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9] 죽(이)거나 도망치거나 - <장녀들>

인디언
2024-05-03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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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거나 도망치거나, 다른 방법이 없다면 어쩔 것인가!

 

시노다 세츠코의 소설 세 편 <집 지키는 딸> <퍼스트레이디> <미션>이 『장녀들』 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다.

세 명의 주인공은 30대 중반에서 40대의 비혼 장녀들.

이들의 이야기는 소설이지만 결코 낯설지 않고, 일본이지만 한국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나의 노후는 어떻게 될까 

나오미는 유능한 40대 돌싱 직장인이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집에서 부모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여동생은 정치인 집안으로 시집가서 그 집안을 챙기느라 바쁘다. 어머니는 아직 60이 되지 않았으나 골다공증이 심하고 치매가 있다. 손이 많이 가는 오래된 주택에서 어머니와 둘이 사는 나오미는 직장생활을 하며 어머니를 돌보았으나, 결국 직장을 포기하고 어머니를 24시간 돌보게 된다.

어머니는 나오미가 자신을 돌보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집과 땅을 나오미가 물려받을 것이니까 어쩌면 당당하기도 하다. 심지어 이혼하고 집으로 돌아오기를 원한 것도 같다. 요양보호사도 싫다하고 데이케어도 절대 거부하며 딸이 직장도 그만두게 만든다.

같이 살지 않는 여동생은 잠깐 와서 보고 어머니가 괜찮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어머니를 환자로 보는 언니를 나무라며 제도적으로 도움 받는 것보다 가족이 마음으로 돌보아야 한다는 식으로 설교를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 우리의 소중한 추억이 담긴 집이니까 언니, 시집 간 나 대신 잘 지켜줘.” 이런 소리나 하면서.

어머니는 루이(레비)소체 치매에 파킨슨증. 없는 사람을 보면서 함께 대화하는 환시 증세가 심한데 약 먹는 것을 기어코 거부한다. 어쩌면 어머니는 환영이지만 자신이 만날 수 있는 유키(손녀 혹은 어머니의 여동생)를 계속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결국은 그 환영이 나오미를 구한다는 부분이 이것이 소설임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나오미와 어머니의 일상은 피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사실적이다.

나오미의 인생은 어머니로 인해 송두리째 사라져버렸다. 마음 속 갈등으로 괴롭지만 어릴 적 엄마가 자신에게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를 생각하며 자책한다. 단짝 친구처럼 지내던 엄마와 딸 관계의 변화와 모녀간의 감정들이 세세히 드러나서 울컥하게 한다.

나오미는 치매 어머니의 모습에서 자신의 노후를 본다. 직장을 그만 두었으니 어머니 보다 더 빈곤할 것이고 돌봐주는 가족도 없어서 더욱 비참할 자신의 모습. 지금 우리가 마주한 딱 그 지점이다. 다행히 한 줄기 빛이 보이기는 한다.

 

죽(이)지 않으려면 도망쳐

게이코는 의사 집안의 장녀다. 의대를 중퇴하고 종교에 빠져 헤매다가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대신해 지역 명사인 아버지를 보좌하는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한다. 어머니는 시부모를 모시고 아이들을 키우고 병원의 서무 일까지 맡아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했으나 시부모가 돌아가시고 병원시스템이 전산화되자 모든 일에서 손을 뗀다. 의사 집안의 허세에 비판적인 어머니는 퍼스트레이디 역할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자신의 당뇨병을 방치하여 시한부 선고를 받는 과정에서 게이코는 엄마와 심한 갈등을 겪는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기도 한다. 신장이식이 마지막 방법이 되었을 때 의사인 오빠도 아버지도 냉정한 태도를 보이지만, 게이코는 가장 위태로웠던 순간에 자신을 도와준 엄마에게 자신의 신장을 이식하려 하는데, 거기서 엄마의 진심을 알게 된다. 그리고 하마터면 어머니를 죽일 뻔 한다. “너는 내 몸이나 마찬가지니까.” 섬뜩한 결합체로서의 모녀관계를 강요받은 게이코는 이제 가족 앞에서 사라지려 한다. 어머니의 딸도, 아버지의 퍼스트레이디 노릇도 당장 그만두고.

 

좋은 죽음이란

요리코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는데 어머니의 암투병 과정에서 한 의사를 알게 된다. 그 의사에게 감명 받아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뒤늦게 의대에 진학해서 의사가 된다.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화목했던 가정이 사실은 어머니의 돌봄 노동에 의해 유지되었던 것임을 인식하게 된 요리코. 아버지와 오빠는 요리코에게 어머니의 역할을 기대했지만 그녀는 과감히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했다. 졸업 후 의료가 취약한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고 요리코는 아버지의 고독사에 죄책감을 느낀다.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 그 의사가 히말라야에서 7년째 의료봉사를 하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후임으로 히말라야에 가게 된 요리코. 그녀는 그곳에서 건강한 삶과 죽음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견해를 접하고 혼란에 빠지게 된다. 나는 사실 이 부분이 더 재미있었는데 작가가 이 부분을 좀 더 펼쳐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진정 좋은 죽음이란 무엇인지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다.

 

세 소설의 주인공은 비혼 장녀들이다. 다른 형제 자매들은 모두 결혼하고 자식 낳고 살면서 아무도 부모를 돌보려고 하지 않는다. 부모들도 이들에게 자신을 돌봐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장녀가, 그것도 비혼이라면 너무도 당연히 부모 돌봄은 그들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가족들. 돌봄 노동의 문제가 생겨나기 전에는 화목한 가정이었지만, 물론 그것도 어머니라는 역할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 어머니가 돌봄이 필요한 존재가 되었을 때 딸들은 어머니를 닮아 책임감을 느끼며 그 역할을 감당하려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죄책감에 시달린다. 자신의 삶을 뒤로 하고 어쩔수 없이, 때로는 자신의 선택으로 돌봄 노동을 감당하지만 마음의 갈등이 너무나 심해 죽음까지 생각하게 되는게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집에서 부모를 돌보는 것이 점점 불가능해지는 현실이지만 우리 부모 세대는 요양시설에 가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신이 가족들, 자식들로부터 버려졌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부모 마음을 아는 자식들도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나오미처럼 직장까지 그만두고 어머니 돌봄에 올인하는 경우는 별로 없겠지만 다른 대안이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이 또한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자식들을 키우는데 최선을 다한 부모들, 그들을 돌보는 장녀들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도 그만큼 했으니 너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느냐는 기대가 있고, 그 기대가 채워지지 않으면 분노하거나 원망한다. 가장 가까이서 자신을 돌보는 자녀를 힘들게 하는 것은 그런 마음의 표현일 수도 있다. 다른 가족들은 장녀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안도의 한숨을 쉴지도 모른다. 매일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부모의 상황을, 돌봄 노동을 책임지고 있는 다른 가족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돌봄 노동을 감당한 이들, 비혼 장녀들의 노후는 어떻게 될까?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며 느끼는 나오미의 불안과 절망감은 나오미만의 것은 아닐 터. 1인 가구가 점점 늘어나는 우리 사회에서 이건 모두 함께 풀어야할 문제인 것만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렇게 곱게 귀하게 키웠는데, 애정도 아무 것도 없구나. 늙어서 남이 내 기저귀를 갈다니, 절대 싫어. 그런 창피하고 비참한 꼴을 안 보려고 딸을 열심히 키웠는데.” 그러니까 자기 기저귀를 갈게 하려고 딸을 곁에 계속 붙잡아 놓았다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이대로 차를 돌려 고속도로 중앙 분리대를 들이받을까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러면 두 사람 모두 통증과는 이별이다. 저세상에서라면 영원히 사이좋은 모녀 노릇을 해줄 수 있었다.(54)

 

어머니는 망령이 났고, 자신은 미쳐간다. 그렇게 해서 행복과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다면 별로 나쁜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재산을 탕진한 독신 여성에게 노후 따위는 없다. 어차피 자신은 망령이 나기도 전에 객사할 거라고 체념하자, 나오미의 마음은 명랑한 무기력으로 풀어졌다.(132)

 

이미 한참 전에 한계를 넘어 있었다. 스스로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죽이거나 도망치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었다. 몸 속을 흐르는 피만이 아니라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을 모두 공유하는, 섬뜩한 결합체로서의 모녀관계를 어머니에게 강요받았다. 동시에 어머니가 다하지 못한 아버지의 아내로서의 역할까지 도맡아왔다. 결국에는 장기까지 나누어 무의식적으로 어머니의 어두컴컴한 자궁으로 돌아가려고 했다.(224)

 

건강한 보리도 겨울이 되면 시든다. 그러나 시들 때는 이미 새로운 생명의 싹을 남기고 봄이 되면 스스로의 몸을 다음 보리가 자라날 자양분 삼아 땅속에 돌려준다. 늙으면 개인은 죽는다. 그러나 그때 이미 새로운 생명은 자라고 있고, 사람은 스스로의 생명과 맞바꾸어 아이들에게 풍부한 결실과 지혜를 남긴다...... 어젯밤까지 보리를 베던 사람이, 오늘 아침 야크 젖을 짜 버터를 만들던 사람이 갑자기 쓰러져 죽는다. 그중에는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이들도 있지만 한순간의 일이다. ‘조금 피곤해. 잠깐 쉬게 해줘’라며 자리에 앉았다가 그대로 잠들어 다시는 깨어나지 않는다. 공덕을 쌓은 자에게만 주어지는 편안한 죽음이다. 남겨진 자식들은 조용히 그 죽음을 애도하며 육체에서 떠나가는 영혼을 배웅한다. 그리고 계절이 바뀔 즈음에는 얼어붙은 대지에서 싹을 틔운 풀들이 꽃을 피우듯, 사람들의 마음도 새로운 기쁨으로 채워진다.(304)

 

 

 

1. 집안에 돌봄이 필요한 부모님이 있는 사람

   -본인이 주 돌봄노동자이거나 식구 중 다른 사람이 주 돌봄노동자인 경우 모두

2. 자신의 노후 돌봄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 사람

3. 건강한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은 사람

4. 아마도 모든 사람?

댓글 4
  • 2024-05-03 09:53

    일본에서는 비혼 여성 딸의 독박돌봄이 엄청난 사회문제인가봐요.
    제가 논문도 한편 읽은 적 있어요
    우리도 비혼이 느니까 조만간 닥칠듯..........ㅠㅠㅠㅠ

  • 2024-05-04 07:25

    현실 같은 소설과 소설 같은 현실.... 요런 말만 맴도네요

  • 2024-05-04 10:04

    사회적 차원에서 죽거나 죽이지 않는 돌봄이 절실하군요.
    정말 방법이 없는 걸까요?(존엄사나 안락사 논의도 이런 맥락과도 깊은 관련이 있겠지요.)

  • 2024-05-10 09:40

    작년 돌봄 수업에서 들었던 '돌봄을 잘 받는 것도 능력'이라는 말이 떠올라요.
    가까이 있는 가족의 희생이 아닌 남에게 나의 엉덩이를 드려낼 용기. 지금 우리가 가져야 할 용기인가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