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3] 품위를 지키기 위한 선택 - <죽음을 어떻게 말할까>

서해
2024-03-22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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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마침표를 찍다

 

저자의 아버지이자 스위스의 성공한 기업가인 하인리히 오스발트는 91세가 되던 해 가족들에게 삶에서 Exit(그가 선택한 자살 조력단체의 이름도 Exit이다)할 결심을 전한다. 그는 몸이 다소 불편하긴 했지만 의식이 명료하고 주변에 자신을 도와줄 사람들이 충분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인생을 충분히 맛보았고 생에 마침표를 찍고 싶은 때가 되었다'고 했다. 저자는 이를 니체가 말한 ‘온전한 자유의지로 명확한 의식을 가지고 선택한 자유죽음’으로 바라보며 아버지의 마지막 1년을 기록했다.

 

이 책은 조력자살의 과정을 담고 있기도 하지만 둘째 아들이 그려내는 가족사이기도 하다. 흩어져 살고 있던 가족들은 아버지의 죽음선언을 계기로 모이게 되고, 둘째 아들인 저자가 아버지의 마지막을 보살피는 가장 가까운 가족의 일원으로 함께 한다. 그렇다고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절절한 마음이 담겨있을 것으로 상상하면 안 된다. 이 세상에 다정한 부자관계란 없지 않은가. 명망 있는 아버지에 비해 매우 평범한 두 아들. 아버지는 자신의 기준으로 인생의 성공여부를 가늠했는데 특히 저자는 아버지가 생각하기에 무의미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분야에서만 성과를 얻는 사람이었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은 ‘한 놈은 이혼해 두 가족을 부양해야 하고, 다른 놈은 실직한 상태’로 주부 역할을 하고 있는 한숨 나오는 존재들이다. 저자가 담담하게 이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인류학과 저널리즘을 전공했고 기자라는 직업을 가졌기 때문이리라.

 

아버지와 함께 한 마지막 1년간 저자는 아버지와는 정반대로 죽음을 받아들였던 어머니를 소환하고 아들들에게 철저하게 자신의 가치관만을 주입시켰던 어린 시절의 아버지를 만난다. 그리고 여전히 어색하기만한 형과 아버지의 관계를 재발견하고 아쉬워한다. 또한 스스로를 무산계급으로 칭하는 그는 재산문제와 관련해서 끝까지 자식들에게 투명하지 않았던 아버지에게 큰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다. 아버지가 기획한 죽음프로젝트에는 가족만 포함된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여자 친구와 숙련된 간병인, 재무담당자, 조력자살단체의 임원 역시 비중 있는 역할로 소개되고 있다.

 

품위 있는 삶은 준비된 죽음으로 완성되는 것?

 

날카로운 통찰력과 재치, 강인한 성격을 가진 아버지였지만 자신의 건강 앞에서는 통제력을 잃었다. 아프면 비명을 지르고 의사가 빨리 문제를 해결해 주기 바랐으며 그래도 안 되면 의사를 바꿔버렸다. 간병인을 한시도 쉬지 못하게 들볶으며 주변사람들이 늘 시중 들기를 바라는 고약하고 의존적인 노인네였다. 그런데 그 때 아버지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품위 없는 죽음을 피하고 싶다는 욕구를 더 크게 느낀다.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내맡겨지는 죽음만은 피하고 싶어 했다.

 

그가 이러한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는 것이 어렵지 않았던 이유는 평소 예기치 않은 죽음까지도 준비해 온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망의 경우>라는 제목이 붙은 서류철을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해 두었다. 아내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장거리 휴가를 갈 때면 떠나기 전 아이들을 불러 만약에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 경우 기록에 따라 모든 것을 처리하라는 지시를 했다. 이 서류철에는 합리적이고 공평한 재산분할과 같은 유산문제는 물론 <가장 먼저 할 일>, <부고>, <장례절차와 규모>, <마지막 유지>를 비롯하여 장례식장에서 낭독할 고인의 이력과 부음명단까지 당장 장례를 치르더라도 부족함이 없는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그런 철저함 때문에 아들은 디데이가 다가오자 안도감과 고통을 동시에 느낀다. 그리고 질문한다.
‘모든 게 꼼꼼하게 계획된 죽음을 아버지가 맞아야 하다니 ... 우연은 일체 배제된 죽음. 이런 사무적인 처리는 한 인간의 인생을 결정짓는 순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가눌 수 없는 고통, 호흡 곤란, 중환자실에서 벌어지는 요란함이라고 해서 이 순간에 더 알맞을까?’

 

나의 마지막은 어떤 모습이길 기대하고 있는지, 그것을 위해 나는 어떤 노력과 준비를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아버지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달변의 건장하고 생기 넘치는 남자로 바라보는 것에 피곤해했다. 스스로 더는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마당에 그런 기대가 부담스럽다고도 했다. 늦든 빠르든 언젠가 우리는 그처럼 열심히 연기해 온 역할, 실제로는 자신에게 전혀 맞지 않는 역할로 벌을 받기 마련이다.(44)

 

아버지는 오늘 비교적 신선한 모습이다. 아무래도 자신을 괴롭히던 큰 부담 하나를 덜었기 때문이리라. 결정이라는 이름의 짐을. 대화를 나누는 동안 불평과 불만은 깨끗이 자취를 감추었다. 아버지의 활기참은 앙겔라와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예상한 대로 우울하게 숟가락만 놀리는 게 아니라, 식사를 하며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아버지는 시를 암송하고 음미하며 토론을 벌였다. 중간 중간 아버지는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언급하며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우리 역시 돌려 말하지 않고 아버지가 쓰는 표현을 곧이곧대로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아버지가 예고한 죽음은 오늘 우리를 두렵게 만들지 않는다.(90)

 

나는 가까워 오는 죽음을 두고 기꺼이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랬더라면 우리 모두에게 좋았을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어머니가 말을 하지 못하고 생각도 할 수 없을 때까지 그저 기다리기만 했다.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괴롭다. 죽어 가는 사람은 살아남을 가족을 지켜 주려 진실을 말해 주지 않는다.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임을 알면서도 곧 괜찮아질 거야 하는 말로 죽어 가는 사람에게 견디라고 부추긴다. 삶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거짓말을 하고 마는 것이다.(106)

 

 

 

 

 

 

 

 

 

1. 평생 아버지의 기에 눌려 편안한 대화를 나눠본 기억이 많지 않은 아들들에게

 

2.자신의 존엄사를 한번 쯤 고민해 본 사람들에게

댓글 10
  • 2024-03-22 07:51

    1번은ᆢ 아니지만 2번에는 해당되네요. 남편이 얼마전 유툽으로 스위스 조력자살 관련 영상을 보고 있길래, 아 그렇지 이젠 당신도 당연히 이런데 관심가질 나이가 된거지 싶으면서도 동시에 마음이 묘했죠.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2024-03-22 11:18

    글 잘 읽었습니다.
    존엄사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런 죽음도 있구나.. 라는 생각이 많아지네요.

  • 2024-03-22 11:34

    이것도 읽어보고 싶네요.
    그런데 읽어보고 싶은 걸 다 살 수도 없으니....
    나이듦연구소 다음 스텝은 '나이듦 도서관' 구성이 되지 않을까요? ㅋㅋㅋ

  • 2024-03-22 13:09

    우연은 일체 배제된 죽음. 이런 사무적인 처리는 한 인간의 인생을 결정짓는 순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요 문장이 눈에 쏙~~ 하지만... 이런 사무적인 처리도 좀 하면서 죽음을 준비하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 2024-03-22 14:12

    저는 ‘품위’, ‘존엄’… 이런 말들에 물음표가 잔뜩입니다.
    서해님 글 덕분에 전부터 의문이 들던 생각들을 다시 떠올려볼 수 있었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2024-03-22 16:43

    준비된 죽음도 죽음의 우연성에는 부합하지 않는 점이 있군요....생각할 것이 많네요!

  • 2024-03-23 08:42

    삶에 대한 책임과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 고민되는 문제입니다
    읽어보고 싶군요

  • 2024-03-23 11:22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임을 알면서도 곧 괜찮아질 거야 하는 말로 죽어 가는 사람에게 견디라고 부추긴다.
    삶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거짓말을 하고 마는 것이다"
    : 흑흑, 그러네요. 뭐가 괜찮다는 거지 ?
    아니, 그렇다면 어떻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

  • 2024-03-23 18:46

    서해님 낚시에 제대로 걸렸어요. 읽고 싶어지네요. 이런 낚시 언제든 한영.
    품위 있는 삶? 준비된 죽음? 뭔가 아귀가 안 맞고 서걱거리는 느낌이에요.
    책을 펼쳐 확인하고 싶어집니다.

  • 2024-04-15 09:39

    아버지의 죽음을 함께 준비할 수 있었던 작가가 부럽습니다. 제게도 꼭 그런 기회가 오기를 바라 봅니다.