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물론 이론의 전장] 3주차 질문 모음

정군
2024-01-16 22:01
412

여기에 수요일 정오까지 댓글 본문으로 올려주세요.

댓글 16
  • 2024-01-16 23:52

    P470~553)홈페이지가 요 며칠 이상하더니 정군샘이 올린 이 질문 공지글이 홈페이지 첫 화면 최신글에는 올라오지 않네요. 여기 단기집중 세미나 아래에는 있는데 최신글에는 안보이네요. 정군샘이 바쁘신가 했어요. 아무튼 이번 주 제 질문은 삼천포입니다. 질문이 이번 주 범위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과감히 생략하거나 혹시 세미나 시간이 남는다면 이야기 나눠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의 목표는 신유물론의 지도책인 것으로 보입니다. 여태까지는 목표대로 훌륭하게 읽혔습니다. 읽는 저로 하여금 어려울 망정 위치 파악 및 (저의)주제파악을 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토마스 네일에 와서는 좀 갸우뚱하게 됩니다. 일단 양적으로 균형을 상실했다고까지 보여질 정도로 분량이 압도적입니다. 그간 다뤄진 주제나 철학자에 비해 압도적으로 깁니다. 이렇게 긴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자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압도적인 분량에도 불구하고 잘 읽히지가 않습니다. 맑스를 수행적으로 재독해 한 네일을 그리려는 것으로 보이는데, 네일을 그리는지 맑스를 그리는지 저자의 생각인지가 문장문장/내용내용에 구분이 잘 가지 않습니다. 네일에도 문외한이고 맑스도 잘 알지 못하는 독자는 저자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저자의 글에서 그간 보여준 압축과 요약의 미덕이 사라진 듯 보이기도 합니다. 네일 부분은 지도책으로 삼기가 좀 어려웠습니다. 여러분은 잘 읽히셨는지요?

  • 2024-01-17 00:11

    (2)유목적 주체(p.288)

    슬픔을 기쁨으로 만들고, 수동을 능동으로 만드는 유목적 주체의 욕망은 변신의 기쁨은 의미한다. 이 변신은 사실상 기존의 사회적 배치 안에서는 ‘소수적 움직임’일 것이다(p.294 하단). (질문1) 왜? 유목적 주체는 소수자/소수성이어야 하나요?

    유목적 주체는 관광객도 아니고, 비즈니스맨도 아니고, 화폐획득 목적의 이주민도 아니다. 유목적 주체는 체 게바라의 신체이자, “궁극적인 목적지가 없는 변형의 흐름”이며, "다중적이고 관계적이며 역동적인“ 생성의 과정으로서, ”유목민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유목민 되기“를 계속하는 주체이다(p.293)
    (질문2) 왜? 유목적 주체는 관광객이나 비즈니스 맨, 자본가 등은 아니지요?

    신유물론적 주체는 ‘유목적 주체’이다. 이 주체는 생성 또는 되기의 과정에서 자신의 위도와 경도를 파악하고, 빠름과 느림을 가늠한다. 또한 이 유목적 주체는 이미 그어져 있는 지도의 경로를 따르기보다 “끊임없이 침해, 위반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생성이란 본래 비습관적이며, 더 나아가 존재하는 것의 형상과 틀을 횡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p.289) 라는 기술을 근거로 생각하면 상기 질문1)소수자/소수자성, 질문2)체 게바라의 신체성만이 유목적 주체라고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인데, 어떤가요?

  • 2024-01-17 00:50

    이렇게 어렵고 복잡하게 설명하고 결국 '사랑'을 이야기하는 게 흥미롭습니다.
    - 로지 브라이도티: 이를 위해 우리는 서로 간에 인간/비인간의 관계성을 넘어서는 '감응의 능력'을 기를 필요가 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될 생성의 윤리학이나 정치학이다..... 지금 여기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것으로 수렴되지요. 그것은 아주 잘 알려진 사랑, 세계에 대한 사랑이며, 혼란함을 느끼게 하는 그 어떤 상황에서조차 우리가 느끼는 것입니다." 302쪽
    - 브뤼노 라투르: 비근대인들은... 인민들의 공포와 해방감, 기쁨과 슬픔 모두를 긍정한다. 그리고 비인간적인 혼종들도 긍정한다. 긍정의 윤리는 라투르의 체계에서도 이런식으로 가동되는데, 라투르는 그것을 "형제애"라는 다른 표현을 사용하여 그러낸다. 이들은 전 지구적인 네트워크로 연결되며, 과학과 기술에 의해 창조된 또 다른 형제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분투한다....349-350쪽
    - 퀑탱 메이야수: 투사들은 삶을 사랑하며 그 삶이 총체적으로 정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안다. 즉 삶 자체는 정치가 아닌 다른 곳에서 스스로를 성취하고자 한다. 그것은 사랑, 우정 ,예술 사유이다. 393쪽

    '들어가기'에 이런 설명이 있습니다. "물질적 요인들을 전경화하고, 그와 더불어 주체를 뒤로 물리면서 그 공존과 반목의 상황을 그려 낼 때 유물론은 가장 날카로운 사유의 모습을 띄게 된다. 그것은 유물론이 반드시 실천철학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 실천적으로 이것은 당대의 인류세 또는 자본세로 규정하고 이를 '살게하는' 방향으로 이끌 윤리-정치적 모색을 한다." 31쪽

    유물론자들의 날카로운 사유를 이해하려고 애쓰다가 지칠때 쯤 그래서 이들이 윤리-정치적 지향점으로 '삶의 긍정', '세계에 대한 사랑'에 도달하면, 이렇게 복잡하게 사유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오늘날 철학하기가 얼마나 어려울까하는 생각도 해보구요. 이렇게 진입장벽이 높아서 실천철학이 될 수 있을까,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이들이 말하는 실천이 상아탑 속 실천 그 이상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떤 '사건'을 만나야 가능할까요?

  • 2024-01-17 04:09

    352p)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용어에 대한 질문입니다. 메이야수를 비롯한 4인이 2007년 컨퍼런스를 연 것을 계기로 이들을 "사변적 실재론"자들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메이야수는 자신의 철학이 "사변적 실재론"이라고 불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메이야수가 거부한 사변적 의미의 실재와 그가 극구 옹호하고자 하는 유물론적 의미의 실재가 어떻게 다른지를 가늠해야 할 숙제를 우리에게 던져"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숙제를 해결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사변적 의미에서의 실재와 유물론적 의미에서의 실재가 어떻게 다른지... 저는 왜 이해가 안 될까요? "원-화석" 개념과 "본사실성"의 원리(우발적 절대성)는 어떻게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을까요?

  • 2024-01-17 04:47

    3장에 등장하는 브라이도티나 데란다의 경우는 들뢰즈 개념에 대한 주석처럼 읽힙니다. 물론 브라이도티는 '신체성'을 강조하거나 '관계적 생기성'과 같은 단어들로 들뢰즈를 풀어내는 한편 나름의 깊이와 넓이를 더하고 있지는 말입니다. 그래서 관건은 들뢰즈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81쪽) 저자는 들뢰즈 등의 신유물론의 흐름을 진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을까요?
    352쪽)메이야수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나오는 '사변speculation'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상관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데, 그에게 사변은 절대적인 것의 사유가능성(372)나 비이성의 원리라거나 "우리와 세계를 이어 주는 사유는 그 사유 이전과 이후에 일어났고 일어날 사건들에 대해 사유"(388)라고 합니다. 그리고 '실재'를 탐구하는 것을 중시(?)했을 그가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말 대신에 사변적 유물론이라는 말로 자신의 철학을 지칭했다면, 실재에 접근하는 그의 태도는 사변적 실재론자들과 뭐가 달랐던 것일까요? 여기서 '사변'은 그 다름을 드러내는 방법적 차이인가요?

  • 2024-01-17 08:54

    -3장- p.306
    이질적인 것들이 자가촉매적 루프를 형성하면서 재귀적 순환을 통해 차이 나는 반복을
    형성하는 것은, 달리 말해 '시간'의 구조가 발생하는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이때의 시간은 선형적 시간인 크로노스가 아닌, 인간적인 의지가 개입되는 카이로스의 시간일까요?

    -4장- p.326
    [그림5]에서 물신 2번의 "만약 제조되었다면 그것은 허상이다" 는 표현이
    사실 1번의 문구와 같아 보이지만 오타가 아니라면,
    물신 2번의 내용은 "만약 '자율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허상이다" 는 의미일까요?
    '제조되었는가, 아니면 자율적인 실재인가'라는 분하을 가능하게 하는 질문에서
    제조는 자율적이지 않다는 맥락으로 읽혀집니다.

  • 2024-01-17 09:19

    (354쪽) 실험과학이 불가능하고 사실상 알려지지 않은 과학-바깥의 세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저자는 관념론이나 상상력으로 매도할 필요는 없다고 하는데, 과학 바깥을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과학-밖 소설은 과학을 통해 절대로 가는 길(386)이라는 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렵네요. 과학 소설도 어려운데 과학-밖 소설까지^^

  • 2024-01-17 09:28

    368쪽부터 이어지는 현사실성과 본사실성, 비이성 원리 부분이 잘 이해가 안되었어요.
    사유와 사변, 절대의 의미들 메이야수가 정의하는 바를 다시 이야기 해봤으면 해서요.
    아 질문을 어떻게 요약할지도 정리가 안되네요..
    일단은 올려야 하니까...올려놓고 세미나 전까지 더 읽어보고 오겠습니다.

  • 2024-01-17 09:30

    420쪽 “여기서 다양체는 여러 얽힘들의 다중적 주름이기도 하다. 윤리적인 측면에서 이것은 그 결과, 책임, 의무에 있어서 선형적 인과를 벗어나는 행위의 본래 모습을 보여 준다. 개별적 행위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책임은 우리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기에 책임의 경감은 없다. 오히려 저 다중적 주름에 대한 끊임없는 응답 가능성, 즉 책임이 있으므로 더 많은 책임이 생겨난다…”
    저자는 바라드의 신유물론을 설명하면서 ‘다양체는 여러 얽힘들이기 때문에 개별적 행위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윤리적인 측면에서 결과, 책임 의무에 있어서 선형적 인과를 벗어난다’고 말합니다. 개별적 행위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윤리적인 책임도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요? 개별성과 선형성에서 벗어나서 어떻게 윤리와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 2024-01-17 10:28

    5장 새로운 세대들의 분투 장에서, <수행적 유물론자들> 편에서 462쪽 ‘수행적 신유물론자들에게 물질이란 “근본적으로 불확정적인 수행 또는 운동-중-과정” 이다. 라는 정의 에 이에 세 가지 테제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방행’을 “반-자동적 자기-이동의 운동”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방행 운동을 하는 물질은 단지 준안정적인 어떤 구조를 매 순간 생성시키며, 그 구조와 다른 구조의 발생에 관여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준다.”(463) 465쪽 주에서 “결론적으로 바라드의 행위적 실재론에서 수립행위로서의 행위적 절단과 현상들의 역동성은 ‘방행’ 이라는 개념에 와서 그 우발적 특성을 드러낸다. 현상들은 방행적 움직임 안에서 간-행하며, 이 간-행들이 장치들의 확장된 본성 안에서 얽힘을 형성한다. 얽힘과 간-행 그리고 행위적 절단의 ‘수행’은 방행적 움직임 안에서의 주름 운동에 다름 아니다.” 신유물론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움직인다는 의미로 물질의 개념을 재정의하고 있다고 볼 때, 이 운동성을 ‘방행’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이 개념이 잠재성(들뢰즈의 개념) 개념을 극복했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방행적 움직임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의심스러운 ‘잠재성’을 극복했다는 점과 연결해서요.

  • 2024-01-17 10:45

    "달리 말해 포스트휴먼은 혼종성으로 발산하는 물질성 그 자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이어져 온 존재론의 명제인 '존재인 한에서의 존재'(ens in quantum ens)로서의 그 단일성을 해체한다. 그러므로 '물질적 전회'란 다른 말로 '존재론적 전회'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회를 의미하는 형이상학은 이제 포스트-메타피직스(post-metaphysics), 들뢰즈의 용어로 '순수 형이상학'(metaphysique pur)이다." 278쪽

    1.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인 한에서의 존재'는 무슨 뜻인가요? 어떤 맥락에서 그 안에 '단일성'이 내포되어 있는지 궁금합니다.

    2. 신유물론에서는 포스트-메타피직스, 순수형이상학이라는 이름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일철학을 재독해합니다. 형이상학의 사전적 의미는 메타피직스(자연학 다음/뒤), 形而上學(형상/꼴/얼굴 위의 학문)이고, 그 의미는 안드로니코스의 주석에서 유래했다고합니다. 이후 철학사에서 제일철학, 제일원인에 대한 다양한 재독해가 이루어져온 것으로 아는데요, 형이상학이 아리스토텔레스 원전에서는 어떻게 설명되고 있는지, 이후에 대략 어떤 흐름으로 그 의미가 갱신되어왔는지 궁금합니다.

  • 2024-01-17 11:08

    메이야수가 실재를 다루고 이는 신유물론적 의미에서 물질적인 것과 상응한다(351P)고 하니 그런가 싶기는 하지만 (2)본사실성의 원리와 거대한 바깥 부분을 넘어가면서는 '사변적 실재론, 사변적 유물론'에서 실재나 사물보다 사변에 포인트가 있고 사변 가능성으로 수렴되는 것은 형이상학적이지 않다(372P)라고 했는데 이게 어떤 의미일까요?

  • 2024-01-17 11:10

    들뢰즈는 신유물론에 있어 메타피직스는 물질적 상태를 의미화하는 것, 사건화하는 것이라고 했다(p281). 저자는 철학자는 현실적 과정들에서 잠재적 사건들을 추출하여 창조된 것들을 펼쳐내는 것(다양체), 과학은 지시체를 활용하여 함수화하고 사건들을 현실화해 내는 것(지시체)이라고 한다(p314)
    라투르는 포스트 휴먼적 혼종체를 이야기 하면서 과학자들이 과학적 객관주의자들과 윤리적 절대주의자들 사이에 위치할 것이라 한다.(p336) 그리고 저자는 라투르에게 진리는 과학의 편에 있는 것 같다고 하면서(p339). 필요한 것은 형이상학적 독단과 본질주의 질문 모두를 회피하고, 순환하는 지시체와 다이어그램이라는 새로운 물질-객체를 회복하는 것이라 한다(p339)
    메이야수는 강한 상관주의자로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를 거론하면서, 예를 들어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상관주의적 태도는 우리가 존재하는 사유 사이의 관계를 사유할수 있을 뿐이라는, 그렇기에 우리의 지식은 오로지 현상에 제한된다는 사유안에 놓여 있다고 합니다.(p365).
    질문) 비트겐슈타인은 진리가 사실이 되는 것, 개념을 쫒을 때 이미 고정화되므로 언어적 개념은 필요없다. 기존의 언어로 충분하다고 했답니다. 그리고 개념을 형성하는 것은 철학이 아니라 '사상'이다. 지성을 착취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철학이다고도 했답니다. 그럼 유물론은 철학일까요 사상일까요?

    메이야수의 사변이란 절대적인 것 일반에 접근한다고 주장하는 모든 사유, 비-형이상학적 사변, 현시성의 절대성으로부터 즉자(절대적인 것)의 속성을 연역하는 것(p372). 절대적인 것의 존재 가능성, 어떤 비존재의 상태, 아무것도 아닌 어떤 것이 있다(p375)
    질문) 결국은 불교의 공(空)사상을 언어로 설명하려는 과정들이 아니었을까요?

  • 2024-01-17 11:30

    진리대응설에서 진리이동설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근대의 이분법은 허물어진다고 라투르는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동설로 설명되는 물질을 팩티쉬(factish)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팩티쉬를 설명하는 다이아그램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네요. 326p의 그림5와 그림6에서 각 축이 뭘 말하는지도 모르겠고, 각 구역에 표현되고 있는 것도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두 그림이 대응설에서 물질(사실)과 물신간의 이분법이 이동설에서 붕괴되는 모습을 보여주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조(fabrication)'이라고 하는데....

  • 2024-01-17 11:41

    375쪽

    "메이야수는 들뢰즈에 대해 말하면서 그가 '개방성의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에 '거대한 바깥'을 사유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375쪽)

    메이야수는 라투르나 바라드 등과 뭔가 결을 달리하는 듯이 보입니다. 위 문장에서처럼 들뢰즈를 비판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합니다. 메이야수의 거대한 바깥은 상관주의 너머의 초카오스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사실 라투르의 네트워크도, 바라드의 존재-인식론의 얽힘이나 간-행도 메이야수의 입장에서 보면 여전히 상관주의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의혹이 듭니다. 저는 거대한 바깥에 대한 사변적인 사유, 혹은 비이성의 원리를 통해 본사실성으로 나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감잡기도 어렵네요.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같이 이야기해보았으면 합니다.

  • 2024-01-17 13:39

    질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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