜨린다. 물론 모든 곰팡이가 버섯의 형태로 포자를 퍼뜨리는 것은 아니다.

 

버섯의 몸인 균사체는 통제센터가 따로 없는 탈중앙적 유기체다. 균사체의 조율기능은 모든 부분에서 일어나고, 균사체의 작은 조각 하나 만으로도 네트워크 전체를 재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75) 균사의 끝부분을 균사정단 혹은 균사선단이라고 하는데, 균사정단은 가지치기와 융합의 방식으로 생장하고 이동한다. 가지치기란 균사가 끊임없이 나뉘어 지면서 분열증식하는 것이다. 융합은 다른 균사를 만났을 때 상대방을 끌어들여 잇는 활동이다. 균사정단은 인간처럼 뇌조직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자신이 누구와 융합할 수 있는지를 아는 다른 지능을 가진 존재다. 똑같은 모양의 균사체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균사네트워크는 가지치기와 융합을 통해 끊임없이 형태를 변형하며 생명활동을 지속한다. 곰팡이의 균사네트워크는 ‘생명체의 존재방식이 고정된 실체(thing)가 아니라 변화하는 과정(process)이라는 것’(104)을 그 무엇보다 잘 보여준다.

 

균사체는 나와 남, 혹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진법의 세계를 살아가지 않는다. 균사체야말로 n개의 성을 가지고 있으며 조금이라도 유전적 공통점이 있으면 서로를 연결한다. 치마버섯의 경우 2만3,000가지 이상의 교배형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균사체의 융합능력은 탁월하다. 곰팡이는 자신만의 정체성을 고집하지 않는다. ‘곰팡이의 자아는 점진적으로 타자에게 물들어 간다.’(76) 그렇게 연결된 균사체의 입장에서 보면 균사 네트워크 전체는 하나의 개체다. 그러나 분열하고 융합하는 균사정단의 관점에서 보면 균사체는 복수의 개체다(95). 균사체 네트워크는 생명의 개체성을 당연하고 확실한 것으로 간주하는 실체론적 입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유기체라 할 수 있겠다.

 

 

나무와 곰팡이의 균근파트너십과 우드 와이드 웹

버섯의 몸인 균사 네트워크와 나무들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식물들의 90% 이상이 균근 곰팡이(mycorrhizal fungi)와 공생한다. 균근이란 곰팡이(그리스어 mykes)와 뿌리(그리스어 rhiza)의 합성어다. 균근은 나무의 뿌리와 곰팡이의 균사네트워크를 연결하는 정류장이다. 곰팡이는 나무가 합성하지 못하는 인, 질소 등의 물질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관계는 결코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균사체는 나무로부터 당류와 같은 영양분을 공급받기 때문이다. 곰팡이는 그 대가로 나무를 보호하는 면역물질을 생성한다. 어린 나무의 뿌리가 자신에게 적합한 곰팡이와 공생관계를 맺지 못하면 살아남기 힘들 정도로 나무는 곰팡이에게 생존을 의지한다고 말할 수 있다.

 

나무의 뿌리와 곰팡이 네트워크 사이의 공유 균근 파트너십는 5억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으로 육상으로 올라온 조류는 뿌리가 없었다. 광합성을 하는 녹색 조류가 거친 육상환경에서 식물로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은 곰팡이와 공생관계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곰팡이는 식물로부터 당분을 제공받고, 수분이 부족한 척박한 환경에서 암석을 분해하여 식물이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을 만들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곰팡이의 독특한 대사능력 때문이다. 곰팡이는 강력한 효소와 산을 이용해 무엇이든 분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빙하, 사막 등 척박한 지구 표면과 심해, 고압 고온의 깊은 땅속 어디에도 곰팡이가 없는 곳은 없다. 심지어 체르노빌 원자로과 같은 극한환경에서 방사능을 분해하여 에너지를 얻는 곰팡이도 있다. 곰팡이의 식물 사이의 강력한 균근 파트너십은 서로의 진화에 관계되어 왔다. 그러므로 곰팡이가 없다면 식물도 없고, 숲도 없다고 말해도 좋다.

 

나무의 뿌리와 뿌리 사이를 연결하는 균사네트워크를 월드 와이드 웹에 빗대어 우드 와이드 웹(wood wide webs)이라고 부른다. <네이처>는 1997년 캐나다의 식물학자 수잔 시머드의 논문에 영감을 받아 이 단어를 만들었다. 시머드는 식물이 자연환경에서 균사 네트워크를 통해 탄소를 주고 받는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녀는 나무에 극소량의 방사능을 주사하여 그 방사능이 어디로 가는지 측정했다. 방사능은 균근 네트워크를 공유하지 않는 나무에게는 전달되지 않았고 네트워크를 공유하는 나무에게만 연결되었다. 테드 강의에서 시머드는 숲에서 크고 오래된 어머니 나무가 이제 막 싹을 틔우기 시작한 작은 나무들에게 균근 네트워크를 통해 부족한 수분과 양분을 보내고, 의사소통을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숲을 벌목할 때 생존의 지혜를 갖고 어린 나무들을 키워내는 어머니 나무를 베어내는 것은 미친 짓이라는 것이다. 어머니 나무와 연결된 어린 나무가 숲을 풍요롭게 키울 가능성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이 아이디어는 영화 <아바타>에도 채용되었다.

 

수잔 시머드의 테드 강의

 

균근 네트워크를 통해 이동하는 것은 단지 수분이나 양분만이 아니다. 균근네트워크는 단지 나무와 나무를 연결할 뿐만 아니라 식물 외의 유기체들과도 관계를 갖는다. 균근 네트워크를 통해 곰팡이가 생산하는 온갖 화학물질과 함께 박테리아와 같은 세균도 이동한다. 어떤 실험에 의하면 진딧물이 나뭇잎을 갉아먹는 공격이 있을 때 균근 네트워크는 빠르게 정보를 보내는 통신망의 기능을 하기도 한다. 우드 와이드 웹은 식물 입장에서의 정보통신망이다.

 

그런데 우드 와이드 웹이라는 아이디어에 대해 『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의 저자 멀린 셸드레이크는 식물 중심적인 시각의 용어라는 점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식물이 아니라 곰팡이의 관점에서 균근네트워크를 볼 때도 우드 와이드 웹이라고 이름할 수 있을까. 곰팡이 입장에서는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곰팡이는 나무를 위한 수동적 존재가 아니다. 곰팡이는 나무와 곰팡이 사이의 공생 시스템에서 자기 나름의 능동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식물이 가능한 더 많은 곰팡이와 관계를 맺으려 하는 것처럼 곰팡이 역시 더 많은 식물과 관계를 맺으려 한다. 이들의 관계는 문란하고 난잡하다.

 

또 다른 점에서 보면 우드 와이드 웹은 식물 개체와 식물 개체를 연결하는 그물망이다. 그러므로 앞서 균사체가 단수인지 복수인지 의문을 던진 것과 같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균근네트워크로 연결된 나무는 독립된 개체일까 아닐까, 균근 네트워크로 연결된 그 전체를 하나의 집합적 생명체로 보아야 할까 아닐까, 라는 질문 말이다. 개체는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에서 끝나는가? 곰팡이와 나무들의 네트워크, 그리고 미생물들과 다른 유기체들과의 공생관계는 서로 다른 계의 생명체라는 범주적 구분을 초월하는 연결의 세계를 보여준다. 생명의 세계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개체들의 세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고방식은 지의류가 하나의 유기체가 아니라는 주장이 등장한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는 모두 지의류다

유기체를 단독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부터 생태학(ecology)라는 말이 나왔다. 생태학은 독일 생물학자이자 철학자이며 지의류를 예술적으로 형상화한 그림을 그린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 1834~1919)이 1866년에 처음 사용한 말이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869년 스위스 생물학자 시몬 슈벤데너는 지의류는 하나의 유기체가 아니라 균과 조류가 섞인 유기체라는 ‘2생명체 가설’을 내 놓았다. 이 주장은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생명의 나무는 종적 분화를 향해 나아간다는 믿음에 어긋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종류의 유기체가 수렴하여 하나가 된 것이 지의류라는 주장이 점차 수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마침내 경쟁이 아니라 공생(symbiosis)을 통한 진화라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졌다(1877년, 알베르트 프랑크). 오늘날에 이르러 지의류는 2생명체 가설을 넘어 일종의 다성음악과 같은 것이라는 이해로 받아들여지고 있을 정도이다.

 

헤켈과 헤켈이 그린 그림

 

지의류는 공생으로 가는 통로 유기체였다.(136) 그럼에도 공생이라는 아이디어가 진화생물학에서 시민권을 얻기까지 한 세기가 넘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19세기 말 크로포트킨 역시 경쟁이 아니라 호혜성이 생물의 진화를 이끌어 왔다고 주장했다. 아나키스트였던 크로포트킨의 주장은 국가를 넘어서는 정치적 대안을 제시하기에 이르렀지만 생물학의 정통과는 거리가 멀었다. 20세기 후반에 나온, 세포 속에서 에너지를 생산하는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가 세포와 박테리아의 융합과 연합을 통한 공생진화의 증거라는 린 마굴리스의 주장 역시 오랫 동안 생물학계를 이끄는 남성 생물학자들의 조소와 냉소를 감수해야 했다.

 

아무튼 지의류는 모든 생명체가 하이브리드(186), 잡종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 첫 출발이었던 셈이다. 그런 점에서 세포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신체 차원에서 수많은 미생물과 공생하고 있는 생명체인 ‘우리는 모두 지의류’(165)라고 말할 수 있다. 공생하는 생명은 ‘서로 다른 요소들의 카탈로그가 아니라 역동적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지의류화의 길(159)’을 가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수많은 생명체들이 융합하여 하나의 유기체로 살아가는 지의류는 공생도 결코 고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161). 우리는 모두 이질적인 것들이 합쳐진 키메라이다. 융합과 연합을 통해 진화해 온 생명을 범주에 따라 분류하고 각각의 종차로부터 순수한 본질을 찾으려 하는 것은 일종의 인간적 망상이라는 것을 지의류가 가르쳐주고 있다. 물론 균사네트워크와 나무의 공생이 알려주는 것 또한 다르지 않다. 진화생물학은 우리에게 생명의 역사에서 과연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개체가 존재한 적이 있기는 했는지 묻고 있다.

 

인간 중심주의를 넘어

‘자연은 멈추지 않는 사건’이고 생명은 ‘실체가 아니라 과정’이다(104).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생명과 개체에 대해 독립된 자율적 존재라는 개념에 붙들려 있다. 그러니 서로에게 의존하며 살아가는 생명의 공생 시스템에 대한 우리의 이해 역시 늘 애매모호하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실체와 개체 중심으로 생각할 때 ‘관계’란 어둡고 모호한 영역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관계를 개체가 먼저 있은 다음에 생겨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관계가 없다면 개체는 없다. 관계를 중심에 놓고 개체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결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고정된 개체라는 관념에 머무를 수 없게 된다. ‘관계’란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닌 만큼 관계적 사유는 추상적인 개체의 틀을 비틀고 어긋나게 하는 효과가 있다. 그 개체는 개체이면서 개체가 아닌 것이다. 마치 버섯이 그러한 것처럼.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라고 해서 무엇이 다르겠는가?

 

생명의 나무 꼭대기에 인간이 있는 진화의 그림은 인간중심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린 마굴리스는 이러한 인간중심주의를 뒤집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생물권은 미생물 우주에 뒤늦게 도착한 웃자란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마이크로 코스모스』, 85쪽) 미생물권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잠시도 살아갈 수 없다. 우리 몸에는 세포수보다 더 많은 미생물이 살고 있으며 그것들은 수분을 제외한 몸무게의 10% 가량의 무게를 차지한다. 그러나 그 각각의 미생물들은 또한 자신만의 좌표계를 갖고 자신의 현실을 살아간다. 이 미생물들은 나와 다른 존재인가, 나의 일부인가. 도대체 나란 어디에서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일까. 각자의 세계를 살면서 함께 또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생명체들의 관계는 불교의 화엄이 말하는 겹겹이 서로를 비추는 인드라망의 구슬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산책길에 만난 버섯으로부터 시작된 관계적 사유와 생명체의 공생에 대한 이 탐구의 여정이 어디로 이어질까. 더 많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더 많은 혼란과 더 많은 질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 과정에서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문화에 대한 굳은 관습적 생각들도 함께 깨어지는 사건들이 거듭거듭 닥쳐오기를 기대해 본다.

댓글 8
  • 2023-03-05 14:01

    쌤, 너무 하신대요? 이렇게 정리를 잘 해주시면 책을 안읽죠. 저도 이 책 읽으려다가 쌤 글 보고 아, 이거나 3번 더 읽고 말아야겠다 했네요ㅎㅎ '공생, 아름다운 공존'도 쌤 글 하고 거의 똑같이 정리돼있는데요, 그 때 그 책 읽고... 이 책을 안읽었으면 어쨌을까 생각했었죠. 균류가 진화 초기부터 거쳐온 어마어마했을 시간과 수천 수만 킬로의 상상할 수 없는 거리를 그려보면서 왠지 이런 게 철학책에 나오는 '영원'의 느낌일까 했었으니까요. 공부방 쌤들의 읽기쓰기가 기대됩니다. 열심히 읽어볼게요~

    • 2023-03-05 15:16

      오~ 세션샘! 감사합니다. 저는 <공생, 그 아름다운 공존>이라는 책은 몰랐어요. 샘 댓글 보고 검색해보니, <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에서 다루고 있는 균류, 우드 와이드 웹, 공생 등 같은 주제를 공유하는 책이군요.^^ 미리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근데 안타깝게도 절판이군요. 그리고, 아시겠지만 제가 정리한 것은 제 나름대로 간추린 뼈대일 뿐, 책 속에는 훨씬 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답니다. 1234에서 제 글을 읽은 뒤에 철학학교 에세이데이에 함께 했던 공부방 샘들이 모두 세션샘이 왜 '우리 버섯이 되어 만나요'라고 했는지 이제야 알겠다고, 찬탄하고 공감했답니다.^^ 5월에 있을 두번째 1234에서도 저는 다른 생명체와의 만남을 시도하면서 같은 주제를 이어나가보려고 해요.ㅋㅋ

      • 2023-03-05 15:31

        나에게 있음, 그 책^^

  • 2023-03-06 09:59

    앞으로 버섯을 먹을때는 경건한 맘으로 먹어야겠어요!

  • 2023-03-06 15:20

    '도대체 나란 어디에서 어디까지를 말하는 걸까?'라는 의문이 점점 커지는 요즘입니다. 인공지능과 사이보그를 공부하면서도 '나의 인공화'는 앞으로 될 무엇이 아니라, 이미 예전부터 그러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더 강해집니다. 그런 점에서 '인공'이라는 말의 의미도 많이 달라져야... 아니 인공과 자연의 구분이라는 게 과연 가당키나 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바로 지금이 스피노자를 (다시) 읽을 적기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2023 철학학교가 이제 겨우 첫시간을 지난만큼, 여전히 문은 열려 있달까요? 여러분? 응?

  • 2023-03-07 16:23

    버섯은 먹는 것과 못 먹는 것, 딱 두 가지만 있는 줄 알았는데........
    요요님의 글이 아주 아주 신선했습니다. 이 책 좀 빌려 주세요!

    • 2023-03-15 09:41

      가마솥쌤 다음엔 저 빌려주세요~~

      요즘 보고 있는 영국 드라마도 버섯에 대한 내용이거든요
      버섯이 인간에게서도 자라나서, 버섯-인간이 된 세계의 이야기인데요
      버섯 다큐도 보고 버섯 드라마도 보고 1234에서 버섯 책까지 소개받아서
      덕분에 요즘 제 세상은 완전 버섯 세상이 되었답니다 ㅎㅎ

  • 2023-03-18 08:03

    저도 버섯에 대한 다큐를 보고 영상을 하나 만들었었는데(공개될지 안될지는 알 수 없지만..), 요요샘의 글을 보니 더욱 흥미가 생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