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해설서 낭독> 2/2 감성과 지성이 만나기 위한 조건

호수
2023-02-06 23:14
325

벌써 2년도 더 되었네요. 이수영 샘의 <순수이성비판> 강좌를 듣고 문탁의 여러 선생님들과 서문을 읽었던 때가요. 그때 공력이 높으신 선생님들의 치열한 읽기에 자극을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문탁샘과 요요샘의 집중력과 치밀함에 저도 그렇게 나이 들고 싶다고 생각했음을 아주 뒤늦게 고백합니다:)

 

그해 이수영 샘의 강의와 서문 읽기에 꽤 성실히 참여했는데, 당시 저의 이해 부족에 더해, 아니 그로부터 나오는 저의 오해가 참 많았음을 그 뒤로 자주 느꼈습니다. 그때 대충 관념론의 대표 철학자로 알고 있었던 칸트의 경험주의자적인 면모에 상당히 놀랐던 것 같아요. 특히 “잡다” 그러니까 우리가 외부에서 받아들이는 최초의 자료에 다른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태도는 어언 30여 년 전 학부 과정에서 배운 인지 심리학의 전제들과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또 경험이 결합되지 않은 개념들만의 종합으로는 가상밖에 얻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그러한 논리에 기반해 과거의 신 존재 증명들을 무력화시키는 대목은 굉장히 짜릿했습니다.

 

한편 황당하기도 하고 한계라고 느껴지는 점들도 있었습니다. 제가 짜릿하게 느낀 바로 그 지점을 요상하게 뒤집는 말들이었는데요, 특히 “인식은 할 수 없지만 생각(사고, 사유)는 해볼 수 있다”라는 말이 그랬습니다. 그리하여 나중에 스스로 신을 요청하기까지 한다는 데 이르러서는 신의 존재를 무력화한 자신의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가지 않은 비겁한 태도라고도 생각했습니다.

 

저는 칸트가 인간의 인식에서 한계점을 보여주며 겸허히 자신에게 주어진 영역(경험으로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이성보고 나대지 말라고 마구 야단치는 것 같은... ㅎㅎ) 마음에 들었고 그것이 비판을 내세운 칸트의 주요한 철학적 결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칸트의 강조점은 애초부터 다소 다른 곳에 있지 않았을까 하는 예감이 이후 자주 들었어요. 요즘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애초부터 칸트의 강조점은 ‘선험적’, ‘초월론적’ 영역(제게는 이것이 칸트가 이성에 어떤 신비감과 새로운 지위를 부여하는 느낌이 들어요)에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세미나에서는 초월적 감성학을 넘어 초월적 논리학 중 분석학 부분을 거의 다 읽었습니다. 칸트는 지식의 두 가지 원천으로 감성과 지성을 들고 있고, 앞서 초월적 감성학에서 감성을 다루었습니다. 초월적 논리학에서는 이 경험과 독립적이면서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서 지성을 다룹니다. 초월적 연역론을 거쳐 지난 시간의 도식론과 원칙론에 이르기까지 칸트는 경험과 독립적인 지성이 어떻게 해서 경험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지, 간단히 말하면 감성과 지성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설명해 내기 위해 심혈을 쏟아붓는 것이 보입니다. 연역론에서는 소속이 깔끔하게 파악되지 않는 상상력이 “범주의 자발성이 감성적 확장”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물과 기름과 같은 이종적인 감성과 지성을 잇는 도식이 나옵니다. 지난 시간에 집중적으로 읽었던 원칙론에서는 직관으로 받아들인 잡다를 종합적으로 통일하기 위한 필연적 조건들이 제시되었습니다. 우리가 양(외연량)과 질(밀도적 크기)를 파악하는 데는 경험적 인식을 선험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이상한(스스로도 기이하다고 표현하네요 ㅎㅎ) “예취”가 등장합니다. 이어 인과성과 필연성 역시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그것이 종합판단의 원칙이며 필연적 조건이라고 말합니다. 이 일련의 논증들이 제게는 ‘선험적인 영역은 있어야 하므로 있을 수밖에 없다’로 보이기도 하지만, 칸트가 주장했듯이 이것은 분명 합리론의 독단과 경험론의 미궁으로부터 한 걸음 나아간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원전의 내용을 충실히 담은 해설서를 한 문장도 빠뜨리지 않고 같이 읽는 세미나에 참여하니 역시나 아무래도 더 꼼꼼하게 보게 됩니다. 다음 시간에 읽을 예지계 부분도 나중에 나올 변증론의 이율배반 부분도 기대되네요. 애초 계획대로 실천이성비판까지 다 읽진 못하겠지만 앞부분이라도 좀 들어갈 수 있겠지요. 다음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댓글 6
  • 2023-02-07 15:46

    감사합니다.
    한참 읽다보면, 뭐라는겨? 하다가, 근데 왜 이런 얘기를 하는겨? 하게 되는데,
    호수님 후기가 어디쯤 가고 있는 지 알려 주네요

  • 2023-02-07 15:59

    여섯 번째 강독 순서를 올립니다. 17강 까지 갈수 있을려는지 몰라도 우선 거기까지 나누어 놓습니다.

    4부. 초월적 논리학2 : 변증학

    15강. 순수이성과 형이상학
    초월적 가상에 대하여 - 김은영님
    초월적 가상과 순수이성 - 무사님
    초월적 이념 - 걷는이님

    16강. 순수이성의 오류추리
    나는 생각한다 - 바람님.
    실체성의 오류추리 - 여울아님.
    인격성의 오류추리 - 여울아님.
    관념성의 오류추리 - 가마솥님
    순수 영혼론의 결산 - 손숙희님.
    나의 속성과 범주의 관계 - 단순삶님
    매개념 다의의 오류 - 호수님
    훈육으로서의 이성적 영혼론 - 김은영님

    17강. 순수이성의 이율배반
    순수이성의 안락사 - 무사님
    우주론적 이념들의 체계 - 걷는이님
    첫번째 이율배반 - 바람님
    두번째 이율배반 - 여울아님
    세번째 이율배반 - 여울아님
    네번째 이율배반 - 가마솥님
    에피쿠루소주의와 플라톤주의의 대립 - 손숙희님
    이율배반의 이유와 비판의 척도 - 단순삶님
    변증학 해결의 열쇠로서의 초월적 관념론 - 호수님
    우주론적 논쟁에 대한 비판적 판결 - 김은영님
    이율배반의 가상적 상충 - 무사님
    순수이성의 규제적 원리 - 걷는이님
    수학적 이율배반의 해결 - 바람님
    역학적 이율배반의 해결 - 가마솥님.

    • 2023-02-07 18:23

      아고... 가마솥샘, 제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번주와 다음주 세미나 불참이에요.
      16강과 17강에 제가 맡은 부분이 있네요. 죄송합니다.ㅠㅠ

      • 2023-02-08 17:25

        예~ 요요님 확인했습니다~~

  • 2023-02-08 07:05

    "애초부터 칸트의 강조점은 ‘선험적’, ‘초월론적’ 영역(제게는 이것이 칸트가 이성에 어떤 신비감과 새로운 지위를 부여하는 느낌이 들어요)에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이 생각에 동의합니다. 칸트는 감성과 지성을 연결하연서 '유독' '초월적'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저는 이것이 이성에 막강한 힘 또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듯 합니다.
    감성과 지성이 같은 무게로 자리매김하듯이 논리를 펼치는것 같지만 읽다보면 점점 감성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인 그 무엇은 우리 머리 속 or 정신 속 깊은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것은 선험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오성인 듯 한데 그것은 가르칠 수 있는게 아닌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이런 지점마다 제가 불편함에 걸려 넘어지는 것 같습니다.
    노력해선 안된다. 타고나야한다는 느낌...가능성을 닫아놓는 좀 더 나가면 우생학까지 갈 것 같은..^^
    (이런 지점에서 열린 가능성을 제시하는 베르그손을 더 좋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넘 나갔나요? ㅎㅎ
    여튼 호수님 후기로 다시 정리하고 갑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2023-02-08 17:30

    저도 호수님 생각에 동의~~합니다~

    칸트의 초월은 내가 아는 그 초월이 아니네... 로 시작해서 낭독 중반을 넘어서니 그에겐 초월 개념이 전부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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